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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어린이도서관, 어린이날 맞이 온오프라인 행사 개최
  • 서울 어린이도서관, 어린이날 맞이 온오프라인 행사 개최
  • [이데일리 김형환 기자] 서울시교육청 산하 어린이도서관이 어린이날·도서관 개관 44주년을 맞이해 다음달 1일부터 7일까지 어린이주간 체험 행사를 운영한다고 24일 밝혔다.서울시교육청 산하 어린이도서관이 다음달 1일부터 7일까지 어린이주간 체험 행사를 운영한다. (사진=서울시교육청 제공)이번 행사는 온·오프라인 융합 운영으로 어린이와 가족이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놀이·공연·전시·체험 등 다양한 행사로 구성됐다. 어린이도서관은 △놀이마당 △문화마당 △배움마당 △체험마당 △정보마당의 42종 프로그램이 어린이도서관 관내와 앞마당에서 진행한다.놀이마당 ‘도서관 앞 놀이터’는 로드기차·회전그네·키즈라이더·초대형 바운스·에어 스포츠 버블 체험 등으로 구성돼 어린이·가족 모두 참여할 수 있다. 문화마당에서는 미술공연 ‘책 읽어주는 미술관’, 디지털 명화 전시 ‘그날의 빛 인상주의, 빈센트 반 고흐’, 동극 ‘우리는 친구’ 등이 진행된다.배움마당에서는 그림책 작가인 박규진 작가와 ‘왜 띄어 써야해’, ‘루치루치 작가와 함께 읽는 여섯 살 친구’ 등이 운영된다. 체험 마당에서는 ‘어린이 창의예술 놀이터’, ‘어린이도서관 스탬프 랠리’ 등 13종의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정보마당에서는 ‘가족의 모양’이라는 주제로 사서가 추천하는 가족다양성에 관한 그림책 북큐레이션이 운영된다.이번 행사는 모두 무료로 진행되며 서울시교육청 펴생학습포털 ‘에버러닝’을 통해 사전 접수 후 참여할 수 있다.이미정 어린이도서관장은 “이번 행사가 도서관에서 책과 놀이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며 “앞으로도 어린이도서관은 어린이와 함께 성장하며 미래를 열어가는 공간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2023.04.24 I 김형환 기자
어린이들, 대학로 모여라…예술위, 22일부터 '예술로 소풍'
  • 어린이들, 대학로 모여라…예술위, 22일부터 '예술로 소풍'
  •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와 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이하 아시테지 코리아)는 어린이해방선언 100주년을 기념해 오는 22일부터 6월 24일까지 어린이 문화예술 기획행사 ‘예술로(路) 소풍’을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 일대에서 진행한다.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로 소풍’. (사진=한국문화예술위원회)2023년은 어린이·청소년극 100년과 어린이해방선언 100년을 맞는 해다. 100년 전 소파 방정환은 민족의 희망인 어린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어린이의 목소리를 담은 이야기극의 문을 열었다. 이를 기념하고자 예술위는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공연·전시·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했다.‘예술로 공연’은 어린이를 위한 거리극 및 낭독공연이다. 오는 22일부터 6월 24일까지 격주 토요일마다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앞마당에서 펼쳐진다. 22일에는 배우 박혜수, 박정미의 ‘4월의 동화’, 극단 문 인형극 ‘제랄다와 거인’이 마로니에공원에서 어린이들을 만난다.‘예술로 후원’은 ‘예술로 공연’과 함께 아르코예술극장 앞마당에서 진행한다. 어린이를 위한 체험부스 ‘우리 아이 생애 첫 기부, 예술나무 심기’ ‘예술나무 키링 만들기’ 등을 마련한다. 어린이들이 문화예술분야 후원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으로 오전 11시부터 5시간 동안 진행할 예정이다.‘예술로 극장’은 22일부터 6월 24일까지 상시 운영하는 5미터 높이의 대형 인형 ‘걸리버 인형 전시’와 ‘책 읽는 극장’으로 아르코예술극장 로비에서 만날 수 있다. ‘예술로 공연’과 ‘예술로 후원’을 진행하는 격주 토요일에는 어린이를 위한 체험프로그램 ‘컬러링 엽서 꾸미기’ ‘엽서 전시’를 마련한다.‘예술로 미술관’은 22일부터 6월 24일까지 매주 토요일마다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전시해설 프로그램 ‘어린이 대상 도슨트_주제기획전 기억·공간 전시투어’를 진행할 예정이다. 격주 토요일에는 설치미술작가들로 구성된 예술기업 스플과 함께 버려지는 커피가루를 재활용해 어린이가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아르코아틀리에_업사이클링 드로잉 워크숍’을 개최한다.이 개최된다. 미술관 프로그램은 사전신청제로 운영한다.5월 이후 ‘예술로 공연’ 프로그램을 비롯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예술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23.04.21 I 장병호 기자
현실과 이상의 괴리, 가위질할 수 있다면<25>
  • 현실과 이상의 괴리, 가위질할 수 있다면[정하윤의 아트차이나]<25>
  • 마오쉬후이의 ‘붉은 가위’(2001). 지금껏 30년 남짓 가위를 테마로 작업해온 마오쉬후이의 ‘가위 시리즈’ 중 한 점이다. 별다른 치장이나 군더더기 없이 가위 하나로만 화면을 꽉 채우고 있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존재 자체로 충분히 위협적이다. 때론 세상의 권위에 저항하는 무기로, 때론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는 도구로 쓰인 마오쉬후이의 가위는, 이후 일상의 다른 사물을 눌러버리는 권력의 화신이 돼 점점 화면을 지배해나갔다. 캔버스에 유채, 180×130㎝, ⓒ마오쉬후이·탕컨템포러리아트 제공.중국 그림을 보지 못한 지 한참입니다. 한국 미술시장이 자못 뜨거웠던 지난해와 올해, 세계의 작가와 작품이 우리를 기웃거리던 때도 중국은 없었습니다. 중국 ‘큰손’ 컬렉터의 규모와 수가 미국을 제쳤다는 얘기도 이미 2~3년 전입니다. ‘으레 미술은, 그림은 그런 것’이라며 반쯤 우려하고 반쯤 체념했던 한국화단을 뒤흔든, 기발한 감수성으로 뒤통수를 내리쳤던 중국 작가들이 하나둘 사라졌습니다. 예술을 예술이 아닌 잣대로 들여다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술에 기대하는 희망 역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정치에도 경제에도 답이 없다 생각할 때 결정적인 열쇠를 예술이 꺼내놨습니다. 오랜시간 미술사를 연구하며 특히 중국미술이 가진 그 힘을 지켜봤던 정하윤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지점 그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때마침 ‘한중 수교 30주년’입니다. 다들 움츠리고 있을 때 먼저 돌아보는 시간이고 먼저 찾아가는 길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깊고 푸른 ‘아트차이나’로 안내합니다. <편집자 주> [정하윤 미술평론가] 시뻘건 몸체. 녹슨 칼날. 뾰족하고 거대한 몸집의 가위가 화면을 지배한다. 어째 섬뜩한 느낌이 드는 이 그림(‘붉은 가위’ 2001)은 중국 화가 마오쉬후이(毛旭輝·67)가 그렸다. 30년 가까이 가위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이지만 처음부터 이런 그림을 그렸던 것은 아니다. 딱히 서늘한 그림을 그릴 이유도 없었다. 성장 과정에서도 별 특이사항이 없었고, 세상이 그에게만 특별히 가혹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마오쉬후이는 온화한 날씨 덕에 ‘중국의 하와이’라고 불리는 쿤밍 지역에서 자랐다. 그래서인지 마오쉬후이의 초기작은 인상주의 뺨칠 만큼 아름다운 색채로 그린 따뜻한 풍경화였다. 그런 그가 돌연 위협적인 가위를 그리게 된 까닭은 뭘까. 화가의 생애를 짚어보는 것이 그 이유를 찾는 데 도움이 될 거다. 마오쉬후이는 그림 잘 그리는 사람으로 일찍부터 이름을 알렸지만 정작 미술에 눈을 뜬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그는 마오쩌둥 시대 여느 청년들처럼 10대 후반부터 노동자로 일했다. 주요 업무는 백화점 창고를 지키는 것. 여덟 시간의 노동, 두 시간의 정치교육, 이어지는 저녁 회의가 마오쉬후이의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한 친구가 연필 소묘에 관한 책을 그에게 선물했다. 평소 마오쉬후이가 미술에 대한 관심을 내보여서인지 친구가 먼저 그의 소질을 알아봤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작은 책이 10대 후반의 이 청년을 제대로 자극했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책을 받은 이후 마오쉬후이는 틈나는 대로 데생을 연습했다. 독학이었음에도 실력은 쑥쑥 자랐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 마오쉬후이는 쿤밍에 아마추어 화가들의 야외스케치 모임이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됐고, 주중 노동시간을 늘려 주말시간을 확보한 뒤 그 무리에 합류했다. 그리고 그들 덕분에 아름다운 색채로 그린 낭만적인 풍경화에 눈을 떴다. ‘쿤밍 풍경’(1976)은 그 무렵 마오쉬후이의 화풍을 잘 보여준다. 화창한 날씨, 밝은 색채, 자신감 있는 붓질. 아주 숙련된 화가의 작품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맑고 밝은 매력이 돋보이는 그림임은 분명하다. 특히 당시 중국에 유통하던 그림이 모조리 정치 선전화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마오쉬후이의 순수한 풍경화는 이례적이고 그 자체로 도전적이기까지 하다. 마오쉬후이의 ‘쿤밍 풍경’(1976). 마오쉬후이의 초기작. 고향 쿤밍에서 아마추어 화가들과 야외스케치를 다니던 시절 눈을 뜬 ‘낭만적인 풍경’을 화면에 그대로 옮겨냈다. 두툼하지만 밝은 색채로 자신있게 그어낸 순수한 붓질이 도드라진 작품이다. 종이에 수채, 42×36㎝, ⓒ마오쉬후이·탕컨템포러리아트 제공.◇연이은 좌절…절망·고통, 거친 붓질과 사발술로 풀어재능이 있던 만큼 화가가 되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을 터. 마오쉬후이는 길고 긴 문화대혁명이 끝나자마자 윈난사범대에 진학해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그림을 배울 수 있는 것 자체는 물론 좋은 일이지만 배우는 내용은 지루했다. 기술적인 부분은 이미 마스터한 뒤였으니까. 마오쉬후이의 배움터는 학교 밖이었다. 뜻을 같이하는 미대생들과 함께 스케치여행도 떠나고 미술이론도 공부했다. 각종 미술잡지를 섭렵하고 동서양 미술사스터디를 하기도 했다. 열심히 한 만큼 일이 풀리면 참 좋을 텐데,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잘 그렸고, 모두가 따놓은 당상이라고 얘기했던 미술대 강사 보직을 마오쉬후이는 결국 얻지 못했다. ‘실력’만으로 얻을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던 거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다시 백화점 노동자로 복귀했다. 역시나 예술과는 별 상관이 없는 곳이었다. 그는 또다시 매일 여덟 시간씩 쇼윈도를 꾸미고, 영혼 없이 간판을 꾸몄다. 인생을 허비하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미술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주간에는 생업을 이어가면서 야간과 주말에는 그림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베이징에 가서 기어이 보고만 전시 하나가 결국 마오쉬후이를 뒤집어 놓았다. 막스 베크만, 안젤름 키퍼, 게오르그 바젤리츠 등 독일 표현주의 작가들이 자신의 내면세계를 강렬하게 표현한 그림이었다. 마오쉬후이는 전율을 느꼈다. 이후 마오쉬후이는 더욱 절박하게 그림에 매달렸다. 화면은 거칠어졌다. 색도 어두워지고, 붓질도 난폭해졌다. 술도 더 많이 마셔댔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 절망과 고통을 거친 붓질과 사발 술로 풀어냈다. 그렇게 영혼을 다바쳐 그린 마오쉬후이의 그림은 또 한번 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엄청난 화가가 있다!’ 마오쉬후이는 그 기세를 몰아 야근수당을 모으고 빚까지 더해 전시를 열었고, 다행히 전시는 호평을 받으며 여러 지역을 순회하기까지 했다. 커리어는 이제야 좀 상승세를 타는 듯했다. 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게 세상의 이치. 마오쉬후이의 개인 삶이 파탄 난 것이다. 그때 그는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대학 동창이던 여자친구와 일찍이 결혼했던 그에게는 딸도 하나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1987년, 세 살짜리 딸을 데리고 마오쉬후이의 곁을 떠났다. 신혼여행용으로 받았던 휴가를 친구들과 스케치여행으로 다 써버리고, 월급의 절반을 미술 관련 책을 사는 데 사용하고, 미친 듯 그림을 그리며 술에 절어 있는 남편을 버틸 수 없었던 거다. ‘가장 시리즈’는 이 무렵에 탄생한 작품이다. 