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헌의 혁신@미술]<16> 공장식 공방서 생산→홍보→영업…'CEO 화가' 루벤스

▲아틀리에 경영한 루벤스
대량생산…경쟁선발한 제자·조수 팀별로 조직화
가격정책…루벤스가 제작 간여한 정도따라 차등
홍보영업…작업과정 연출 교양·어학갖춘 친화력
17세기 바로크미술 대가의 '마케팅·세일즈' 혁신
  • 등록 2020-10-08 오전 4:10:00

    수정 2020-10-08 오전 6:21:37

평생 3000점이 넘는 대작을 제작한 ‘다작 화가’ 루벤스의 비밀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뽑힌 제자·조수들을 세심하게 조직화한 공방에서 나왔다. 공장식 분업체계를 세운 뒤 효율적으로 이를 가동해 거대한 작품을 대량생산했는데, 이렇게 생산한 작품은 ‘루벤스가 어느 정도 손을 댔느냐’에 따라 가격도 달랐다. 그 구분에 따라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예수회로부터 주문받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1619)은 모델로(modello)를 기초로 조수들의 역할을 나눠 완성했고, 딸을 그린 ‘클라라 세레나 루벤스’(1615∼1616)는 처음부터 끝까지 루벤스 자신이 제작했다. 또 프랑스의 왕비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를 주제로 한 ‘마르세유 상륙’(1622·연작 ‘메디치 사이클’ 24점 중 하나)은 다른 모든 건 공방에서 제작하되 인물만큼은 반드시 루벤스가 그려야 한다는 조건이 달렸던 작품이다. 빈미술사박물관·리히텐슈타인미술관·루브르박물관 소장.


미술은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밥으로만 채울 수 없는 풍요와 평화를 안겨줬으니까요. 그림의 힘이고 조각의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미술의 역할이 이뿐이라 한다면 미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문명을 이끌고, 의식을 뒤집고, 결정적으로 돈의 흐름을 주도했던, 그것을 못 본 겁니다. 미술의 사조와 양식이 탄생할 때마다 세계경제에는 ‘변화의 그림’이 걸렸습니다. 바로 ‘혁신’을 주도했던 겁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미술로 이룬 혁신’의 현장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주헌 미술평론가] 미술에 대해 잘못 알려진 고정관념 중 하나가 ‘위대한 예술가는 과작(寡作)을 한다’는 것이다. 걸작을 하나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이다 보니 과작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과작을 하는 거장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피카소, 마티스, 반 고흐, 모네, 르누아르, 렘브란트 등 우리가 아는 많은 대가들이 다작을 했다. 미술 창작에 있어서만큼은 ‘다다익선’이 진리다. 다작을 하면 졸작이 많이 나오지만, 걸작 또한 많이 탄생할 수밖에 없다.

17세기 바로크미술의 대가 페터르 파울 루벤스(1577∼1640)도 다작을 한 화가다. 유럽의 주요 미술관을 돌아보면 그의 작품을 설치하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 어렵다. 흥미로운 사실은, 루벤스는 다작을 한 화가일 뿐 아니라 ‘아틀리에 경영’에도 매우 뛰어난 화가였다는 것이다. 아니, ‘아틀리에 경영’이라니? 아틀리에는 화가가 홀로 그림을 그리는 곳이 아닌가. 거기에 무슨 경영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하지만 실제로 루벤스는 ‘아틀리에를 매우 잘 경영’한 화가였다.

루벤스는 개신교도였던 아버지가 박해를 피해 고향 안트베르펜(벨기에 플랑드르 지방)을 떠나 쾰른 인근의 지겐(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 머물 때 그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다시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와 라틴어학교를 다닌 그는 한 백작부인의 시동이 돼 귀족문화를 익혔다. 이런 고급 교육의 바탕 위에서 그림을 공부한 뒤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이탈리아 유학 시절 루벤스는 고대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대가들의 빛나는 성취를 빠르고도 광범위하게 흡수했다. 이후 이를 풍성하고 에너지 넘치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발전시켜 ‘화가들의 군주’이자 ‘군주들의 화가’로 명성을 드높이게 된다.

△주문 받은 그림, 팀장에게 맡겨 책임지고 완성케 해

루벤스가 이처럼 서양미술사의 최고 거장 중 한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된 바탕에는 물론 그의 타고난 재능이 큰 몫을 했다. 하지만 그만의 독특한 ‘아틀리에 경영’ 또한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는 공장식 분업체계를 세운 뒤 이를 효율적으로 가동해 대작을 대량으로 생산했고, 작품 생산방식의 차이에 따라 가격을 차등화했으며, 작업과정을 홍보에 활용하는 독특한 마케팅으로 작품을 손쉽게 팔았다. 그의 이런 행보는 지금의 기준으로 보아도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루벤스의 아틀리에에는 많은 조수와 제자들이 있었다. 얼마나 많은 미술학도가 그의 아틀리에에 들어오고 싶어 했는지 1611년, 그는 한 지인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과장 없이 말하건대, 1000명이 넘는 사람의 청을 거절해야 하네. 심지어 친척과 아내의 청마저도 말일세. 내 가까운 친구들의 불평을 안 들을 재간이 없네.”

