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의 끄덕끄덕]‘더 글로리’ 복수 그 다음을 묻다

  • 등록 2023-03-16 오전 6:15:00

    수정 2023-03-16 오전 6:15:00

[정덕현 문화평론가]학교폭력을 소재로 다룬 드라마들은 최근 몇 년간 쏟아져 나왔다. 작년 3월 드라마로 리메이크됐던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원작 ‘돼지의 왕’은 대표적인 사례다. 2011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연상호 감독의 이름 석 자를 제대로 각인시켰던 이 작품은 학교폭력과 그 이면에 걸쳐져 있는 폭력과 착취의 시스템을 다뤘다. 개로 태어나면 평생을 사랑받으며 살지만, 돼지로 태어나면 제 살을 내줘야 하는 운명으로 살게 되는 시스템이 그것이다. 드라마 속에서 철이(최현진)는 그런 운명도 모른 채 먹이를 달라 꼬리를 흔드는 돼지의 삶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서 칼로 은유되는 공포를 사용한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이 그를 극으로 몰아세우지만 그 끝은 결국 파국이다. 폭력이 얼마나 피해자들에게 아픈 상처를 남기는가에 대한 강렬한 여운을 남겼지만 또한 이 문제가 단순한 복수만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걸 이 작품은 보여준다.

작년에 방영돼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웨이브 오리지널 드라마 ‘약한 영웅’ 역시 학교폭력이 소재인 액션물이었다. 너무나 연약해 보이지만 머리를 써서 가해자들과 맞서 싸우는 영웅담이다. 웹툰 원작의 이 작품은 이른바 ‘학원 액션물’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그건 웹툰, 웹소설에 너무도 많이 쏟아져 나와 그것이 하나의 장르가 됐기 때문이다. 그만큼 학교폭력이라는 소재는 사회적으로 주목받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다만 이들 작품들은 이러한 폭력이 어째서 계속 벌어지고 있는가 하는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보다는, 그런 문제들이 야기하는 고구마 정서에 한바탕 사이다 판타지를 주는 경향이 짙다. 가해자들에게 당한 피해자들이 보여주는 복수는 의외로 그리 어렵지 않게 구현된다. 그것이 이른바 ‘학원액션물’을 보는 대중들이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약자들이 폭력을 당하고 그래서 돈과 권력을 가진 가해자들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 이야기들은 학교폭력 이외에도 넘쳐난다. 학교폭력은 그것이 청소년들에게 벌어지는 일들이라는 점에서 훨씬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것일 뿐이다. ‘펜트하우스’처럼 치고받는 막장 드라마들이나, 그 많은 형사물들이 대부분 복수극을 밑그림으로 깔고 있고, 그 안에 피해자였던 약자들이 심지어 범죄를 동원해 가해자를 처단하는 이야기는 저 학교폭력을 담은 서사들과 크게 다를 게 없다. 특히 최근에는 ‘모범택시’나 ‘빈센조’처럼 사적 복수극이 하나의 장르화돼 등장하는 경우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들 복수극들은 한 마디로 시원시원하다. 가해자들은 처절하게 응징 당한다.

하지만 이러한 손쉬운 복수극들은 때론, 바로 그처럼 너무 손쉽다는 것 때문에 사안 자체의 중대함을 가리기도 한다. 이를테면 ‘모범택시2’에서 첫 에피소드로 등장한 N번방을 연상시키는 성착취 동영상 사이트 운영자들을 응징하는 이야기는 드라마 속에서는 너무나 쉽지만, 실제 현실은 결코 그렇지 못하다. 따라서 드라마를 볼 때 잠시 속 시원하게 느껴지다가도 끝나고 나면 허무해진다. 드라마 한 편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것이 환기시키는 문제들을 보다 선명하게 들여다보게 해줄 수는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손쉬운 복수극은 어딘가 문제들을 너무 쉽게 처리해버린다.

그런 점에서 보면 최근 파트2를 공개해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글로리’는 다른 느낌이다. 이 작품은 결코 쉽지 않은 복수의 과정을 그리고 있고 나아가 가해자가 처벌받는 것만이 아니라 피해자들이 얼마나 큰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동시에 담아내고 있다. 특히 가해자에 대한 복수 혹은 처벌은 피해자들에게 끝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라는 걸 분명히 한 점은 인상적이다. “피해자들이 잃어버린 것 중에 되찾을 수 있는 게 몇 개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나의 영광과 명예 오직 그것뿐이죠. 누군가는 그걸 용서로 되찾고 누군가는 복수로 되찾는 거죠. 그걸 찾아야만 비로소 원점이고 그제야 동은 후배의 열아홉 살이 시작되는 거니까요.” 이 극중 대사가 말해주는 건 피해자들은 이미 피해를 당했을 때 그 어떤 것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극중 주인공 문동은(송혜교)의 온 몸에 남아 있는 화상 자국처럼 말이다. 그래서 복수(처벌)를 한다고 해도 그걸로 모든 상처가 치유될 수는 없다.

대신 ‘더 글로리’는 이러한 폭력의 피해자들이 어떻게 생존해나갈 수 있는가에 대한 단서들을 제공한다. 그것은 그 상처를 깊이 공감하고 이해하는 이들과의 연대다. 그것은 또 다른 문동은 같은 학교폭력의 피해자들일 수도 있고, 가정폭력의 피해자들일 수도 있으며, 또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부모일 수도 있고,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범죄자에 의해 처참하게 아버지를 잃은 피해자일 수도 있다. 그들은 모두 무언가를 잃은 상처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그 뜻에 동참한다. ‘더 글로리’의 복수극은 그래서 피해 당사자가 혼자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혀가는 그런 단순한 복수로 흘러가지 않는다. 거기에는 같은 뜻을 가진 자들이 기꺼이 동참함으로써 확률 0%의 불가능처럼 보이던 그 복수가 100%가 돼가는 과정을 담는다. 그건 이러한 폭력을 직접적으로 겪지 않은 평범한 이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들이 피해자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일은 꼭 겪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며, 그러한 공감의 연대가 피해자들이 비로소 생존해갈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폭력을 포함해 우리네 사회에는 폭력부터 사건, 사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피해자들이 존재한다. 이들 피해자들이 어떻게 해야 생존해나갈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할 때다. 제대로 된 진실이 밝혀지고 가해자가 있다면 처벌을 받는 건 당연한 시작점이다. 그리고 나아가 그 피해자들을 사회가 어떻게 끌어안고 생존할 수 있게 해주는가가 다음 스텝이 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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