검정과 흰색, 회색조로만 구성된 그림은 마치 날카로운 선들이 난도질을 하고 지나간 듯 보인다. 그 폭력적인 화면 안에는 검은색 사람이 흰색 등받이 의자에 기댄 채 앉아 있다. 모든 걸 놓은 듯 힘이 쭉 빠져 있는 이 사람이 작품명에서 말하는 ‘가장’이다. 퇴근 후 텅 빈 집으로 돌아와 몇 시간씩 흑백텔레비전 앞에 멍하니 앉아 있는 본인의 모습이기도 하다(‘등받이의자의 가장’ 1989). 마오쉬후이의 ‘등받이의자의 가장’(1989), 미술로 꿈을 품었으나 미술로 좌절한 시절에 그린 ‘가장 시리즈’ 중 한 점이다. 내면세계를 강렬하게 표현한 독일 표현주의 작가들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듯 거친 화면에 어둡고 난폭하게 그어댄 붓질이 특징. 색을 뺀 흑백톤으로 붓 대신 칼을 쓴 것처럼 날카로운 선이 난무한 그림에 자신의 처지를 투영한 ‘가장’을 박아넣었다. 이후 가장은 어느 순간 가위로 바뀌어 등장했다. 캔버스에 유채, 90×80㎝, ⓒ마오쉬후이·탕컨템포러리아트 제공.앞서 본 ‘붉은 가위’는 ‘가장 시리즈’로부터 탄생한 것이다. 어느 순간 가위는 남자 대신 의자를 차지하더니 점차 의자로부터 분리돼 침실이나 거실 등의 공간에 침입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가위가 가장을 둘러싼 세상에 위협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급작스럽게 등장한 가위는 그 무렵 마오쉬후이가 느꼈던 위기감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노년에 그린 가위들, 차분하고 얌전해져 그때는 바야흐로 중국 현대미술의 전성기. 국제 미술계에 중국 현대미술이란 어마어마한 돌풍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외국의 자본은 중국으로 들어와 여러 작가를 선택해 국제무대에 데뷔시켰고, 해외 이곳저곳에서 동시대 중국 그림 가격이 폭등했다. 해외 큐레이터나 딜러로부터 선택을 받은 몇몇 작가는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았다. 대개 중국의 역사를 전면에 드러내며 이국성을 뽐내는 작품이었다. 절친이던 장샤오강 같은 마오쉬후이의 또래들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반면, 중국역사나 마오시대의 도상을 전면에 드러내기보다는 인간 존재의 본질이나 내면의 괴로움을 다루는 마오쉬후이의 작품은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다. 마오쉬후이는 이런 상업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혼란을 느꼈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이곳저곳 제멋대로 춤추며 다니는 그림 속 가위는 이런 상황 속에서 자신이 느끼는 위기감을 나타내는 동시에 온갖 걱정과 난관을 끊어내고 훨훨 마음대로 날고 싶은 자신을 대변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60대 중반을 넘긴 마오쉬후이의 화면에는 여전히 가위가 등장한다. 그러나 분위기는 예전과 다르다. 서슬이 퍼렇긴 하지만 더 이상 난폭한 가위질을 해대진 않는다. 칼질 같던 붓질도 사라졌다. 가위는 어떤 공간에도 속하지 않은 채 차분한 화면에 얌전히 놓여 있다. 어떻게 보면 실재가 아닌 것도 같다. 기억 속 존재인 것처럼 아련하다. 과거 마오쉬후이를 괴롭히던 여러 문제가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는다는 의미일까. 노년의 화가는 이제 젊은 시절의 번민으로부터 해방된 걸까. 모든 것을 난도질하던 가위도, 그 가위질을 닮은 붓질도 사라진 화면에 어쩐지 안도하게 된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1983년 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고 싶었단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작가는 일찌감치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관심은 한국현대미술이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보려면 아시아란 큰물이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 꼭대기에 있는 중국을 파고들어야겠다 했던 거다. 귀국한 이후 미술사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2023.03.31 I 오현주 기자
"스마트 교육으로 전시 배워요"…전남도립미술관 '어린이 아틀리에' 운영
  • "스마트 교육으로 전시 배워요"…전남도립미술관 '어린이 아틀리에' 운영
  •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전남도립미술관은 3월 말부터 어린이 아틀리에에서 어린이 특화 교육을 본격 운영한다.‘어린이 아틀리에’ 교육 모습(사진=전남도립미술관).‘어린이 책 속 예술 나라’라는 콘셉트로 해외 예술가들의 책을 함께 감상하며 기본 조형의 원리를 이해하는 예술 활동이다. 순수 조형 요소를 이해하고 색과 모양을 재조합하는 과정을 통해 나만의 화면을 구성해본다. 어린이들의 입체적·공감각적 사고를 발달시키는 주말 교육 프로그램으로 참여 대상은 6~7세와 8~10세다. 두 그룹으로 나눠 매주 일요일, 1일 2회 정기 운영한다. 2023년 1차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은 사전 예약을 통해 총 180명의 참여자를 모집한다.지하 1층에 위치한 어린이 아틀리에에서는 ‘전시 연계 교육’이 이뤄진다. 진행 중인 미술관 기획 전시의 작품을 새롭게 이해하고 재창작하는 과정을 위해 △태블릿 PC를 활용한 디지털 교육 △전시 연계 활동지 교육 등 두 가지로 구성했다. 디지털 교육은 태블릿 PC로 작품 미션을 수행하면 실시간으로 화면에 반영되는 실감형 체험교육이다. 전시 연계 활동지는 전시에 대한 주제와 작품 감상법 등의 학습을 위해 비치된 안내 자료에 따라 스스로 그림을 완성하는 교육이다.이지호 전남도립미술관장은 “참신한 예술 경험을 통해 어린이들의 언어적·정서적 능력 함양에 도움을 주고자 했다”며 “관람객의 다양한 수요에 발맞춰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스마트 교육, 현대 미술 전시와 연계한 콘텐츠 연구 개발 등 미술관 교육 기능을 지속적으로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2023.03.13 I 이윤정 기자
선망과 경시 사이…모든 걸 불태운 '모던 걸'<19>
  • 선망과 경시 사이…모든 걸 불태운 '모던 걸'[정하윤의 아트차이나]<19>
  • 추디의 ‘정물화’(1931∼1933). 술잔·주전자·화병·책 등 서양의 사물로만 채운 정물화. 하나하나의 형체·색감은 도드라지지만 전체적으로는 차분하다. 1920년대 상하이 기반의 모더니스트 회화그룹 결란사의 멤버로 활약한 추디는 인상주의·야수파·입체파가 혼합된 듯한 공동의 지향을 따랐다. 사진처럼 그리는 대신 색·형태를 마음대로 변형해 ‘다른’ 화면을 만들어냈다. 캔버스에 유채, 44×53㎝, 개인 소장.중국 그림을 보지 못한 지 한참입니다. 한국 미술시장이 자못 뜨거웠던 지난해와 올해, 세계의 작가와 작품이 우리를 기웃거리던 때도 중국은 없었습니다. 중국 ‘큰손’ 컬렉터의 규모와 수가 미국을 제쳤다는 얘기도 이미 2~3년 전입니다. ‘으레 미술은, 그림은 그런 것’이라며 반쯤 우려하고 반쯤 체념했던 한국화단을 뒤흔든, 기발한 감수성으로 뒤통수를 내리쳤던 중국 작가들이 하나둘 사라졌습니다. 예술을 예술이 아닌 잣대로 들여다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술에 기대하는 희망 역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정치에도 경제에도 답이 없다 생각할 때 결정적인 열쇠를 예술이 꺼내놨습니다. 오랜시간 미술사를 연구하며 특히 중국미술이 가진 그 힘을 지켜봤던 정하윤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지점 그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때마침 ‘한중 수교 30주년’입니다. 다들 움츠리고 있을 때 먼저 돌아보는 시간이고 먼저 찾아가는 길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깊고 푸른 ‘아트차이나’로 안내합니다. <편집자 주> [정하윤 미술평론가] 20세기 초, 한·중·일 3국 모두에서는 영국에서 불어온 ‘신여성’ 신드롬이 거세게 일었다. 이전 시대와는 달리 고등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가 일을 하며, 삶에 주도권을 갖게 된 ‘새로운 여자들’이 등장했다. 사회 여타 분야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미술계에서도 활약했는데, 한국에 나혜석, 천경자, 박래현이 있었다면, 중국에는 판위량, 추디, 관쯔란이 있었다. 먼저 판위량(潘玉良·1899∼1977). 한 살에 아버지를, 일곱 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삼촌이 판위량을 거뒀으나 도박 빚이 커지자 기생집에 그녀를 팔아버렸다. 열일곱 살이던 1916년에서야 판위량을 딱히 여긴 한 남성의 첩이 되면서 사창가를 탈출할 수 있었다. 그림에 관심이 있는 판위량을 위해 남편은 가정교사를 붙여줬다. 판위량의 실력은 일취월장했고, 교사의 권유로 상하이미술전문대학에 시험을 치러 당당히 합격했다. 판위량은 그림에 흠뻑 빠졌다. 누드화 연습을 위해 목욕탕에서 여인들의 나체를 드로잉 하다 쫓겨나기도 했을 만큼. ◇유럽서 조소까지 섭렵하며 승승장구한 판위량내친김에 유학길에도 올랐다. 1921년에는 프랑스의 리옹미술학교, 2년 후에는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입학 허가를 따냈다. 1925년에는 파리미술학교가 수여하는 ‘로마 장학금’을 받았고, 덕분에 이탈리아의 로마국립아카데미에서 국비로 수학할 수 있었다. 로마에서도 승승장구했다. 회화가 전공이었음에도 조소과 주임교수가 그녀의 실력을 눈여겨보곤 2년간 학비까지 면제해주며 조소를 가르쳤다. 1926년에는 ‘로마국제예술전람회’에서 금상을 받기도 했다. 1928년 9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판위량은 모교인 상하이미술전문대학 서양화과 교수로 임용됐고, 1929년에는 ‘중국 최초 여성화가전’을 열며 작품 80여점을 전시했다. 교수가 된다거나 개인전을 여는 것은 당대 여성으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후에도 상하이와 난징에서 다섯 차례의 개인전을 더 열었고, ‘전국미전’에도 참가하는 등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쳤다. 기녀에서 칭송받는 화가까지. 가히 인생역전이라 할 만한 성취였다. 하지만 판위량의 출신배경은 오래도록 그녀를 괴롭혔던 것으로 보인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은 물론이고, 면전에서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들어서며 힘을 잃은 남편마저 그녀의 안위를 지켜줄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판위량은 결국 프랑스행을 택했고, 타국에서 남은 화력을 모두 불태웠다. 판위량의 ‘해골이 있는 정물화’(1929·사진 속 아래)와 판위량. 타고난 재능에 후천적 교육까지 더해 중국 당대 최고의 기량을 발휘한 여성화가로 꼽힌다. 상하이미술전문대학에 합격한 이후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유학도 했다. 중국에 돌아와 모교서 교수를 지내며 ‘중국 최초 여성화가전’을 시작으로 개인전만 대여섯 차례 열었다. 출중한 실력·활약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 기생집에 팔려갔던 출신배경을 극복하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하이화보’ no.505(1929. 9. 9)에 실린 ‘근대 중국의 미술’에서 발췌.다음은 추디(丘堤·1906∼1958). 판위량과 달리 추디는 어릴 때부터 탄탄한 미술교육을 받은 엘리트 여성이었다. 열네 살에 이미 유화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고, 결혼한 후에도 상하이와 일본 도쿄에서 그림을 배웠다. 여성이 자기 일을 갖는다는 것이 되레 이상하던 시절, 결혼한 뒤에는 더욱이 집안일에 집중하는 것이 당연하던 시기에 기혼자였던 추디가 걸은 이 같은 행보는 확실히 평범하지 않다(이후 추디는 남편과 이혼하고, 상하이의 미술가와 재혼한다). ◇추디, 사진처럼 그리는 대신 색·형태 자유롭게 변형1929년 상하이로 돌아온 추디는 상하이를 주 무대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특히 상하이지역의 모더니스트 회화그룹인 ‘결란사’의 멤버로 큰 주목을 받았다. 결란사는 서양화 중에서도 보다 자유로운 화풍을 추구하는 젊은 미술가들의 모임이었다. 프랑스의 인상주의나 야수파, 또 입체파의 혼합 버전이라고나 할까. 파리의 모더니스트들이 케케묵은 회화 전통에 반기를 들었던 것처럼, 20세기 초 상하이의 결란사 회원들도 보수적인 서양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미술을 추구했다. 사진처럼 똑같이 그리는 그림 대신, 색과 형태를 마음대로 변형해 색다른 화면을 만들어내는 것이 추디를 포함한 결란사 멤버들의 목표였다. 속단하긴 어렵지만 추디의 그림은 다른 ‘결란사’ 멤버들에 비해선 다소 얌전한 편인 듯하다. 형태나 색채를 과격하게 변형하기보다는 적당한 선에서 변주 정도에 멈춘 느낌이 든다. 정물화의 시점을 조금 새롭게 한다거나 풍경화의 붓질을 살짝 강하게 만든다든가 하는 정도다. 그래도 추디의 작품은 동료 화가들에게 크게 인정을 받아 1933년의 그룹전 때 멤버들이 주는 상을 받기도 했다. 추디의 ‘원림’(1940s). 