그는 그 치열한 경쟁을 거쳐 들어온 제자들을 세심하게 조직화했다. 서양에서는 중세 길드 시절부터 화가가 제자들을 두고 공방 형태로 작품을 제작했다. 제자들의 협력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스승의 이름으로 팔려나갔다. 루벤스도 큰 틀에서는 이 형식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나, 그의 관리는 다른 작가들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효율적이었다. 그는 일단 주문 받은 작품별로 팀을 하나씩 만들었고, 각 팀의 팀장이 전적인 책임을 지고 그림을 완성하도록 했다. 팀장은 기량이 매우 뛰어나야 했는데, 자신의 제자 출신인지 여부를 가리지 않아 안토니 반 다이크(1599∼1641)처럼 제자는 아니었어도 출중한 능력이 있는 사람을 고용하곤 했다.

△루벤스 손이 얼마나 갔느냐가 작품 값 결정 핵심요소

이렇게 조직화한 공방을 통해 생산한 작품은 정해진 분류기준에 따라 작품 값을 달리 받았다. 미술사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1818∼1897)는 루벤스의 작품으로 알려진 그림들을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① 처음부터 끝까지 루벤스 자신이 제작한 작품, ② 루벤스가 밑그림을 그린 뒤 조수들의 제작과정을 감독하고 직접 마무리한 작품, ③ 모델로(modello)를 기초로 조수들의 역할을 체계적으로 나눠 완성한 작품, ④ 루벤스 풍으로 제작됐으나 그는 거의 손을 대지 않은 그의 공방 작품, ⑤ 루벤스의 직접적인 참여 없이 그의 스타일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복제한 작품, ⑥ 다른 화파의 화가들이 복제한 작품. 여기서 ⑤번과 ⑥번의 작품은 그의 공방에서 제작한 게 아니므로 제외하고, 나머지 작품들은 같은 사이즈라도 제각각 다른 가격으로 팔았다. 물론 루벤스의 손이 많이 간 것일수록 비쌌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루벤스 자신이 그렸다는 ‘클라라 세레나 루벤스’(1615∼1616)의 부분. 첫 부인 이사벨 브란트가 낳은 첫 딸 클라라의 다섯 살 때다. 안타깝게도 클라라는 12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작품 외에 클라라의 초상화는 3점이 더 있다. 루벤스의 다른 대작에 비해선 작은 규모(37×27㎝)로 제작됐다. 리히텐슈타인미술관 소장.


앞의 ③번 사항에서 언급한 ‘모델로’는 원작을 만들기 전, 전체 인물과 배경의 구성이나 배색이 어떻게 될지 미리 구상해보는 유화 스케치를 말한다. 루벤스가 작은 모델로를 그려 팀장인 조수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면 조수들은 자기 밑의 제자들을 지휘해 이를 각각 대작으로 확대 제작했다. 이 과정에서 루벤스의 손이 얼마나 갔느냐가 작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로 기능한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왕비 마리 드 메디치(1573∼1642·앙리 4세의 두 번째 정부인)가 그녀의 생애를 주제로 한 24점의 연작 ‘메디치 사이클’을 주문할 때도 계약서에 ‘인물은 반드시 (조수나 제자가 아닌) 루벤스가 그린다’는 조항을 넣었다. 이처럼 루벤스의 간여 정도를 정하고 그에 맞춰 가격을 흥정한 것이다. 이 거대한 연작 앞에 선 관람객은 어떻게 루벤스가 이 대작들을 불과 2년 만에 완성했을까 놀라게 되지만, 실은 많은 부분이 제자들의 기여로 가능했던 것이다. 이 연작을 제작하는 동안에도 루벤스 아틀리에에서는 다른 팀들이 루벤스의 이름으로 또 다른 작품들을 무수히 제작하고 있었다.

