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환의 크레딧스토리)실패에서 배운다

시장내 암묵적 지원
  • 등록 2004-10-05 오후 4:15:20

    수정 2004-10-05 오후 4:15:20

[edaily] 경영학이 사례의 과학이라면, 신용분석은 그야말로 실패사례의 과학이다. 신용평가의 다양한 분석 방법론은 어느 천재의 창안이 아니라, 뼈아픈 평가실패와 처절한 성찰의 반복 속에 아로새겨진 살아남은 자의 나이테다. S&P와 Moody’s의 성공과 권위도 바로 이러한 실패에 대한 준엄한 자기성찰에서 비롯된다. 신용평가의 자기성찰은 이론적으로는 평가논리의 변경, 실천적으로는 평가항목의 추가나 비중확대로 구체화된다. 그런데, 우리 신용평가의 자기성찰은 사뭇 다르다. 위기의식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면서도 좀처럼 손에 잡히는 결과물을 내놓지 못한다. 결코 우리 신용평가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나태해서가 아니다. 신용평가는 결국 시장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논리보다 관성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논리의 틀에 자신을 묶어 버리면 남는 것은 ‘왕따’ 뿐이다. 어디 평가논리가 신용평가의 전유물이겠는가. 시장의 관심과 호응이 있어야 한다. 끌어주고 밀어주고, 손발을 맞춰 가야 한다. ◇ 반복되는 실패의 유형들 이런 저런 실패사례를 살펴보다 보면 놀랍도록 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실패에 대한 시장의 반응도 한결같다. ‘악당들’을 저주하고 신용평가를 비난하고 당국을 탓하며 적당히 손실을 수습하고 만다. 처음에는 제도적 보완에 관심을 보이지만 이내 시들해진다. 우리가 특히 관심을 가지는 것은 실패가 발생한 직후 반드시 나타나는 동일유형의 실패가능성에 대한 마녀사냥이다. SK글로벌을 예로 들어보면, 당장 종합상사와 SK그룹이 곤경을 겪었다. 하지만 무역금융의 부실, 해외부문의 불투명성, 과도한 단기자금 의존 등에서 닮은 꼴인 다른 얼굴의 ‘진짜 마녀’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는 드물었다. 실패를 반복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만큼 위험이 우리의 일상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패에 대한 깊은 성찰과 시스템의 재정비가 미흡하기 때문이다. 다른 얼굴의 닮은 꼴이 나름대로 여유를 회복하여 조용히 구조조정을 수행한다면 정말 다행이지만, 이런 일은 그야말로 행운의 영역에 속한다. ◇ 첫번째 유형: 암묵적 지원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이처럼 반복되는 실패의 유형들을 다뤄볼 생각이다. 이번에는 우선 첫번째 이슈로 암묵적 지원을 골랐다. 사실 좀 까다로운 주제로 공감을 얻기보다는 자칫 냉소를 살 위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적으로 암묵적 지원을 다루려는 이유는 사안의 중대성도 있지만, 무엇보다 최근의 미국 시장 동향이 좋은 힌트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의 신용시장은 모기지 회사인 파니매와 프래디맥의 분식 때문에 시끄럽다. 그린스펀이나 맨큐와 같은 거장들까지 나서서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2월 그린스펀은 상원에 출석하여 이들 모기지 회사에 대한 美연준의 입장을 밝혔다. 먼저 모기지 회사를 정부지원기관(GSEs, Government-sponsored enterprises)으로 규정하고, 정부의 암묵적 지원(implicit support)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통렬히 설파했다. 상당한 경제적 기여를 한 것은 틀림없지만 장기적으로는 비효율로 이어지고, 무엇보다 시장의 효율적 자원배분을 왜곡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는 단순한 비효율을 넘어 위기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만큼 적절한 규제강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단순한 규제수준을 넘어 규모의 제한을 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린스펀의 의견을 빌어 결론을 먼저 말해 버렸다. 우리의 현실도 별로 다르지 않다. ◇ 암묵적 지원에 대한 과도한 기대가 문제 최근의 실패사례인 SK글로벌과 신용카드의 부실화를 살펴보자. 그들의 비즈니스 모델자체가 잘못된 것일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상사업무와 신용카드업은 어쨌든 필요한 비지니스다. 문제는 과도한 자금투입과 무리한 성장이 왜곡된 방향으로 비즈니스 모델을 끌어갔다는데 있다. 본연의 고유업무보다는 다분히 머니게임에 가까운 부분으로 기형성장을 한 것이다(9월 24일자 칼럼 “엔론, 신용카드 그리고 위기의 법칙” 참조). 그 배경에는 암묵적 지원의 이슈가 있다. SK글로벌과 신용카드의 과도한 성장을 이끈 막대한 자금지원은 이들이 그룹의 메인스트림이라는 믿음과 그룹(또는 은행)의 신용도에 대한 시장의 높은 신뢰에 기초한다. 결과적으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모양이 되었다. 하지만, 이를 두고 관련 기업활동 전반을 평가절하 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암묵적 지원이나 특정부문에의 자원 집중은 선택 가능한 경쟁 수단과 전략의 하나일 뿐이다. 