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호의 그림&스토리]<15>그 많던 웅어 다 어디로 갔을까

▲겸재 정선 '행호관어'와 '척재제시'
한강 행주나루 웅어잡이 그린 '행호관어'
벗 이병연에게 보낸 웅어그림 '척재제시'
물길 막히고 오염돼 한강서 사라진 웅어
옛 그림으로 더듬는 그때 풍경과 그리움
  • 등록 2021-05-21 오전 3:30:00

    수정 2021-05-21 오전 5:15:38

겸재 정선이 1741년에 그린 ‘행호관어’. 한강과 한강변 명승명소 등을 그려 묶은 ‘경교명승첩’에 든 33점의 그림 중 한 점이다. 삼국시대부터 있던 민물포구인 행주나루 부근 행호, 그중 궁궐 진상품인 웅어가 많이 잡히던 음력 3∼4월 즈음의 전경을 그렸다. 비단에 채색, 29.2×23.0㎝, 간송미술관 소장.
혹독한 세상살이에 그림이 무슨 대수냐고 했습니다. 쫓기는 일상에 미술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습니다. 옛 그림이고 한국미술이라면 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는 일을 돌아보면 말입니다. 치열하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었고, 위태롭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었습니까. 한국미술은 그 척박한 세월을 함께 견뎌온 지혜였고 부단히 곧추세운 용기였습니다. 옛 그림으로 세태를 읽고 나를 세우는 법을 일러주는 손태호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조선부터 근현대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시대와 호흡한 삶, 역사와 소통한 현장에서 풀어낼 ‘한국미술로 엿보는 세상이야기’ ‘한국미술로 비추는 사람이야기’입니다. 때론 따뜻한 위로로 때론 따가운 죽비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손태호 미술평론가] 경기 고양시에는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 전승지 행주산성 역사공원이 있습니다. 행주산성 역사공원은 바로 한강 옆에 들어서 정상에 오르면 아름다운 한강의 모습과 낙조를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1845년 헌종의 명으로 세운 행주대첩비와 역사관도 있어 치열했던 옛 역사를 돌아보며 어르신과 아이들이 산책하기가 참 좋습니다. 이곳에는 ‘행호정’이란 전망대가 있는데 이곳은 원래 군사용 초소를 새롭게 단장한 곳으로 ‘행호’(杏湖)는 조선시대 한강의 이곳을 부르던 명칭입니다. 이곳을 행호라 한 것은 인근으로 창릉천이 합류하면서 강폭이 넓어지고 물살이 약해져 마치 호수처럼 잔잔해 붙은 이름입니다. 행호에는 행주나루터가 유명했는데 한때는 고깃배로 붐볐던 곳으로 그 시절 행호의 풍경을 담은 작품이 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바로 조선시대 진경산수화의 1인자 겸재 정선(1676∼1759)의 ‘행호관어’(杏湖觀漁)입니다.

양천현령 겸재가 그린 행주나루터 풍경

겸재는 65세인 1740년(영조 16년) 겨울 양천현령에 제수됐습니다. 양천은 현재 서울 강서구 가양동 일대로, 옛날 현감이 이곳으로 발령을 받으면 울고 왔다가 울고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시골이라 영 아쉬웠는데 재임 동안 수입이 꽤 짭짤해 떠나는 게 또 아쉽더란 뜻입니다. 한강 하구에 위치한 덕에 그만큼 물산이 풍부했던 것입니다. 겸재는 이곳에 있는 동안 멀리 양수리 근교에서 행호에 이르는 한강 주변의 풍경을 그림으로 많이 남겼는데 이 화첩이 바로 대표적 진경산수화첩인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입니다. 양천현의 강변에는 궁산(宮山)이 있는데 높이는 76m밖에 안 되지만 옛날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던 개화산·탑산 등과 함께 한강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던 곳이었습니다. 겸재는 이곳 궁산에 자주 올라 풍광을 감상하고 사색하기를 좋아했는데 여기서 본 한강 건너편 행주산(덕양산) 쪽 풍경을 그린 것이 바로 ‘행호관어’입니다.