1920년대 상하이 기반의 모더니스트 회화그룹 결란사의 멤버로 활약한 추디는 인상주의·야수파·입체파가 혼합된 듯한 공동의 지향을 따랐다. 사진처럼 그리는 대신 색·형태를 마음대로 변형해 ‘다른’ 화면을 만들어냈다. 캔버스에 유채, 44×53㎝, 개인 소장.추디의 자질을 의심한다면 ‘결란사의 홍일점이었기에 격려의 의미로 상을 준 것’이라거나, ‘재혼한 남편이 결란사의 창립멤버라서 특혜를 받은 것’이라고 비아냥댈 수 있을 거다. 상을 받은 작품인 ‘꽃’의 원본이 소실됐기에 의심의 여지를 완전히 거두기는 어려울 수도 있을 테다. 그렇지만 글쎄다. 설령 그 모두가 어느 정도 추디의 명성에 작용했다 하더라도, 그 무렵 이렇게 두각을 나타내며 작업하는 여성 미술가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 주목할 만한 사실이 아닐까. 그 성취를 좀더 너그럽게 인정해줘도 되지 않을까. 생전이나 사후에나 여러 소리를 들었을 것 같은 추디지만,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작업을 이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52세라는 이른 나이에 사망했음에도 아주 많은 작품을 남기면서 말이다. ◇명랑한 색채와 자유분방한 필치 구사한 관쯔란끝으로 관쯔란(關紫蘭·1903∼1986). 관쯔란 또한 엘리트 미술교육을 받은, 당시로선 손에 꼽히는 여성이었다. 텍스타일 무역업을 하는 부모를 둔 관쯔란은 어린 시절부터 예술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당대 중국 현대미술의 중심인 상하이와 동아시아 현대미술의 메카였던 일본 도쿄에서 그림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그녀는 일본에서 유행하던 화풍 중 하나인 앙리 마티스의 야수파에 매료됐다. 명랑한 색채와 자유분방한 필치가 관쯔란의 성향과 맞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일본에서 관쯔란은 동료 화가들과 교류하며 함께 전시를 하는 등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일본 미디어는 일본에서 성공적으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는 독특한 중국인 여성화가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1930년 상하이로 귀국한 이후에도 관쯔란은 ‘모던 걸’을 대표하는 인물로 여겨지며 신문의 헤드라인이나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대중매체에 자주 노출됐지만 가십거리로만 소비된 것은 아니었다. 예술적 역량도 적절히 평가됐다. 중국에 야수파를 소개한 화가 중 하나로 인정받았으며, 중국의 전통적인 주제에 서양식 화풍을 접목한 선구적인 화가로 평가받았다. 대중잡지에는 얼굴뿐만 아니라 작품도 빈번히 등장했고 성황리에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관쯔란의 ‘미스L의 초상’(1929). 치마오를 입은 여성이 무릎에 강아지를 올린 작품은 관쯔란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관쯔란은 강렬한 색채와 넓은 붓질로 밝고 아름다운 화면을 만드는 게 목표였다. 앙리 마티스의 야수파에 매료된 이후 중국 전통주제에 서양화풍을 접목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캔버스에 유채, 90×75㎝, 베이징 중국미술관 소장.관쯔란은 굵은 선을 과감하게 사용하고, 강한 보색 대비로 캔버스를 채우는 유화작품을 주로 발표했다. 마티스처럼 화면 전반에 장식적인 패턴을 삽입하기도 했다. 강렬한 필치와 밝은 색채의 작품은 관쯔란 특유의 화풍을 형성했고, 남은 작품을 둘러보면 인물화, 정물화, 풍경화에 모두 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대 중국의 많은 화가처럼, 관쯔란은 자신의 야수파적 화풍을 지속할 수 없었다. 1949년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만들고 나서는 유럽식 표현방식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쯔란은 불온한 스타일로 낙인찍힌 프랑스산 야수파 스타일을 버려야만 했다. 결국 그녀는 소련의 사회주의 사실주의 방식으로 전향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어떤 이유였는지 관쯔란은 결국 그림을 중단했고, 오랜시간 집에 칩거하다가 1986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전한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았던 중국 여성화가 3인. 놀라운 성취를 이뤘지만 그간 중국의 근현대미술사는 누락하거나 축소한 채 기술했다. 오랫동안 역사에 묻혀 있었기에 알아내야 할 사실도, 연구해야 할 작품도 많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이제 겨우 시작이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1983년 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고 싶었단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작가는 일찌감치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관심은 한국현대미술이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보려면 아시아란 큰물이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 꼭대기에 있는 중국을 파고들어야겠다 했던 거다. 귀국한 이후 미술사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2023.02.17 I 오현주 기자
누구도 읽을 수 없다, 4000개 한자 모조리 '가짜'<18>
  • 누구도 읽을 수 없다, 4000개 한자 모조리 '가짜'[정하윤의 아트차이나]<18>
  • 쉬빙의 ‘천서’(Book from the Sky·1987∼1991) 중 2020년 홍콩미술관이 재개관전으로 연 ‘평범부터 비범까지: 미술관 이야기’에 나온 설치 전경. ‘천서’는 쉬빙을 세계적인 스타작가 반열에 올려놨다. 4년여간 ‘개발’한 가짜 한자 4000여자를 직접 목각으로 판 뒤 목판인쇄로 찍어내, 옛날식 두루마리, 실로 제본한 전통 서책, 벽보 형식의 신문이란 거대한 설치작품으로 구성했다. 한자를 닮았지만 진짜 한자는 단 한 글자도 없는 ‘누구도 읽을 수 없는 문자’로, 1998년 10월 베이징 중국미술관에서 처음 전시된 이후 중국 안팎의 문화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혼합재료·가변크기, ⓒ쉬빙.중국 그림을 보지 못한 지 한참입니다. 한국 미술시장이 자못 뜨거웠던 지난해와 올해, 세계의 작가와 작품이 우리를 기웃거리던 때도 중국은 없었습니다. 중국 ‘큰손’ 컬렉터의 규모와 수가 미국을 제쳤다는 얘기도 이미 2~3년 전입니다. ‘으레 미술은, 그림은 그런 것’이라며 반쯤 우려하고 반쯤 체념했던 한국화단을 뒤흔든, 기발한 감수성으로 뒤통수를 내리쳤던 중국 작가들이 하나둘 사라졌습니다. 예술을 예술이 아닌 잣대로 들여다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술에 기대하는 희망 역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정치에도 경제에도 답이 없다 생각할 때 결정적인 열쇠를 예술이 꺼내놨습니다. 오랜시간 미술사를 연구하며 특히 중국미술이 가진 그 힘을 지켜봤던 정하윤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지점 그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때마침 ‘한중 수교 30주년’입니다. 다들 움츠리고 있을 때 먼저 돌아보는 시간이고 먼저 찾아가는 길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깊고 푸른 ‘아트차이나’로 안내합니다. <편집자 주> [정하윤 미술평론가] 책이 한 권 펼쳐져 있다. 근데 어째 글자가 하나도 없다. 오직 픽토그램과 이모티콘뿐이다. 과연 읽을 수 있을까. 한번 시도해보자. 알람이 울리고, 해가 뜨고, 알람을 듣고, 눈을 뜨고, 불을 켠다. 어라 읽힌다! 누군가의 아침 일과로구나! 쭉 읽어보니 아침으로는 계란과 식빵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엄청 막힌 길을 뚫고 출근했나 보다. 신기하다. 아무 글자도 없지만, 스토리는 누구라도 읽을 수 있다. 문맹이라도 말이다. 이 신통방통한 책은 쉬빙(徐氷·68)의 작품 ‘지서’(2003∼)다. 쉬빙은 중국 태생의 스타, 아니 슈퍼스타 작가다. 국제화 시대니 만큼 슈퍼스타는 비행기를 타고 다닐 일이 많을 터. 쉬빙은 수많은 여행길에서 ‘지서’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좌석에 앉아 탑승 안내문을 읽던 어느 날, 종이를 가득 채운 픽토그램이 새삼스럽게 다가온 거다. 이것이야말로 너무나 쉽게, 누구하고나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문자’라는 사실에 무릎을 쳤다. 그 길로 작품을 만들었다. 땅으로부터 올라온 책 ‘지서’다. 쉬빙의 ‘지서’(Book from the Ground·2003∼) 중 하나. ‘지서’는 ‘그림과 문자의 경계 허물기’로 이해할 수 있다. 소통력을 가진 픽토그램 형식을 가져다가 일상을 다루는 문자기호로 고안해, 문화·언어에 상관없이 누구가 해독할 수 있게 했다. 쉬빙은 이를 위해 껌종이, 공항 표지판, 화장실 안내판, 온라인 이모티콘 등 2500여개의 보편적 기호를 수집했다. 대부분 컴퓨터로 제작되며 디지털 특성을 띤다. 혼합재료, 가변크기, ⓒ쉬빙·더페이지갤러리 제공.이전부터도 쉬빙은 문자, 또 문자로 이뤄진 책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이름을 중국 안팎에 널리 알린 첫 작품인 ‘천서’(1987∼1991) 또한 문자와 관련된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벼락이 친 자리에 새겨진 알 수 없는 문양을 ‘천서’라고 부른다. 하늘에서 내려온 글이란 뜻이다. 쉬빙은 그 의미를 빌려 작품에 ‘천서’라는 제목을 달았다. ‘천서’는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책이기 때문이다. ‘지서’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책인 것과는 완전히 반대다.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책,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책‘천서’를 이루는 글자는 중국어처럼 생겼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도 읽을 수가 없다. 쉬빙이 글자 하나하나를 전부 가짜로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원래 있는 한자의 획을 빼거나 더하고, 위와 아래, 오른쪽과 왼쪽을 대칭해 세상에 없는 글자를 고안한 것이다. 한글로도 자음과 모음을 이상하게 조합해 없는 글자를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쉬빙도 한자를 가지고 장난을 좀 친 거다. 그런데 그렇게 만든 글자가 한두 개가 아니다. 무려 4000자가 넘는다. 그가 만든 4000여개의 가짜 한자에는 단 한 글자도 진짜가 없다. 한자는 그 양이 어마어마해 중국어 원어민조차 모든 한자를 외우지 못한다. 너무 다양해서 획을 하나 더 긋거나 빼내더라도 어딘가 존재할 법한 한자가 되기 쉽다. 그런데 쉬빙이 고안한 가짜 한자는 모두가 진정한 가짜인 거다. 놀라운 치밀함, 완벽한 완성도다. 쉬빙의 ‘천서’(Book from the Sky·1987∼1991) 중 2020년 홍콩미술관이 재개관전으로 연 ‘평범부터 비범까지: 미술관 이야기’에 나온 설치 전경. ‘천서’는 쉬빙을 세계적인 스타작가 반열에 올려놨다. 4년여간 ‘개발’한 가짜 한자 4000여자를 직접 목각으로 판 뒤 목판인쇄로 찍어내, 옛날식 두루마리, 실로 제본한 전통 서책, 벽보 형식의 신문이란 거대한 설치작품으로 구성했다. 한자를 닮았지만 진짜 한자는 단 한 글자도 없는 ‘누구도 읽을 수 없는 문자’로, 1998년 10월 베이징 중국미술관에서 처음 전시된 이후 중국 안팎의 문화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혼합재료·가변크기, ⓒ쉬빙.거기에 더해 쉬빙은 그 모든 글자를 직접 목각으로 팠다. 마치 팔만대장경을 만들 듯 2년여를 홀로 골방에 틀어박혀 글자를 만들고, 목판에 새겼다. 판화를 전공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조수도 없이 그 모든 글자를 만들고 새겼다는 것은 정말이지 보통 일이 아니었으리라. 정성을 다해 만든 글자를 보여주는 방식도 중요할 터. 지혜로운 작가 쉬빙은 그 글자들을 종이에 찍어 ‘책’의 형태로 발표하는 방법을 택했다. 다양한 책의 형태를 두루 만들었다. 천장에는 옛 중국에서 사용하던 두루마리, 바닥에는 선비들이 읽던 책, 벽에는 마오쩌둥 시기에 성행하던 대자보까지. 중국에서 대대로 사용하던 ‘책’들을 섞었다. 그런데 그 모든 책에 정작 내용은 없다니! 어이가 없다. 아니 대체 누가 이렇게 정성 들여 가짜를 만든단 말인가. 쉬빙은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쉬빙은 1955년 베이징에서 나고 자랐다. 마오쩌둥이 집권한 기간이 1949년부터 1976년까지니, 스무 살까지 마오의 강한 영향력 아래 지낸 거다. 쉬빙의 아버지는 베이징대 역사학과 교수, 어머니는 도서관 사서였다. 모두 글과 책과 연관된 직업이었다. 옛 중국에서 ‘문인’은 존경받는 대상이었지만, 마오쩌둥의 중국에서는 전혀 아니었다. 글쟁이, 그러니까 마오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식인은 노동자·군인으로부터 참지식을 다시 배워야 하는 부르주아 집단’일 뿐이었다. 