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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자열 무협회장 "블록체인·NFT, 기업 무역 외연 확대해야"
- [이데일리 함정선 기자] 구자열 한국무역협회 회장이 “글로벌 경기 둔화에도 예술의 영역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미디어의 발달과 블록체인 기술에 기반한 대체불가토큰(NFT) 아트 부상 등으로 온라인 거래가 확대되고 있다”며 “우리 기업들이 새롭게 형성된 시장을 선점하고 무역의 외연을 확대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구 회장은 25일 무역협회가 삼성동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에서 개최한 ‘제164회 KITA 최고경영자 조찬회’에서 이 같이 밝혔다. 이날 행사에는 주연화 홍익대 문화예술경영대학원 교수가 연사로 나서 ‘레오나르도에서 NFT(대체불가토큰)까지 : 글로벌 미술시장의 성장과 최근 트렌드’를 주제로 강연했다. 주 교수는 강연에서 “기존 미술산업이 블록체인 기술과 융합되면서 중요한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다”며 “현재 작품 구매의 약 80% 이상을 30~50대가 주도하고 있으며, 온라인 거래 플랫폼을 바탕으로 기존과 다른 거래 방식과 소통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특히 우리나라는 세계 최대의 온라인 미술작품 거래 플랫폼 ‘아트시(ARTSY)’에 가입한 국민의 비중이 미국 다음으로 높은 국가로, 투자 관심도가 높고 디지털 환경이 잘 구축돼 있어 미술시장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국가별 아트시(ARTSY) 가입 국민 비중을 보면 미국이 24%로 가장 높고, 한국 13%, 영국 6%, 독일 5% 순이다. 주 교수는 또한 “NFT 기술은 소비자와 창작자 간의 새로운 소통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다”며 “미술품뿐만 아니라 제조 상품에도 이를 활용한다면 소비자의 제품 간접체험, 제품 관련 문화콘텐츠 창출 및 공유 등 마케팅에도 새로운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구 회장은 “우리 기업들이 시장을 확대할 수 있도록 협회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며 “오늘 강연을 통해 미술의 본질적인 가치와 트렌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가치 창출의 기회를 찾길 바란다”고 말했다. 무역협회는 기업 경영자들이 세계경제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고, 기업의 지속가능한 경영을 할 수 있도록 매달 경제, 기술, 문화, 사회 등 다양한 분야의 최신 트렌드를 소개함과 동시에 인문학적 소양까지 기를 수 있는 주제로 ‘KITA 최고경영자(CEO) 조찬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시의적절한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변화에 대한 기업들의 적응력을 높여갈 계획이다. 구자열 한국무역협회 회장이 25일 삼성동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에서 개최한 ‘제164회 KITA 최고경영자 조찬회’에서 환영인사를 하고 있다.
- 국립과천과학관, 성인 대상 과학 아카데미 운영
- [이데일리 김국배 기자] 국립과천과학관은 다음 달 2일부터 한 달간 ‘지속가능한 과학적인 삶’을 주제로 ‘성인과학 아카데미’를 운영한다. 시민과학, 예술융합, 현장탐방 분야에서 총 7개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며, 만 19세 이상 어른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시민과학 분야에서는 3주에 걸쳐 교외·도심에 서식하는 새와 그 주변 환경을 관찰하며 다양한 생물과의 공존 방법을 모색한다. 예술 융합 분야에서는 4~ 5주에 걸쳐 재활용(업사이클링) 공예 활동과 물감, 팔레트, 종이를 직접 만들어 그림까지 그려보는 친환경 미술 활동을 수행한다. 현장탐방 분야의 경우 특정 지역과 기관을 방문해 생태탐사, 지질화석탐사, 지속가능 미래탐사를 수행한다.이번 아카데미는 ‘청춘과학대학’, ‘학부모과학아카데미’ 등 기존 성인 교육 과정이 생애주기별 세대 구분에만 집중했던 점과 달리 개인의 취향대로 다양한 주제와 방식을 선택하도록 확대 편성했다. 동시에 과거에 비해 은퇴 후에도 활기찬 삶을 이어가는 신중년을 겨냥한 ‘꽃중년 생태탐사’, ‘꽃중년 지질화석탐사’를 추가 편성했다.이정모 국립과천과학관장은 “이번 성인과학 아카데미에서 준비한 다양한 교육을 통해 자신의 삶 가까이에서 과학을 즐기는 시민참여적 과학문화가 더욱 확대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 '잃어버린 10년'…잊혀져가는 기억 잊어야하는 기억[정하윤의 아트차이나]<3>
- 장샤오강의 ‘핏줄-대가족: 가족 no.1’(1993). 중국 현대미술의 4대 천왕(장샤오강, 쩡판즈, 팡리쥔, 웨민쥔)에 드는 작가를 대표하는 연작 중 한 점. 문화대혁명 시절, 가족의 고된 역사를 기억해낸 뒤 중국의 척박한 역사까지 기억해내게 한 작품이다. 어느 날 문득 꺼내든 가족사진에서 발견한 ‘중국인의 얼굴’로, 개인은 없고 집단만 있던 그 시절을 옮겨냈다. 작가 이전까진 없던 새로운 소재와 색·구성, 그러면서도 ‘기억’과 ‘불안’이란 보편적 인간의 서정을 자극해내면서 세계미술시장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캔버스에 유채, 100×130㎝, ⓒ장샤오강·페이스갤러리 제공.중국 그림을 보지 못한 지 한참입니다. 한국 미술시장이 자못 뜨거웠던 지난해와 올해, 세계의 작가와 작품이 우리를 기웃거리던 때도 중국은 없었습니다. 중국 ‘큰손’ 컬렉터의 규모와 수가 미국을 제쳤다는 얘기도 이미 2~3년 전입니다. ‘으레 미술은, 그림은 그런 것’이라며 반쯤 우려하고 반쯤 체념했던 한국화단을 뒤흔든, 기발한 감수성으로 뒤통수를 내리쳤던 중국 작가들이 하나둘 사라졌습니다. 예술을 예술이 아닌 잣대로 들여다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술에 기대하는 희망 역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정치에도 경제에도 답이 없다 생각할 때 결정적인 열쇠를 예술이 꺼내놨습니다. 오랜시간 미술사를 연구하며 특히 중국미술이 가진 그 힘을 지켜봤던 정하윤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지점 그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때마침 ‘한중 수교 30주년’입니다. 다들 움츠리고 있을 때 먼저 돌아보는 시간이고 먼저 찾아가는 길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깊고 푸른 ‘아트차이나’로 안내합니다. <편집자 주> [정하윤 미술평론가]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화려했던 전성기일 수도, 사무치게 후회되는 순간일 수도, 아름다웠던 유년일 수도 있다. 중국의 스타작가 장샤오강(張曉剛·64)에게 그것은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리는 문화대혁명(1966∼1976)이다. 1958년 따뜻한 남쪽지방 쿤밍에서 태어난 장샤오강은 문화대혁명이 시작됐던 1966년, 여덟살이었다. 극도로 불안한 시절이었다. 정부에서는 우파, 다시 말해 반동분자 색출을 대대적으로 실시했고, 지역단위마다 일정비율 이상을 지명해 보고하라고 했다. 네가 아니라면, 내가 우파가 돼야 하던 때. 사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 희생양일 될 것인가만 필요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 주민들이 장샤오강의 집에 들이닥쳐 그의 부모에게 잘못을 자백하라고 협박했다. 결국 그들은 3년 동안 ‘재교육’을 받으러 집을 떠나야 했다. 여덟살부터 열여덟살까지, 소중한 유년의 때를 장샤오강은 그렇게 보냈다. 딱히 힘들다고 느끼진 못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17년이 지나 우연히 발견한 그 시절의 가족사진은 그의 안에 숨죽이고 있던 기억을 기어이 소환해냈다. 과거를 피해버리지 않고 직시한 덕분에 장샤오강은 ‘핏줄-대가족’ 시리즈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를 일시에 월드스타로 만들어준 바로 그 작품이다. 그중 한 점인 ‘핏줄-대가족: 가족 no.1’(1993)은 부모와 아이가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그대로를 그린 것이다. 특별한 구성도, 구도도 아니지만, 그의 그림은 묘하다. 괴이한 느낌까지 풍긴다. 몇 가지 요소 때문이다. 먼저는 인물이다. 어머니는 화면 밖 어딘가를 응시한다. 아이는 사시다. 정면을 보는 이는 아버지뿐이지만, 그 눈동자조차 멍하다. 가족 모두 표정이 없다. 몸은 사진관에 있지만 영혼은 다른 세상에 있는 듯하다. 화면 전체에 사용한 흐리멍덩한 회색까지 몽롱함을 더한다. ◇개인은 없고 집단만 있던 시절의 ‘기억’과 ‘불안’ 이 그림은 장샤오강의 부모와 형을 그린 것이지만, 당시 중국 어떤 가족의 사진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마오쩌둥 시대에는 모두 같은 옷에 같은 모자, 같은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이 결코 ‘모두가 똑같이 생활하고 생각한다’가 아님에도 개성이 허용되는 범위는 너무 작았다. 