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가들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안을 섣부르게 판단할 수 없다는 강박관념을 갖다 보니 직업병 비슷한 것이 생기기도 한다. 웬만해서는 한쪽 말만 듣고 옳고 그름을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 가족의 일에 대하여도 반대편에서는 뭐라고 했는지 묻고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말하곤 한다. 객관적인 조언을 한답시고 다툼의 상대방이나 할 법만 말과 행동을 해서 가족이나 친구로부터 비난도 받는다.
법률가들은 경험과 판단 사이의 간격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애쓰기도 한다. 원고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원고의 말이 맞고, 피고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피고의 말이 맞는 것 같아 고민스러운 경우도 있다. 하지만 법정에 오는 당사자 중에는 일반인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들의 생각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나라면 어떤 길을 선택했을 것인가, 그 사람이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세상과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생각해보면 그들의 말과 행동에 동조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런데 연말에 중학생 아이들과 며칠 동안 가까이 지내다 보니 내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행동방식’이라는 것이 과연 ‘일반적인’ 기준인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함께 TV로 ‘가요대제전’을 보면서 새해를 맞았다. 그러나 네다섯 시간의 생방송 동안 내가 좋아하는 가수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아는 가수와 들어본 것 같은 노래가 서너 그룹에 다섯 곡을 넘지 않았다. 내가 출연 가수가 지나치게 편파적이라고 했더니, 아내는 10대 팬이 많아야 돈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10대 애들 상대로 무슨 돈을 버느냐고 했더니, 아내는 당신이 1년에 음악에 돈 얼마 쓰느냐, 우리 애는 지난주에도 10만 원 넘는 콘서트 티켓 샀다고 말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앞에서 세상에서 흔히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 일들이 흔히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고, 일반적인 사고방식이나 행동방식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이미 널리 퍼진 방식일 수도 있다. 마치 가요 프로그램에서 10대가 돈을 쓰고 그로 인해 권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콘텐츠를 자신들의 것으로 완전히 채울 수 있듯이 법정에서는 권력을 가진 계층과 세대가 자신들이 선호하는 사고와 행동방식을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한없이 변하고 있다. 새해 들어 좀 더 다양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있을 수 있는 사실에 대하여 미리 선을 그어버리는 것과 열린 눈을 가지고 들여다보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