쉬빙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당연히 직장을 잃었고, 재교육을 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쉬빙의 ‘천서’(Book from the Sky·1987∼1991) 중 2020년 홍콩미술관이 재개관전으로 연 ‘평범부터 비범까지: 미술관 이야기’에 나온 설치 전경. ‘천서’는 쉬빙을 세계적인 스타작가 반열에 올려놨다. 4년여간 ‘개발’한 가짜 한자 4000여자를 직접 목각으로 판 뒤 목판인쇄로 찍어내, 옛날식 두루마리, 실로 제본한 전통 서책, 벽보 형식의 신문이란 거대한 설치작품으로 구성했다. 한자를 닮았지만 진짜 한자는 단 한 글자도 없는 ‘누구도 읽을 수 없는 문자’로, 1998년 10월 베이징 중국미술관에서 처음 전시된 이후 중국 안팎의 문화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혼합재료·가변크기, ⓒ쉬빙.한편 쉬빙은 학교에서 글자를 잘 쓴다는 이유로 환대를 받았다. 당을 선전하기 위한 대자보를 쓰기 위해 글자를 잘 쓰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쉬빙은 헷갈렸다. 글을 잘 안다는 이유로 부모는 고통을 받았는데, 같은 이유로 자신은 환영을 받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글은 나쁜 건가, 좋은 건가. ‘천서’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대한 쉬빙의 예술적 대응이다. 말도 안 되는 문자로 구성한 말도 안 되는 책을 만들어 ‘글자’ ‘글’ ‘학식’에 부여된 온갖 무거운 의미와 이념을 모두 증발시킨 것. 알고 보면 상당히 젠틀하게 날린 통쾌한 한방이다. ◇알파벳 조립, 한자 닮은꼴 만들어…문화융합 시도1989년 쉬빙은 미국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톈안먼사태 이후 중국 미술계에 불어닥친 검열과 얼어붙은 분위기가 그를 떠나게 했다. 새로운 땅에서 쉬빙은 ‘영어’란 문자에 맞닥뜨렸다. 이 경험은 ‘새로운 영어 서예’(1994∼2018)란 작품을 탄생시켰다. 제목 그대로 ‘영어로 쓴 서예’다. 영어알파벳을 꼭 한자의 서예처럼 쓴 거다. 이게 무슨 말이냐. 중국어에는 ‘병음’이란 시스템이 있다. 수세기 전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에 왔을 때,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고안한 일종의 발음기호다(예를 들어 쉬빙은 병음으로 ‘Xu Bing’이라 쓴다). 쉬빙은 이 병음, ‘알파벳’을 이상하게 조립해 한자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한자를 알파벳화한 것을 다시 한자처럼 만든 거다. 치밀한 쉬빙은 자신이 만든 ‘한자+영어 글자’를 읽는 방법을 매뉴얼로도 만들었다. 그것만 숙지하면 한자처럼 보이는 영어를 읽는 것이 어렵지 않다. 물론 굳이 매뉴얼을 익히지 않더라도 ‘오브’(of) 또는 ‘더’(The)와 같은 글자는 금방 알아볼 수 있지만. 쉬빙의 ‘새로운 영어 서예’(New English Calligraphy 혹은 Square Word Calligraphy·1994∼2018) 중 2014년 발표작 중 부분. 중국 서예와 서양의 영어알파벳을 결합해, 직접 개발한 네모꼴 단어(스퀘어 워드)로 옮겨 썼다. 낙관을 찍고 서예작품 특유의 여백을 가진 작품은, 겉으론 한자처럼 보이지만 속은 영문이다. ‘천서’가 읽을 수 없는 ‘가짜 문자’인 데 반해 실제로 읽을 수 있는 ‘진짜 문자’로, 처음 공개됐을 때 중국과 서양 각각의 문화권에 있던 이들을 충격에 빠뜨리기도 했다. 혼합재료, ⓒ쉬빙·더페이지갤러리 제공.쉬빙은 이 영어와 한자 사이 어딘가에 있는 문자를 1994년에 전격 공개했고 큰 주목을 받았다. 작품이 워낙 재미있고 완성도도 높았지만 때도 잘 탔다. 바야흐로 1990년대 초, 중국이 본격적으로 세계에 문을 열 때였다. 미지의 세계에 가깝던 중국에 한창 관심을 갖던 서구 미술계 관계자들에게 ‘미국을 무대로 활동하는 중국인 미술가’ 쉬빙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이국적이면서도 접근가능한 작가라니! 게다가 1990년대는 본격적인 세계화가 시작되며 지구촌이란 말이 유행할 때였다. 쉬빙 작품의 주제가 정확히 ‘문화융합’이 아니던가. 가히 시대를 대변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더군다나 쉬빙의 작품은 낯설면서도 친숙했다. 충분히 이국적인 ‘한자’란 소재, 그러면서도 익숙한 영어의 조합! 적당한 온도의 놀라움이었다. 대륙의 작가다운 거대한 스케일은 화룡점정. 여기에 완벽한 작품의 디테일까지. 이런 여러 가지 이유가 겹쳐 쉬빙은 세계적인 작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2008년 베이징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여전히 정상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쉬빙의 작업은 점잖다. 그러면서도 위트가 넘친다. 경박하지 않은 지적인 유머다. 무조건 믿고 보는 작가 쉬빙이 다음엔 또 어떤 예의 있는 농담으로 우리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할지 벌써부터 흥미진진하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1983년 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고 싶었단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작가는 일찌감치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관심은 한국현대미술이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보려면 아시아란 큰물이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 꼭대기에 있는 중국을 파고들어야겠다 했던 거다. 귀국한 이후 미술사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2023.02.10 I 오현주 기자
안양시 '학습 재능 기부사업' 평생학습도시 좋은정책상 수상
  • 안양시 '학습 재능 기부사업' 평생학습도시 좋은정책상 수상
  • 안양시평생학습원 전경.(사진=안양시)[안양=이데일리 황영민 기자]안양시가 ‘학습 재능기부 사업’으로 전국평생학습도시협의회의 ‘제1회 대한민국 평생학습도시 좋은 정책 AWARD 공모전’에서 좋은 정책상을 받았다. 3일 경기 안양시에 따르면 평생학습도시 좋은 정책상은 ‘모든 평생학습도시 정책은 특별하다’는 주제로 전국의 우수한 평생학습도시 정책을 발굴하고 민관 협업단체 및 평생학습도시에서 근무하는 평생교육사를 격려하기 위해 제정됐다.이번에 좋은 정책상을 수상한 안양시 학습 재능기부 사업은 지역 내 우수 인적자원을 활용해 시민들의 다양한 학습 욕구 충족과 사회 환원을 희망하는 강사들에게 활동 기회 제공을 목적으로 하는 안양시 평생학습원의 정책이다.재능기부가 가능한 안양시민과 강좌 지원이 필요하며 장소 제공이 가능한 관내 기관 모두가 참여할 수 있다. 안양시에서는 지난해 생활 목공예품 만들기, 미술 상담치료, 사진예술, 시와 나의 이야기 등 다양한 주제로 16명의 재능기부 강사가 21개의 강좌를 운영해 총 655명의 시민들이 학습에 참여했다.또한 수도군단, 희망작은도서관 등 학습 지원을 요청한 관내 기관에 그림책테라피, 일본어 회화, 앙금플라워케이크 만들기 등의 주제로 재능기부 강사를 연계해 청소년, 성인, 군인 등 331명이 참여하는 성과를 거뒀다.최대호 안양시장은 “재능기부 사업뿐 아니라 보다 다양한 평생학습 정책을 추진해 시민과 지역사회가 함께 성장하는 평생학습 체계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2023.02.03 I 황영민 기자
"붉고 큰 마오 얼굴이 떴습니다"<15>
  • "붉고 큰 마오 얼굴이 떴습니다"[정하윤의 아트차이나]<15>
  • ‘옛 세계를 파괴함으로써 새 세계를 건립한다’(1967).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 미술과 미술계는 이 한 장의 포스터로 요약할 수 있다. 문화대혁명(1966~1976) 전반부에 집중적으로 무수히 제작한 포스터는 홍위병이 앞장서 옛것을 무너뜨리는 거친 폭력성을 담고 있다. 실제로 홍위병의 발과 망치 아래 찬란했던 중국 문화와 미술은 사정없이 부서졌다. “최대한 강하게, 되도록 빨리, 가능한 많은 이미지”란 마오의 명령을 수행하는 최적의 매체로 떠오른 포스터는 1920∼1930년대 이미 쌓아둔 목판화 제작 노하우를 바탕으로 신속하고 저렴하게 마오시대가 요구한 이미지를 대량생산할 수 있었다. 포스터. 110×80㎝,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대 소장.중국 그림을 보지 못한 지 한참입니다. 한국 미술시장이 자못 뜨거웠던 지난해와 올해, 세계의 작가와 작품이 우리를 기웃거리던 때도 중국은 없었습니다. 중국 ‘큰손’ 컬렉터의 규모와 수가 미국을 제쳤다는 얘기도 이미 2~3년 전입니다. ‘으레 미술은, 그림은 그런 것’이라며 반쯤 우려하고 반쯤 체념했던 한국화단을 뒤흔든, 기발한 감수성으로 뒤통수를 내리쳤던 중국 작가들이 하나둘 사라졌습니다. 예술을 예술이 아닌 잣대로 들여다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술에 기대하는 희망 역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정치에도 경제에도 답이 없다 생각할 때 결정적인 열쇠를 예술이 꺼내놨습니다. 오랜시간 미술사를 연구하며 특히 중국미술이 가진 그 힘을 지켜봤던 정하윤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지점 그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때마침 ‘한중 수교 30주년’입니다. 다들 움츠리고 있을 때 먼저 돌아보는 시간이고 먼저 찾아가는 길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깊고 푸른 ‘아트차이나’로 안내합니다. <편집자 주> [정하윤 미술평론가] 화가 잔뜩 난 채 온몸에 힘이 들어간 청년이 커다란 망치를 내려친다. 세상 무엇이라도 파괴할 기세다. 왼팔에 찬 붉은 완장은 그가 홍위병임을 알려준다. 문화대혁명 시기 마오쩌둥의 붉은 군대, 물불 가리지 않던 젊은 부대 ‘홍위병’. 홍위병 청년이 때려 부수려 하는 대상은 왼쪽 하단에 있다. 불상, 유교 경전, 예수 그리스도의 상, 서양 레코드 등등. 별 나쁜 것도 아니건만 왜 없애려는 것일까. 그 이유를 왼쪽 상단에 적힌 글자가 친절하게 안내한다. “옛 세계를 파괴함으로써 새 세계를 건립한다.” 풀어 말하자면 지금 이 청년은 발 아래 쪼그라져 있는 잡다한 물건들, 다시 말해 ‘옛 세계’를 부숨으로써 ‘새 세계’를 건설하는 중이다. 명분은 그럴듯할지 모르지만 이 주장에 내재한 폭력성은 감출 수 없다. 꽤 무섭고 다분히 선동적인 이 이미지는 문화대혁명(1966~1976) 전반부에 셀 수 없이 만들어진 포스터의 전형적인 예다. 한 번 보면 이해를 못할 수도, 잊을 수도 없는 이런 이미지는 건물에, 길바닥에, 집 벽에 붙어 ‘인민’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문화대혁명 초반에는 화가 잔뜩 난 홍위병 무리가 집을 ‘압수수색’하는 일이 잦았다. 그들의 기준에서 파괴돼야 마땅할 물건들을 찾아 그 소유주와 함께 처단하는 것이 홍위병의 ‘일’이었다. 물건은 즉각 파괴됐다. 물건의 주인은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자아비판’을 하고, 어딘가로 끌려가 사라지기도 했다. 서로가 서로를 고발했다. 어제 감자를 나눠 먹은 친한 옆집 아주머니가 오늘 그 감자 담은 그릇에서 ‘부르주아’ 냄새가 났다며 당에 이웃을 찔렀다. 혁명정신에 고취된 아이들이 부모를 신고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홍위병은 수시로 출동했다. 망치를 들고. 찬란했던 문화가 부서지고 관계가 깨졌다. 이 모든 행태는 “옛 세계를 파괴함으로써 새 세계를 건립한다”는 말로 정당화됐다. ◇‘홍량광 고대전’ ‘삼돌출법’…영웅 마오, 붉고 크고 빛나게 돌출그 무서운 시대에 미술은 당의 이념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강렬한 이미지가 사람들의 머리와 마음을 흔들 수 있다는 것을 마오쩌둥은 잘 알았다. “최대한 강하게, 되도록 빨리, 가능한 많은 이미지를 생산해 모든 인민에게 닿게 하라!” 이 명령을 수행하는 데 최적의 매체는 포스터였다. 1920∼1930년대 이미 쌓아둔 목판화 제작 노하우를 바탕으로 신속하고 저렴하게 당이 원하는 이미지를 대량생산했다. 마치 공장처럼 또는 군대처럼, 망치를 들고 ‘옛것’을 때려 부수는 이미지를 무수히 찍어냈다. 물론 홍위병이 필요했던 문화대혁명 전반부까지만이다. 이후 더 이상 그들의 역할이 필요치 않게 되면서 홍위병은 해산됐고, 그들의 이미지도 사라졌다.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은 농민, 노동자, 군인이었다. 우상화한 마오쩌둥과 함께. ‘마오주석 만세, 세계 혁명가들의 마음속 붉은 태양’(1969)이 문화대혁명 후반부의 전형적인 포스터다. 무엇이 가장 먼저 보이는가. 당연히 하늘 위에 동동 떠 있는 마오쩌둥이다. 제목에서 말하는 ‘붉은 태양’이 바로 그다. 그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가운데 푸른 옷을 입은 노동자를 기준으로, 왼편에는 군인, 오른편에는 농민이 있다. 마오의 중국에서 가장 멋진 사람들로 여겨지던 그룹이다. ‘마오주석 만세, 세계 혁명가들의 마음속 붉은 태양’(1969). 마오시대 문화대혁명 후반기에 제작한 포스터 유형. 하늘로 띄워올린 마오쩌둥과 그를 바라보며 환호하는 농민·노동자·군인, 또 우방국 외국인들이 대거 등장했다. ‘붉은 태양’이 중국의 수장이란 걸 알린 포스터는 마오 우상화 작업의 절정을 보여준다. 미국 오리건주 조던 슈니처 미술관 소장.