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타까웠던 9년 전을 떠올리며 셀린은“다파리 튈르리 정원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 퐁네프 다리에서 사크레 쾨르 대성당 앞 잔디밭까지 파리는 온통 연인들의 도시였다. | |
‘비포 선라이즈’의 9년 후 상황을 그린 속편 ‘비포 선셋’ 궤적을 밟아 프랑스 파리를 돌아다니는 여정은 세월의 위력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비포 선셋’은 그날의 일을 소설로 쓴 제시가 ‘저자와의 대화’ 행사에 찾아온 셀린과 만나며 시작한다. 재회가 이뤄진 파리 5구에 있는 헌책방 명소 ‘셰익스피어 서점’은 사람들로 북적댔다. 치쌓인 책더미 사이 좁은 통로를 지나 낡은 나무 계단을 타고 2층으로 갔다. 제시가 셀린을 만났던 작은 방에선 아마추어 시인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토요일의 그 모임은 누구든 자신의 시를 복사해오면 돌려 읽고 평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방에서 나와 비좁은 서가를 구경하다 구석에서 허름한 침대를 봤다. 그 옆 작은 책상엔 낡은 타자기가 놓여 있었다. 책더미 사이엔 싱크대도 있었다. 예전부터 가난한 작가들을 재워주었다는 이 서점 2층은 책이 삶 자체인 풍경을 담고 있었다. 제시도 행사 전날 이곳에서 잤다. 2층에서 내려오려다 입구의 글귀를 본 순간 한없이 따뜻해졌다. “나그네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 것. 그들은 변장한 천사일 수도 있다.”
▲ 늘 사람들로 북적이는 셰익스피어 서점. | |
골목길을 누비다 둘이 찾아가는 ‘르 퓌르 카페’는 요즘 파리에서 새로운 예술 중심지로 부상한다는 11구의 샤론 역 근처에 있었다. 셀린과 제시가 앉았던 테이블로 가서 그들처럼 커피를 주문했다. 바(Bar)에 앉아 와인을 마시던 남자는 부드러운 샹송이 흘러나오자 휘파람을 불었다. 제시는 여기 앉자마자 “왜 미국엔 이런 카페가 없을까”라고 했다. 한적하고 여유로운 카페와 뒷골목은 파리지앵의 파리가 어떤 것인지 말해줬다. 탁자 위 냅킨에 적힌 ‘르 퓌르 카페’ 글씨 뒤엔 말줄임표 점 세개가 찍혀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철학과 종교와 사회에 대해 폭넓게 대화하던 둘이 끝내 줄여버린 말은 어떤 것이었을까. 사랑의 수명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입 밖으로 내뱉은 낭만이 아니라 심장으로 삼킨 연민이다.
▲ 셀린과 제시가 찾았던 르 퓌르 카페. | |
지는 태양은 그림자 길이를 두 배로 늘린다. 제목처럼 ‘해가 지기 전에’ 공항으로 떠나야 할 제시는 짙은 아쉬움 때문에 이별을 자꾸 미룬다. 무려 네 번을 유예한 끝에 그는 결국 셀린 집으로 들어선다. 셀린이 자기 집 주소라고 말하는 ‘샤토도’ 지하철 역 근처 작은 길 ‘뤼 데 프티 제큐리’를 헤맸지만, 그 집을 찾아내지 못했다. 길 이름의 의미처럼 쳇바퀴 속 ‘작은 다람쥐’처럼 골목길을 오가며 닫힌 문 앞 인터폰으로 묻고 또 물었지만 허사였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허망하게도 극중 대사와 달리 실제 촬영지는 다른 곳이었다.
텅 빈 거리에 서서 둘의 재회에 서린 감정의 정체는 뭘까 생각했다. 9년이 흐르는 사이, 꿈꾸는 20대 중반에서 삶의 불능과 부정(否定)을 확인하게 된 30대 중반이 된 제시와 셀린. 삶의 외형을 만드는 것은 대로의 사건이지만 반복 음송되는 것은 뒷골목에서 발생한 일이다. 둘은 작가와 환경운동가로 활동하는 현재 삶의 외형 대신 오래 전 비엔나 뒤안길의 하루를 생(生)의 내밀한 동력으로 여긴다. 회상되는 것은 세월이 아니다. 우리가 문득문득 떠올리는 것은 언제나 순간이다. 순간은 도도한 세월 앞에 늘 무릎을 꿇지만 결정적 지점에 되살아나 그 모든 시간을 무화시킨다. 지루한 영원은 폭발하는 찰나를 동경한다.
집에 들어온 제시에게 셀린은 자신이 만든 노래를 들려준다. 9년 전 일을 아프게 반추하는 노래였다. 그러고선 재즈 싱어 니나 시몬을 흉내내며 마지막 장면에서 장난스레 묻는다. “자기, 이러다 비행기 놓쳐.” 제시는 여유롭게 답한다. “알아.” 이제 질문은 형태를 바꿔 반복된다. 결국 제시는 그녀 집에 남았을까. 아니면, 아쉬운 이별을 다시 빚은 채 현실 대신 추억을 선택할까.
‘비포 선셋’은…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감독하고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가 주연한 2004년작 ‘비포 선셋’(Before Sunset)은 같은 감독의 1995년작 ‘비포 선라이즈’의 9년 후 상황을 그린 수작 멜로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하루를 함께 보내면서 낭만적인 사랑을 하고 헤어진 20대 청춘 남녀가 9년 뒤 프랑스 파리에서 재회하면서 시작한다. 그 사이에 작가가 된 미국 남성 제시와 환경운동가가 된 프랑스 여성 셀린은 제시가 비행기로 떠나야 할 시간 직전까지 파리 곳곳을 헤매며 다시 사랑을 나눈다. 러닝 타임 79분과 실제 영화 속 시간이 거의 그대로 일치하는 이 작품은 놀라운 사실감과 사랑에 대한 갖가지 통찰로 많은 영화팬들을 사로잡았다. 두 영화를 비교해서 보면 9년이란 시간이 배우의 외모와 분위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다.
★여행수첩=파리에서 전 분량을 찍은 ‘비포 선셋’ 촬영지는 파리의 화려한 명소들에 비하면 지극히 소박하다. 노트르담 성당에서 강을 건너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셰익스피어 서점’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그 독특한 분위기로 깊은 인상을 남길 유명 헌책방이다. 두 사람이 커피를 마시던 분위기있는 찻집 ‘르 퓌르 카페’는 지하철 샤론 역 근처의 길인 ‘뤼 장 마세’에 있고, 영화 속에 인상적으로 등장하는 산책로 ‘프로므나드 플랑테’는 파리 12구(www.promenade-plantee.org)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