그럼에도 장샤오강은 ‘남과 다름’에 유달리 공포를 느꼈다. 어머니가 앓던 정신질환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조현병을 앓았는데 그로 인해 이웃에게 질타를 받을까 늘 염려했던 것이다. 막내아들이던 장샤오강은 깔깔 웃다가도 돌연 화를 내는 어머니가 때때로 두려웠고, 혹여 그 병이 자신에게도 발현될까 걱정했다. ‘핏줄-대가족’ 시리즈에서 어딘지 모를 불안이 느껴지는 것은 그의 이런 심리가 반영돼서다. 그림에서는 사람의 얼굴 쪽에 색채가 갑자기 이상해지는 부분이 드문드문 보인다. ‘컬러패치’라고도 불리는 이 장치는 장샤오강이 화면에 랜덤하게 삽입한 것으로 급작스레 기분이 변하던 어머니의 증상을, 누구라도 숙청 대상이 될 수 있던 당시 중국의 사회를, 그 안에서 장샤오강이 느꼈을 불안감을 함축한다. 화면 전반에 아주 가늘게 그어진 붉은 선도 불안함을 증폭시킨다. 아버지의 귀에서 아이의 배꼽으로, 다시 어머니의 가슴으로, 또 아이의 귀에서 아버지의 심장으로, 규칙 없이 끊어질 듯 이어진 가느다란 선은 제목이 말하듯 ‘핏줄’이다. 가족이 무한정 확대돼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중국의 문화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 연결이란 게 사실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암시하기도 한다. 30대 중반에 이미 대스타로 떠올랐지만 사실 장샤오강의 청춘은 답답했다. 미술대 졸업 후 실직기간을 거치기도 했고, 마음고생으로 술을 많이 마신 탓에 위출혈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소련식 사실주의부터 장 프랑수아 밀레, 빈센트 반 고흐, 초현실주의까지 섭렵했지만 세상을 뒤집을 만한 작품을 내놓지는 못했다. 전환을 맞은 것은 유럽 땅을 밟은 1992년이었다. 우상이던 반 고흐의 ‘해바라기’와 마주한 뒤, 서양의 명화만 좇다간 ‘아류’밖에 되지 않겠다는 위기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중국의 화가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결심했다.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 헤매던 중 10여년 전 가족사진에서 중국인의 얼굴을 본 것이었다. 장샤오강의 작품은 중국의 작가가 중국의 사회, 그 안에서 살던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다. 등장인물조차 중국인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중국적이다. 그러나 보편적이기도 하다. 누구나 가족사진을 찍어서만은 아니다. 작품을 관통하는 본질, ‘기억’과 ‘불안’이란 주제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누구나 하나쯤 마음속에 품고 있는 빛바랜 기억,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내면의 불안을 건드린다. 이국적이기에 새로우면서도 보편적이기에 공감하기 쉽다는 점. 이것이 국제미술계에 소개되자마자 미술관과 갤러리, 학계와 시장 모두에서 전례 없는 주목을 받은 이유다. 장샤오강의 ‘망각과 기억 no.21’(2003). ‘핏줄-대가족’을 시작한 지 10여년 만에 나온 새 연작 중 한 점이다. 가족의 얼굴 대신 일상의 물건·건물 등을 들여 중국 사회와 문화를 옥죄던 문화대혁명 시절을 떠올린다. 불 나간 전구를 통해 기억과 망각의 문제를 건드리며 중국인의 마음과 역사까지 내보인다. 캔버스에 유채, 249×301㎝ ⓒ장샤오강·페이스갤러리 제공.◇역사, 무엇을 망각하고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핏줄-대가족’ 시리즈를 10여년 정도 지속한 뒤 장샤오강은 새로운 시리즈를 선보였다. 이번에는 가족의 얼굴 대신 일상의 물건과 건물을 큰 화폭에 담았다. 그리는 대상은 달라졌지만 소재는 다시 한번 마오쩌둥의 중국을 연상시킨다. 천편일률적인 디자인의 침대와 소파, 역시나 찍어낸 듯 똑같은 이층짜리 시멘트 건물. 여기에 회색조의 화면이 이 개성 없는 사물들을 다시 흐릿하게 만든다. 결정적으로 전구는 불이 나갔다. 기억의 불이 꺼져버렸다는 뜻일까. 반짝하며 과거의 기억이 돌아오는 것도, 그것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도 두렵기는 매한가지다. 장샤오강은 이 시리즈에 ‘망각과 기억’이란 제목을 붙였다. 잊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기억하고 싶었던 것일까(‘망각과 기억 no.21’ 2003). 어느덧 60대 중반이 된 장샤오강의 그림에는 여전히 문화대혁명 시기를 떠올리게 할 도상이 등장한다. ‘눈을 가린 무희(2016)와 같은 그림이 그 예다. 시공간이 명확하지 않은 방안에는 확성기가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서 있고, 오른쪽으로는 벽돌로 막힌 창문이 보인다. 마오쩌둥 시대, 하루에도 몇번씩 마을 전체에 당의 메시지를 전하던 확성기와 홍위병들이 쏘아대던 총알 때문에 벽돌로 막아야 했던 창문을 기억하며 그린 것이다. 장샤오강의 ‘눈을 가린 무희’(2016). 60대가 된 작가의 내면에 여전히 남아있던 문화대혁명을 좀더 적극적으로 풀어냈다. 닫히고 가둔 시대가 만든, 닫히고 갇힌 사람·현실을 벽돌창·확성기·석고상 등의 장치로 표현하고 있다. 무엇을 보고, 보지 말아야 하는지, 또 무엇이 들리고, 들리지 않는지를 격동의 한 시절을 축소한 공간을 배경으로 중국인·중국사회의 자화상처럼 그려냈다. 캔버스에 유채, 160×200㎝, ⓒ장샤오강·페이스갤러리 제공.하지만 요즘 중국의 젊은 세대는 문화대혁명에 대해 잘 모른다. 아버지 장샤오강이 지금까지도 그때의 기억을 그리는 것과는 달리, 1994년에 태어난 그의 자녀 역시 그 시절에 관심이 없다. 그래선가. 그림에 등장하는 소년과 소녀도 주변에 일어나는 상황에 무관심하다. 소년은 서랍 안에 쭈그리고 앉아 책에 빠져 있고, 소녀는 아예 눈을 가려버렸다. 저 멀리 열린 문 뒤로는 아그리파 석고상이 마치 감시자처럼 이상한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다. 장샤오강의 최근 그림에는 초현실적인 면모가 눈에 띄게 강해졌다. 이는 그가 기억하는 문화대혁명 시기가 비현실적이기도 했지만, 엄연한 그 역사적 사실이 점점 잊히는 현재의 상황 또한 비현실적이기 때문일 거다. 개인의 기억과 집단의 기억. 다시 말해 역사는 어떻게 기억되는가, 또는 망각되는가. 우리는 무엇을 잊고, 또 기억할 것인가. 장샤오강의 작품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1983년 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고 싶었단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작가는 일찌감치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관심은 한국현대미술이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보려면 아시아란 큰물이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 꼭대기에 있는 중국을 파고들어야겠다 했던 거다. 귀국한 이후 미술사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 [이상미의 미디어아트] 미디어아트의 확장
- [이데일리 고규대 기자] 최근 몇 년간 미디어아트 시장은 급성장했다. 캔버스를 벗어난 벽이나 바닥 등 다양한 공간을 도화지로 사용하는 미디어아트가 관심을 끌고 있다. 미디어아트는 메타버스와 NFT의 기술적 성장과 더불어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이번 연재로 미디어아트를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전시 공간과 그 공간 속 작가들의 이야기를 다뤄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예술은 고정관념의 진리처럼 불변하지 않는다. 예술은 변한다. 새로워지고 낯설어진다. 인류 최초의 예술로 꼽히는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는 1만 8천5백 년 전에서 1만 4천 년으로 추정된다.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가 약 1만 8천 년 전에 끝났다고 한다. 인간이 무언가를 남기고자 한 열망이 예술이 되었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최근 기술과의 만남으로 예술은 대변혁을 이루었다. 매체를 기반으로 한 미디어아트 역시 마찬가지다. 매체예술이라고도 불리는 미디어아트는 1839년 사진의 발명 이후 이미지의 기계적인 재현과 복사가 가능해지면서 도래하게 된 TV, 비디오 같은 매체들을 바탕으로 점차 확정되어왔다. 미디어아트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종류도 변모해왔다. 백남준이 활동했던 시대에는 TV와 비디오였다. 오늘날에는 인터넷과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이미지와 영상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예술가들은 미학적으로 기존 매체들과 구분되는 독창성을 찾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여러 유형의 이미지 변형과 왜곡 기술이 유행하게 되면서 미디어아트는 현재 여러 장르와 결합하며 그 영역을 꾸준히 확장하고 있다. 인터랙티브 아트, 컴퓨터 아트, 넷 아트 등으로 미디어아트의 분류와 확정되는 분야를 살펴보자.