그런데 그 양옆으로는 어쩐 일인지 외국인들이 가득하다. 문화적 다양성을 옹호했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이들은 마오의 중국과 사상적으로 동일한 우방 나라의 사람들이다. 세계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지지자(포스터 제목에 따르면 혁명가)들인 거다. 모두 마오쩌둥의 어록인 붉은 책을 손에 들고 ‘태양’을 향해 열렬히 환호하고 있다. 포스터의 의미는 자명하다. 세계의 사회주의·공산주의자들의 ‘붉은 태양’은 중국의 수장, 마오쩌둥이라는 것.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던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포스터가 지금 우리 눈에는 다소 조야해 보일 수 있지만, 실은 철저한 규칙 아래 그려진 것이다. 일명 ‘홍량광 고대전’과 ‘삼돌출법’. 이게 뭔 해괴한 말인가. 풀어보면 간단하다. 일단 첫 번째 규칙은 그림의 주인공, 다른 말로 마오는 ‘홍=붉고’ ‘량=밝고’ ‘광=빛나게’ ‘고=높고’ ‘대=크고’ ‘전=완전하게’ 그리라는 것. 포스터에서 마오쩌둥의 혈색이 과하게 붉고, 머리 주변으로 후광이 둘러싼 것은 이 규칙 때문이다. 갑자기 하늘로 들려 올린 것도, 다른 사람보다 말도 안 되게 사이즈가 큰 것도 마찬가지다. 고대 이집트 벽화에서 파라오를 가장 크고 완벽한 모습으로 그렸던 것과 동일한 이치라 하겠다. 두 번째 규칙인 ‘삼돌출법’은 영웅을 그리되, 더 중요한 영웅은 약간 돌출해서, 그보다 더 중요한 영웅은 가장 돌출해서 그리란 것이다. 그러니 붉은 깃발 아래서 소리치고 있는 이들 모두는 영웅이다. 하지만 영웅이라고 다 같은 영웅은 아니다. 그중 조금 더 난 영웅인 중국의 노동자·농민·군인은 가운데 두고 조금 크게 그려서 기타 영웅들보다 부각했다. 최고 영웅은 물론 마오쩌둥이다. 따라서 범접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높이 그려 최고로 돌출한 거다. 문화대혁명 시기의 모든 포스터는 당에서 마련한 이런 ‘흥미로운’ 규칙에 따라 제작됐다. 인물들의 표정도 볼 만하다. 마오쩌둥부터 가장 가장자리에 있는 작은 사람까지 모두 허연 이를 드러내며 밝게 웃고 있다. 하나같이 혁명정신에 고취돼 있으며 행복한 모습이다. 사실일까. 그럴 리가. 그 무렵 중국은 경제적으로 정말 궁핍했다. 모두가 이렇게 건장하고 혈색이 좋지 않았단 말이다. 게다가 1968년에 진짜로 이렇게 외국인까지 마오쩌둥을 칭송하며 활짝 웃었을 리 없다. 다시 말해 이 이미지는 사실이 아닌, 고도로 이상화한 모습이다. 좋은 말로는 곧 도래할 미래에 대한 청사진, 조금 비아냥거리자면 ‘뻥’이라고나 할까. 마오쩌둥 시대에서 행해진 ‘집단 창작’ 전경. 여러 명이 매달려 거대한 포스터를 공동제작하고 있다. 그저 강렬한 이미지뿐일 듯한 당시 포스터 작업에는 나름의 철저한 규칙이 있었다. 마오쩌둥을 그릴 땐 ‘붉고 밝고 빛나고 높고 크고 완전하게’(홍량광 고대전), 영웅을 그릴 땐 중요도에 따라 차등을 둬 돌출할 것(삼돌출법). 물론 1순위에 올릴 최고 영웅이 마오쩌둥이었던 건 더 말할 필요가 없다.◇“정치 목적 포스터도 작품…마오 이념 일방적 강요는 잘못”마오쩌둥 시기에 제작한 포스터가 얼마만큼 심미적 만족을 줬는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회의적이다. 마오쩌둥은 분명 감동을 줄 수 있도록 형식에도 신경 써야 한다고 말했지만, 이런 포스터의 형식면에서 감동을 받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지. 적어도 지금 우리의 기준으로는 그리 많았을 것 같진 않다. 뭐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개인의 취향 따위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국가는 만들고, 인민은 감동(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반혁명분자다. 그런데 의문이다. 과연 이런 포스터도 ‘예술’이라 할 수 있을까. 딱히 아름답지도, 그다지 예술가의 혼도 느껴지지도 않는데 정말 이들을 ‘작품’이라 불러도 될까, 미술에는 다양한 형식과 목적이 있다. 그렇기에 마오시기의 포스터처럼 정치적인 목적을 갖고 내용 전달을 우선시하는 ‘작품’도 있을 수 있다. 전 세계, 전 시대에 걸쳐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제작한 작품은 무수히 많다. 내용을 우선시한 작품, 정치에 봉사하는 미술 자체가 잘못됐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마오시기의 문제는 오직 그것만 존재했다는 데 있다. 다른 것은 전부 틀렸고, 오직 당에서 정한 규칙에 따라 그 사상을 전달하는 작품만 옳다고 여긴 것은 엄연한 잘못이다. 예술작품은 각기 다른 생각과 취향을 표현하는 장이(어야 한)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사회가 우리가 믿는 건강한 사회다. 그리고 예술이 때때로 그 사회의 건강지표가 되기도 한다. 자, 그렇다면 이제 동시대 한국의 예술을 떠올려 보자. 지금 우리 사회는 얼마나 건강한가. △정하윤 미술평론가는…1983년 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고 싶었단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작가는 일찌감치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관심은 한국현대미술이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보려면 아시아란 큰물이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 꼭대기에 있는 중국을 파고들어야겠다 했던 거다. 귀국한 이후 미술사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2023.01.20 I 오현주 기자
'한나라 도자기' 박살은 시작이었을 뿐<14>
  • '한나라 도자기' 박살은 시작이었을 뿐[정하윤의 아트차이나]<14>
  • 아이웨이웨이의 ‘한나라 도자기 떨어뜨리기’(2016·위)와 ‘색을 입힌 화병들’(2015). 기원전 20년, 무려 2000년 전 중국 한나라 때 제작한 도자기를 떨어뜨려 박살내는 퍼포먼스를 촬영한 사진(1995)을 다시 레고 블록으로 제작했다. 마오쩌둥 시대 문화대혁명 당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한다’는 미명 아래 행해진 ‘옛것 파괴행위’를 파격적인 방식으로 비난한 것이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고 있는 이가 아이웨이웨이다. 아래 작품 역시 유사한 맥락. 신석기시대 유물로 추정하는 토기를 공업용 페인트에 담갔다 꺼내 제작했다. ‘현실에서 이런 일쯤은 흔하게 벌어지지 않느냐’는 작가의 탄식과 경종을 동시에 녹였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아이웨이웨이: 인간미래’ 전에 설치한 전경. (위) 레고 조각, 각 240×200㎝, (아래) 도자기·페인트, 각 지름 25∼28×31∼36㎝, ⓒ아이웨이웨이·이데일리DB.중국 그림을 보지 못한 지 한참입니다. 한국 미술시장이 자못 뜨거웠던 지난해와 올해, 세계의 작가와 작품이 우리를 기웃거리던 때도 중국은 없었습니다. 중국 ‘큰손’ 컬렉터의 규모와 수가 미국을 제쳤다는 얘기도 이미 2~3년 전입니다. ‘으레 미술은, 그림은 그런 것’이라며 반쯤 우려하고 반쯤 체념했던 한국화단을 뒤흔든, 기발한 감수성으로 뒤통수를 내리쳤던 중국 작가들이 하나둘 사라졌습니다. 예술을 예술이 아닌 잣대로 들여다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술에 기대하는 희망 역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정치에도 경제에도 답이 없다 생각할 때 결정적인 열쇠를 예술이 꺼내놨습니다. 오랜시간 미술사를 연구하며 특히 중국미술이 가진 그 힘을 지켜봤던 정하윤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지점 그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때마침 ‘한중 수교 30주년’입니다. 다들 움츠리고 있을 때 먼저 돌아보는 시간이고 먼저 찾아가는 길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깊고 푸른 ‘아트차이나’로 안내합니다. <편집자 주> [정하윤 미술평론가] 2023년 검은 토끼의 해가 밝았다. 계묘년 새해에 혹 새롭게 결심한 바가 있는가. 또는 꼭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는가. 중국 미술가 아이웨이웨이(66)의 소원은 올해도 같다.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 아이웨이웨이는 미술가이자 사회운동가로 불린다. 작품을 통해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내는 미술가이기 때문이다. 아주 적극적으로. 그래서 때론 매우 시끄럽게. 1957년 베이징에서 태어난 아이웨이웨이가 사회적인 미술가가 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의 아버지는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예전 중국이었다면 ‘문인’으로 존경받을 수 있었겠지만, 마오쩌둥의 시대에는 그렇지 못했다. 지식인은 자산계층, 다른 말로 위험한 분자로 취급됐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1957년 반우파투쟁 때 아이웨이웨이의 아버지는 ‘우파’로 낙인 찍혔다. 그가 쓴 글이 문제시됐던 것이다(하고 싶은 말을 했다가 큰 코 닥치는 일이 당시에는 비일비재했다). 한 살이 된 아이웨이웨이를 포함해 온 가족은 ‘하방’(번역하자면 ‘귀향’ 정도 될 거다) 됐다. 흑룡강의 노동캠프로, 또다시 신장지역으로. 주거의 자유 따위는 없었다. ◇권위 상징 세계 명물 앞에서 가운뎃손가락 사진아이웨이웨이로서는 태어나자마자부터 납득할 수 없는 일을 당한 셈이다. ‘우리 아버지는 뭘 잘못한 걸까’ ’‘왜 우리는 살고 싶은 곳에서 살 수 없나’ 등등. 의아한 점은 많고도 많았다. 꼬마 아이웨이웨이가 품었던 ‘언론의 자유’와 ‘거주의 자유’에 대한 의구심은 후에 ‘인권’이란 작품의 주요 테마로 이어진다. 아이웨이웨이 가족은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나서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이웨이웨이는 베이징중앙미술학원에서 영화를, 미국에서 뒤샹이나 워홀과 같은 서구의 여러 새로운 작업을 접한 후, 1993년 베이징으로 다시 돌아와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다. 실험적인 혹은 도발적인 작품들을. 초기작 중 하나가 한나라 시대의 도자기를 깨뜨리는 퍼포먼스다. 아이웨이웨이는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유물을 떨어뜨려 깨뜨리는 과정을 사진으로 찍었고(1995), 최근에는 그 사진을 다시 레고 블록으로 만들었다(‘한나라 도자기 떨어뜨리기’ 2016). 흡사 문화파괴자 같은 그의 행위는 보기 불편하다. 이런 야만인 같으니. 물론 아이웨이웨이가 진짜 문화파괴자일 리는 없다. 그는 ‘문화대혁명’(문혁) 시기의 마오쩌둥의 말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유일한 방법은 옛것을 파괴하는 것”이란 말을 그대로 실행했을 뿐이다. 아무리 좋은 목적이라도 과정이 폭력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담아서. 비슷한 시기에 아이웨이웨이는 도전적인 작품들로 이목을 끌었다. 톈안문광장에서 여자가 치마를 들어 올리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거나 ‘권위’를 대표하는 세계 각국의 명물들(톈안문광장, 백악관, 모나리자, 에펠탑 등) 앞에서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원근법 연구 1995∼2011’(2014) 시리즈가 대표적인 예다.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권력이나 권위에 대한 조롱이나 경고일 수도, 또는 그런 ‘힘’에 겁먹지 말라는 격려일 수도 있다. 아이웨이웨이의 ‘여행의 법칙’(2017). 거대한 고무보트에 올라탄 채 목숨을 건 탈출 중인 난민들의 절박한 모습을 길이 60m의 대규모 설치작품으로 형상화했다. 올라탄 사람만 258명. 작품을 발표하면서 아이웨이웨이는 “불확실성 시대에 우리에겐 더 많은 관용, 연민, 신뢰가 필요하다”며 “아니라면 인간성은 더 큰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2018년 시드니비엔날레에 나왔을 때 작품. 고무, 가로 600㎝, ⓒ아이웨이웨이·탕컨템포러리아트 제공.◇검열에 대한 저항 ‘민물 게’ 도자기로 만들어 전시그렇지만 아이웨이웨이가 처음부터 특정 인물이나 정부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국 정부와 사이가 꽤 좋기도 했다. 2008년 열릴 베이징올림픽 주 경기장 설계에 참여하기도 했을 만큼. 하지만 아이웨이웨이와 중국 정부의 관계가 크게 틀어지는 ‘사건’이 생기게 된다. 2008년 쓰촨에서 8.0 강도의 대지진이 발생한 무렵이다. 지진 때문이 아니다. 지진에 대한 정부의 대응 때문이다. 당국은 사망자 집계를 제대로 내지 않았다. 대규모 사상자를 낸 학교가 부실시공이었다는 것이 드러났음에도 제대로 조사하거나 설명하지 않았던 것이다.아이웨이웨이는 분노했다. 학교는 반드시 안전한 곳이어야 했다. 만에 하나 그렇지 못했을 때 당국은 정확히 조사하고 투명하게 모든 사실을 밝혀야 했다. 그것이 아이웨이웨이가 당연히 믿는 바였다. 그러나 정부는 그 마땅한 바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웨이웨이가 직접 움직였다. 