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원로 연극배우 백성희 선생의 목소리는 한겨울 날씨만큼이나 찼다.
“네 선생님, 근데 금요일 말고 조금 일찍 뵈면 안 될까요?”
“안돼요.”
백선생의 답은 단호했다. 선생을 먼 발치서 뵌 적은 있었지만 대화를 나눠 본 것은 처음이었다. 오랜 세월 무대에선 대배우로서의 내공과 깐깐함이 느껴졌다. 올해 연세는 아흔살. 지난 17일 타계한 영화배우 황정순여사와 동갑이다. 연극계의 최고 원로다. 지난해도 노부부의 삶과 죽음을 그린 연극 ‘3월의 눈’에서 늙은 아내 이순 역을 연기했다. 일제치하 시절인 1942년 가극 ‘심청’의 뺑덕어멈 역으로 무대에 선 이래로 70년 넘게 무대를 지켰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밖에 달리 부를 말이 없다.
며칠 후 서울 방이동으로 갔다. 가는 내내 코끼리 커피숍이란 단어를 생각했다. 코끼리? 왠지 1970~1980년대 서울변두리나 지방의 다방 이름이 떠올랐다. 동네 노인네 몇 분이 한담을 나누는 사랑방이 연상됐다.
교회 앞에 섰다. 우선 ‘코’ 자로 시작하는 상호를 훑어 갔다. 아무리 찾아도 ‘코끼리’ 간판은 없었다. 낭패감이 밀려왔다. 전화를 했다. 신호만 갔다.이번엔 왼쪽으로 돌았다. 역시 아무리 찾아봐도 코끼리의 ‘코’ 자도 보이지 않았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대로를 따라 더 내려 갔다.
순간 거짓말처럼 코끼리 대신 선생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 가게 벽유리 앞에서 서성거리며 출입구를 찾고 있었다. 가게 상호를 봤다. 혹시 주(Zoo)라는 커피전문점을 아는가? 코끼리, 기린, 호랑이, 원숭이 등 동물원의 동물 그림이 그려져 있는…
“아 그래 코끼리 커피숍 맞다!”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상을 줘. 염치없다”는 선생은 이젠 대사가 잘 외워지지 않는다고 했다. 선생은 지나다니다 꼭 이 코끼리 커피숍에 오고 싶었다고 했다. 다방 커피 맛과 같은 카라멜 마키아토를 시켜 드렸다. 달고 맛있다고 아이처럼 좋아 하셨다.
선생을 배웅하러 코끼리 커피숍을 나왔다. 밖에서 다시 보니 방금 다리미질한 검정색 바지에 같은 색의 구두를 맞춰 신었다. 나온 김에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하겠다며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선생. 세월도 비켜간 타고난 여배우셨다.
선생은 10일 행사 당일 30분 전에 백발의 남편 같은 아들과 극장에 왔다. 그날 선생은 기립박수를 받고 시상무대에 올랐고 멋진 수상소감을 들려줬다. 이틀 후 원로무용가 김백봉 선생의 88세 미수(米壽)축하연에서 선생을 다시 만났다. 언제 우리 동네 오면 코끼리 커피숍에 가서 카라멜 마키아또를 사주시겠다고 한다. 네, 선생님 올해도 멋진 공연 기대하겠습니다. 선생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