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 본제본◇ 인터랙티브 아트미디어아트가 회화나 조각 같은 예술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바로 작가와 관객의 상호작용에 있다. 미디어아트의 특징은 인터랙션(Interaction)이다. 인터랙티브 아트의 특징은 말 그대로 관람객과 상호작용하는 예술이다. 인터랙티브(Interactive)는 ‘상호 간’이라는 뜻을 지닌 인터(Inter)와 ‘활동적’이라는 뜻을 지닌 액티브(Active)의 합성어다. 예술가가 일방적으로 작품의 의미나 의도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관람자와 상호 소통을 할 수 있다. 작가와 작품 사이의 인터랙션도 가능하다. 그저 관람객이 수동적으로 작품을 보는 데 그쳤던 전통 예술과는 달리 인터랙티브 아트는 관람객들에게 능동적으로 작품에 대한 다양한 행동을 끌어낸다. 이를 위해 인터랙티브 아트는 시각, 청각, 촉각과 같은 관람객의 감각 행위에 해당 작품이 반응하도록 설계된다.그렇다면 인터랙티브 아트의 대표 작품은 무엇인가? 1999년 미국의 미디어 아티스트 카밀 우터백(Camille Utterback)과 이스라엘 출신의 컴퓨터 공학자 로미 아키튜브(Romy Achituv)가 공동 작업한 ‘텍스트 레인’(1999)이다. 대형 프로젝션 스크린에 투사된 관람객의 움직임에 맞춰 알파벳 문자가 흘러내린다. 관람객들에게 떨어지는 작은 영문 알파벳들이 마치 눈송이 같기도 하다. ‘텍스트 레인’에서 관람객이 체험하는 텍스트 애니메이션은 가변적 조합으로 재구성된 에반 짐로드(Evan Zimroth)의 언어와 신체에 대한 시인 ‘Talk, You’의 알파벳 문자들이다. 이 시는 1993년 출간된 시집 ‘Dead, Dinner, or Naked’에 수록되어 있다. ‘텍스트 레인’에는 모션 캡처 기술이 사용되었다. 모션 캡처는 전시장의 교육이나 놀이 프로그램으로 활용된다.미국의 미디어 아티스트 카밀 우터백과 이스라엘 출신의 컴퓨터 공학자 로미 아키튜브가 공동 작업한 ‘텍스트 레인’(1999)은 인터렉티브 아트의 대표로 손꼽힌다.◇ 컴퓨터 아트컴퓨터 아트는 컴퓨터그래픽을 활용한 예술을 말한다. 컴퓨터 아트는 1960년대 초에 등장했다. 당시 컴퓨터는 매우 거대하고 가격도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대기업 부설 연구소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기계였다. 다룰 수 있는 사람도 공학자나 수학자 정도였다. 컴퓨터 아트의 출발점도 미국의 대형 통신회사 AT&T에서 지원을 받은 벨연구소의 마이클 놀이라는 공학자이다. 그는 벨연구소에서 컴퓨터를 통해 이뤄진 작업을 출력하는 과정에서 프로그래밍 오류 발생했는데, 특정한 패턴이 없는 무작위적 그래픽이 출력된 것이다. 놀은 ‘컴퓨터 아트’라고 불렀다. 그는 우연히 만들어진 출력물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어 디지털 아트를 창작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1960년대 독일에서도 컴퓨터 아트가 시도되었다. 독일 예술가 프리더 나케와 게오르크 네스는 각각 수학과 철학을 전공한 이들로서 통계적 무작위성과 미학에 대한 고찰을 바탕으로 컴퓨터를 활용한 작품을 만들어내려고 했다. 이들은 자기 작품을 1965년 슈투르가르트에 있는 벤델린 니들리히 갤러리에 전시했다. 이는 컴퓨터 아트를 하는 예술가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 중 하나였다. 컴퓨터라는 새로운 매체로 창작자의 표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준 것이다.1980년대에 들어서 컴퓨터의 가격이 더 낮아지고 이용법 또한 쉬워지자, 예술가들이 컴퓨터를 예술에 접목하기 시작했다. 그 후 더 저렴하고 성능이 향상된 개인용 컴퓨터가 대중화되면서 그래픽, 애니메이션, 디지털 이미지 등 컴퓨터 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예술은 발전되었다. 컴퓨터를 통한 예술은 실물 없이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것은 단지 현실 세계의 재현이나 표현에서 벗어나 예술가가 생각하는 상상과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변형을 가할 수도 있다.컴퓨터 아트의 특징으로는 상호작용적이며, 네트워크를 통해 창작자와 관람자 간의 소통이 가능하다. 컴퓨터 아트는 모든 정보가 디지털화되어 있어 아날로그 방식의 매체와 다르게 완전 복제가 가능하다. 이는 예술의 ‘비 물질화’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실물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오리지널 개념의 폐기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헝가리 예술가인 베라 몰나르(Vera Molnar)는 컴퓨터 아트의 초기 개척자 중 한 명이다. 그녀의 철저한 컴퓨터 시스템 기반의 접근 방식은 예술과 기술 간의 현대적 교차점에 대한 매개변수를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베라 몰나르는 컴퓨터 드로잉을 통해 복잡하고, 급하게 그린 듯한 일련의 선이 있는 작품을 선보였다. 그녀는 컴퓨터를 사용해 자신이 표현한 것을 혁신적이고 급진적인 작업으로 확장해 나갔다. 이를 통해 미학적인 충격을 만들어냈다. 체계적이고 대칭적인 단순하고 평범한 요소들을 배제 시키기 위해 작가가 우연적이거나 임의로 바꾸어 만들어 낸 것이었다.베라 몰나르가 컴퓨터 드로잉으로 작업한 ‘Molndrian 74,066/11.23.00’(1974) 작품◇ 넷 아트 오늘날의 예술에 있어서 인터넷은 상당히 큰 역할을 한다. 인터넷을 활용하는 넷 아트(Net Art 또는 웹 아트)는 예술에 인터넷을 비롯한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다. 실물 작품에서는 불가능한 경험이나 감상이 넷 아트에서는 가능하다. 마우스나 키보드로 누르면 화면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다양하게 확장되는 걸 보거나 들을 수 있다. 월드와이드웹(www)은 1991년에 배포된 이름이다. 1989년부터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유럽소립자물리학연구소에서 영국의 컴퓨터 과학자 팀 버너스-리에 의해 개발되었다. 월드와이드웹의 의도는 물리학자들 간의 국제적 커뮤니케이션을 돕는 데 있었다. 그 후 군사나 대학의 연구 목적에 활용되다가 일반에 개방되었다. 넷 아트는 기술이 예술의 발전을 이끈 대표적인 사례다. 넷 아트는 1997년 독일의 카셀 도큐멘타 X에서 선보였다. 이듬해인 1998년 여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은 웹을 위한 첫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대만계 미국 예술가인 슈 리아 창(Shu Lea Cheang)의 ‘브랜든’(1998)이다. 티나 브랜든이라는 실존했던 여성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트랜스젠더인 티나 브랜든은 안타깝게도 1993년 강간 후 살해되는 끔찍한 범죄를 입었다. 이 작품은 구겐하임 미술관이 제작한 ‘브랜든’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웹사이트에 접속해 마우스로 화면 중앙을 클릭하면 여러 이미지가 바둑판 모양으로 나열된다. 브랜든의 삶과 죽음에 대한 광범위한 영향을 조명하기 위해 육체가 없는 인간 형태의 이미지, 범죄와 형벌을 주제로 한 문장이나 그림들이 나온다. 마우스로 클릭할 때마다 다른 이미지로 변형된다. 이를 통해 슈 리아 창은 브랜든의 죽음에 대해 되묻고 있다. 대만계 미국 예술가인 슈 리아 창(Shu Lea Cheang)이 티나 브랜든이라는 실존했던 여성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룬 작품인 ‘브랜든’(1998)이다. 트랜스젠더인 티나 브랜든은 안타깝게도 1993년 강간 후 살해되는 끔찍한 범죄를 입었다.◇ 나날이 확장하는 미디어아트그 외에도 파일 전송법과 복사 미술에서 비롯되어 정보통신과 상호작용적인 네트워크, 위성 예술인 커뮤니케이션 아트, 위치 파악 미디어 프로젝트, 예술가가 제작한 비디오 게임, 멀티미디어를 이용한 설치작업과 퍼포먼스, 생명과학 기술을 활용한 바이오 아트,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아트 등이 있다. 미디어아트는 기술 발전에 따라 계속 변화하고 있기에 현재진행형이라고 볼 수 있다. 기존 미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예술이기에 미디어아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미학의 정립 또한 필요하다. 20세기 미술사조는 새로운 양식이 미술사조가 등장할 때마다 어떤 이즘(-ism)으로 묶으려 했다. 오늘날의 미디어아트는 디지털을 활용해 무궁무진한 잠재력과 발전을 거듭하면서 이즘에 국한되지 않으려 한다. 디지털 기술이 여러 장르에 영향을 끼치는 현재 회화, 조각, 사진, 퍼포먼스 등 장르 간의 경계도 점차 허물어지고 있다. 여기에 미디어아트는 여러 매체를 혼합하며 현대미술의 대표로 거듭나고 있다. 미디어아트는 과연 어디까지 확장하게 될까?△ 글=이상미 프랑스 파리 고등미술연구원 예술경영학과에서 수학했고, 파리 고등실천연구원에서 서양예술사학과 고고학으로 석사 학위, 파리 고등사회과학연구원에서 미학으로 박사과정을 밟았다. 이상아트(주) 대표이사이자 유럽문화예술콘텐츠연구소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미술계 현장에서 활발한 활동과 함께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전문성을 갖고 있다.