현장으로 달려갔고, 인터넷으로 자원자를 모아 사망한 아이들의 명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1년이 못 돼 5000명이 넘는 명단이 나왔고 아이웨이웨이는 이를 자신의 블로그에 게재했다. 현장 사진과 인터뷰를 담은 다큐멘터리도 만들었다. 물론 설치작품도. 학교 건물에 널브러져 있던 책가방을 떠올리며 책가방으로 미술관 외벽을 싸는 대규모 설치를 선보였고, 현장에서 모은 철근을 바닥에 놓아 작품으로 만들었다. 미술관 벽에는 사망자 이름과 생년월일을 빼곡하게 적고,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는 목소리를 녹음해 틀었다. 아이웨이웨이의 작업은 뉴스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건을 기록했고, 공론화했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중국 정부가 자신들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아이웨이웨이의 활동을 예뻐할 리 없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예의주시 당했고, 각종 제재를 받았다. 2009년 아이웨이웨이의 블로그는 폐쇄됐고, 그는 경찰에게 머리를 맞은 뒤 뇌출혈로 응급수술을 받기도 했다. 2010년 11월에는 자택에 구금됐으며, 2011년 1월에는 상하이 스튜디오가 철거됐다. 같은 해 4월에는 탈세 혐의로 공항에서 체포·수감돼 185만달러(현재 23억여원)가 미납세금·벌금으로 부과됐다. 81일 만에 석방됐지만 여권은 당국에 뺏긴 채였다. 아이웨이웨이의 ‘민물 게’(2011). 구금 중 상하이 작업실이 강제로 철거된 뒤 마을주민을 초대해 상하이 명물인 민물 게를 한상 차려 대접한 연회를 기념한 동시에 ‘저항’을 상징한다. 중국말 ‘민물 게’ 발음이 중국 정부의 슬로건이던 ‘화해’와 발음이 비슷한 데서 비롯됐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아이웨이웨이: 인간미래’ 전에 설치한 전경. 자기, 각 약 5×10×256㎝, ⓒ아이웨이웨이·이데일리DB.◇난민이 사용했던 구명조끼·옷으로 ‘인간의 위기’ 표현이 모든 사건은 국제사회 뉴스에 오르내렸고, 신문의 문화면보다 사회면에서 아이웨이웨이의 이름을 더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아이웨이웨이가 뼛속까지 예술가인 것은 이 모두를 예술활동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구금 중일 때 그는 상하이 건물에서 상하이 게를 먹는 파티를 열고 수천 마리의 게를 만들어 전시장에 설치했으며(‘민물 게’ 2011), 구금 중 겪은 바를 모조리 미니어처로 만들어 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 전시하기도 했다. 세계 도처에서 아이웨이웨이를 지지하는 이들은 세금 납부를 위한 기부를 시작했고, 석방을 위한 서명을 했다. 그는 이 모든 과정을 일종의 ‘기록예술’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공유했다. 중국 정부가 아이웨이웨이를 탄압할수록 그의 작품은 주목받았고, 그를 향한 국제사회의 관심과 응원은 더해졌다. 2015년 여권을 돌려받은 아이웨이웨이는 그 길로 중국을 떠나 지금까지 외국에 거주 중이다. 자의 반 타의 반 고향 밖을 떠도는 일종의 ‘난민’이 된 셈이다. 그래서인가. 아이웨이웨이는 요즘 난민의 삶에 대한 작업에 힘을 쏟는다. 시리아 내전으로 자국을 떠나 떠돌아야 하는 사람들의 상황을 다큐멘터리 필름으로 촬영하고, 구명보트에 올라 목숨을 건 탈출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60m 규모의 대형 설치작품(‘여행의 법칙’ 2017)으로 만든다. 도자기에 난민의 이야기를 입히기도 하며(‘기둥으로 쌓은 도자기 꽃병’ 2017), 그들이 사용했던 구명조끼(‘구명조끼 뱀’ 2019), 갈아입지 못했던 옷가지 또한 작품화(‘빨래방’ 2016)한다. 아이웨이웨이는 ‘난민의 위기’란 단어를 쓰지 않는다. 대신 ‘인간의 위기’라고 부른다. 아이웨이웨이의 ‘구명조끼 뱀’(2019). 그리스 남동부 레스보스섬에서 난민들이 벗고 간 구명조끼 140벌을 연결해 만든 설치작품이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아이웨이웨이: 인간미래’ 전에 설치한 전경. 22.5m나 되는 푸르고 붉고 긴 뱀이 전시장을 연결하는 복도 천장을 기어가는 것처럼 보이도록 연출했다. 구명조끼 140벌, 65×2250×85㎝, ⓒ아이웨이웨이·이데일리DB.수십 년 동안 조각, 퍼포먼스, 설치, 비디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했지만, 기저에 흐르는 주제는 하나다. 인권. 도자기를 떨어뜨리고,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려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경고하고, 힘을 잃은 자들의 이야기를 작품을 통해 말하는 이 모두는 ‘인권’을 위함이다. 작년 한 해 가장 인상적인 문장은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계묘년 새해, 아이웨이웨이 또한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인권을 위한 힘찬 행보를 이어가기를 응원한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1983년 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고 싶었단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작가는 일찌감치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관심은 한국현대미술이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보려면 아시아란 큰물이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 꼭대기에 있는 중국을 파고들어야겠다 했던 거다. 귀국한 이후 미술사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2023.01.13 I 오현주 기자
예술가로 산다는 것, 그 버거움 버텨낸 힘은
  • 예술가로 산다는 것, 그 버거움 버텨낸 힘은
  • 서울 종로구 부암동 서울미술관 기획전 ‘3650 스토리지-인터뷰’ 전경. 정면에 우뚝 세운 임준호의 ‘조각상 no.48’(2019) 뒤로 추종완의 ‘위대한 유산’(2021) 연작(왼쪽)과 조문기의 ‘독식가의 방’(2020) 등 회화작품 4점, 김태동의 ‘플래넷’(2017·2018) 연작 등이 걸렸다. 미술관 개관 10주년을 기념한 두 번째 전시다. 10년간 50여건의 ‘현대미술 기획전’에 나섰던 300여명의 작가 중 48명의 신작 200여점과 이들의 ‘인터뷰’를 정리한 48점을 함께 걸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누군가 다가와 묻는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없었느냐”고, “어떤 힘으로 지금껏 버텨왔느냐”고. 혹시 눈치챘으려나. 이 질문엔 진한 복선이 깔려 있다. 당신이 해온 일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라고. 안타깝지만 앞으론 그렇지 않으리라 어떤 장담도 할 수 없다고. 과연 선뜻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질문과 복선이 뒤엉킨 기가 막힌 현실을 읽어냈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던 몇몇 대답을 먼저 보자. “결승선이 보이지 않는 마라톤을 하는 기분이 들 때였다. 애써 말하지 않고 나를 오롯이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작업밖에 없더라”(강소선). “분노, 열등감, 성취감, 연민, 신앙, 에로스, 욕망, 시기, 질투, 동료, 술, 담배, 핫식스, 가족, 칭찬, 책, 음악 등을 에너지로 삼았던 것 같다”(감성빈). “아무리 오랜 시간 노력해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을 때 절망했다. 그런데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림을 그리는 행위 속에서만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무나씨). “작가로 사는 것은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것 같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가 또 작업이 잘되면 세상을 가진 듯하기도 하고. 그래서 관두고 싶다가도 또 계속하기를 오래 반복하고 있다”(엄익훈). “경제적인 이유로 매일 예술가의 삶에 회의를 느낀다. 하지만 그 고민은 늘 더욱 큰 창작욕으로 이어지더라. 예술은 곧 나의 삶이니까. 삶을 포기할 순 없다”(이태강). “언제나 포기하고 싶은 순간의 연속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나에게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고 삶의 이유라 당연하게 이어가게 된다”(콰야). 서울미술관 기획전 ‘3650 스토리지-인터뷰’ 전경. 미술관 개관 10주년을 기념한 두 번째 전시는 10년간 50여회 기획전에 나선 300여명의 작가 중 48명의 신작 200여점과 이들의 ‘인터뷰’를 정리한 48점을 함께 걸었다. 지난 여정을 압축한 주요 전시 포스터와 참여작가 이름들이 전시장 초입을 장식하고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이들은 모두 작가다.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는. 그래, 맞다. 저 어려운 질문은 이들 작가들에게 했던 거다. 이름만 대면 작품이 연상될 이들의 ‘대답’이 그저 순간의 넋두리인 건 아니다. 미술관에 버젓이 전시작으로 걸려 있으니까. 도구와 기법은 다르지만 결국 이들이 살아가는 까닭이고 삶의 이유가 돼준 ‘작품’들과 기꺼이 나란히. ◇작가 300여명 중 절반이 팬데믹 거치며 작업 중단 서울 종로구 부암동 서울미술관이 특별한 기획전을 꾸렸다. ‘3650 스토리지-인터뷰’란 타이틀을 단 전시는, 미술관이 늘 해오던 방식에서 한 계단 올라섰다. 주목할 작가들의 작업을 내보이는 데서 나아가 그들의 ‘손과 생각, 마음’을 동시에 엿보게 한 건데. 전시에 참여한 48명 작가가 출품한 작품은 물론 ‘인터뷰’한 내용까지 함께 걸어낸 거다. 서울미술관 기획전 ‘3650 스토리지-인터뷰’ 전경. 48명 참여작가의 작품과 함께 ‘인터뷰’ 내용을 함께 전시하고 있다(사진=서울미술관).굳이 이런 고안을 한 데는 계기가 있다. ‘10년 세월’이다. 2012년 흥선대원군 별장이던 석파정을 낀 바위산에 미술관이 들어선 이후 10년. 그 고락을 함께해온 작가들과 다시 한번 뭉쳐보자 했다는 거다. 10년간 미술관이 쌓은 50여건의 ‘현대미술 기획전’을 통해 작품을 걸거나 세웠던 작가들은 300여명. 수소문을 시작했다. 그런데 의외의 난관에 부딪혔단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작업을 중단한 작가들이 “절반에 이르더라”는 거다. 이번 전시에 이름을 올린 48명은 그 ‘절반의 작가’ 중 전시주제 등과 맞는 신작을 낼 수 있었던 작가들이다. 그러니 묻지 않을 수 있었겠나. ‘포기가 밀려든 순간을, 용케 버텨낸 힘을’ 말이다. 그렇게 국내작가 39명, 해외작가 9명이 회화·조각·사진·영상·설치·일러스트 등 200여점을 내놨고, 그외에 ‘인터뷰’란 타이틀을 가진 같은 이름 다른 내용의 작품 48점을 더 걸 수 있었다. 감성빈의 ‘표류’(2021·157×188㎝). “살아가며 조우하는 다양한 형태의 인간군상들을 평면·입체·설치 등으로 작업한다”는 작가는 캔버스 안 회화는 물론 캔버스 밖 액자프레임까지 조각하는 독특한 작품을 내놨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작품 수로는 단연 회회작품이 앞선다. 섬세한 캔버스 묘사도 부족해 액자프레임까지 조각해버린 감성빈(‘가족’ 2022, ‘표류’ 2021 외), 흑인음악에서 받은 영감을 콜라주로 옮겨내는, 서양화를 전공한 가수 유나얼(‘깨지기 쉬운’ 2022 외), 한지에 먹만으로 도형에 갇힌 한 사람의 일상을 4.8m 8폭 병풍에 나열한 무나씨(‘각자의 도와 생’ 2021), 담백한 스토리를 담백한 인물에 얹어 힘 뺀 붓질로 덤덤하게 덧입혀 나간 콰야(‘추운 날’ 2021 외), 작가 자신을 소재로 정체성은 물론 슬픔을 정화하는 방법을 ‘종이에 수채’로 순하게 그려낸 이고은(‘란’ 2020 외), 가부장적 가족관이 충돌하는 상황을 ‘험악한 유머’로 묘사한 조문기(‘독식가의 방’ 2020 외) 등. 콰야의 ‘추운 날’(2021·117×91㎝·왼쪽)과 ‘어느 비 오는 날’(2020·145.5×112㎝). “일상의 다양한 순간에서 영향을 받아 일기를 쓰듯 작업한다”는 작가는 담백한 스토리를 담백한 인물에 얹어낸다. 전시작을 두곤 “형태를 단순하게 만들고 기술적인 표현을 줄여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조금 더 초점을 맞췄다”고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조문기의 ‘추락하는 자식을 삼키는 남자’(2020·145.5×112㎝·왼쪽)와 ‘대부님 기계장치를 타고 내려오신다’(2020·112.3×162.2㎝). 작가는 “가부장적 가족관이 충돌하는 소재를 다룬 시리즈”라고 전시작을 소개했다. 자칫 ‘험악하게’ 보이는 장면을 두곤 “미디어를 통해 굴절된 인간 군상들을 바라보다가 현실의 모양과 비교해 관찰했던 기억을 조합이 아닐까”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이고은의 ‘란’ 연작(2020·51×61㎝, 51×61㎝,, 56×70㎝). 