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상 이 작품] 운명 저항하는 '한국형 노라' 만나다

- 심사위원 리뷰
국립극단 '운명'
일제강점기 '사진결혼' 폐해 고발
신파 요소 대신 사실성 강화해
  • 등록 2018-09-20 오전 5:50:00

    수정 2018-09-20 오전 5:50:00

국립극단 ‘운명’의 한 장면(사진=국립극단).


[이은경 연극평론가] 우리나라 최초로 공연한 창작희곡 ‘운명’(윤백남 작·김낙형 연출)이 국립극단 ‘근현대희곡의 재발견’ 시리즈 9번째 작품으로 공연(9월 7~29일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하고 있다. 1888년 태어나 일제강점기 극작가이자 소설가, 영화감독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윤백남의 처녀작 ‘운명’(1920)은 발표 당시 연극상황을 고려하면 독보적 완성도를 갖춘 창작희곡이다. 멜로 드라마적 서사로 전개되지만 여성의 주체적 자각을 제시하고 가부장 이데올로기 비판, 사진결혼의 폐해를 고발한다는 점에서 근대성이 돋보인다. 뿐만 아니라 사기결혼·불륜·치정살인 등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소재를 활용한 대중적 글쓰기도 주목할 만하다. ‘인형의 집’의 한국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신여성 박메리(양서빈 분)는 아버지의 강요와 외국에 대한 동경으로 사랑하는 연인 이수옥(홍아론 분)을 배신하고 하와이에 사는 양길삼(이종무 분)과 사진결혼을 한다. 메리는 이상적인 남편을 기대하면서 하와이로 오지만 실제 길삼은 술과 도박에 빠진 중년의 양화수선공이었다. 사기결혼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불행한 삶을 살아가던 그녀는 미국 유학을 가는 중 잠시 하와이에 들른 옛 연인 수옥과 재회한다. 비로소 억누르고 있던 자신의 욕망을 깨닫고 주체적 삶을 선택한다. 결국 메리가 수옥에게 가려고 가출을 하자 질투에 눈이 먼 길삼이 칼을 들고 이들을 좇아온다. 실랑이 과정에 우발적으로 메리가 길삼을 칼로 찔러 죽인다.

공연은 원작의 서사에 충실하지만 신파적 요소를 약화시키고 사실성을 강화하기 위해 약간의 장면 연출을 더했다. 이웃집 여인 갑(이수미 분)과 을(주인영 분)의 비중을 키워서 사진결혼·이주노동자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담아낸다. 특히 여인들의 대사와 행위를 만담처럼 진행시켜 죽음으로 치닫는 긴장과 갈등 속에 희극적 이완을 조성해서 극적 리듬감을 부여한다.

무대는 옛 무덤의 발굴터를 연상시킨다. 흙으로 덮어 돋아준 사각형의 공간은 높이가 다르게 2단으로 구분돼 있다. 무대 앞쪽은 메리의 집이고 무대 뒤쪽은 사탕수수농장, 선술집 등 이주노동자들의 고단한 현실공간이다. 무대 좌우 끝에는 노동기구인 대형 도르래가 긴 줄을 늘어뜨리고 위치해 있는데 등장인물의 삶을 조종하는 운명의 고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찻잔·주전자·의자 같은 생활 소품들은 100년이란 시간의 거리를 상징하듯 앙상한 뼈대로만 존재한다. 죽음의 이미지가 가득한 형해화된 무대에서 생명을 느끼게 하는 것은 두 공간의 경계에 놓인 화분 속 식물들뿐이다. 작품의 비극성이 시각적으로 상징된다. 공연은 사진결혼한 여성의 내레이션과 함께 당시의 사진·영상자료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대사는 원작 그대로 개화기의 화법을 살리고 노동행위는 마임으로, 메리와 수옥의 내면갈등은 무용으로 표현된다. 근대극의 여백을 채워보려는 연출의 고민이 읽힌다.

아쉬운 점도 분명하다. 신파극의 과장된 연기를 순화시킨 양식적 연기에 중점을 두었겠지만 사실연기까지 넘나들어 연기의 일관성이 부족했다. 이웃집 여인들의 만담 앙상블이 뛰어나고 에피소드의 독특함이 돋보여서 오히려 중심인물들의 존재감이 약해졌다. 주객이 전도된 격이다. 배우들의 어설픈 신체움직임, 영상자료의 부실함으로 인해 당시 현실을 현재로 소환하려는 연출 의도도 잘 살아나지 않았다.

국립극단 ‘운명’의 한 장면(사진=국립극단).
국립극단 ‘운명’의 한 장면(사진=국립극단).
국립극단 ‘운명’의 한 장면(사진=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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