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감옥이었던 '섬', 따스한 봄기운이 스며들다

69년 이별, 실향의 섬''교동도'를 가다.
北 연백에서 불과 2.6km 떨어져
삼국시대부터 교통, 무역, 군사적 요충지
한국전쟁 후 황해도 피란민 모여들어
황해도 실향민 모여 만든 '대룡시장'
연산군 유배지, 한증막 등 볼거리 많아
  • 등록 2019-04-19 오전 4:00:00

    수정 2019-04-19 오전 4:00:00

교동도 대룡시장 입구에 자리한 실향민의 모임터 ‘청춘부라보’. 실향민 뿐만 아니라 일반 관광객도 이곳에 들러 차를 나누고 주민들과 담소를 나눌 수 있다.


[교동도=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과거 ‘섬’은 감옥이었다. 그 자체로 바닷물이나 강물로 둘러싸여 있어서다. 과거 역적이나 중죄인을 먼 섬으로 유배를 보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천시 강화군의 부속 섬인 교동도도 유배지였다. 주로 왕과 왕족을 교동도로 보내졌다. 고려 21대 왕이었던 휘종도, 패악을 일삼았던 연산군도,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도 여기서 생을 마감했다. 그렇게 교동도는 오랜 기간 고립과 분리의 섬이었다. 지금의 모습도 당시와 비슷하다. 해안선 대부분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고, 뚫린 곳은 남동쪽의 포구 두세 곳뿐이다. 이마저도 군인들 통제를 받는다. 섬 북쪽도, 서쪽도 북한 땅인 최전방 지역이어서다. 이런 교동도가 변하고 있다. 연륙교가 놓이면서 외부인들의 출입이 잦아들어서다. 따스한 봄기운처럼 온기가 넘치는 교동도로 떠난다.

교동도 대룡시장 내 교동은혜농장


◇ 교동도, ‘섬 아닌 섬’이 되다

경기만 최북단에 위치한 강화군에 딸린 섬 교동도. 최근 외지인의 발길이 늘어나면서 뜨고 있는, 소위 ‘핫’한 곳이다. ‘교동’이라는 땅이름은 신라 경덕왕 때 ‘교동현’에서 비롯됐다. 그전에는 ‘대운도’라 불리기도 했다. 조선시대까지 교동도는 이웃한 강화도와 통합분리를 반복하며, 행정구역도 군과 읍을 오갔다. ‘교동면’으로 정착한 것은 일제강점기이다. 당시 교동군과 강화군이 합해지면서 동서남북 네 개 면을 화개와 수정, 두 면으로 통합한 이후 1934년에 교동면으로 마저 합해 오늘에 이르렀다.

2014년 연륙교인 교동대교 개통으로 ‘섬 아닌 섬’이 됐다. 육지와 연결했지만, 이웃한 석모도와 달리 민간인출입통제선 너머에 있어서다. 그렇다고 출입절차가 까다로운 편은 아니다. 신분증을 보여주고, 방문 목적을 설명하면 출입증을 발급받을 수 있다. 단 자정부터 오전 4시까지는 통행금지에 묶여 섬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섬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불편이 있기는 하다.

교동도 대룡시장 내 교동이발관


지금이야 석모도가 훨씬 더 알려지긴 했지만, 사실 교동도의 위세는 지금의 석모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사실 교동도는 삼국시대부터 교통, 무역, 군사적 요충지였다. 교동도의 남산포구는 송나라 사신들이 개성으로 들어가는 뱃길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실제 지도를 펼쳐보면 서해에서 경기만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있는 곳이 바로 교동도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와 황해도 충청도의 삼도 수군을 관할했던 ‘삼도수군통어영’도 남산포에 있었을 정도였다. 여기에 고려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진 간척사업으로 웬만한 육지보다 더 넓은 전답이 있었다. 교동도 논 면적이 무려 여의도의 열배에 육박할 정도다. 강화도 전체 전답보다 더 넓은 전답을 가진 셈이었다.

교동도가 쇠퇴의 길로 접어든 것은 한국전쟁 이후 부터였다. 한국전쟁은 교동도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전쟁이 끝난 후 섬은 철조망에 둘러싸여 바다에 의지하지도, 바닷길로 통하지도 못하게 됐다. 이후 간첩선이 자주 출몰하면서 시끄러워지자 어로도 막았다. 남산포에서 미법도, 서검도, 불음도, 주문도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선인 ‘어로저지선(어로허용선)’로 인해 북쪽으로의 조업도 금지했다.

교동도 대룡시장에서는 말타기 놀이 조형물과 다양한 벽화들을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교동도 대룡시장
◇ 실향민 아픔 고스란히 간직한 ‘대룡시장’

지금 교동도는 실향민의 땅이다. 한국전쟁 다시 황해도 연백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어서다. 당시 피란민이 어느 정도 들어왔는지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1965년 발표한 인구조사에서 교동도에 1만 2000여명이 살고 있었다는 기록은 남아있다. 불과 3000여명이 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이들은 교동도에 뿌리를 내렸다. 잠시 머물다 전쟁이 끝나면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마련한 임시거처였던 셈이다. 그렇게 섬에 정착한 실향민들이 물건을 사고팔면서 교동도에는 고향의 연백시장을 본뜬 대룡시장이 들어섰다. 500m가 채 안되는 시장골목 양쪽으로 슬레이트 건물이 들어섰다. 지금도 1960년대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시장은 촌스럽지만 정겹고 순박하다. 기나긴 시간이 흘렀지만,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실향민들 때문인지 아련한 공기마저 감돈다

교동도 대룡시장에는 실향민의 쉼터인 ‘청춘부라보’가 있다. 청춘부라보 관광객을 대상으로 황해 전통 강정 등 북한 음식을 소개하고 있다.