그림을 한 번 살펴볼까요. 저 멀리에 원경의 산들이 겹쳐 있고 중앙에는 행주와 덕양산이 있으니 그 앞이 바로 행호입니다. 행호에는 작은 어선들이 제법 몰려 있습니다. 오른쪽 덕양산 가장 높은 곳 아래 기와건물은 조선중기 문신 죽소 김광욱(1580∼1656)의 별서인 귀래정입니다. 가운데 기와집은 행주대신으로 불리던 송인명(1689∼1746)의 별서로 그는 당시 좌의정을 맡고 있었습니다. 맨 왼쪽의 건물은 숙종의 사돈인 김동필(1678∼1737)의 별서입니다. 결국 그림에 보이는 건물 모두가 세도가들의 별서였던 셈입니다. 이들은 모두 겸재와 직간접적으로 인연이 있는 인물들로 아마 겸재의 발걸음이 미쳤던 곳들이라 자신 있게 묘사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행호관어’는 ‘행호의 고기잡이를 구경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고기잡이배가 그림에서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작은 고깃배가 무려 14척이나 강에 나왔으니 딱 지금이 풍어의 시기로 만선의 기쁨이 한창일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곳에선 어떤 고기를 잡았을까요. 그 해답은 그림과 함께 있는 사천 이병연(1671∼1751)의 제시에 적혀 있습니다. “늦봄이니 복어국이요, 초여름이니 웅어회라. 복사꽃 가득 떠내려오면, 행주 앞 강에는 그물 치기 바쁘다.”

겸재 정선의 ‘척재제시’(1741). ‘경교명승첩’에 든 한강변 진경산수화가 아닌 그림들 중 한 점이다. ‘척재가 시를 쓴다’는 뜻인데, 붓을 든 흰 수염의 선비가 척재 김보택이다. 귀한 웅어를 선물로 받고 답시를 쓰고 있는 모습이다. 비단에 담채, 33.2×28.7㎝, 간송미술관 소장.
행호는 서해의 조수와 한강 민물이 만나는 기수역으로 많은 어류가 모이는 곳입니다. 특히 행주 웅어와 행호 하돈(황복어)은 맛이 뛰어나 임금의 수라상에도 올라가는 매우 귀한 생선이었습니다. 웅어는 갈대 속에서 많이 자라 갈대 ‘위’(葦)자를 써서 위어(葦魚·갈대고기)라고도 하며 지역에 따라 ‘우여’ ‘우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말기에는 아예 행주에 위어소를 둬 왕실에 진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음력 4월이면 행주나루에는 웅어잡이 배로 가득했습니다. 겸재의 그림 중 이 웅어와 관련된 그림이 또 있는데 바로 ‘척재제시’입니다.

웅어가 연결해준 그림과 시, 끈끈한 우의

여러 종류의 나무와 큰 파초가 울창한, 녹음을 자랑하는 어느 대감댁 마당에 군노가 생선꾸러미를 들고 있습니다. 방안 서가에는 책들이 가득 쌓여 있고 하얀 수염의 선비가 벼루와 연적을 놓고 종이에 글을 쓰려고 붓을 들고 있습니다. 그림은 온갖 초록빛으로, 이렇게 녹색을 과할 정도로 많이 사용한 예는 겸재의 작품 중 이 그림이 유일합니다. 특히 커다란 파초가 인상적인데 파초는 끊임없이 새 잎을 밀고 올라오는 모습, 봄이 되면 어김없이 새순이 다시 나오는 속성으로 강인한 생명력과 변하지 않는 의리의 상징이라 선비들이 좋아했던 나무입니다. 신라 최치원의 시에 처음 등장한 이래, 조선말까지 한시에 꾸준히 등장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조선후기에는 문인사대부들이 정원을 가꾸는 문화가 크게 성행하는데 그때 파초 가꾸기가 유행했다고 합니다.

