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순대빛깔 혼혈족의 건국신화 조작하기

연극 `풍찬노숙`
객석과 무대 경계 뒤집어
시공간 모호한 세계 구축
4시간 공연 완성도 높아
  • 등록 2012-01-27 오후 4:42:17

    수정 2012-01-27 오후 4:43:59

이데일리신문 | 이 기사는 이데일리신문 2012년 01월 27일자 37면에 게재됐습니다.
▲ 연극 `풍찬노숙`(사진=남산예술센터)
[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버려진 땅. 마치 공사판 같은 지형이 보인다. 그런 장소라면 으레 있을 양 갈래 둔덕 가운덴 탑인지 무덤인지 정체가 모호한 돌덩이들이 수북하다. 그때 난데없이 비료포대를 들고 나타난 세 명의 장정들. 순식간에 둔덕을 미끄러지는 썰매를 타면서 떠들어댄다. “실컷 놀다보면 죽음이 와서 데려가겠지.” 나이가 얼마나 됐으며 어떻게 먹고 사는지 가늠키 어려운 그들은 형제라 했다.

비탈 위 덩그러니 놓인 낡은 북이 위압적이다. 시대가 있다면 과거인지 미래인지, 땅이라면 지하인지 지상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그곳은 신화적 공간이다. `얼굴은 마이클인데 이름은 응보`인 남자와 그의 가족이면서 동포인 `순대빛깔` 피부색을 지닌 혼혈족들이 모여사는 곳이다.

연극 `풍찬노숙`은 지난 역사가 아닌 먼 미래의 역사로 앞서나간 `시골민족` 탄생설화 혹은 그들의 건국신화다. `현대-근대-중세-고대`로 거꾸로 진행하는 시대 중 현대의 끝부분에 산다. 역행하는 극 속 미래에도 여전히 잔존할 계급성은 단 하나, 인종이다.   `농업인구 감소를 극복하기 위해 유입된 외래인구`인 혼혈족은 토종 순혈족에게 핍박받고 차별받는다. 억눌린 분노로 장구한 세월을 견디고 있는 그들의 고난은 `미래의 과거`인 현재에서 진행 중이기도 하다. 혼혈은 `바로 지금`의 문제이기도 한 까닭이다. 하지만 작품은 즉답이나 단답형의 넋두리는 거둬내고자 했다. 대신 묵직한 대사와 수사로 두텁게 포장을 했다. 신화가 필요한 것은 이 지점이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공존하는 그 땅엔 삼각애정 구도까지 넘실댄다.

그런데 혼혈족에겐 공포의 대상이 있다. 북이다. 북소리가 울리면 이들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극복해야 할 이 고난에 단 한 사람, 북소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 있다. 응보다. 똑똑하지만 심약한 응보는 이를 빌미로 오랜 친구이자 지식층을 대변하는 `문계`의 부추김에 떠밀리듯 왕으로 추대된다.   
▲ 연극 `풍찬노숙`(사진=남산예술센터)
극이 진행되면서 민족적 지위를 인정받길 원한 혼혈족의 문제의식은 서서히 드러난다. 한마디로 “왜 우리는 역사를 가질 수 없는가”다. 그리고 10분은 족히 넘길 문계의 독백을 결론삼아 사초를 만들기로 한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하다. 역사를 만들기 위해 상황을 `조작`하는 단계에까지 이른 거다. 근대성을 얻기 위해 왕이 필요했으나 “왕이 죽어야 근대가 온다”는 신념이 그 왕을 살해해야 했다. 피폐한 현실보다 더 피폐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만들어낸 문계는 나직이 또 독백을 쏟아낸다. “왕은 역사에 살게 될 터. 왕을 지키기 위해 왕을 죽인다.”

얌전한 평면을 깬 무대다. 둔덕을 만들기 위해 객석 경사를 빌렸고 무대와 뒤바뀐 객석 위론 흔들거리는 철근다리를 놓았다. 그렇게 사방으로 뚫린 공간에서 출몰하는 배우들은 관객 뒤통수에서 곡소리를 내기도 하고 비탈길을 뛰어다니고 출렁이는 다리를 오르내리며 관객들의 잠든 공간감각을 수시로 자극한다.

무려 4시간에 이르는 대작이다. 지난한 인내와 고뇌를 온몸으로 표현한 배우들에게 메시지를 쥐어줬다. 2008년 4시간30분짜리 연극 `원전유서`로 연극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김지훈 작가의 신작이다. 공상과학적 상상력이 충만한 그가 `장석조네 사람들` `누가 대한민국 20대를 구원할 것인가` 등 인간적이고 사실적인 연극을 지향해온 연출가 김재엽을 만난 것으로도 화제가 됐다. 유기적 결합은 성공적이었다. “어찌하여 왕의 일생만을 역사라 부르는가” “납득할 만한 일은 기록할 필요가 없다네”. 할 말 많은 작가의 천근같은 대사를 연출은 배우들 입에 유려하게 붙여냈다. 서울 예장동 남산예술센터에서 2월12일까지. 02-758-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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