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간 또는 80분, 참신한 연극 골라보세요[알쓸공소]

국립극단, 차세대 연출가 신작 나란히 무대로
김정 연출 '이 불안한 집', 그리스 비극 재해석
임성현 연출 '스고파라갈', 기후위기 문제 다뤄
독특한 형식, 강렬한 연출…연극의 새로운 재미
  • 등록 2023-09-08 오후 4:56:08

    수정 2023-09-08 오후 5:02:12

‘알쓸공소’는 ‘알아두면 쓸모 있는 공연 소식’의 줄임말입니다. 공연과 관련해 여러분들이 그동안 알지 못했거나 잘못 알고 있는, 혹은 재밌는 소식과 정보를 전달합니다. <편집자 주>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국립극단이 신작 연극 2편을 나란히 선보이고 있습니다.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이 불안한 집’,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에 오른 ‘스고파라갈’입니다.

두 작품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국 연극계가 주목하는 젊은 연출가인 김정(‘이 불안한 집’), 임성현(‘스고파라갈’)의 작품이라는 점인데요. 두 연출가 모두 동아연극상 신인연출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두 작품의 공연 시간입니다. ‘이 불안한 집’은 공연 시간만 무려 5시간에 달합니다. 개막 직전 우려(?)도 많았지만, 개막 이후엔 5시간이 지루하지 않다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면 ‘스고파라갈’의 공연 시간은 80분입니다. 짧지만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독특한 형식으로 충격(?)과 여운이 오래 갑니다. 무엇을 골라 보더라도 연극의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피의 복수에 5시간이 ‘순삭’

연극 ‘이 불안한 집’의 한 장면. (사진=국립극단)
‘이 불안한 집’은 아이스킬로스의 그리스 비극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바탕으로 합니다. 사랑하는 딸을 신에게 제물로 바친 아가멤논 왕가에서 펼쳐지는 가족 간의 분노와 반복되는 참혹한 복수를 그립니다. 영국 극작가 지니 해리스가 현대적 감각으로 고전을 재해석했습니다.

작품은 총 3막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1막은 작품의 원형이 된 그리스 비극에 가깝습니다. 딸 이피지니아를 신을 위한 제물로 바친 아가멤논, 그리고 아가멤논을 향한 복수와 원망을 키워나가는 아내 클리템네스트라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10여 명의 등장인물이 쉼 없이 무대에 등장해 원초적인 에너지로 관객을 사로잡습니다.

1막이 ‘버라이어티 쇼’ 같은 느낌이라면 2막은 ‘가족 드라마’입니다. 아가멤논을 끝내 살해한 클리템네스트라, 그리고 가족의 저주에서 벗어나려는 딸 엘렉트라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요. 2막은 이들 가족의 이야기에 보다 집중합니다. 밀도 높은 심리 드라마를 통해 빠져나오고 싶어고 그러지 못하는 ‘피의 굴레’를 보여줍니다.

연극 ‘이 불안한 집’의 한 장면. (사진=국립극단)
하이라이트는 3막입니다. 작품은 갑작스럽게 현대로 넘어옵니다. 클리템네스트라에게 복수를 저지른 엘렉트라는 정신과 의사 오드리의 상담을 받고 있습니다. 오드리 또한 자신의 실수로 남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트라우마를 지닌 인물인데요. 두 사람을 중심으로 작품은 마치 사이코드라마처럼 인물의 내면 속 깊은 심리를 무대 위에 꺼내보입니다.

개막 이후 3막에 대해 다소 호불호가 엇갈리고 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무대 구성과 인물들의 이야기에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습니다. 원래 그리스 비극에서 3부는 2부까지 벌어진 사건들을 둘러싼 신들의 재판이 그려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니 해리스는 이 문제를 인간이 해결하는 이야기로 풀어내기 위해 이런 각색을 선택한 게 아니었을까요. 무엇보다 정교한 연출과 강렬한 이미지로 5시간이 ‘순삭’ 되는 신비로운 체험이 됐습니다. 공연은 오는 24일까지 이어집니다.

한줄평 남긴 관객에게 현금 주는 이색 퍼포먼스

연극 ‘스고파라갈’의 한 장면. (사진=국립극단)
‘스고파라갈’은 국립극단의 작품 개발 사업인 ‘창작공감: 연출’의 2022년 주제인 ‘기후 위기와 예술’에서 출발해 1년여의 개발 기간을 거쳐 완성한 작품입니다. 자본주의와 기후위기의 연관성에 주목하고, 이로부터 시작된 고민과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제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고파라갈’은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단어인데요. 거꾸로 읽으면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갈라파고스죠. “뒤집힌 세상 속에서 우리는 제대로 알고, 보고 있는지, 이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곳은 어디인지 묻는다”는 의미인 듯 합니다.

일반적인 연극에서 볼 수 있는 ‘기승전결’ 구조의 스토리는 없습니다. ‘갈라파고스 땅거북’과 이를 둘러싸고 7명의 배우들이 나누는 대화가 80분을 가득 채웁니다. 땅거북은 계속해서 바다로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7명은 왜 땅거북이 바다로 가야 하는 건지, 바다로 간다면서 왜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대화를 이어갑니다. 반복되는 단어로 이루어진 대사, 그리고 의미를 좀처럼 알기 힘든 퍼포먼스가 계속해서 펼쳐집니다.

연극 ‘스고파라갈’의 한 장면. (사진=국립극단)
이들의 대화 속에서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윈다 스찰’, ‘크스머 론일’, ‘스저지’ 입니다. 거꾸로 하면 찰스 다윈, 일론 머스크, 그리고 지저스(예수)입니다. 각각 과학, 자본주의, 종교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죠. 작품은 이 세 사람을 통해 이런 질문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과학의 진화, 자본주의 발전, 그리고 종교적 구원이 지금 우리 세상에 긍정적인 결과만 가져왔는지를 말입니다.

공연 말미에는 관객에게 도발(?)적인 제안도 합니다. 배우들은 자신들이 국립극단에서 계속 공연하려면 관객들이 ‘한줄평’을 남겨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즉석에서 한줄평을 남겨주면 티켓을 현금으로 바꿔주겠다고 제안합니다. 황당하면서도 흥미로운 퍼포먼스였는데, 공연이 끝나고 곱씹어 보니 예술마저도 자본주의적인 거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풍자한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아무튼 (좋은 의미에서) 이상하고 재미있는 연극입니다. 공연은 오는 17일까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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