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제공] 제자의 무릎이 스승의 복부를 강타하자 '퍽' 소리가 났다. 양팔에 의수(義手)를 단 스승은 '억'하는 신음소리를 내면서도 "더 세게! 다시 한번"을 외쳤다. 스승은 제자의 훈련을 위해 배로 제자의 타격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지난 19일 서울 북가좌동 삼산이글체육관. 한국 최고의 여자 격투기 선수 임수정(24)이 무에타이 스승인 이기섭(41) 관장을 상대로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불행을 떨쳐버린 무에타이
이 관장은 대학 시절인 1988년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고압 전선에 감전돼 오른쪽 팔꿈치 아래와 왼쪽 어깨 아래를 잃었다. 병원에서도 "살 가망이 없다"고 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멀쩡하던 아들이 중증 장애인이 되자 그의 부모는 먹고살 방편으로 당구장을 차려줬지만 이도 1997년에 화재로 잿더미가 됐다. 불행의 연속이었다.
방황하던 그가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1999년 친구의 소개로 시작한 무에타이 덕분이었다. 두 팔을 잃은 이 관장은 무릎 공격을 허용하는 무에타이의 화려한 타격술에 흠뻑 빠졌다. 하루 10시간이 넘는 훈련을 했다. 두 팔이 없는 만큼 두 다리를 가혹할 정도로 단련했다. 피나는 노력 끝에 이 관장은 무에타이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5단 단증을 땄고, 친구가 운영하던 도장도 인수했다.
2002년 말 앳된 여고생이 "다이어트도 할 겸 무에타이를 배우고 싶다"고 이 관장의 도장을 찾아왔다. 예쁘장한 얼굴이지만 펀치와 킥에 남다른 힘이 있었다. 2003년 여름, 이 관장은 그저 샌드백만 두드리던 이 여학생에게 "너 선수할래" 하고 물었다. 여학생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임수정 챔피언 만들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날부터 임수정은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끊임없이 동네 언덕길을 달렸고, 주먹에서 피가 날 정도로 샌드백을 때렸다. 정강이엔 언제나 멍이 들어 있었다. 선수가 되는 일은 다이어트와는 차원이 달랐다. 임수정이 "아침이 오는 게 무서웠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관장은 제자와 함께 달렸고, 자신의 몸을 샌드백으로 내어주며 임수정을 조련했다.
임수정은 2004년 7월 첫 경기에서 TKO승을 거두며 데뷔한 뒤 실력파 '얼짱 파이터'로 급성장 중이다. 임수정은 현재 대한무에타이협회 밴텀급(54㎏) 및 네오파이트 52㎏급 챔피언이다. 지난달 말 서울에서 열린 격투기 K-1 여성대결에선 일본의 신예 레나를 판정으로 제압했다. 통산전적은 22전 18승(8KO) 4패.
임수정은 20일 태국으로 무에타이 수련을 위해 떠났다. 이 관장은 "임수정이 홀로서기를 할 때가 된 것 같다"며 공항에도 나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