모든 모순이 다 위기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위기의 목전에서 극적인 반전을 이룬 사례도 많다. 돌이켜보면 1989년의 IT와 2001년의 주택건설업도 그랬다. 사실 과부하의 법칙은 ‘근육 만들기’에만 통용되는 법칙이 아니다. 원래 위기라는 것이 위험과 기회가 함께 하는 것이다. 이 순간에 필요한 것이 바로 경영능력과 기업가 정신, 그리고 어느 정도의 행운이다. 이렇게 보면 암묵적 지원의 이슈는 사실상 투자자의 문제다. 현실적으로 모든 투자에 대해 성공과 실패의 기대 값을 꼼꼼히 따지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상황은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현금흐름과 자금조달구조, 정보투명성 등의 이슈가 종합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오직 ‘XX그룹이니까’하는 식의 암묵적 지원에 대한 믿음이 모든 분석적 판단을 압도하는 시장은 절대 위기를 피할 수 없다. 암묵적 지원 자체보다는 이에 대한 맹신으로 투자자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경계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 그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 정부지원금융기관의 암묵적 지원 파니매와 프래디맥에 대한 그린스펀의 맹렬한 성토를 우리 금융시스템에 대입하여 다시 읽어 보았다. 거의 다르지 않다. 엔론과 신용카드의 위기가 단지 업종이 다를 뿐이지 기본적으로 같은 맥락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GSEs(정부지원기관)의 경제적 기여는 분명히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특히 개발초기단계나 외환위기의 과정에서 그들의 역할은 정말 돋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장이 어느 수준에 이르면 버팀목이 성장의 걸림돌이 된다. 정확히 표현하면 버팀목의 기능과 걸림돌의 한계가 공존하는 상황이다. 정책금융으로서의 GSEs의 역할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일반금융으로 역할이 확대되면서 묘한 상황이 전개된다. 물론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금융시장의 변동성을 완화하고 시장의 실패를 막아주며 혁신적인 신금융기법의 도입창구가 되기도 한다. 다만 부담스러운 것은 일정 부분 민간부문을 구축한다는 점과 암묵적 지원구조를 확대 재생산한다는 점이다. 기업의 입장에서 GSEs는 보다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금융경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암묵적 지원에의 의존이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기업의 체질은 급격히 약화된다. 끈적끈적한 관계유지가 첫번째 관심사가 되고 환경변화에 대한 기민한 대응은 뒷전이 된다. 주로 재무적인 부문에서지만 어쨌든 기형적인 구조가 되고 만다. 이러한 상황은 절대 자연치유 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그린스펀의 진단이고 우리 금융시장의 현실이다. 그래서 적절한 수준의 규제확대와 규모의 통제라는 그린스펀의 해법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이다. 시장이 이러한 금융편중의 위험을 가격으로 디스카운트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GSEs의 암묵적 지원구조는 붕괴직전까지도 감히 도전하기 어려운 거인의 위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 결론: 암묵적 지원의 관리 앞서 SK글로벌과 신용카드의 실패사례에서 보았듯이 암묵적 지원의 이슈는 시장의 곳곳에 펼쳐져 있다. 독자적 사업기반이나 전망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그룹이나 정책의 의지에 기대어 상당히 무리한 투자가 이루어지는 사업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그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절한 수준에서 시장의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확실히 해야 한다. 대략 세가지 방향이다. 하나는 사업의 효율성이다. 아무리 captive market이라고 하지만 모기업의 보조금으로 시장의 경쟁질서를 왜곡하는 방식이어서는 곤란하다. 가장 효율이 떨어지는 배에 선단의 속도를 맞추는 선단식 경영의 폐해로 이어진다. 또 하나는 정보투명성과 재무적 안정성 측면에서의 신뢰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상세하게 논의하려 한다. 마지막으로 절대 잊어서는 안될 것은 규모의 이슈다. LG카드의 차입금이 처음부터 10조원 수준이었다면 그처럼 황당한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모기업의 안정성까지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의 암묵적 지원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 말장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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