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기획)`세계의 수도` 맨해튼, 세계人이 만든다

(제5부)매력사회로 가는 길
`작은 세계` 맨해튼..코스모폴리탄이 숨쉰다
코스모폴리탄적 정신 `핵심경쟁력`

  • 등록 2008-04-07 오전 11:17:17

    수정 2008-04-07 오전 11:17:17

[뉴욕=이데일리 김기성특파원] `월스트리트,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브로드웨이, 명품 5번가, 센트럴파크, 자유여신상, 유엔본부, 노란색 택시, 할렘..`

뉴욕시 맨해튼. 길모퉁이만 돌면 세계와 만난다. 수많은 민족과 종교, 인종, 언어. 누구나 익히 알만한 명소들. 경제, 문화, 예술, 관광, 미디어 그 어느하나 세계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오묘한 매력과 열정이 잠들지 않고 발산되는 멜팅팟(meltingpot)의 본고장이다. 
 

▲ 세계의 수도로 불리는 맨해튼
`섹스 앤 더 시티`, `프렌즈`, `로 앤 오더` 등 무수한 TV 드라마와 영화의 배경이 된 영감의 도시. 한발짝만 나가도 피카소와 앤디 워홀을 만날 수 있는 거리. 그리고 나만도, 그렇다고 너만도 아닌, 우리가 함께 어울리는 개방적인 코스모폴리탄적 정신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여의도 면적의 7배가 조금 넘는 맨해튼(58.8 km²)이 세계 중심으로 발돋움한 까닭이다. 맨해튼은 미국이 아닌 작은 세계, 또는 세계의 수도로 통한다. 

◇코스모폴리탄의 본고장..개방, 도전, 경쟁의 함수

원래 인디언의 땅이었던 맨해튼. 이탈리아 항해사 다베라지노가 이 곳을 발견한 때는 1524년. 네덜란드 식민지로 출발해 `뉴암스테르담`으로 불렸던 맨해튼은 보스턴, 필라델피아 등과 함께 미국 역사를 대표하는 도시다.
 



그러나 네덜란드인들이 개척한 맨해튼은 처음부터 여타 도시들과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었다. 신대륙에 도착하자 마자 교회를 짓고 도덕성과 신앙심 깊은 공동체를 건설했던 뉴잉글랜드의 신교들이나 펜실베니아의 퀘이커교도, 메릴랜드의 카톨릭 교도들과는 너무도 달랐다.

튤립 투기로 상징되듯이 이재에 밝은 네덜란드인이 점령한 맨해튼은 처음부터 수익을 위해서라면 인종과 종교를 불문했다. `뉴암스테르담`은 처음부터 개방, 도전, 경쟁의 코스모폴리탄적 성격을 띠었던 것이다. 그 이후 18세기와 19세기를 거쳐 아일랜드, 독일 등 유럽 각국의 이민자들이 대거 몰리면서 이같은 코스모폴리탄적 분위기는 맨해튼의 상징이 됐다. 
 
현재 맨해튼의 일자리수는 230만개로 뉴욕시 일자리의 3분의 2에 달하고 있다. 이중 150만명은 뉴욕, 북부 뉴저지, 롱아일랜드 등 `트라이 스테이트`라고 불리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지역에서 통근하는 사람들이다.

비슷한 사람들만 모여있는 획일적인 도시보다 다양한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도시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사실을 맨해튼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맨해튼=월스트리트`

맨해튼이 처음부터 금융도시였던 것은 물론 아니다. 허드슨강을 따라 대서양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어 식민지 중계무역을 통해 상업도시로 발전했다.
 
그러나 세계 금융의 중심 월스트리트의 탄생은 숙명에 가까웠다. 
 
애팔라치아산맥에 가로막혀 있던 동부와 서부간 원활한 운송을 위해 벌였던 대역사 이리운하(허드슨강~이리호) 건설은 맨해튼이 그 당시 미국 금융의 중심지였던 필라델피아를 제치는 계기가 됐다. 1817년 착공해 1825년 완공된 이리운하 건설을 위해 발행된 700만달러 어치의 채권발행과 폭발적인 인구 증가가 월스트리트에 금융의 본격적인 싹을 틔웠다. 

세계 1,2차대전은 그당시 세계 최대 금융도시였던 런던을 누르고 세계 정상에 올라서는 발판이었다. 세계 대전중 금융시장 구실을 했던 유일한 곳이 월스트리트였던 터라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군의 자금조달 창구 역할을 했고, 미국의 전쟁특수로 유럽의 자금이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 월가의 상징 뉴욕증권거래소

이름모를 한 뒷골목으로 잊혀질 수도 있었던 월스트리트. 그 곳을 중심으로 한 맨해튼은 28만명이 금융산업에 종사하는 세계 자본시장의 심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범죄와의 전쟁..이미지 쇄신

그렇다고 맨해튼에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은 범죄였다. 1960년~1990년까지 기승을 부렸던 강력범죄로 `탈맨해튼` 현상까지 빚어졌었다. 예를 들어 1960년대 390건에 그쳤던 뉴욕시의 살인사건은 1970년 1117건, 1980년 1812건으로 급증했고 1990년에는 2262건으로 정점에 달했다.

이에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특히 부랑자 문제와 지하철 무임승차 등 작은 범죄도 단호히 대처한 `무관용` 정책을 펼치면서 모든 범죄율은 1990년 이래 평균 75% 급감하는 기록적인 결과를 낳았다. 범죄의 온상에서 안전이 보장된 도시로 새롭게 변신한 뉴욕시는 매년 수천만에 이르는 관광객이 안심하고 찾는 최고의 도시로 변신하는데 성공했다. 

맨해튼은 값비싼 주거비, 대기오염, 월스트리트에 대한 런던과 홍콩의 도전 등 현안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맨해튼이 초기 코스모폴리탄적 정신만 잃지 않는다면 특유의 경쟁력은 유지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맨해튼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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