시장 입구 교동도 안내소 옆에 있는 ‘청춘부라보’는 실향민 쉼터다. 실향민인 최봉렬(88)씨가 운영하는 곳이다. 이름 그대로 실향민들의 쉼터로, 관광객을 대상으로 북한 음식을 소개하는 공간이다. 교동이발소는 이곳의 대표 명소다. 카메라를 든 관광객이라면 교동이발소 앞에서 사진촬영은 필수다. 피난민들이 모여 만든 대룡시장은 처음 모습과 거의 변한 게 없다. 다만 장사하던 실향민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을 뿐이다. 북한 황해도 출신 이발사 지광식(80) 씨가 운영하고 있다. 시장 안으로 더 들어서면 낡은 이발소도 있고, 달걀을 띄운 쌍화차를 내는 찻집도 있다. 오래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약방도 있다. 마치 영화세트장에 들어선 느낌이다. 지금은 이 낡고 허름한 시장 골목을 찾는 이들도 많다. 그러다 보니 과거의 낡은 느낌도 점점 퇴색해 가고 있다. 다시 한번 교동도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는 것이다.

교동도 대룡시장 제비집


교동 제비집도 꼭 들러야 하는 장소다. 한 통신회사가 마을에 기탁해서 자율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여기서는 IT 기반의 관광 안내를 받거나, 자전거와 스마트 워치를 대여할 수도 있다. 자신의 얼굴을 새겨 넣은 1인 ‘교동신문’을 발간하는 체험 프로그램도 있고, 디스플레이에서 교동도와 북한 황해도 연백 사이 2.6km 거리를 잇는 사이버 다리도 놓을 수 있다.

교동도는 왕과 왕족의 유배지였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연산군이다. 교동도 연산군 유배지에는 연산군이 유배 당시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밀랍인형으로 재현해 두었다.


◇ 수많은 왕족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다

교동도를 찾은 관광객들은 교동도만 보고 서둘러 돌아가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제법 볼 것이 많다. 교동도는 예로부터 왕족의 유배지였다. 연산군 유배지로 알려진 섬이 바로 여기다.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연산군은 교동도로 유배와서 생을 마감했다. 오죽하면 교동도를 ‘돌아오지 않는 섬’이라고 했을까. 유배당한 이들 대부분이 이곳을 빠져나오지 못해 얻은 ‘악명’이었다. 교동 제비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화개산 서쪽 자락에는 연산군 유배지가 있다. 이곳에는 압송 수레를 탄 연산군의 모습을 밀랍인형들로 재현해 놓았다.

교동도 고구리 조선시대 한증막


연산군 유배지 바로 옆 샛길로 들어서면 조선시대 선조들이 만들어 사용한 한증막 터도 남아 있다. 돌을 원형의 돔 형태로 쌓아 만든 한증 굴과 박석을 쌓아 만든 기단, 물을 받아두던 곳으로 보이는 석물 등이 남아 있다. 장작불을 지펴 한증 굴의 돌집을 덥힌 다음 적당히 식었을 때, 솥가지에 물을 뿌려서 그 수증기로 한증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쪽의 읍내리에는 교동읍성이 있다. 인천기념물 25호다. 조선시대 인조 7년(1629년) 수영을 설치했을 때 축조한 것으로, 도읍 전체를 둘러싸 외부로부터 침입을 막아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했다. 성의 둘레는 약 430m, 높이는 6m로 동, 남, 북에 3개의 성문이 있었다. 현재는 반원 형태의 남문인 ‘홍예문’만 남아있다.

교동읍성


교동읍성 옆에 자리한 교동향교는 가장 오래된 향교 중 하나다. 고려 인종 5년(1127년)에 화개산 북쪽에 지었으나, 조선 영조 17년(1741년)에 현재 위치로 옮겼다. 고려 충렬왕 12년(1286년) 당시, 안유선생이 원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공자와 십철의 초상을 모셔 왔다고 전해진다. 제사와 교육의 공간이 결합해 있는 향교에서는 매년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를 위시한 성현들을 추모하고 덕을 기리기 위한 ‘석전제’가 펼쳐진다. 이 모든 역사를 품은 교동도는 살아있는 야외 박물관인 셈이다.

교동도 대룡시장에 있는 식당의 갈비젓국


◇여행메모

△가는길= 섬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은 두 개다. 하나는 48번 국도를 타고 강화대교를 건너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356번 지방도로를 따라 강화초지대교를 건너는 길이다. 강화대교는 섬 북쪽, 초지대교는 섬 남쪽으로 이어진다. 교동도는 48번 국도를 계속 타고 가다 강화군청을 지나 교동대교를 건너서 갈수 있다.

△먹거리= 강화를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가 ‘젓국갈비’다. 이름은 갈비지만 실제로는 전골에 가까운 음식이다. 새우젓과 돼지고기를 넣고 우려낸 육수에 미나리·양파·호박 등 각종 채소를 넣고 팔팔 끓여서 먹는 음식이다. 새우젓 말고는 별다른 양념을 하지 않아 국물맛이 깔끔하고 담백하다.

교동도 대룡시장 내 재미있는 벽화
교동도 대룡시장 앞 곳곳에 붙어있는 재미있는 옛날 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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