- 장르 허문 현대예술 축제 '옵/신 페스티벌' 30일 개막
-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무대 위에 설치된 스크린 속 영상의 배우와 현실 무대 위의 배우가 함께 연기하는 연극은 어떤 모습일까. 모로코 마라케시의 오래된 카바레에서 일하는 ‘아이타’ 가수들이 보여주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목소리는 공연예술이 될 수 있을까.‘옵/신 페스티벌 2022’에서 선보이는 일본 연출가 토시키 오카다의 ‘뉴 일루젼’. (사진=옵/신 페스티벌)장르 경계를 허문 독특한 시도를 담은 현대예술을 한자리에서 선보이는 축제 ‘옵/신 페스티벌 2022’가 오는 30일부터 다음 달 20일까지 서울 시내 9개 공간(서촌공간 서로·일민미술관·대학로극장 쿼드·문래예술공장·문래예술공장·아트선재센터·김희수아트센터·에스더 쉬퍼 서울·갤러리 기체)에서 열린다. 총 11개국 28편의 작품으로 현대예술의 최전선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18일 서울 종로구 서촌공간 서로에서 만난 ‘옵/신 페스티벌’의 김성희 예술감독은 “‘옵/신 페스티벌’은 새로운 형식과 태도를 제시하는 다원예술 작품 중 국제적으로 최고 수준의 작품을 선보이는 축제”라며 “기존의 장르 구분이 아닌, 예술가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관점을 더욱 주목한다”고 설명했다.‘옵/신’(ob/scene)은 ‘장(scene)을 벗어난다(ob)’다는 의미로 기존의 장르 구분을 허문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일반적인 공연예술 축제가 연극·무용 등 장르 구분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반면, ‘옵/신 페스티벌’은 장르의 경계를 뛰어넘어 활동 중인 국내외 예술가들의 작품을 관객에게 소개한다는 것이 차별점이다. 2020년 처음 시작해 올해로 3회째를 맞는다.국내에선 낯선 형식의 축제지만 해외, 특히 유럽에서는 예술계의 한 경향으로 자리 잡은 대표적인 축제 형식이기도 하다. 김성희 예술감독은 “‘옵/신 페스티벌’은 국내외 현대 예술가를 초청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작품을 기획, 제작해 다른 축제에도 소개하는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다”며 “아시아의 최신 현대예술에 관심이 많은 유럽의 유명 큐레이터들도 꾸준히 축제를 찾고 있다”고 밝혔다.오는 30일 개막하는 ‘옵/신 페스티벌 2022’ 포스터. (사진=옵/신 페스티벌)올해 선보이는 작품들은 △인간중심의 사유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예술적 형식 △후기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성찰 △기술 과잉 시대에 기술에 대해 던지는 비평적 관점 △전통과 신화로부터 찾는 미래의 가능성 △장르와 장르, 실제와 가상, 극장과 미술관을 교차하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이 중에서도 일본 연출가 토시키 오카다의 ‘뉴 일루전’은 본인이 개발한 새로운 예술 형식인 ‘에이조 연극’(EIZO Theater, 영상 연극)을 통해 무대 위 스크린 속 배우들과 현실 배우들이 함께 연기하는 이색적인 무대를 선보인다. 모로코 안무가 보슈라 위즈겐은 일본의 게이샤와 비교되는 모로코의 명인 ‘아이타’ 가수들의 목소리와 타악기가 공존하는 콘서트 형식의 매혹적인 안무를 공연으로 올린다.이밖에도 현대미술계가 주목하는 작가 티노 세갈과 필립 파레노를 비롯해 마텐 스팽베르크(독일·스웨덴), 메테 에드바센(노르웨이), 호루이안(싱가포르), 더블럭키 프로덕션(독일), 마리아 하사비(미국) 등의 해외 연출가·안무가들의 작품을 선보인다. ‘옵/신 페스티벌’을 통해 해외도 주목하고 있는 한국 작가 김지선, 김보용, 서현석, 임고은 등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김성희 예술감독은 “‘옵/신 페스티벌’은 낯선 축제지만, ‘연극·무용은 이러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하얀 도화지 상태에서 열린 마음으로 공연장을 찾아온다면 조금은 편안하게 작품을 볼 수 있을 것”이라며 “예술이 엔터테인먼트의 기능도 있지만, 우리의 관점을 바꾸고 나아가 사회까지 바꾸는 힘도 있다는 것을 함께 나누고 싶다”고 전했다. ‘옵/신 페스티벌’에 대한 보다 자세한 프로그램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새우 한마리가 3억원…평범해서 비범하더라[정하윤의 아트차이나]<2>
- 치바이스의 ‘새우’(1941). 세상을 뜨기 3개월 전까지도 붓을 놓지 않았다는 치바이스가 남긴 작품 수는 수만점. 그중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새우그림’ 연작이 단연 돋보인다. 8마리 새우가 바로 튀어나올 듯 뒤엉켜 있는 작품은 그중 한 점. 치바이스의 새우를 특별하게 만든 요소는 생생한 현장감에 있다. 몸을 덮은 갑각은 물론이고 긴 수염, 집게발, 촉수 등 하나하나를 움직이는 실체로 완성한 새우의 생생한 디테일은 “아무나 도달할 수 없는 경지”란 극찬을 받는다. 종이에 수묵, 101.5×34.5㎝.중국 그림을 보지 못한 지 한참입니다. 한국 미술시장이 자못 뜨거웠던 지난해와 올해, 세계의 작가와 작품이 우리를 기웃거리던 때도 중국은 없었습니다. 중국 ‘큰손’ 컬렉터의 규모와 수가 미국을 제쳤다는 얘기도 이미 2~3년 전입니다. ‘으레 미술은, 그림은 그런 것’이라며 반쯤 우려하고 반쯤 체념했던 한국화단을 뒤흔든, 기발한 감수성으로 뒤통수를 내리쳤던 중국 작가들이 하나둘 사라졌습니다. 예술을 예술이 아닌 잣대로 들여다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술에 기대하는 희망 역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정치에도 경제에도 답이 없다 생각할 때 결정적인 열쇠를 예술이 꺼내놨습니다. 오랜시간 미술사를 연구하며 특히 중국미술이 가진 그 힘을 지켜봤던 정하윤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지점 그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때마침 ‘한중 수교 30주년’입니다. 다들 움츠리고 있을 때 먼저 돌아보는 시간이고 먼저 찾아가는 길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깊고 푸른 ‘아트차이나’로 안내합니다. <편집자 주> [정하윤 미술평론가] ‘중국의 피카소’라 불리는 화가가 있다. 청나라 말인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격변하는 중국을 살다간 치바이스(齊白石·1864∼1957)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는 치바이스 기념관이 있고, 고향인 후난성 샹탄시에는 그의 이름을 딴 공원 안에 동상이 우뚝 서 있다. 14억명 중국인 중에는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은 치바이스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외국에서도 명성이 자자하다.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나 영국 런던의 영국박물관 같은 유수의 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전시해 왔으며, 크리스티나 소더비 같은 세계적인 미술품 경매에서도 각광을 받는다. 2017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한 미술품 경매에서는 그의 산수화 ‘산수 12조병’이 8억 1000만위안(당시 약 1500억원)에 낙찰되며 중국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가를 경신하기도 했다. 세계 미술시장에서 거액에 거래되는 파블로 피카소나 앤디 워홀에 비견되는 가격대다. 이 낙찰로 ‘중국의 앤디 워홀’이란 별명이 하나 더 생겼다. 한국 관람객에도 친숙하다. 2017년(‘치바이스: 목장에서 거장까지’ 전)과 2018년(‘같고도 다른: 치바이스와의 대화’ 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두 차례에 걸친 대형전시를 통해 치바이스의 작품을 대거 선보였다. 당시 중국 국보급으로 들인 전시작의 보험가액만 1500억원쯤 된다는 얘기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타계 한 해 전인 1956년에는 세계평화평의회로부터 세계평화상을 받은 적도 있다. 도대체 무슨 그림을 그렸기에 국내외에서 이토록 극진한 대접을 받는단 말인가. 얼마나 특별한 작품을 그렸기에. 치바이스의 대표작은 단연 ‘새우그림’이다. 새우라니. 어째 김이 빠진다. 희귀종이라도 되나. 아니다. 개천에나 사는 보통 새우다. 금이라도 발라 놨나. 역시 아니다. 일반 종이에 먹으로 그린 그림이다. 아니 이게 정말, 작품가로 따져보면 그림 속 새우 한 마리가 2억∼3억원쯤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돌 만큼 특별한 그림인가. 대체 왜? ◇매란국죽 대신…일상 소재, 예술의 영역으로 가져와 모순적이게도 치바이스의 새우는 ‘평범’하기 때문에 ‘특별’하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은 소재다. 치바이스는 ‘중국화’라고 하면 으레 떠오르는 저 세상의 무릉도원이나 선비의 절개·지조·기상 등의 온갖 상징을 담았다는 매란국죽을 그리지 않았다. 그는 실개천에 펄떡이는 새우와 개구리, 마당에서 종종대는 병아리, 삶의 냄새가 진하게 밴 농기구를 작품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고고한 문인이라면 쳐다보지 않았을 평범한 소재, 그것을 그렸다는 점이 바로 특별한 점이다. 굳이 치바이스를 워홀에 비해야 한다면, 그것은 단지 작품값 때문이 아니라, 코카콜라병이나 농기구 같은 일상의 소재를 예술의 영역으로 가져왔기 때문이어야 한다. 