그림의 내용은 척재 김보택(1672∼1716)이 임금에게 진상했던 별미인 웅어 꿰미를 선물받고 이에 대한 답례로 시를 써 보냈다는 일화를 담고 있습니다. 척재의 집은 지금 종로구 북촌로 헌법재판소 자리로 그림에선 당시 조선시대 집권층의 사랑방 풍경을 엿볼 수 있습니다. 겸재가 이 일화를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그림은 완성 후 척재가 아닌 사천에게 보내졌는데요. 사천은 이 그림에 대한 답신으로 이렇게 적어 보냅니다.

“버들가지에 꿰어 보낸 것으로 한술 뜰 수 있었습니다. 제 시를 보시고자 한다 하나 제가 보고자 하는 것은 몇 배입니다. 육지가 애상될까 보아 하나의 시축 중에 넣어 보내니 육지를 돌려보내실 때 함께 돌려보내소서. 18일 새벽에 조아림.”

겸재 정선의 ‘척재제시’(1741) 중 군노가 든 생선꾸러미를 클로즈업했다. 대감댁 주인인 척재 김보택이 선물받은 귀한 ‘웅어’다.
음력 4월 18일이니 웅어철입니다. 겸재는 사천에게 웅어 선물을 보내면서 예전 척재의 이야기가 담긴 그림을 함께 보내 시를 독촉한 것입니다. 사천은 시와 함께 이렇게 편지를 보냈던 것이고요. 사천과 겸재는 이렇게 서로 그림과 시를 서로 주고받으며 평생 우의를 지킨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으며 웅어는 벗을 그리워하는 겸재의 마음이었습니다.

어부 소년과 양반집 규수의 사랑 이야기 전해 내려와

행주 웅어에는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전해옵니다. 행주 어부소년 금원은 양반집 소녀 난사를 짝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난사가 못된 병에 걸려 고통받자 금원은 그 모습이 안타까워 이 병에 특효약이라는 웅어를 잡아 난사에게 먹입니다. 하지만 웅어는 허락 없이 함부로 잡을 수 없는 생선이라 어명을 어긴 죄로 금원은 석빙고에 갇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병이 나은 난사는 금원을 찾았으나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한강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런 사건이 있은 뒤 유독 아름다운 은빛 웅어 두 마리가 행호를 자유롭게 헤엄치는 모습이 자주 보이더라는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을 타고 전해졌습니다.

행호의 웅어는 도시개발과 확장으로 물길이 막히고 오염되자 거의 사라져 버렸습니다. 현재 행주와 능곡의 웅어전문집에 나오는 웅어는 한강이 아닌 목포와 해남의 웅어라 합니다. 이처럼 한강의 기적은 얻게 한 것뿐 아니라 잃게 한 것도 적잖습니다. 앞으로 한강이 좀더 깨끗해지면 사라졌던 은빛 웅어들이 헤엄치는 모습과 붉은 노을 속에 웅어잡이에 나선 고깃배들도 다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우리에게 옛 그림이 남아 있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을 풍경입니다. 상상만으로도 그 풍경이 너무 보고 싶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림의 어원이 ‘그리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겸재 정선(1676∼1759)은 나고 자라 평생을 살던 백악산과 인왕산 아래 장동 일대를 중심으로 한양 곳곳을 화폭에 담았다. 65세던 1740년 12월 11일에 양천의 현령으로 부임한 이듬해부턴 한강과 한강변 명승명소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 그림들을 모아 묶은 것이 ‘경교명승첩’(보물 제1950호)이다. 1741년부터 그려나가 화첩을 완성한 건 사망하던 해인 1759년으로 추정한다. 가로 42㎝ 세로 36㎝의 두 권짜리 화첩에는 상권 19점, 하권 14점 등 총 33점의 그림이 들어 있고, 이 중 20여점이 한강을 주제로 한다. ‘행호관어’ 외에 조선의 대표적 나루터로 꼽혔던 ‘송파진’, 아차산 일대 위치해 노량진과 함께 태종 때부터 별감이 배치됐던 교통의 요지 ‘광진’ 등 260여년 전 한강 일대가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겸재의 그림에 사천 이병연의 제발과 시가 어우러진 예술성은 물론, 현재 사용하지 않는 지명이나 본래 모습이 사라진 실경 등을 ‘기록’한 사료로서도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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