작가는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을 극복하는 과정을 겪고 “이젠 슬픔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담아 착수한 미완의 연작”이라며 “인물의 미묘한 표정과 눈빛을 재현하는 데 집중했다”고 설명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하지만 전시장에 우뚝 솟아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형체는 단연 조각작품이다. 송유정이 그려낸 탐험의 세계(‘안녕 나의 작은 친구들’ 2022 외), 엄익훈이 꾸며낸 빛과 환상의 조화(‘춤추는 소녀’ 2020 외), 이태강이 빚어낸 세상에 없는 인물(‘초인의 두상’ 2018), 임준호가 창조한 세상에 없을 동물상(‘조각상 no.48’ 2019) 등. 여기에 화룡점정은 호주 출신 샘징크의 극사실주의 조각이 찍었다. 피부조직은 물론 신생아의 배냇머리까지 한올 한올 심어, 사람의 외형 그대로를 옮겨낸 인물조각으로(‘베이비’ 2012, ‘여인과 아기’ 2010). 호주 출신 극사실주의 조각가 샘징크의 ‘베이비’(2012·18×36×36㎝·왼쪽)와 ‘여인과 아기’(145×40×40㎝). 실리콘과 레진 등을 사용해 마치 실물인 듯한 사람의 형상을 만들었다. ‘베이비’는 투명한 피부, 발바닥 주름은 물론 진짜 신생아의 배냇머리를 심어낸 머리카락까지 생생하다. 작가의 가족을 모델로 삼았다는 ‘여인과 아기’ 중 노인이 입은 옷은 “어머니가 손수 제작한 것”이라고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서울미술관 기획전 ‘3650 스토리지-인터뷰’ 전경. 이태강의 회화작품 ‘비범한 풍경’ 연작(2022·117×91㎝·왼쪽)과 조각작품 ‘초인의 두상’(2018·80×70×90㎝)을 나란히 걸고 세웠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서울미술관 기획전 ‘3650 스토리지-인터뷰’ 전경. 조각작품과 그림자회화를 결합한 엄익훈의 ‘춤추는 소녀’(2020·53×23×52·왼쪽부터), ‘바이올린 켜는 소년’(2020·51×22×50㎝), ‘발레리나 되기’(2020·44×26×46㎝)가 나란히 놓였다. 뒤로 강소선의 회화 ‘밖에서 안으로, 안에서 밖으로’(2022·97×162.2㎝·오른쪽)와 작가의 ‘인터뷰’가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48명 작가의 ‘손과 생각, 마음’으로 다시 10년 예약서울미술관이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펼친 두 번째 전시다. 지난해 4월 개막해 7개월여간 진행한 첫 번째 기념전 ‘두려움일까 사랑일까’를 이었다. 한국 근현대거장 31명의 주요작품 200여점을 내보였던 첫 전시에는 10만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더랬다. 두 차례의 기념전이 말해주듯 서울미술관의 지난 10년 역시 두 갈래였다. 미술관을 세운 안병광 회장의 500여점의 컬렉션을 수시로 내보인 ‘소장품’ 전은 일단 예외로 하자. ‘러브 액추얼리’(2013), ‘모든 것이 헛되다’(2015) ‘연애의 온도’(2016·2021), ‘사랑의 묘약’(2017), ‘카페 소사이어티’(2017), ‘디어 마이 웨딩드레스’(2018), ‘보통의 거짓말’ (2019) 등, 동시대 현대미술가들의 기량과 고민을 한자리에 모았던 기획전이야말로 단연 미술관의 역사를 썼다고 할 테니까. 서울미술관 기획전 ‘3650 스토리지-인터뷰’ 전경. 무나씨의 ‘각자의 도와 생’(2021·135×480㎝·오른쪽)과 이이립의 ‘공진’ 연작(2019∼2022·130×97㎝)이 나란히 걸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그럼에도 말이다. 지난 시간을 떠올릴 장면을 요란하게 치장하지 않은 이번 기념전은 그중 ‘백미’라고 할까. 혹여 지난 10년간 서울미술관 기획전을 한번 이상 둘러봤다면 어느 지점에선가 저절로 발을 멈추게 돼 있으니. 48명 작가에게는 과거를 뛰어넘을 기회를 주고, 48명 작가에게서 빌린 ‘손과 생각, 마음’으로 미래를 예약한 자리가 됐으니. 아쉬움이 없진 않다. 작가 48명의 ‘인터뷰’를 단지 ‘출력한 종이 위 텍스트’로만 남겼다는 점이 말이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말이다. 저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됐다면 그 깊이를 좀더 긴밀하게 더듬어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던 중 발견한 ‘인터뷰’ 한 조각이 지레 화들짝 놀라게 한다. “너무 많을 걸 욕심내면 몸이 힘들어집니다. 너무 조급하면 마음에 상처가 납니다. 우리 같이 욕심부리지 말고 조급해하지도 말고 천천히 작업합시다.” 후배 예술가를 토닥이는 황선태 작가의 다정한 조언일 뿐인데, 마치 관람객인 우리 어깨를 내어준 듯하달까. 전시는 4월 16일까지. 서울미술관 기획전 ‘3650 스토리지-인터뷰’ 전경. 스페인 다원예술가 하비에르 마틴의 평면작품 ‘달과 거짓 사이의 맹목’(2022·200×200×5.5㎝·오른쪽), 안준의 사진작품 ‘자화상’ 연작(2021·152.4×101.6㎝·왼쪽), 림배지희의 회화작품 ‘껍데기’(2021·130.3×193.9㎝·정면) 등이 한 공간에 걸렸다. 안쪽으로 정소윤의 설치작품 ‘안정으로 가는 길’(2021·가변설치)이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2023.01.11 I 오현주 기자
'프랑스에서 온 댄디 보이' 다비드 자맹, '한국의 별들'을 그리다
  • '프랑스에서 온 댄디 보이' 다비드 자맹, '한국의 별들'을 그리다
  •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제 인생과 작업의 세가지 키워드를 꼽자면 자유(Freedom), 온정(Benevolence), 삶에 대한 사랑(Love of Life)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미술계의 감성술사’ 다비드 자맹이 서울에서 두번째 개인전을 연다. 오는 2월 4일부터 4월 27일까지 더현대 서울, ALT 1에서 개최하는 ‘다비드 자맹: 프로방스에서 온 댄디보이’다. 한국경제신문과 비아캔버스가 주최하고 주한 프랑스대사관 후원, 더현대 서울과 협력해 진행하는 전시다.2021년 예술의전당에서 ‘데이비드 자민: 내면 세계로의 여행’을 통해 처음으로 국내 관객을 만난 바 있다. 당시 4주라는 짧은 전시 기간과 코로나 시국에도 불구하고 서울 관람객을 매료시키며 연일 만원사례를 이어갔다. 이번에는 프랑스식 표기인 ‘다비드 자맹’으로 변모해 다시 국내 관람객을 찾는다.프랑스 현대미술가 다비드 자맹(사진=한국경제신문).자맹은 1970년 11월 24일 프랑스 남부의 작은 도시 님므(Nimes)에서 태어났다. 프로방스 지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자맹은 10살 무렵 아버지의 전근으로 1000km 떨어진 프랑스 북부지방 칼레(Calais)로 이주해 그곳에서 순수미술을 공부했다. 1996년 아트월드 갤러리와 작업을 시작한 뒤 애호가들의 러브콜을 받으며 단숨에 촉망받는 작가로 성장했다. 이후 프랑스를 비롯해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이탈리아 등 유럽 전역과 미국 뉴욕, 캐나다 몬트리올 등에서 전시를 이어나가고 있다. 자맹은 감각적인 색채와 붓터치로 내면의 감정과 인간의 움직임을 탐구하는 현대미술가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고향 대한 작품을 비롯해 대규모 신작 등 150점을 선보인다. 그가 자주 탐구해온 주제와 내면초상화, 댄디보이를 비롯해 미술사를 아우르는 명작에 대한 오마주, 한국의 스타들을 주제로 한 작품, 어린아이들, 정원을 주제로 한 그림까지 한 자리에 모았다. 전시는 총 6가지 주제로 구성했다. ‘프로방스의 작업실’ ‘자유로운 멋쟁이’ ‘너와 나의 소우주’ ‘경의를 바치며’ ‘한국의 별’ ‘내 마음속의 안식처’ 등 마치 여행을 떠나듯이 그의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다비드 자맹의 ‘푸른 자화상’(사진=한국경제신문).가장 눈에 띄는 건 ‘한국의 별’이다. 자맹은 리오넬 메시를 비롯해 마라도나 등 전설의 스포츠 선수들을 주제로 ‘2022년 그레이스트(위대한 선수들)’ 시리즈를 선보인 바 있다. 해당 시리즈는 전시 후 경매를 진행했고, 판매 수익금은 청소년 암 환자를 돕기 위해 기부했다. 주최측은 한국 전시만을 위한 ‘한국의 별들’도 선보이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고, 작가가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한국의 별 시리즈가 완성됐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대중문화의 별 중 초상권 협의를 통해 손흥민, 김연아, 김연경, 박찬욱, 윤여정을 주제로 한 작품을 선보인다.‘자유로운 멋쟁이’에서는 ‘자유’ ‘살다’ ‘환희’ 등의 작품을, ‘너와 나의 소우주’에서는 ‘밤’이라는 주제로 그려낸 ‘밤의 얼굴들’을 전시해놓았다. ‘경의를 바치며’에서는 선배 화가들에 대한 존경을 담아 그려낸 오마주 작품들을 선보인다. 그가 가장 흠모하는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의 프로방스 시절의 그림들을 연작으로 만나볼 수 있다. ‘내 마음의 안식처’에서는 삶에 대한 사랑을 담은 작품들을 선보인다. 책을 사랑하는 화가가 그려낸 자신의 서재와 책 읽기 가장 편안한 안락의자, 연인들의 가장 뜨거운 사랑의 순간들, 아이들의 가장 행복한 순간, 자연과 정원이 주는 평화까지. 일상이 주는 소중한 선물 같은 순간들을 선사한다.다비드 자맹의 ‘Lecteur 2022’(사진=한국경제신문).
2023.01.10 I 이윤정 기자
책 내음 가득한 갤러리…박영 출판사 70년 역사 고스란히
  • 책 내음 가득한 갤러리…박영 출판사 70년 역사 고스란히
  •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넓을 박, 꽃부리 영(博英)’. ‘넓게 인재를 양성한다’는 뜻을 지닌 박영 출판사는 1952년 ‘대중문화사’라는 명칭의 출판사로 시작해 70년의 세월을 한국의 근현대문화사와 함께했다. 파주출판단지 1호 갤러리인 ‘갤러리 박영’은 안종만 박영사 회장이 미술문화에 깊은 뜻을 가지고 시작한 갤러리다. 70년만큼은 아니지만 갤러리 박영도 올해로 개관 15주년을 맞이했다.박영 출판사의 70주년 뿌리를 되짚어보고 숨은 미술 사랑을 엿볼 수 있는 특별 기념전 ‘두레 문화, 박영 70’이 2월 15일까지 경기 파주출판단지 내 갤러리 박영에서 열린다. 갤러리는 현재 안종만 회장의 딸 안수연 대표가 맡아 운영하고 있다. 최근 갤러리 박영에서 만난 안수연 대표는 “2008년 갤러리 박영을 개관할 때 파주 출판단지 안에는 갤러리가 한 곳도 없었다”며 “본사는 물론이고 갤러리도 운영이 쉽지 않았던 상황에서 묵묵히 이어갈 수 있었던 배경은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예술에 대한 애정 어린 DNA가 아닐까한다”는 생각을 밝혔다.오재우 작가가 경기 파주시 갤러리박영에서 작품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두레는 원시적 유풍인 공동노동체 조직. 농촌사회의 상호 협력, 감찰을 목적으로 한다. 이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변의 이웃과 함께 힘을 합침으로써 과업을 성취하는 한민족의 유구한 공동체 정신을 표상하는 문화다. 안 대표는 “박영사 70년을 압축하는 키워드로 두레 정신을 선정했다”며 “국가와 민족 공동체를 위해 박영사가 힘 써왔던 정신을 기리고자 했다”고 의미를 뒀다.박영 출판사는 민법총칙, 경제학 원론 등 다양한 학술서를 펴낸 출판사로 유명하다. 경영진은 3대에 걸쳐 미술품을 수집하고 15년째 갤러리를 운영할 정도로 미술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출판사의 역사를 모태로 한 만큼 이번 특별전에는 박영사의 책을 주제로 한 다양한 작품이 전시된다. 오재우 작가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진 작품을 선보인다. 1950∼1980년대 출간된 박영사 수장고 속 빛바랜 책 가운데 70권을 추리고 촬영했다. 오 작가는 “책은 오래되고 색이 변하지만, 그 안의 내용이나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했다”며 “책을 직접 보고 오래된 책의 냄새까지 느낄 수 있도록 책들도 함께 배치했다”고 설명했다.창립자인 고(故) 안원옥 회장이 남긴 고미술 컬렉션도 공개한다. 고종의 어진을 그린 심전 안중식의 그림부터 안중근 의사가 중국 뤼순 감옥에서 간수에게 남긴 서예 작품까지 한자리에 모았다. 작품에는 ‘황금백만량불여일교자(황금 백만 냥도 자식 하나 제대로 가르침만 못하다)’라고 써있는데 이를 통해 실력을 양성시키려는 안중근의 교육자적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안중근 의사의 서예 작품(사진=갤러리 박영).소치 허련, 청전 이상범, 연담 김명국 등의 그림도 전시해놓았다. 구본민 큐레이터는 “허련 선생은 김정희 선생의 제자로 그의 작품에선 진한 먹감의 특징이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상범 작가의 경우 동아일보 기자 재직 당시 마라토너 손기정의 일장기를 지운 일화로 유명하다”며 “화가로 변신한 후에는 서양화의 데생을 동양화에 차용해 수묵실경산수화를 그렸다”고 했다. 이동춘 작가는 박영사의 책을 층층이 쌓아 훈민정음 해례본 이미지를 덧씌워 촬영한 뒤 1.4m 길이 한지에 인화한 ‘박영의 역사’를 선보였다. 이 작가는 “고미술품과 어떤 사진을 연결하면 좋을지 고민을 많이 했다”며 “파주에 있는 한옥에서 ‘형설지공’을 표현해보고 싶어서 박영사의 책과 호롱불을 콜라보해서 작업했다”고 말했다.토마스 엘러는 박영사에서 출간한 ‘경영전략’ 도서를 확대해 3차원적으로 그려낸 ‘더 바운티’를 작업했다. 이외에도 이지현 작가가 박영사 책을 뜯어서 만든 ‘드리밍 북’을 비롯해 임상빈, 랠프 플렉, 조나단 켈런 등 국내외 작가들이 책 또는 도서관을 소재로 만든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이동춘 작가의 ‘박영의 역사’(사진=갤러리 박영).
