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D)''서편제'' 그 마을에 새 길이 생겼다

4월 개방한 청산도 슬로길… 느릿느릿 20㎞
가도 가도…푸름의 연속 길 잃고 헤매도 좋다
  • 등록 2010-04-15 오후 12:10:00

    수정 2010-04-15 오후 12:10:00

▲ 요즘, 청산의 봄이 완연하다. 당리 돌담길은 완연한 청산의 봄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조선일보 제공] 19㎞. '육지'와 청산도 사이 거리입니다. 서울에서 과천을 잇는 거리와 비슷합니다. 그만큼 짧은 거리를 건너왔을 뿐인데, 청산도(전남 완도군 청산면)는 외지인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을 보여줍니다.

먼저 김과 다시마 양식장이 까맣게 수놓은 바다가 있고, 노란 유채와 푸른 보리가 완연한 봄을 알리는 다랭이 밭이 있습니다. 제주의 돌담과 해남의 갈대밭과 거제의 몽돌 해변과 서해의 갯벌도 그곳에 있습니다. 비릿한 바닷바람과 청명한 들바람을 동시에 맞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청산입니다.

그러하니, 섬이 작더라도 청산이 주는 선물들을 하루에 맛보겠다는 건 욕심입니다. 4월 개방한 슬로길 20여㎞ 구간을 천천히 걸을 때에야 비로소 그 선물들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습니다. 잠시 정해진 길을 벗어나 마음 내키는 대로 걸어도 좋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동차로는 한 시간에 돌 수 있는 20여㎞ 구간이 한없이 길어집니다. 그 길어진 만큼이 청산이 주는 선물의 크기입니다.

◆갯내 물씬한 길―도청항~권덕리

청산도 슬로길은 도청항에서 시작한다. 도청항에서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면 유채와 마늘이 각기 노랑과 파랑으로 봄을 알리는 곳, 당리에 도달한다. 서편제를 촬영했던 곳이다. 영화 속 유봉 일가가 진도아리랑 가락에 맞춰 어깨춤을 추며 걸었던 길은 근경으론 소박한 돌담을, 중경으론 마늘밭과 유채밭을, 원경으론 도청항과 바다와 섬을 조망한다. 절경이다. 그 풍경에 반해 임권택 감독은 이 길을 5분40초간 롱테이크로 찍었다.

그러나 1코스를 동행한 마을 주민 김송기씨에게 이 길은 마냥 예쁘기만 한 길은 아니다. 서편제 개봉이 1993년, 이후 돌담길은 세 번 바뀌었다. 김씨가 말했다. "처음엔 흙길이었는데, 장마지면 길이 질퍽해지다 보니 주민들이 군에 민원 넣어서 시멘트로 포장했소. 그랬더니 영화 팬들이 '어떻게 이 길을 포장할 수 있느냐'며 반발한 거라. 다시 시멘트를 벗겨 냈지. 그러면 주민들이 가만있겠소. 결국 군청에서 비싼 돈 들여 황토포장길로 바꾼 거요."

▲ 청산도는 푸르다. 먼 바다는 하얗게 푸르고 가까운 보리밭은 연하게 푸르다. 그 푸른 흐름의 마지막을 유채의 노랑이 장식한다. / 조선영상미디어

길의 사연은 청산도의 최남단, 화랑포를 도는 해안도로에서도 이어진다. 발이 편한 당리 돌담길과 달리, 이 길은 시멘트 포장이다. 적어도 3㎞가 넘는 시멘트 길을 걷다 보면 자연히 발이 아파져 온다. 본래 이곳 역시 흙길이었으나 2005년 관광자원 개발사업을 이유로 길을 시멘트로 덮었다. "시멘트 길은 걷기에 좋지 않다"고 김씨에게 말하자 그가 답했다. "그렇다고 시멘트를 다시 벗겨 내면 얼마나 예산 낭비요."

