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득 칼럼) '식품 황제'와 '라면의 신'

  • 등록 2021-03-19 오전 6:00:00

    수정 2021-03-19 오전 6:00:00

1990년대 초반 서울 조계사 옆 옅은 하늘색의 구식 건물. 옛 종로국민학교 교사를 개조해 만든 나지막한 이 건물의 2층 안쪽 회장실은 늘 조용했다. 찾아오는 손님도 많지 않았다. 회장님은 외출도 않은 채 혼자 점심을 들 때가 적지 않았다. 단골 메뉴는 자신의 회사가 만든 라면이었다. 회사 직영의 시식코너에서 조리해 온 라면을 그는 포크로 면발을 돌돌 말아 들기도 했다. 70세를 넘긴 그의 고독한 식탁을 한결같이 지켜준 건 라면 사랑과 회사 운영의 신념으로 삼았던 정직과 신용, 그리고 고독이 전부였다.(삼양식품)

주주총회장에 불쑥 들어서자 회의를 주재하던 인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참석해 있던 사람들의 표정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분위기가 ‘영’ 아니었다. 호기심 삼아 들어갔던 기자는 머쓱해져서 곧 일어서야 했다. 황급히 달려온 홍보실 간부가 말했다. “에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얼굴 사진 한 장이라도 신문에 실리면 우리는 큰일납니다” 취재랍시고 더 이상 들이대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나중에 들은 이야기. “바깥 세상과는 담 쌓고 사시는 분이세요”(농심)

필자가 케케묵은 옛 취재 수첩에서 기억을 더듬어 본 삼양식품의 창업자 고 전중윤 회장(1919~2014)과 신춘호 전 농심 회장(1932~). 국내 라면 시장은 물론 식품 산업 역사에서 두 사람 스토리를 빼면 나머지는 속 빈 강정이다. 먹거리가 절대 부족했던 1960년대에 회사를 세우고 (삼양식품 1961년, 농심 1965년)치열한 맞수 싸움을 거치며 큰 족적을 남긴 두 거인에게 업계에서 붙인 닉네임은 ‘식품 황제’와 ‘라면의 신’이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견해가 다를 수도 있는데다 한정된 분야에서 붙여진 별칭이니 별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와 경영 스타일, 시장을 주름잡던 시기가 다른 점을 고려하면 비교가 무리라는 지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주목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선구자’라는 데에 있다. 전 회장이 1963년 국내 최초의 라면을 선보이며 불모의 시장을 개척했다면 신 회장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농심을 1위 업체로 올려세운 데 이어 세계 곳곳을 한국 라면의 장터로 만든 글로벌시장의 파이어니어라는 점에서 DNA가 같다. 씨를 뿌리고 꽃을 피운 곳이 국내냐, 아니면 해외냐가 다를 뿐이다. 무죄로 결론난 1980년대 후반의 ‘우지(牛脂)파동’에 회사가 휘말리지만 않았더라면 전 회장도 더 큰 꿈을 펼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한우물을 팠다는데 있다. 돈이 된다면 이것저것 손대고, 빚으로 허장성세 부리다 무너진 대기업이 수두룩한 우리나라 재계 역사에서 ‘라면’ 하나로 우뚝 서고 세계 무대에 한류 식품의 우수성을 알린 두 사람의 공은 작지 않다. 대외 활동의 유혹과 권유가 끊이지 않았음에도 세상 일에 관심을 끊고 오로지 회사 일과 씨름했던 이들의 외고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은 물론이다.

라면의 종주국은 일본이고 세계에서의 명성과 파워도 일본 메이커들이 아직 한 수 위다. 1958년 라면을 세상에 처음 선보이고 인류의 대표 먹거리로 키우는데 앞장섰던 안도 모모후쿠(1910~2007년)닛싱식품 창업자는 업계와 일본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는 전설적 존재였다. 그의 경영이념은 ‘食足世平’(먹을 것이 풍부해야 세상이 평화롭다)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전중윤과 지난해 사상 최대의 호실적을 거두고 16일 일선에서 물러난 신춘호라는 두 거인이 있다. 일본에서 배우고 들여온 기술과 기계로 출발했지만 한국 라면이 반도체, 조선처럼 글로 벌시장의 최정상에 오르지 말라는 법은 없다. 안도 창업자 이상의 사명감과 승부욕으로 신화를 쓴 두 거인 같은 재계 거목이 더 많이 나오길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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