치바이스가 사용하는 필법도 별것 없다. 그래서 파격적이다. 중국화는 그 유구한 역사만큼 따라야 하는 법칙이 많다. 점을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 붙는 준법의 종류도 많고, 선을 어떻게 휘두르는지에 따라 화파도 나뉜다. 치바이스는? 그중 어떤 법칙도 따르지 않았다. 나름의 방식으로 먹의 농담을 조절해 붓을 놀렸을 뿐이다. 그렇게 그린 그의 새우는 부드럽고 유연하며 생동감이 넘친다. 그래서 치바이스의 새우는 종이 위에 놓인 것이 아니라, 물 안에서 유영하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그림 옆 글귀도 허를 찌른다. 그림에 덧댄 글은 자고로 그림에 대한 감상이나 그림의 의미를 현학적으로 표현하기 마련인데, “이 종이는 먹이 스미지 않아서 맘껏 붓질을 할 수 없다”처럼 일기장에나 끼적거릴 법한 말을 써 놨다. 치바이스를 중국의 피카소에 비유해야 한다면, 이 또한 단순히 작품값 때문이 아니라, 미술의 법칙에 파격을 가져왔다는 점 때문이어야 한다. 치바이스의 ‘연꽃 호수’(1924). 붓이 스치기만 하면 만물은 순식간에 튀어나올 듯 꿈틀대는 생물체가 된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생명력’과 ‘현장감’은 치바이스의 작품을 관통하는 특징. 문인화가 대부분이 매란국죽에 매달리고 고고한 산수에 빠져있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종이에 수묵채색, 182×96㎝.치바이스가 나고 자란 환경 역시 지극히 평범하다. 그는 중국 후난성의 시골마을, 가난한 농민집안에서 태어났다.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대단한 그림교육을 받지도 못했다. 17세기부터 전해 내려오던 미술교본인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중국 청나라 초에 간행한 화보. 제1집은 1679년, 제2·3집은 1701년, 제4집은 1818년에 펴냈다. 산수·난죽매국·화훼·영모·인물 따위를 체계적으로 편집했다)를 보며 산과 나무, 꽃과 풀을 그리는 것을 연습하고, 목수일을 배우며 글자나 문양을 나무에 새기는 기술을 터득했을 뿐이다. 탄탄한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약점이기도 했지만, 어떤 정통화법에 얽매이지 않고 개성 있는 화풍을 만들 수 있는 강점이기도 했다. 물론 생경한 그림 스타일과 비천한 출신이란 이유로 치바이스는 주류 미술계에서 쉬이 인정받지 못했다. 50대 초반까지만 해도 시골 출신에 배우지도 못한 자가 그린 ‘듣도 보도 못한 그림’이란 취급을 받았다. 전환을 맞은 것은 1922년 일본에서 열린 ‘중일회화연합전’에서 큰 호평을 받으면서였다. 일본 사람들이 열광하고, 작품이 완판 되자 중국인의 인식도 달라졌다. 나라 밖에서 먼저 인정을 받은 케이스다. ◇젓가락으로 귀후비는 사내…친근하고 익살스러운 그림이후로 치바이스의 명성은 하늘 높이 올라갔지만, 그는 일관되게 자기 그림을 그렸다. 예를 들면 ‘귓밥’(1947)과 같은 작품. 그림 안에는 콧수염 턱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식탁 앞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다. 생선을 먹던 젓가락으로 귀를 후볐나 보다. 젓가락에 들린 것이 생선살인지 귓밥인지 헷갈린다. 교양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 그림을 보자니 웃음이 난다. 정신의 세계, 마음의 풍광을 다루던 이전 중국화에서는 느낄 수 없던 정겨움이다. 이처럼 치바이스의 그림은 저 멀리 난해한 별나라에 있지 않다. 생선을 먹으며 귓밥을 파는 우리의 일상에 착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치바이스의 ‘귓밥’(1947). 어수룩한 사내의 일상을 그린 작품은 치바이스가 추구한 ‘인물화’의 지향을 그대로 내보인다. 초상이라 하면 으레 떠올릴 경직된 얼굴과 포즈가 없는 데다가 복잡한 배경은 지우고 본질만 끌어내는 ‘생략’의 힘까지 얹어, 군더더기 없이 시대를 앞선 ‘현실주의적’ 인물화의 완성을 봤다. 종이에 수묵채색, 102×34㎝.1957년, 치바이스는 93세로 영면했다. 돌아가신 분을 두고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의 사망 시기는 참으로 적절했다. 이후의 중국 정세가 너무도 어렵게 흘러갔기 때문이다. 그가 사망한 해인 1957년에 시작한 반우파투쟁부터 문화대혁명(1966~1976)까지, 중국은 정치적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들었고, 때문에 미술가들은 매일 살얼음판을 걸었다. 하루아침에 그림의 형식이나 소재, 출신성분에서 꼬투리가 잡혀 우파로 낙인찍히기도 하고, 그로 인해 치욕스러운 일을 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으니 말이다. 험한 꼴을 당할까 무서워서 자신의 작품을 손수 불태우는 이들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특히 치바이스가 그리던 중국화는 과거 봉건체제의 잔재란 이유로 ‘개조’냐 ‘폐기’냐의 기로에 섰던 장르였다. 먹이 너무 진해서, 산수화를 그려서, 또 다른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강도 높은 비난을 받아야 했던 미술가가 너무 많았다. 다행히 치바이스의 명예는 안전히 보존됐다. 생전 워낙 정치와는 철저히 거리를 두기도 했지만, 그의 평범한 배경과 일상적인 소재, 비전통적인 방식에서 타도 대상이던 문인화의 냄새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민 출신으로 주변의 물건을 나름의 방법으로 그린 그림은 그래서 안전했고, 오히려 중국화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지향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평범했기에 비범한 화가로 빛나게 됐다고나 할까. 혹 살다가 특출나지 않은 배경이나 능력, 외모 등으로 의기소침해지기도 한다면 치바이스의 새우를 떠올려 봐도 좋겠다. ‘평범함이 비범함이 아니던가!’라고 되뇌면서. △정하윤 미술평론가는…1983년 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고 싶었단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작가는 일찌감치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관심은 한국현대미술이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보려면 아시아란 큰물이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 꼭대기에 있는 중국을 파고들어야겠다 했던 거다. 귀국한 이후 미술사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 [이상미의 미디어아트] 살아있는 비디오아트의 거장, 빌 비올라
- [이데일리 고규대 기자] 최근 몇 년간 미디어아트 시장은 급성장했다. 캔버스를 벗어난 벽이나 바닥 등 다양한 공간을 도화지로 사용하는 미디어아트가 관심을 끌고 있다. 미디어아트는 메타버스와 NFT의 기술적 성장과 더불어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이번 연재로 미디어아트를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전시 공간과 그 공간 속 작가들의 이야기를 다뤄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살아있는 비디오아트의 거장이라 불리는 빌 비올라.빌 비올라(Bill Viola)는 살아있는 비디오아트의 거장이다. 국제갤러리에서 2003년·2008년·2015년 등 3회에 걸친 개인전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부산시립미술관 이우환 공간에서의 전시로 우리에게는 친숙하다. 작가는 백남준의 조수로도 일한 경험이 있다. 백남준이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라면, 비올라는 비디오아트를 대중에 널리 알리고, 예술의 반열에 오르게 한 인물이다.그는 40년 넘게 삶과 죽음에 대한 원초적 질문과 감정·의식 등을 주제로 한 200점의 작품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 왔다. 1983년 뉴욕현대미술관, 1997년 휘트니 미술관, 2003년 폴 게티 미술관, 2004년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2006년 일본 모리 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1995년과 2007년 두 차례의 베니스 비엔날레에 미국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70살이 넘은 빌 비올라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며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비디오아트를 현대미술의 한 분야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한 선구자인 빌 비올라의 삶과 작품 세계를 만나보자.빌 비올라의 초기작 중 하나인 ‘투영하는 연못’(1977~1979).◇ 물에 빠져 생사를 오갔던 유년 시절의 기억비올라는 1951년 미국 뉴욕 퀸즈에서 태어나 웨스트베리에서 자랐다. 그의 유년기에서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6세 때 익사할 뻔한 순간이다. 다행히 삼촌이 건져 올렸다. 30대가 된 빌 비올라는 푸르고 녹색 빛의 물속이 아름다웠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작품에 물이 자주 등장하는 건 이 유년의 기억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뉴욕에 있는 시라큐스 대학교에서 실험영상학을 전공하며 회화·뉴미디어·인지심리학·전자 음악 등을 배웠다. 