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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에 따르면 1993년 3월 12일 외교부 국제기구국은 ‘북한의 NPT탈퇴선언 및 대책’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작성했다. 당시 문서는 대책으로 △대북한 설득 노력을 통한 NPT탈퇴선언 철회 유도(중러를 통한 북한 설득, 미북한 고위급 접촉) △IAEA특별이사회 조기 소집, 북한의 NPT탈퇴에 따른 유엔안보리 보고결의 채택 △북한이 NPT탈퇴선언을 철회하지 않을 경우, 동문제의 유엔안보리 대책수립 시행 등을 수립했다.
외교부 문서에는 IAEA 핵 사찰과 관련해 뉴욕타임즈의 보도의 출처를 묻는 에피소드도 담겼다.
1993년 2월 뉴욕타임즈는 북한이 IAEA 핵 사칠팀의 영변지역 2개 핵 폐기시설 방문 요청을 거부함으로써 핵무기 개발을 계속하고 있다는 우려를 증대시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북한의 NPT 탈퇴 선언 후에 미국의 대응전략도 볼 수 있다. 1993년 6월 2~11일 미국 뉴욕에서는 1차 북미 고위급 회담이 열렸다. 당시 북측은 한반도 통일을 위한 미국의 지원, 내정불간섭, 자위 경우를 제외한 무력불행사, 남북 비핵화 공동선언 지지의 4개 항이 포함된 북미 공동성명을 채택하는 조건으로 NPT 탈퇴 결정을 보류하겠다고 통보했다. 나흘 뒤 북한의 NPT 탈퇴 유보와 미국의 무력 불행사 등을 담은 공동성명이 채택됐다.
이후 북한은 7월 14~19일 제네바에서 열린 2차 회담에서 흑연방식 원자로를 경수로 방식으로 전환하는데 미국이 협조하면 핵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의했다.
이와 관련해 미국 축은 당시 한승주 외무장관과 통화에서 “작지만 중요한 진전을 이룩했다. 경수로 문제는 미국이나 한국에 중요한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외 과거 공개되지 않았던 1988년 이전 외교문서도 세상에 드러났다. 대한항공(KAL) 858편 폭파 사건을 유엔 안보리에 상정하고, 북한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고발했던 당시의 상황을 볼 수 있다.
공개된 외교문서 원문은 서초동 외교사료관 내 외교문서 열람실을 직접 방문하거나, 공개외교문서 열람?청구시스템을 통해 온라인으로 신청해 확인할 수 있다. 열람청구시스템의 경우, 올해 공개된 문서는 6월 이후 이용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