[양승득 칼럼]평양의 아베, 나라의 아베

  • 등록 2022-07-22 오전 5:00:00

    수정 2022-07-22 오전 10:05:59

시곗 바늘을 20년 전으로 돌린 2002년 9월 17일의 평양 백화원 영빈관. 북·일정상회담 참석차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를 수행하고 온 아베 신조 관방 부장관이 오전 회담이 끝나자 고이즈미를 별실로 잡아끌었다. 그리고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총리, 김정일이 납치를 인정하고 사죄하지 않는 한 북·일 공동성명에 서명하면 안 됩니다. 당장 일본으로 돌아가시죠” 잠시 후 속개된 오후 회담. 간혹 미소만 띨 뿐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던 김정일 총서기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쏟아졌다. “납치입니다... 특수기관내 일부 인사들이 영웅주의에 빠져 망동을 저질렀습니다...솔직하게 사과합니다”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철권 통치자가 국제 사회에 고개를 숙인 대사건이었다. 주일특파원으로 일하면서 일본 TV들이 전한 이 장면을 도쿄에서 실시간으로 지켜봤던 기자의 기억에서도 김 총서기의 당시 음성과 표정은 지워지지 않는 파일로 남아 있다.

지난 2002년, 평양에서 사상 최초로 북일정상회담이 열렸다(사진=AFP)
지난 8일 나라현에서 선거 지원 유세 중 총격으로 사망한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만큼 한국인의 눈에 밉상이었던 일본인은 흔치 않다. 극우,혐한, 전범 집안의 후손 등등.. 한일 관계를 최악의 수렁에 빠뜨렸다는 그에게서 우리는 온갖 부정적 표현과 함께 오만, 독선의 이미지를 자동으로 떠올린다. 평균적 일본인이 지녔다고 평가받는 ‘겸손, 친절’ 등의 미덕과는 거리가 먼 ‘폭주 정치인’의 모습을 연상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듯하다. 두 차례에 걸쳐 8년 9개월 간 총리로 재임한 그가 대한 외교에서 보여준 사고와 처신이 큰 배경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강제 징용, 종군 위안부 문제와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에 이르기까지 우리 감정을 사사건건 후벼파고, 먹고사는 문제까지 건드리려 한 것 등이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특정 정치인에 대한 평가는 나라 안과 밖이 다를 수밖에 없다. 침탈과 고난의 역사를 되풀이해 겪은 탓에 일본에 대한 감정이 애정과 호감보다 적개심, 혐오로 더 쏠려 있는 우리에게 일본 정치인은 기본적으로 후한 점수를 얻기 힘들다. 일본 어린이들에게 위인으로 존경받는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에서는 조선 침략의 원흉으로, 이토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가 우리에겐 영웅이지만 일본에서는 테러리스트(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로 표현되는 것이 현실이다. 아베의 경우는 항일 투쟁하듯 ‘죽창가’를 외치며 반일 몰이를 부추겼던 문재인 정부의 흠집내기와 거리두기가 점수를 더 깎아내렸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대다수 한국인의 감정과 결이 다르지만 일본 언론이 주목하는 정치인 아베의 최대 공적 중 하나는 북한에 의한 납치피해자 문제 해결에 누구보다 앞장서며 5명을 귀국시키는 등 국민의 아픔을 치유해줬다는 점이다. 1997년 ‘납치피해자 가족 모임’ 발족을 주도한 그는 피해자 송환 등 해결을 요구하며 끈질기게 북한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납북된 요코다 메구미의 부친이 2020년 별세했을 때에는 “메구미를 아직 귀국시키지 못해 창자가 끊어지는 듯 슬프다”며 유족을 위로하기도 했다. 아베 사망 직후 메구미의 모친이 “납치 문제에 대한 세계의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아베 덕”이라며 “가슴을 찌르는 고통”이라고 애도할 정도였다.

아베를 잃었지만 일본 국민은 김정일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국민 보호를 외쳤던 그의 충정을 쉽게 잊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2년 전 서해상에서 북한군에 의해 구조는커녕 총알 세례를 받고 죽어간 해양수산부 공무원과 귀순 의사를 밝혔는데도 강제 송환된 북한 어부들의 소식에 가슴이 저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공교롭게도 모두 인권변호사라는 문 전 대통령 시절 일어난 사건들이며 국가와 지도자의 자국민 보호 의무를 곱씹어보게 하는 일들이어서다. 악플을 각오한 글이지만 한일 두 지도자의 너무도 판이한 행보 탓에 뒷맛이 영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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