비올라는 전자 미디어아트 역사의 거장인 피터 캠퍼스의 영향을 받아 1970년대 초 비디오 작업을 시작했다. 1973년 대학 졸업 후 시라큐스에 있는 에버슨 미술관에서 비디오 기술자로 일했다. 당시 에버슨 미술관은 비디오아트와 뉴미디어 전시를 주로 개최했다. 비올라는 백남준과 같은 당시 유명 작가들의 전시 설치를 도왔다. 1974년 시작된 백남준과의 인연은 1979년까지 이어졌다. 비올라는 백남준이 ‘과달카날 레퀴엠’(1977)을 제작할 때 촬영을 담당하기도 했다. 비올라는 2015년 국제갤러리와 한 인터뷰에서 백남준에 대해 “내 평생 그런 분은 처음 만나봤다. 너무 에너지 넘치고 정말 재미도 있고 지극히 아름다운 분이었다. 나이 든 분이나 젊은이든 그 누구에게도 마음이 열린 분이고 내가 만난 사람 중에 최고의 분이었다”라고 말했다.비올라는 작곡가인 데이비드 투도어와 1973년부터 1980년까지 함께 일하며 음악과 음향에 대한 자신의 관심과 이해를 발전시켜 나갔다. 1974년부터 1976년까지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마리아 글로리아 콘티 비코치가 이끄는 선구적인 비디오 스튜디오인 Art/tapes/22에서 테크니컬 디렉터로 일했다. 1976년과 1977년에 그는 전통 공연예술을 녹음하기 위해 솔로몬 제도, 자바, 인도네시아를 여행했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그의 작품에 녹아든다.1977년 빌 비올라는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 있는 라트로브 대학교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이때 교양 미술 담당자였던 키라 페로프를 만났는데, 둘은 서로에게 평생의 반려자가 된다. 비올라와 페로프는 작업에 있어서 협력 관계를 형성했다. 페로프는 1978년부터 비올라의 비디오테이프와 설치물을 관리하고 행정 일을 하고 있다.비올라는 1970년대에 슈퍼8 필름과 흑백 비디오로 작품을 시작했다. 슈퍼8 필름은 1965년 이스트먼 코닥사가 출시한 8mm 필름이다. 기존 필름보다 큰 면적에 이미지를 담아 농도나 선명도가 뛰어났다. 이 당시 비올라의 초기 작업은 비디오라는 매체가 가진 예술적 가능성을 꾸준히 실험하며, 예술 장르로 개척함과 동시에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와 본질적인 존재 구조’를 탐구했다. 초기작 중 하나는 ‘투영하는 연못’(1977~1979)이다. 숲에서 걸어 나와 물웅덩이 앞에 선 남자가 물을 향해 뛰어들려고 힘차게 도약하는 일순간에 화면이 멈춘다. 자세히 보면 남자를 제외한 주변 풍경은 아주 느리게 움직인다. 시간을 물질로 파악하고, 이를 시각화하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담긴 작품이다.◇ 어머니의 죽음과 아이의 탄생1980년에는 일·미 문화교류 펠로우십을 통해 다나카 다이엔 선사와 함께 불교를 공부했다. 이 기간에 비올라는 소니 아츠기 연구소의 상주 예술가이기도 했다. 일본에서 선(禪) 수행은 비올라의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비올라는 이때 일본에서의 경험을 통해 인생이 바뀌었다고 술회했다. 비올라는 1983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캘리포니아 예술학교(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 칼아츠로 부르기도 함)의 비디오 교과목의 강사가 되었다. 칼아츠는 오늘날 미국 최고의 예술대학으로 손꼽힌다. 그해 뉴욕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 정도이니 비올라가 비디오아트로 예술계에서 인정받았다는 걸 알 수 있다. 1980년대에 비올라는 ‘나는 내가 무엇 같은지 모른다’(1986)를 통해 죽은 들소나 생선이 썩어가고 이를 다른 생물이 뜯어먹는 과정을 통해 죽음과 생명의 순환을 다룬다. 이미 생과 사를 인지하던 그였지만, 더 큰 변화의 계기가 찾아온다. 바로 1990년 겪게 되는 어머니의 죽음과 아이의 탄생이다. 비올라는 어머니의 임종과 아이의 탄생을 비디오에 담아 ‘통과하다’(1991)라는 작품으로 발표한다. 그는 죽음과 삶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는 곧 작품 세계에도 반영된다. 바로 ‘느림의 미학’이다.비올라가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미국관 대표로 참여해 발표한 작품인 ‘인사’(1995).◇ 빌 비올라를 대표하는 ‘느림의 미학’비올라는 어머니의 죽음을 겪게 된 1990년대 이후부터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에 슬로 모션을 사용하거나 되감기 기법을 적용해 시간을 확장하는 작업을 선보인다. 짧은 기록은 보통 10분 내외의 길이로 늘어난다. ‘인사’(1995)는 비올라가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 대표로 참여해 발표한 작품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화가 폰토르모의 ‘방문’(1528~1529)이라는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 두 명의 여자가 서로 대화하는 중에 갑자기 한 명의 여자가 더 끼어든다. 이 작품은 고정된 카메라로 45초간 촬영된 영상을 10분 22초 길이로 매우 느리게 재생해 보여준다. 느린 속도로 보면 가운데 있는 여성이 다른 여성의 등장으로 극도의 소외를 겪는 게 확연히 드러난다. 비올라는 시간의 구조를 일부러 변형시킨 느림을 통해 우리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인간 존재를 바라보게 한다. 부산시립미술관 이우환 공간에서 열린 ‘이우환과 그 친구들Ⅱ-빌 비올라, 조우’ 전시는 비올라의 영상과 영상설치 작품 총 16점을 공개했다. 작품 전체 상영시간이 약 6시간 30분에 달할 정도이니, 비올라가 추구하는 느림의 미학이 어느 정도인지 예측해볼 수 있다.화면을 거꾸로 재생하는 되감기 기법은 시간을 뒤로 돌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 떨어지던 물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식으로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시간을 작품 속에서는 마치 신처럼 주무른다. 비디오아트를 하는 많은 예술가가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채택하고 있지만, 비올라는 디지털 편집에 거의 의존하지 않는다. 그런데 세련되고 능숙하게 뉴미디어와 기술을 다루고 있다. 기술은 그저 작가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도구일 따름이다.비올라는 관람객로 하여금 자신의 작품에 빠져들게 하며, 그동안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섬세하고도 미묘한 감정 변화 그리고 생각을 하게 한다. 긴 세월 동안 비올라의 작품 세계를 연구한 세계적인 큐레이터 제롬 뇌트르는 “빌 비올라는 지난 40여 년간 3가지 형이상학적 질문과 싸워왔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 둘째 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셋째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고 말했다. 비올라는 종이 대신 영상으로 시를 쓰는 시인처럼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 어떻게 답할지는 관람객들의 몫이다. 2014년 5월 영국 런던의 세인트폴 성당에 영구 설치된 빌 비올라의 ‘순교자(흙, 공기, 불, 물)’ 시리즈 4점.◇ 살아 있는 거장의 길1997년 미국의 휘트니 미술관은 비올라의 25년 회고전을 기획하고 국제 투어를 통해 비올라의 작품이 세계적인 미술관에 순회하도록 했다. 가히 살아있는 거장의 행보다. 비올라는 2007년 열린 제52회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청되어 ‘해변 없는 바다’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이 작품은 이듬해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되기도 했다. 영국 런던의 세인트폴 성당의 의뢰로 비올라는 200만 달러(약 22억 원)를 들여 제작한 ‘순교자(흙, 공기, 불, 물)’ 시리즈 4점을 2014년 5월 영구 설치했다. 유럽의 교회에서 다빈치·렘브란트·카라바조 등 뛰어난 예술가에게 성화 제작을 주문했던 오랜 역사를 잇는 방식이다. 세인트폴 성당은 최소 10년 이상의 회의를 거쳐 비올라의 작품 설치를 결정했다고 한다. 전통 회화가 아닌 비디오아트, 그것도 비올라를 선택했다는 점은 비올라가 살아있는 거장이라는 방증이기도 하다.비올라는 국제갤러리에서의 전시로 내한했을 때 가진 언론사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미디어아트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는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요한 것은 미래보다 우리가 현재 사는 이 세상을 ‘어떻게 잘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가히 우문현답이 아닐 수 없다. 현존하는 비디오아트의 거장, 빌 비올라가 어떤 새로운 작품으로 우리에게 찾아올지 기대가 된다. △ 글=이상미 프랑스 파리 고등미술연구원 예술경영학과에서 수학했고, 파리 고등실천연구원에서 서양예술사학과 고고학으로 석사 학위, 파리 고등사회과학연구원에서 미학으로 박사과정을 밟았다. 이상아트(주) 대표이사이자 유럽문화예술콘텐츠연구소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미술계 현장에서 활발한 활동과 함께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전문성을 갖고 있다.