이렇게 공방에서 작품을 제작하는 동안 그는 유럽의 여러 왕실을 드나들었다. 루벤스는 당시 그 어떤 상인 못지않게 ‘영업’의 중요성을 잘 알았다. 그의 인간적인 장점은 성격이 호방해 친화력이 높았고, 어릴 때부터 귀족문화를 잘 알아 세련되게 행동했으며, 고전에 대한 교양과 어학능력이 뛰어나 금세 사람들을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그는 모국어인 플라망어뿐 아니라 라틴어·이탈리아어·프랑스어·영어에 능통했다. 이런 능력으로 적극적으로 ‘영업’에 나서니 숱한 귀족과 왕들이 그의 패트런이 됐다. 그에 대한 보답이라고나 할까. 루벤스는 유럽 왕가를 다니며 나라 사이의 복잡하고 어려운 외교문제의 해결에 적극 나서곤 했다. 이런 공로로 그는 영국과 스페인의 왕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처럼 바쁜 루벤스가 대작 위주로 평생 3000점이 넘는 작품을 생산했다는 것은, 아무리 붓을 빨리 놀리는 화가였다 하더라도,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대규모 공방이 아니었다면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작업실에 컬렉터 전용 발코니 마련…‘퍼포먼스’ 연출도

물론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 루벤스는 매우 부지런히 일했다. 흔히들 예술가는 올빼미 형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났다. 또 일할 때는 ‘멀티태스커’였다. 1621년 덴마크 궁정의사 오토 스페를링이 목격한 바에 따르면, 루벤스는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의 저서 낭독을 들으며 그림을 그렸는데, 그러는 동안 편지를 구술해 쓰게 했고, 손님들과 이야기꽃을 피웠다고 한다. 스페를링은 이 모든 게 동시에 이뤄진다는 게 지극히 경이로웠다고 적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루벤스가 일부러 이런 연출을 한 ‘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패트런이나 딜러들이 자신의 아틀리에를 찾아오면 그는 이 모든 과정을 기꺼이 보여줬고, 붓으로 2m에 가까운 곡선을 휘감듯 그리는 ‘퍼포먼스’로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작업실 안에는 브리지 형태의 발코니가 있어 컬렉터들은 이 모든 장면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루벤스는 또,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 고대 조각을 비롯한 동전·보석 등도 수집했는데, 컬렉터가 자신의 작품을 사서 나갈 때 “나보다 더 훌륭한 예술가의 작품”이라며 자신이 수집한 작품을 끼워 팔았다. 당대 최고의 화가가 극찬하며 떠안기니 컬렉터들은 그 작품 역시 사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이처럼 루벤스는 탁월한 ‘CEO 화가’였다. 관리에 능했으며 마케팅과 세일즈에 뛰어났다. 그렇게 해서 많은 재산을 모았을 뿐 아니라, 역사에 길이 남는 거장의 반열에까지 올랐다.

※ 안토니 반 다이크(1599∼1641)

루벤스와 함께 플랑드르 바로크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다. 어릴 적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여 ‘신동’ 소리를 들었다고 전한다. 특히 초상화에 탁월했는데, 굳이 대적할 상대를 꼽자면 루벤스와 티치아노를 거론할 정도다. 덕분에 그의 ‘우아하고 기품있는’ 초상화 양식은 이후 200여년간 유럽 궁중이나 귀족을 그리는 기준이 됐다. 루벤스와의 관계는 1618년 19세부터다. 이미 16세에 두 명의 조수를 고용한 독립 공방을 꾸리다가 루벤스의 작업을 돕게 되면서다. 굳이 제자만 고집하지 않았던 루벤스의 눈에 들었던 셈인데, 그럼에도 루벤스는 “내 제자 중 최고”라고 할 만큼 그의 능력을 높이 샀다고 한다. 루벤스에게는 확실한 조수였던 만큼 반 다이크 역시 큰 화가로 성장하는 데 루벤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실제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이 둘의 작품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루벤스 회화의 비법을 숙달했고, 루벤스의 작업장을 찾는 수많은 지식인·예술가·컬렉터들과 교류하며 대가를 상대하는 교양과 매너를 몸에 익혔다. 명예욕과 자기애가 강했다는 그는 평생 자신의 모습을 많이 그린 화가로도 꼽힌다. 1620∼1621년 그린 ‘자화상’에는 그의 20대 초반 앳된 얼굴이 보이는데, 이 얼굴은 이후에도 배경과 의상을 바꾸며 여러 차례 등장한다.

안토니 반 다이크 ‘자화상’(1620∼1621). 루벤스에게서 “내 제자 중 최고”란 말을 들었을 만큼 능력을 인정받은 반 다이크는 평생 자신의 모습을 많이 그린 화가이기도 했다. 20대 초반 앳된 모습인 이 자화상 속 얼굴은, 이후에도 배경과 의상을 바꾸며 여러 차례 등장한다. 독일 뮌헨 알테피나코텍 소장.


△이주헌 미술평론가는…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신화의 미술관’(2020),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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