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 코리아]생떼와 폭력 그리고 거수기‥부끄러운 국회史 7대장면

정치적 견변기서 정권 하수인 역할
민주화 이후는 의견갈리면 폭력사태
비민주적 정당 의사결정구조는 지속
  • 등록 2017-01-03 오전 8:01:30

    수정 2017-01-03 오전 8:01:30

[이데일리 장순원 기자] 대한민국 국회가 가동한지 70년이 돼 간다. 서구 민주주의 사회와 비교하면 이제 청년기에 접어든 셈이다. 그렇지만 우리 국회는 여전히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정파적 이해관계에 파묻혀 국회를 이전투구의 장(場)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70년 대한민국 국회가 스스로 권위를 떨어트린 사건을 짚어봤다.

정치적 격변기‥국회가 ‘생떼’ 앞세워 막장정치

1950~60년대 역사적 격변기 속에서 국회에서도 많은 사건이 있었다.

우리 헌정사에서 막장국회로 인식된 것은 첫 사건은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이다. 1954년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위해 개헌을 단행했는데, 표결 결과 개헌 정족수인 136석에 1표 모자랐지만 135표가 나오면서 개헌이 좌절되는 듯했다. 야당을 비롯해 개헌 반대언론도 자축하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하지만 부결 다음날 자유당은 대학교수까지 동원해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명인데, 소수점 이하의 숫자인 0.333은 버려야 한다는 해괴한 논리로 부결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사사오입은 반올림의 일본식 표현이다.

가결 직후 민주당 의원들이 의장석으로 뛰어들어 당시 의사를 진행했던 국회부의장의 멱살을 잡는 등 한바탕 충돌이 벌어졌다. 김영삼, 민관식 등 자유당 소장파 국회의원 일부는 사사오입 개헌을 비판하며 자유당을 탈당했다.

박정희 정권 초기 국회 오물투척사건도 벌어졌다. 1966년 김두한 무소속 의원이 삼성 계열사인 한국비료가 사카린을 대량 밀수한 사건에 대한 질문을 하던 도중 미리 준비해간 오물을 본회의장에 투척한 것이다. 김 의원은 재벌과 내각을 규탄하다 “밀수한 사카린 맛을 봐라”라며 준비해간 오물을 던졌다.

당시 밀수로 벌어들인 돈이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국민은 통쾌해했지만 김 의원은 국회의장 모독과 공무집행방해로 구속됐다. 김두한 오물투척은 최악의 의사진행방해 행위로 기억된다.

국회가 정권의 하수인 역할

유신말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의원직 제명도 눈에 띄는 사건이다. YS는 박정희 정권의 눈엣가시였다. 박 대통령의 독재 행보를 정면으로 비판했기 때문이다. 유신정권의 말기가 되자 유신정권은 본격적인 YS 제거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1979년 야당인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받으면서 총재직을 잃게 됐는데, 이를 계기로 YS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국민과 유리된 정권,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다수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할지를 밝혀라”고 요구했다.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이 나서라는 얘기다. 이러자 공화당은 YS를 반국가적 언동, 사대주의 발상이란 비난을 쏟아내던 공화당은 YS 의원직 제명을 추진했다.

공화당 의원들과 ‘체육관 선거’로 뽑힌 유정회 의원들은 신민당 의원들이 점거한 국회 본회의장을 피해 146호실로 모였고 제명안은 일사천리로 처리됐다.

신민당 의원 60명 전원이 이에 반발해 사퇴서를 냈으나 공화당 일부에서는 사표를 수리해야 한다는 주장마저 나왔다. 유신 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했던 당시 집권당의 민낯인 셈이다.

이 사건으로 YS의 정치적 기반인 부산 마신 민심이 술렁였고 결국 부마항쟁으로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 대통령이 저격당한 10ㆍ26 사태가 일어났다.

민주화 시대‥폭력 국회의 역설

민주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국회는 주로 의견이 팽팽하게 갈린 쟁점 사안을 단독 처리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폭력사태로 자주 비화했다.

지난 2008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사태가 대표적이다. 그해 연말인 12월18일 당시 집권당인 한나라당이 FTA 동의안을 단독 상정 처리하려 하면서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회의장은 전쟁터를 방불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아침 일찍 외교통상위 회의장을 점거한뒤 문을 걸어 잠그자 허를 찔린 야당 의원들이 달려오면서 충돌이 시작됐다. 민주당 의원과 당직자 150여 명이 회의장 진입을 시도하며 문을 밀기 시작했고 급기야 문을 부수기 위해 대형 망치까지 동원됐다. 질서유지를 위해 동원된 국회 경위들이 민주당 의원들을 향해 분말 소화기를 분사했고 민주당도 소화전을 이용해 물대포를 쏘며 맞대응했다. 이 과정에서 주변 유리문이 깨지고 경위와 보좌관이 다쳤다.

한미 FTA의 파장은 2011년까지 이어졌다. 민주노동당 소속이던 김선동 의원은 2011년 11월 22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강행 처리를 막기 위해 본회의장에서 최루탄을 터트렸다.본회 의장의 최루탄 살포는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다. 당시 FTA 협정 비준을 놓고 극한의 대립을 이어가던 국회는 ‘최루탄 국회’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김 전 의원은 지난 2014년 6월 대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고 의원직을 잃었다.

국회 선진화법 이후 폭력사태 급감...후진적 정당 행태는 지속

2004년 3월 12일 진행됐던 노 전 대통령 탄핵안 표결은 여야의 격한 대립 속에서 재적 의원 271명 중 195명이 투표에 참가해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가결됐다. 2004년 당시에는 탄핵 찬반 의원 간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국회의장이 경호권을 발동할 정도였다. 당시에는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통곡하면서 본회의장 곳곳에서 탄핵가결에 항의했다.

국회가 잦은 폭력사태를 빚으면서 18대 국회 말에 통과된 국회 선진화법이 통과됐다. 국회의장이 본회의에 법안을 직권 상정할 수 있는 경우를 제한하고 쟁점법안은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의 동의를 얻도록 했다. 폭력사태를 방지하고 다수당의 독주를 견제한다는 취지다. 법안이 통과된 이후 폭력사태는 현저히 줄었다.

하지만 후진적인 정당구조가 지속하면서 국회의원에 대한 신뢰는 여전히 바닥권이다. 비민주적 정당정치의 단면이 드러난 게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옥새 파동이다. 당 대표가 여섯 군데 지역 공천장에 당인(黨印)을 찍지 않고 부산으로 가버리는, 한국 정당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당내 친박 세력이 공천권을 휘두르자 이에 반발한 것이다. 이를 두고 우리나라 정당정치의 현주소가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평가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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