- '인민의 태양' 진 자리 '고흐의 달' 떴소이다[정하윤의 아트차이나]<1>
- 장훙투의 ‘석도-반 고흐’(Shitao-Van Gogh·1998). 회화·조각·콜라주·도자기·설치 등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가 그림으로 시도한 ‘동서양 연결’ 작업 중 하나다. 1990년대 후반부터 중국 풍경의 구성을 가져다가 유럽 인상파 화풍으로 캔버스 유화를 그렸는데, 작품은 중국 청나라 초기의 화승인 석도의 산수화에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녹여낸 것이다. 중국 미술과 서양미술의 가치·관습을 동시에 탐구한 동시에 모더니즘의 본질까지 파고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캔버스에 유채, 147.32×172.72㎝.중국 그림을 보지 못한 지 한참입니다. 한국 미술시장이 자못 뜨거웠던 지난해와 올해, 세계의 작가와 작품이 우리를 기웃거리던 때도 중국은 없었습니다. 중국 ‘큰손’ 컬렉터의 규모와 수가 미국을 제쳤다는 얘기도 이미 2~3년 전입니다. ‘으레 미술은, 그림은 그런 것’이라며 반쯤 우려하고 반쯤 체념했던 한국화단을 뒤흔든, 기발한 감수성으로 뒤통수를 내리쳤던 중국 작가들이 하나둘 사라졌습니다. 예술을 예술이 아닌 잣대로 들여다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술에 기대하는 희망 역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정치에도 경제에도 답이 없다 생각할 때 결정적인 열쇠를 예술이 꺼내놨습니다. 오랜시간 미술사를 연구하며 특히 중국미술이 가진 그 힘을 지켜봤던 정하윤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지점 그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때마침 ‘한중 수교 30주년’입니다. 다들 움츠리고 있을 때 먼저 돌아보는 시간이고 먼저 찾아가는 길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깊고 푸른 ‘아트차이나’로 안내합니다. <편집자 주> [정하윤 미술평론가] 어디 보자. 두껍게 발라올린 물감, 힘차게 요동치는 붓질, 선명한 노란색과 파란색의 대비.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인데. 누구더라. 오호라!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구나. ‘별이 빛나는 밤’(1889)이란 작품이 아닌가. 그런데 가만 보자니 반 고흐 작품이라기엔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그림 속 판잣집 안에는 웬 선비가 앉아 책을 읽고 있고, 산세 또한 지나치게 험준하다. 왼쪽 상단에 올린 붉은 낙관은 또 무엇인가. 사실 이 그림은 재미 중국화가 장훙투(張宏圖·79)의 ‘석도-반 고흐’(Shitao-Van Gogh·1998)다. 그런데 중국 미술가가 죽은 지 100년도 훌쩍 넘은 네덜란드 화가를 자신의 작품에 소환한 이유는 뭘까. 장훙투의 파란만장한 인생스토리가 그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다. 장훙투는 1943년, 신장위구르와 몽골이 접한 중국 서북부의 간쑤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독실한 무슬림이었다. 아버지는 아랍어를 연구했고, 아랍어를 사용하는 학교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중국 전역을 누비기도 했다. 어머니 또한 중국이슬람교협회에서 일했다. 하지만 마오쩌둥(1893∼1976)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한 이후, 중국에서 종교를 갖는다는 것은 점점 더 위험한 일이 됐다. 토종이든 외래종이든 상관없이, 종교는 ‘봉건시대 착취의 잔재’로 여겼기 때문이다. 공자의 흉상이 부서지고, 유교 서적과 십자가가 불태워졌으며, 사찰은 파괴됐다. 또한 위구르의 무슬림은 무참히 학살됐다. 골수 무슬림이던 장훙투의 집안은 ‘우파’로 단단히 낙인찍혔고, 그의 부모는 직장을 잃었고 사회의 멸시를 받았다. ◇中 사회주의 영원불멸 리더를 美 자본주의 상품 캐릭터로당시 많은 중국의 청년들처럼 장훙투도 한때 마오쩌둥의 정책을 지지했다. 그러나 부모가 사회에서 매장당하고, 삼촌이 죽도록 맞아 시신이 강물에 버려지는 것을 목격한 뒤론 달라졌다. 친한 줄만 알았던 친구가 ‘좋지 않은 성분’으로 낙인찍힌 자신의 일기장을 몰래 검열해 보고하는 일도 겪었다. 서로 감시하고, 혐오하고, 매도하고, 심지어 죽이는 세상. 그것은 공포 그 자체였다. 장훙투는 스물아홉 살에 직장을 얻었다. 뛰어난 그림 실력 덕분인지 보석 수출입을 담당하는 회사의 디자이너로 일하도록 배정받았고, 거기서 9년을 일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던가. 그 9년 사이, 세상은 정말로 달라졌다.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사망했고, 덩샤오핑은 서서히 개혁과 개방을 추진했다. 그 변화의 바람을 타고 장훙투는 회사를 통해 미국 뉴욕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Art Students League)에서 미술을 공부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냈다. 1982년 뉴욕으로 건너간 그는 이후 다신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뉴욕에서의 생활은 곤궁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던 날들이었다. 그러던 1987년 어느 아침, 여느 날처럼 식료품점에서 산 오트밀 가루를 개어 아침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식탁 위에 놓아둔 오트밀 포장상자가 눈에 꽂히는 게 아닌가. 그 위에 인쇄된 퀘이커 오츠(Quaker Oats)의 마스코트 ‘미스터 퀘이커’(Mr. Quaker)를 바라보고 있자니, 아뿔싸. 누군가가 떠올랐다. 중국의 영원한 아버지, 마오쩌둥이었다. 장훙투는 재빨리 붓을 들었다. 미스터 퀘이커를 마오쩌둥으로 만드는 데는 붓질 몇 번이면 충분했다. 단 몇 분 만에 서양의 자본주의 상품경제의 캐릭터는 중국 사회주의의 영원불멸한 리더로 탈바꿈했다(‘마오 주석 만세’ 시리즈 중 ‘퀘이커 오츠 마오’ 1987). 장훙투의 ‘마오 주석 만세’ 시리즈 중 ‘퀘이커 오츠 마오’(1987). 오트밀 퀘이커 오츠 상자에 찍힌 마스코트 ‘미스터 퀘이커’를 마오쩌둥으로 둔갑시켰다. 서구에 거주하는 중국 미술가가 중국 당국을 비판할 수 있는 ‘자유’를 충족시킨 장훙투의 작품은 중국식 팝아트를 대표하는 동시에 정치인의 형상과 팝의 형식을 접목했다고 해 ‘정치적 팝’이라 불리기도 한다. 퀘이커 오츠 박스에 아크릴, 24.63×12.7㎝.퀘이커 오츠에서 마오쩌둥을 발견한 이후, 장훙투는 마오쩌둥의 도상을 꾸준히 재생산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마오쩌둥의 얼굴을 마음껏 놀려댄 ‘마오 주석’(12유닛·1989) 같은 작품을 만들 때 그는 두려웠다고 고백한다. 여전히 신성시되는 절대 권력자의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콧수염을 달고, 호랑이 분장을 시키는 것은 분명 손이 덜덜 떨리는 일이었으리라.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그 대상과 마주하는 것뿐임을 알고 있었다. 마오쩌둥의 형상을 다루면서 그는 자기 안에 남아 있던 과거의 상처를 매만졌다. 관람자를 그 과정에 초대한 작품(‘핑퐁 마오’ 1995)도 있다. 관람자는 전시실에 놓인 탁구대에서 직접 탁구를 칠 수 있다. 일반 탁구대 크기와 똑같지만, 네트를 사이에 둔 양쪽에는 마오쩌둥의 형상을 파낸 구멍이 있다. 관람자가 탁구에, 다른 말로 작품에 몰입할수록 마오쩌둥의 형상은 단지 피해야 할 장치로만 느껴지고, 아우라는 증발된다. 바로 마오쩌둥을 둘러싼 정치적 의미가 완전히 제거되는 순간이다. ‘핑퐁 마오’는 누군가에게는 재미있기만 한 현대미술일 거다. 그러나 장훙투처럼 마오쩌둥, 또는 그로 대변되는 그 시대에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치유의 과정이기도 하다. 도려낸 마오쩌둥의 형상을 피해 탁구를 치면서 자신 안에 남아 있는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완화할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장훙투의 ‘마오 주석’ 12유닛(1989). 마오쩌둥의 얼굴을 마음껏 놀려댄 작품이다.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콧수염을 달고, 호랑이 분장을 시키면서 그는 자기 안에 남아 있던 과거의 상처를 매만졌다. 서구에 거주하는 중국 미술가가 중국 당국을 비판할 수 있는 ‘자유’를 충족시킨 장훙투의 작품은 중국식 팝아트를 대표하는 동시에 정치인의 형상과 팝의 형식을 접목했다고 해 ‘정치적 팝’이라 불리기도 한다. 종이에 사진 콜라주·아크릴, 각 21.59×27.94㎝.20세기에 끔찍한 세계대전을 두 차례나 겪었기에 현대미술에서는 장훙투처럼 개인 또는 집단의 트라우마를 다루는 작업을 종종 볼 수 있다. 무겁고, 어둡고, 울퉁불퉁한, 할라치면 한없이 심각할 수 있는 것이 이런 종류의 작품이다. 그렇지만 장훙투는 전혀 다른 어법인 ‘유머’를 택했다. 