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그 후’ 스틸 컷.(사진=전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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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 영화평론가] 홍상수는 늘 사랑 그 자체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건 그가 주로 중년의 불륜에 대해 얘기해서만은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 그 궁극의 환멸을 두고 비교적 치를 떨게 만든다. 사람들은 홍상수의 영화에 열광한다. 관객 수는 늘 고만고만하다. 그런데 소수의 관객이 보여주는 로열티가 항상 뜨겁다. 그건 사람들이 그의 영화에 일정한 경외심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 모두가 홍상수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보통은 그러지 않는다. 영화를 좋아하면 그걸 만든 사람까지 좋아하게 되는 법이다.
홍상수는 영화를 통해 늘 자신과 우리 모두의 치졸(稚拙)함을 드러낸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스스로 드러내게 만든다.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 나면 사람들이 사랑한다는 것, 더 나아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두고 언쟁을 벌이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다 점점 더 그의 영화에 대해 애기를 나누려 하지 않게 된다. 홀로 생각을 하려고 한다. 홍상수의 영화는 그렇게 점점 더 매니악(maniac)해진다. 홍상수가 하루가 갈수록 고독할 수밖에 없는 건 그 때문이다.
홍상수가, 또 한편의 외로운 작업을 통해 이루어 낸 ‘빛나는’ 성과의 작품 ‘그 후’도 같은 범주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 홍상수의 영화가 특징적이고, 결코 남이 따라 하지 못하는 부분을 건드리고 있다는 세간의 평가가 줄을 잇는 것은 그가 늘 ‘간극’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장기 중 하나는 사랑과 사랑 사이의 예민한 부분을 너무 잘 안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홍상수만큼 그걸 알기는 한다. 그러나 그만큼 표현을 해내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홍상수는 절대 상수다. 그 미세한 감정의 차이를 잘 알고, 또 너무 잘 그려 낸다.
| 영화 ‘그 후’ 스틸 컷.(사진=전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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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서도 보면 출판사 사장(그는 새로 온 직원 아름(김민희 분)에게 자신을 대표라고 부르지 말고 사장이라고 부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사장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지만 사실 그건 현실에서는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사장과 대표의 어감의 차이가 크게 들린다. 주인공이 대표 말고 사장이라고 부르라고 할 때 기이하게도 그의 속물적인 근성이 한순간에 드러난다)인 봉완(권해효)이 어느 시기, 어떤 과정에서 갈등을 겪는 가야 말로 이 영화의 핵심 포인트다. 그건 특히 영화의 시작에서 강조돼 있는데, 봉완은 얼마 전, 그러니까 한 달 전쯤(그는 나중에 그게 한 달인지 두 달인지 증언을 번복한다. 의식적으로 그는 모든 것을 모호하고 애매하게 가려고 노력하는데 불륜 남의 특징이다.) 깊이 사귀던 애인이자 자신의 직원인 창숙(김새벽)과 헤어진 상태다. 비밀스런 관계인 여자와 헤어진 남자의 심리란 한 마디로 태풍이 지나간 후의 먼 바다 한 복판과 같은 것이다. 가까운 바다가 아니라 저 멀리 망망대해를 말한다. 세상은 여전히 돌아 가고 있으며 극히 잔잔하고 평온해 보이는 듯 해도 그의 일상은 어딘 가가 올바르게 작동되지 않는다. 잠이 오지 않고, 그래서 일찍 일어나 홀로 밥을 먹기도 하지만 그건 모두 일상을 억지로라도 이어 가려는 기계적인 안간힘일 뿐이다.
그런 그의 속 마음이 드러날 때는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다. 예를 들어 그는 새벽에 (늘 그래 왔지만 이제는 그것도 의미가 없어진) 운동을 하는데 한참을 달리던 그는 간이 놀이터 앞에서 숨을 거칠게 내쉬며 한참을 꺽꺽 댄다. 힘겨운 것이다. 여자와 헤어져서 힘든 것이다. 여자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렇게 힘든 자신을 그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가 지금 너무나 힘들다는 것을 아무한테도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불륜과 비밀의 사랑을 한 대가로 그는 스스로 외로움의 동굴에서 견뎌 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조금씩 조금 씩 드러나게 된다. 아내 해주(조윤희)가 남편을 이상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뭔가를 간파한다. 쿡 찔러 본다. 하지만 아직은 설마 수준이다. 그러나 곧 봉완을 둘러싼 세 여자, 그러니까 아름과 창숙과 해주 사이에 사단(事端)이 나기 시작한다. 사랑은 균열을 일으킨다. 관계만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인생에 크레바스(crevasse)를 만들어 낸다.