아파오는 발과 달리 눈은 즐겁다. 청산도는 반농반어촌이다. 절반이 농사를 짓고 나머지는 바다를 삶의 바탕으로 삼는다. 이중 어업으로 생계를 잇는 이들의 삶은 대체로 만(灣)에 몰려 있다. 바다가 육지 쪽으로 오목하게 들어간 곳에 어민들은 김이나 다시마, 전복 따위를 양식한다. 남쪽으로 불쑥 돌출한 지형의 화랑포 양쪽도 이 같은 양식장인데, 어민들이 바다에 펼친 밭은 육지의 논밭처럼 수확되는 작물 따라 모습이 다르다. 전복 양식장을 수놓는 구조물은 촘촘하며 검고, 김 양식장을 구획 짓는 부표는 넓게 드리워지되 그 아래 흩날리는 김으로 검다.

화랑포 일주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시멘트 길은 다시 흙길로 바뀌었다. 숲 속 해안절벽을 따라 걷는 길 위에서 바다는 길의 고도에 따라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면서 농담(濃淡)을 바꾼다. 멀리서 바다는 먹먹한 소리로 점성 짙은 유체처럼 흔들리고 가까이서 바다는 철썩이는 파도소리로 하얗게 부서진다.

◆바닷바람과 들바람 사이— 범바위~장기미

화랑포처럼 돌출된 지형의 권덕리에서 범바위를 오르는 길은 20여㎞의 슬로길 구간 중 가장 힘든 길이다. 그리 크지 않은 고도차를 오르고 내렸던 길은 보적산 8부 능선에 자리잡은 범바위를 향해 가파르게 솟구친다. 

▲ 범바위에서 바라본 일몰
그러나 범바위의 전망은 그 힘듦을 채우고도 남는다. 전망은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되는데, 그 중 첫째가 청산도의 지형과 주민들의 삶이다. 대성산·대봉산·대선산·고성산 등 청산을 이루는 주요 산들은 자락을 바깥으로 펼쳐 병풍처럼 해안을 둘러쳤다. 산자락이 낮아지는 곳엔 어업으로 생계를 잇는 이들의 마을이 웅크리고 있다.

반면 섬의 안쪽으로 산들은 완만하게 낮아진다. 그 경사 위로 보리나 마늘 밭이 바람에 휘청대고, 농업을 생계의 바탕으로 삼는 청계리나 원동리·양지리 등의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범바위에서, 청산도가 반농반어촌이란 게 실감 난다.

둘째로, 범바위는 슬로길 중간 즈음에 있어 지나온 길과 가야 할 길을 종합한다. 다섯 시간 넘게 걸어야 할 길이 앞으로 가깝고, 다섯 시간 전에 걸었던 화랑포는 뒤로 흐릿한 안개에 묻혀 멀다. 도시에서 지나온 길은 인파나 자동차에 묻혀 보이지 않기 마련인데 이곳의 돌아봄은 트인 시야로 걷는 일의 행복을 가르쳐준다. 하여 앞으로의 걸음에 힘을 싣는다. 범바위에서 지나온 걸음과 가야 할 걸음은 이처럼 서로 의지하며 같이 나아간다.

범바위를 내려가는 길은 오르는 길만큼이나 가파르다. 그 길은 보적산 자락이 바다를 향해 나아가며 경사를 낮추는 길이다. 그래서 길 따라 출렁이는 계곡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는데, 이 산의 물소리는 장기미 해변에서 갑자기 파도소리에 자리를 내어준다. 장기미는 불과 수십 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계곡과 바다가 공존하는 지형이다. 이 지형은 앞으로 갯내음의 길 대신 마늘향의 길이 이어질 것을 예고한다.