그의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언제나 피식 웃게 만든다. 아프고 어두운 이야기를 유쾌하게 푸는 것. 이것이 장훙투 작품의 힘이다. ◇마오쩌둥 그리고, 파내고, 변형한 10년 뒤…‘동서양 결합’1990년대 후반, 장훙투는 새로운 작품 시리즈를 시작했다. ‘석도-반 고흐’와 같이 반 고흐나 클로드 모네, 폴 세잔이 그린 풍경화와 석도(중국 청나라 초기의 화승)나 동기창(중국 명나라 말기의 문인·화가·서예가)이 그린 산수화를 한 작품에서 만나게 한 그림이다. 전형적인 해석과 같이, 이 시리즈는 동서양의 결합이다. 서양의 미술을 본토의 미술과 결합하는 것은 19세기 말부터 동아시아 미술의 숙명 같은 것이었고, 미국으로 이주해 문화충돌을 겪은 장훙투가 이 주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주목하고 싶은 것은 새 작품이 탄생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장훙투가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한 것은 마오쩌둥을 처음으로 다룬 1987년부터 근 10년이 지난 후였다. 또 한 번 강산이 변하는 그 기간동안 장훙투는 유머를 잃지 않은 채 마오의 형상을 그리고, 파내고, 변형했다. 그후에야 비로소 자신을 옭아매던 과거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장훙투의 ‘핑퐁 마오’(1995). 관람자가 전시실에 놓인 탁구대에서 직접 탁구를 칠 수 있게 한 설치작품이다. 일반 탁구대의 네트를 사이에 둔 양쪽에는 마오쩌둥의 형상을 파낸 구멍이 있다. 1971년 마오쩌둥이 탁구를 통해 중국과 미국의 수교를 텄던 스포츠외교를 풍자한 것이기도 하다. 혼합재료 설치, 76.2×152.4×274.32㎝.아픈 과거란 것이 어찌 장훙투나 그 세대에게만 국한된 것이겠나. 꼭 정치적인 사건이 아니더라도 가정에서, 관계에서, 커리어에서, 심지어 내 자신으로부터 우리는 자주 마음을 다치지 않던가. 강도와 빈도가 다를 뿐 누구의 마음에나 생채기는 있다. 장훙투의 작품과 삶은 그러한 크고 작은 과거의 아픔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이 원망이나 비난에 있지 않음을, 나아가 그것을 직시하며 충분히 만져주는 시간이 필요함을 일러준다. 장훙투의 작품에 ‘인민의 태양’ 마오가 아닌, 밤하늘을 환히 밝히는 달이 떴다는 사실이 무척 반갑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1983년 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고 싶었단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작가는 일찌감치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관심은 한국현대미술이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보려면 아시아란 큰물이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 꼭대기에 있는 중국을 파고들어야겠다 했던 거다. 귀국한 이후 미술사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 이상일 용인시장과 흥미로운 미술의 세계로 떠나볼까
- 이상일 용인시장이 29일 수지구청 대회의실에서 수지노인대학 수강생을 대상으로 ‘스토리가 있는 그림의 세계’를 주제로 특강을 진행하고 있다.(사진=용인시)[용인=이데일리 김아라 기자]“현대 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는 9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죽기 직전까지 무려 1만6000여점의 작품을 남겼을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을 했는데요, 회화 뿐 아니라 조각, 무대미술, 판화, 도자기, 그래픽 아트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났습니다. 피카소의 비서였던 하이메 사바르테스는 피카소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에서도 영감을 얻었다는 말을 남겼는데 그만큼 창조성이 남달랐습니다.”이상일 용인특례시장이 29일 수지구 풍덕천동 수지구청 대회의실에서 (사)대한노인회 용인시 수지구지회 부설 수지노인대학 수강생 150명을 대상으로 ‘스토리가 있는 그림의 세계’를 주제로 특강을 했다.이 시장은 이날 약 2시간여 동안 어르신들을 흥미로운 미술의 세계로 이끌었다.이 시장은 “사람들이 어떤 미술작품이나 예술품을 보고 반해서 순간적으로 어지럼증을 느끼거나 실신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스탕달 신드롬(증후군)’이라고 한다”며 “소설 ‘적과 흑’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스탕달이 이탈리아에서 그런 경험을 했고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는 글도 남긴 데서 비롯된 말”이라며 강의를 시작했다.이 시장은 “이탈리아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의 영화 ‘스탕달 신드롬’을 소개하면서 영화에선 주인공이 네덜란드 화가 피터 브뤼겔의 ‘이카루스 추락이 있는 풍경’을 보고 스탕달 신드롬을 느낀다“며 그림을 보여줬다.그는 브뤼겔의 또 다른 그림인 ‘바벨탑’을 소개하고 ”16세기 작품 안에는 당시의 건축 양식이 정교하게 표현됐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지어진 오늘의 유럽 의회 건물은 이 그림을 바탕으로 건축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이 시장은 “네덜란드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소설가가 상상력을 더해 소설로 쓰고 이것이 영화화돼 알려지기 시작했다”며 “이처럼 그림, 문학, 건축, 음악 등의 예술 장르가 서로 영향을 주고 영감을 주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그는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가치로 따진다면 약 40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분석 기사를 본 적 있다”며 “현대 화가들은 모나리자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 해 특별한 가치를 창조했다”며 여러 작가의 작품을 소개했다.이 시장은 길거리에서 파는 엽서를 우스꽝스럽게 변형한 마르셀 뒤샹의 ‘L.H.O.O.Q(프랑스어로 그녀는 엉덩이가 뜨겁다는 뜻)’, 모나리자를 풍만하고 익살스럽고 경쾌한 색감으로 표현한 페르난도 보테로의 ‘12세기 모나리자’ 등의 그림과 화풍, 일화 등을 재미있게 풀어냈다.이 시장은 또 “파블로 피카소는 1940년대에 산책하다 주운 자전거를 집으로 가져와 분해한 후 안장과 핸들을 재배치하고 청동을 입힌 후 ‘황소 머리’라는 이름을 붙여 조각 작품으로 발표하는데 이 작품은 약 50년 뒤에 300억원이라는 거액에 팔리며 피카소의 기발한 상상력과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고 말했다.세계에서 두 번째로 비싸게 팔린(경매가 기준)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은 외젠 들르라쿠아의 ‘알제의 여인들’을 모방했음에도 입체주의라는 피카소만의 화풍이 더해졌기 때문에 전혀 새로운 그림으로 느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이 시장은 어르신들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는 ‘이중그림’의 창시자 16세기 이탈리아의 궁정 화가 아르침 볼도의 그림도 소개했다. 멀리서 보면 인물화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정물화 같기도 그림을 보면서 어르신은 연신 감탄을 자아냈다.이 시장은 지난 2015년 특수교육기관 용인강남학교 학생들이 개개인의 사진을 모아 이상일 시장의 얼굴로 만들어 준 ‘이중그림’을 보여주며 “아르침 볼도가 이중그림을 창안하지 않았다면 제가 이런 귀한 선물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며 애틋함을 드러내기도 했다.이어 이중그림으로 알려진 한국 작가 김동유의 작품과 한국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김환기 화백의 작품인 ‘우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달 항아리와 시’ 등의 작품도 소개했다.전경래 수지노인대학장은 “마치 미술대학 학생이 된 것처럼 특별한 경험이었다”며 “우리 노인들의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고, 의식에 변화를 주고, 지혜를 담아가는 귀한 시간을 선물해 줘 감사하다”고 말했다.이 시장은 “피렌체 메디치 가문이 큰 부를 이룬 후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지원하고 양성하면서 ‘융합’이 생기고 ‘창조’가 생기고 ‘르네상스’를 이룬 것”이라며 “소통을 통해 배움이 생기는 만큼 자주 이런 기회를 만들어 저 역시 많은 것을 얻어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