| 영화 ‘그 후’ 스틸 컷.(사진=전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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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사랑 관-인생 관-세상 관은 이번 26편 째 작품 ‘그 후’를 만들면서 그 세공(細工) 기술력이 ‘노인네 잔소리’마냥 깐깐해 졌음을 보여 준다. 그는 기이하게도 점점 문어(文語)적이 돼 간다는 느낌을 주는데 그건 그의 영화가 보는 작품이 아니라 읽는 작품이 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영화는 순서대로 상상력을 부과하지만 책은 아예 순서가 없기 때문이다. 머리 속 기억, 특히 사랑에 대한 기억은 순식간에 시공간을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영화의 이야기가 언뜻 순서상 이리저리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가 그간 즐겨 써 왔던 퀵 줌 인(quick zoom in) 기법이 현격하게 줄어 들고 있는 것도 이제 그가 세부적인, 심지어 아주 지엽 말단의 심리 묘사까지 충분히 자신 있어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 모든 것은 홍상수가 점점 더 자연주의자가 돼 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게 만든다. 자연주의는 ‘야비한 일상의 현실을 극단적으로 묘사하는’ 일종의 사실주의를 말한다. 홍상수의 장기 중 하나 인 ‘술 상’ 신 이야말로 자연주의의 극치를 보여준다. 술을 마시며 극중 인물들은 지나치게 저속하고, (특히 이 영화의 주인공 봉완처럼) 비겁하며, 위선적이다. 술 집 밖에서 그들은 안 그런 척 하고 살지만 결국 술이 본심을 드러내게 한다. 홍상수의 술은 술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부른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서 ‘밤이 해변에서 혼자’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그리고 ‘클레어의 카메라’와 ‘그 후’까지 홍상수는 요즘 이상하게 서두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빨리 찍고 많이 찍는다. 그건 그가 뭔가를 목표로 했기 때문은 아닐 터이다. 할 말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은 통으로 한 번에 얘기할 지 몰라도 홍상수로서는 그렇게 하는 한 세상 일, 사람 일을 설명하기란 요령부득이어서 그걸 하나씩 잘라서 말하는 것이 맞다 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이 많아지고, 작품이 많아지고, 속도가 빨라지고 있는 것이다.
홍상수의 어법은 늘 불편하다. 불쾌하기까지 하다. 이 영화 ‘그 후’는 그런 면에서 최고봉일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서 자조적으로 남몰래 낄낄대는 짓도 그만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상수와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우리를 점점 더 완벽하게 쏙 빼어 닮기 시작한다. 그건 그가 점점 더 세상의 도를 체득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홍상수의 영화를 기필코 보게 되는 것, 간과할 수 없게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 영화 ‘그 후’ 스틸 컷.(사진=전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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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오랜만에 권해효의 명불허전 연기를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그가 그동안 은막에서 다소 지나치게 은둔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 영화 한편으로 고스란히 입증해 냈다. 영화 속에서 앞 여자(창숙)와 뒷 여자(아름)가 이렇게 저렇게 순서를 따지고 있을 때 봉완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보는 사람들을 다 민망하게 만든다. 우는 남자를 보면서 전혀 불쌍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런 연기를 권해효는 척척 선보인다. 그의 연기 내공이 얼마나 심도가 깊은지를 보여 준다. 김민희는, 그 모든 논란에도, 뛰어난 연기의 소유자임을 유감없이 선보인다. 그건 더 이상 놀라운 일도 아니다. 김새벽, 조윤희도 발견의 기쁨을 준다. 홍상수 영화 속의 배우들은 한결같이 연기를 잘한다. 그것이야말로 홍상수가 누리는 최고의 사치다. 그는 그럴 만한 권리가 있다.
◇[오동진의 닥쳐라! 영화평론]은 영화평론가 오동진과 함께합니다.
글을 쓴 영화평론가 오동진은 상세하다 못해 깨알과 같은 컨텍스트(context) 비평을 꿈꿉니다. 그의 영화 얘기가 너무 자세해서 읽는 이들이 듣다 듣다 외치는 말, ‘닥쳐라! 영화평론’. 그 말은 오동진에게 오히려 칭찬의 글입니다. 윗글에 대한 의견이 있으신 분들은 ‘닥쳐라!’ 댓글을 붙여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