◆하늘과 땅의 푸름이 조응하는 길—청계리~신흥해수욕장

'청산'이란 이름은 역시 같은 '淸'자가 들어가는 청계리에서부터 또렷하다. 낱알을 품은 보리는 연푸른색으로 물결치며 출렁이고 마늘은 쉽게 구부러지지 않는 단단함으로 짙푸르다. 북쪽으로 양지리와 중흥리 너머 우뚝 솟은 대봉산은 올곧게 솟은 소나무로 검푸르다. 연푸르거나 짙푸르거나 검푸르거나, 땅의 푸름은 하늘의 푸름과 조응하며 걷는 이의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청산에서, 푸름을 지탱하는 건 돌의 무채색이다. 해남이나 김제처럼 광활한 들을 가지지 못한 청산도민은, 대신 돌을 기반으로 논이나 밭을 일궜다. 청산을 대표하는 구들장 논은 그 중 하나. 청산의 농민들은 한옥 온돌방의 구들장처럼 돌로 구들을 만들곤, 그 위에 흙을 덮었다. 대봉산 아래 남쪽으로 펼쳐진 논이 이 같은 구들장 논이다. 돌을 쌓는 부지런함으로 청산도는 농경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길은 북쪽으로 구들장 논을 바라보며 원동리 일대 밭을 한복판으로 가로지른다. 이 길은 온전히 농경민의 것이다. 바다도, 파도소리도 없이 오직 푸르게 펼쳐진 논밭과 경운기 소리가 이 길의 정서를 지배한다. 해안가에서 끝없이 출렁이며 일어서던 산들도 여기서는 숨죽인다. 원동리 일대는 청산의 몇 안 되는 평야다.

그 평야 위에서 보리는 이삭을 품었고 마늘은 높게 자랐다. 5월 수확을 앞둔 마늘밭에서, 원동리 주민 김정덕(79)씨는 낫으로 잡초를 골라내는 일에 한창이다. 마늘 수확이 끝나고서도 김씨는 바쁘다. 그는 "마늘을 수확하고 나면 '나락(벼)'을 심어야 한다"고 했다.

원동리 평야에 김씨처럼 밭일하는 주민은 종종 눈에 뜨였으나 그 주민들로는 원동리의 너른 평야를 감당하지 못했다. 하천 옆으로 일손이 달려 내버려 둔 논밭엔 갈대가 무성하다. 갈대는 왕성한 생명력으로 하천을 따라 신흥해수욕장까지 길게 늘어서며 초록의 들판을 갈색 띠처럼 가로질렀다.

길은 원동리에서 상서리로 향한다. 이 길 위에서 밭담과 집담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이어진다. 집담은 판석처럼 얇은 돌로 처마 끝까지 쌓았으며 밭담은 낮게 쌓아 아래 밭의 담이 위 밭을 지탱했다. 그중에서도 2006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상서리 옛 돌담길은 유혹적이다. 높은 돌담 때문에 시야는 길에 집중되고, 위로 오르는 길은 굽어지고 휘어지며 길에 집중된 시야를 제한한다. 제한된 시야는 그 너머 뭐가 있을지에 대한 호기심을 자아내, 끝내는 바닥에 그려진 슬로길 표시를 버려두고 그 길로 발을 이끈다. 그 길 위에서는 보리와 마늘 밭을 흩날리던 바람도 잠잠해 불현듯 적요하다. 그러하니, 상서리에서는 잠시 길을 잃고 헤매는 것도 좋겠다.

상서리에서, 길은 동촌리를 지나 신흥해수욕장에서 마감한다. 다시 바다이되, 그 바다는 산이 압박해 절벽으로 맞닿은 바다가 아니라 원동리의 평야가 맞닿은 부드러운 바다다. 어민의 바다에서 시작한 청산의 슬로길은 이처럼 농민의 평야를 지나 바다의 평야인 갯벌로 끝난다. 길은 스스로 이야기를 지어내고 자연스런 결말에 이른다. 물론 이 결말은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니 7월, 청산도는 섬의 북쪽을 잇는 19㎞ 구간을 개방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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