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기준은 누가 만드는가?

  • 등록 2018-01-04 오전 6:00:01

    수정 2018-01-04 오전 6:00:01

[유영근 서울남부지방법원 부장판사] 직업이 법률가이다 보니 세상에 흔히 일어나지 않는 일들을 자주 접한다. 내가 경험한 세계는 평범하기 그지없는데 정작 다루는 사건은 놀라운 것들이 많다. 가끔은 세상 물정 모르는 책상물림이 멋모르고 판단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렇다고 온갖 경험을 다 한 사람에게 이런 역할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일하는 입장에서도 애로가 많다.

법률가들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안을 섣부르게 판단할 수 없다는 강박관념을 갖다 보니 직업병 비슷한 것이 생기기도 한다. 웬만해서는 한쪽 말만 듣고 옳고 그름을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 가족의 일에 대하여도 반대편에서는 뭐라고 했는지 묻고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말하곤 한다. 객관적인 조언을 한답시고 다툼의 상대방이나 할 법만 말과 행동을 해서 가족이나 친구로부터 비난도 받는다.

법률가들은 경험과 판단 사이의 간격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애쓰기도 한다. 원고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원고의 말이 맞고, 피고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피고의 말이 맞는 것 같아 고민스러운 경우도 있다. 하지만 법정에 오는 당사자 중에는 일반인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들의 생각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나라면 어떤 길을 선택했을 것인가, 그 사람이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세상과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생각해보면 그들의 말과 행동에 동조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런데 연말에 중학생 아이들과 며칠 동안 가까이 지내다 보니 내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행동방식’이라는 것이 과연 ‘일반적인’ 기준인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요새 유행하는 ‘급식체’라는 동영상을 보았다. 급식을 먹는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말투와 유행어라고 했다. 나는 거기에 나오는 ‘~각’, ‘~부분’ 등의 유행어를 메모하고 외워서 나름 상황에 맞게 애들에게 구사했다. 그런데 비난일색이었다. 급식체를 그렇게 상황에 맞게 구사하려고 애쓰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행동이고, 그냥 말이 되든 말든 감각적으로 쓰는 용어라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건 포스트모더니즘 언어구사인 셈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TV로 ‘가요대제전’을 보면서 새해를 맞았다. 그러나 네다섯 시간의 생방송 동안 내가 좋아하는 가수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아는 가수와 들어본 것 같은 노래가 서너 그룹에 다섯 곡을 넘지 않았다. 내가 출연 가수가 지나치게 편파적이라고 했더니, 아내는 10대 팬이 많아야 돈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10대 애들 상대로 무슨 돈을 버느냐고 했더니, 아내는 당신이 1년에 음악에 돈 얼마 쓰느냐, 우리 애는 지난주에도 10만 원 넘는 콘서트 티켓 샀다고 말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아이들과 함께 TV로 보는 세상은 내가 사는 세상과는 사뭇 달랐다. 인터넷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청소년들이 사용하는 용어와 주도하는 사회적 이슈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어렸을 적엔 가족이 함께 모여 ‘십대가수 가요제’를 보았다. 우리가 좋아하는 가수와 부모님이 좋아하는 가수가 골고루 나왔고, 가수왕은 가족들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지금의 현상은 단순히 세대차이라고 해석하기엔 간극이 너무 크고 양상도 사뭇 다르다.

내가 앞에서 세상에서 흔히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 일들이 흔히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고, 일반적인 사고방식이나 행동방식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이미 널리 퍼진 방식일 수도 있다. 마치 가요 프로그램에서 10대가 돈을 쓰고 그로 인해 권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콘텐츠를 자신들의 것으로 완전히 채울 수 있듯이 법정에서는 권력을 가진 계층과 세대가 자신들이 선호하는 사고와 행동방식을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한없이 변하고 있다. 새해 들어 좀 더 다양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있을 수 있는 사실에 대하여 미리 선을 그어버리는 것과 열린 눈을 가지고 들여다보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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