2023.01.03 I 이윤정 기자
박보균 장관 "K콘텐츠 비상 위해 문체부가 날개 달 것"
  • [신년사]박보균 장관 "K콘텐츠 비상 위해 문체부가 날개 달 것"
  •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장관은 “2023년 윤석열 정부의 국정철학은 문화·체육·관광 정책 안에서 더욱 선명해질 것”이라며 “정부 출범 2년 차를 맞아 구체적인 성과를 창출하는 해로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고 말했다.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사진=문체부)박 장관은 1일 계묘년(癸卯年) 새해를 맞아 발표한 신년 인사말을 통해 “윤석열 정부의 국정 깃발은 ‘자유’와 ‘연대’이다”라며 “자유 정신 아래서 우리의 과감한 혁신과 도전 정신은 살아 숨 쉬는 정책으로 태어난다”며 이같이 밝혔다.박 장관은 “2023년에도 ‘약자 프렌들리’ 정책의 확산은 계속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예비·청년·신진 예술인 맞춤형 지원 △장애예술인 표준 공연장·전시장 조성 △방송 스태프들의 정당한 대가 보장 △문화누리카드·스포츠강좌 등 취약계층 문화스포츠 활동 지원 확대 등을 약속했다.K콘텐츠 분야 지원도 강화한다. 박 장관은 “전 세계인이 열광하는 케이-콘텐츠의 더 높은 비상을 위해 문체부가 날개를 달아드리겠다”며 “콘텐츠 기업들이 다양한 금융·세제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지원 정책을 정교하게 다듬고, 3년간 콘텐츠 융복합 미래인재를 1만 명 육성하며, 3월부터 시행되는 OTT 자체등급분류제도는 도입 취지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차질 없이, 짜임새 있게 준비하겠다”고 전했다.‘2023~2024 한국 방문의 해’도 추진한다. 박 장관은 “2023년은 대한민국이 관광대국으로 가는 원년”이라며 “관광과 케이-컬처의 독보적인 융합, 매력적인 볼거리, 편리하고 안전한 관광으로 민관의 유기적 협력을 이끌고 한국 여행을 ‘세계인의 버킷리스트’로 각인시키겠다”고 말했다.지난해 개방한 청와대에 대해선 “서울의 상징적인 랜드마크로 작동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청와대 주변과 연계해 “독보적인 볼거리, 이야깃거리, 먹거리를 갖춘 관광클러스터로 본격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2030자문단 등을 통해 “젊은 세대의 예술적인 독창성, 파격, 감수성, 도전의 투혼을 정책에 담아내겠다”고 다짐했다.다음은 박 장관의 신년 인사말 전문이다.국민 여러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박보균입니다. 반갑습니다.2023년 계묘년(癸卯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국민 여러분 모두 새해에는 늘 건강하시고, 올해가 새로운 꿈에 도전하여 그 꿈을 성취하는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문화번영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2022년은 거침없이 확장되는 대한민국의 문화적 위상에 가슴 뜨거워지는 한 해였습니다.지난달 막을 내린 카타르 월드컵에서 비티에스(BTS) 정국이 공연한 ‘드리머스’ 무대는 월드컵을 꿈의 제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꿈의 무대는 케이-팝의 압도적인 글로벌 위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꿈의 무대에서 우리 축구 대표팀은 불굴의 의지와 투혼으로 16강 진출의 꿈을 성취했습니다.영화 ‘헤어질 결심’과 ‘브로커’는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각각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의 쾌거를 거두었으며, 오티티(OTT)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미국 에미상 6관왕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 첼리스트 최하영,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는 케이-클래식의 지평을 거침없이 확장하고 있습니다.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그림책 작가 이수지, 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의 소설 ‘저주토끼’는 한국문학의 저력을 보여주었습니다.2022년 문체부는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언급한 ‘자유’와 ‘연대’, 그리고 ‘공정한 문화의 접근 기회 보장’을 문화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청와대는 단순한 개방에 그치지 않고 문화예술, 대통령 역사, 수목원, 전통문화재를 담고 있는 거대한 ‘역사문화예술복합공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소수가 은밀하게 감상해왔던 청와대 예술품을 국민 누구나 즐길 수 있게 하고, 43년간 대통령이 머문 공간에서의 리더십, 삶, 권력 심장부를 국민이 실감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윤석열 정부는 약자 프렌들리 정부, 문체부는 장애인 프렌들리 부처입니다. 국민 품속 청와대의 첫 번째 행사인 장애예술인 특별전에는 20일 동안 7만 명이 다녀갔습니다. 역대 정부 최초로 장애예술인 문화예술활동 지원 기본계획을 수립해, 장애인 예술계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문화는 산업입니다. 케이-콘텐츠는 어느새 우리의 수출 주력 상품이 됐습니다. 2021년 기준 콘텐츠 수출액(124.5억 불)은 가전제품(86.7억 불), 전기차(69.9억 불), 디스플레이 패널(36억 불)을 추월하여 수출시장의 떠오르는 스타로 자리매김했습니다.관광 분야에서는 제7차 국가관광전략회의를 개최하였습니다. 코로나19로 극심한 침체를 겪었던 관광산업 생태계 복원을 위해 전문가들을 모시고 케이-컬처와 함께하는 윤석열 정부의 케이-관광 전략과 비전을 수립하여 발표했습니다.윤석열 정부의 공정과 상식, 자유와 통합은 스포츠에서 펼쳐져야 합니다. 제2의 신유빈이 생기지 않도록 현실과 동떨어진 스포츠혁신위 권고안을 체육계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여 개선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2023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유치를 위해서도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비록 유치에는 실패했지만 “축구는 축제다”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문화와 스포츠가 함께하는 축제의 방향을 제시했습니다.2023년, 윤석열 정부의 국정철학은 문화·체육·관광 정책 안에서 더욱 선명해질 것입니다. 정부 출범 2년 차를 맞아 구체적인 성과를 창출하는 해로 만들어 나가고자 합니다.윤석열 정부의 국정 깃발은 ‘자유’와 ‘연대’입니다. 자유 정신 아래서 우리의 과감한 혁신과 도전정신은 살아 숨 쉬는 정책으로 태어납니다. 문화·체육·관광 현장에 계신 분들이 독창성, 자율성, 파격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문체부 구성원 모두가 열정적으로 업무에 임할 것입니다. 2023년에도 ‘약자 프렌들리’ 정책의 확산은 계속됩니다. ‘연대’의 가치는 약자와 함께할 때 더욱 빛납니다. 예비·청년·신진 예술인 맞춤형 지원으로 미래 예술의 동력을 확보해 나갈 것입니다. 장애예술인 표준 공연장, 전시장 조성으로 장애예술의 창작·유통 환경도 획기적으로 개선합니다. 케이-컬처의 빛나는 조연인 방송 스태프들이 정당한 대가를 누리도록 공세적으로 뒷받침하겠습니다. 문화누리카드, 스포츠강좌 등 취약계층의 문화스포츠 활동 지원을 대폭 확대할 것입니다.전 세계인이 열광하는 케이-콘텐츠의 더 높은 비상을 위해 문체부가 날개를 달아드리겠습니다. 콘텐츠 기업들이 다양한 금융·세제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지원 정책을 정교하게 다듬고, 3년간 콘텐츠 융복합 미래인재를 1만 명 육성합니다. 3월부터 시행되는 오티티(OTT) 자체등급분류제도는 도입 취지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차질 없이, 짜임새 있게 준비하겠습니다.2023년은 대한민국이 관광대국으로 가는 원년입니다. 2023~2024 한국 방문의 해가 시작됩니다. 문체부는 케이-관광의 3대 추진전략을 3C 전략으로 삼았습니다. 관광과 케이-컬처의 독보적인 융합(Convergence), 매력적인 볼거리(Charming attractions), 편리하고 안전한 관광(Convenience) 입니다. 민관의 유기적 협력을 이끌고 한국 여행을 ‘세계인의 버킷리스트’로 각인시키겠습니다.개방된 청와대는 서울의 상징적인 랜드마크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청와대를 중심으로 경복궁과 광화문, 주변 미술관과 박물관, 북촌과 서촌 등 고품격의 독보적인 볼거리, 이야깃거리, 먹거리를 갖춘 관광클러스터로 본격 조성하겠습니다.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청년간담회에서 “청년의 생각과 아이디어를 우리가 수용하고, 청년들이 국가 업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하셨습니다. 문체부도 2030자문단을 꾸려 청년세대의 상상력을 정책에 주입하는 통로를 마련했습니다. 문화·체육·관광의 무대는 각 분야 청년들의 열정과 비전을 통해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습니다. 젊은 세대의 예술적인 독창성, 파격, 감수성, 도전의 투혼을 정책에 담아내겠습니다.저는 취임 이후 언제나 현장을 강조해왔습니다. 올해는 더 자주 문화예술·체육·관광 세계에 계신 분들을 뵙고 현장의 목소리를 짜임새 있는 정책으로 펼치겠습니다.2023년에도 문체부는 국민 속에서, 문화·체육·관광 현장 속에서 세계일류 문화매력국가를 향한 도약과 번영에 앞장서겠습니다.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감사합니다.2023년 1월 1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박보균
2023.01.01 I 장병호 기자
현대미술과 클래식이 만났다…세계디지털아트페어 초대작가전
  • 현대미술과 클래식이 만났다…세계디지털아트페어 초대작가전
  •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현대미술과 클래식이 만난 ‘세계디지털아트페어(WDAF) 초대작가전’이 오는 28일부터 31일까지 용인 포은아트갤러리에서 열린다. ‘그림을 노래하다’를 주제로 개최되는 이번 전시에는 권태원, 원종신 작가와 소프라노 김황경, 메조소프라노 변지현, 피아니스트 한미연이 함께한다. 개막일에는 원종신 디렉터가 그림을 해설하고, 그림과 연상되는 노래가 연주되는 방식의 살롱 콘서트가 진행된다. 권태원 작가는 2018년 그림책 ‘시간선물’로 경기콘텐츠진흥원 히든 작가에 선정됐으며 다수의 아트페어와 개인전으로 대중과 만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2070 기다림’이라는 작품을 통해 2070년 우주로 이주하는 신인류의 감성과 생각을 연출했다. 송은문화재단과 소마 미술관 아카이브 작가로 선정된 원종신은 회화와 사진, 컴퓨터 세 가지 영역의 접합을 통해 새로운 형식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원 작가의 ‘Dreaming tree’는 기억에 대한 이미지를 조합해 작품을 구성했다.전시를 주관한 ABS 갤러리 관계자는 “5인의 정상급 미술가와 음악가들이 꾸미는 콜라보 무대를 통해 새로운 예술적 영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22.12.23 I 이윤정 기자
집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의 탐험하기
  • 집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의 탐험하기 [여섯번 째 수수께끼]
  • [이데일리 김현아 기자]편석준 작가이데일리는 IT적인 상상력을 키우는데 지혜를 주는 편석준 작가의 칼럼을 매주 월요일 연재하려 합니다. 그는 세상의 디지털전환을 앞당기는데 전사 역할을 하게 될, 아이들의 사고력을 높이는데 관심이 많습니다. 아이들의 사고력을 높이는 방법은 많지만, 아이들에게 직접 기획적 사고를 해보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편 작가는 이데일리를 통해 <아빠와 함께 풀어보는 수수께끼들-주기장(週企帳)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편집자주>출처 : 특허, (구글) 가상 현실 탐사를 위한 리더 디바이스 및 참가자 디바이스들을 포함하는 시스템들, 구글엘엘씨상희 가족은 아빠, 엄마, 아들 상희 세 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겨울방학이 끝날 때쯤 회사 발령으로 엄마는 제주도에서 일 년 정도 일하게 되었다. 대신 아빠는 육아휴직을 내고 상희를 돌보기로 했다. 아빠는 일 년 동안 상희와 마음껏 놀 생각도 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상희를 어떻게 하면 잘 가르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저 돈만 내고 걱정하면서, 스트레스 받는 것을 노력했다고 자위하면서 이런저런 학원에만 보내면 될까? 아빠는 평소에도 “생각하는 법”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열 살이 된 아들에게 직접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주기장(週企帳)이었다. 일주일에 하나씩 ‘기획(企劃)’을 해보고 기록하는 공책이란 뜻이었다. ‘기획’이란 현실 위에 미래를 꿈꾸며 그리는 그림이었다. 생각이 먼저 있은 다음에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아빠는 상희가 주기장을 처음 접해보기 때문에 의욕을 돋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기장을 작성해야 매주 용돈을 주기로 했고, 나중에 비싼 물건을 살 수 있도록 상희 이름으로 된 통장에 별도의 적립금도 입금해주기로 했다. 적립금은 일종의 보너스로 보너스 지급 여부와 금액은 아빠가 결정하기로 했다. 아빠와 상희는 본 내용으로 계약서를 작성했고 서로 지장을 찍었다. 그리고 서두에 “주기장은 상희가 아빠에게 돈을 내고 배워야 정상이지만, 아직 상희의 나이가 어려 경제활동이 어렵고 혈연관계임을 감안해 특별히 무상으로 교육함을 밝힌다.”라고 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 ‘기획’이란 말은 아이에게 어렵기 때문에, ‘수수께끼’란 말을 사용하기로 했다. [본문]“아빠, 내일부터 일주일 동안 학교 나오지 말래.”“친구 몇 명이 감염병에 걸렸나 봐.”“변이 코로나에 걸린 거야?”“아니, 코로는 아닌데 쉽게 전파될 수도 있는 독감 같은 건가 봐.”입학식 때 본 교장 선생님 얼굴이 떠올랐다. 의지에 강해 보이는 눈빛과 장년임에도 단단해 보이던 몸집, 그는 입학식 때 학생의 건강과 안전사고 방지를 최우선으로 하겠다고 선언했었다. 어쩐지 상희가 시무룩해 보였다. 코로나 대유행 시절 학교를 거의 1년 가까이 나가지 않고, 온라인으로 수업 들었던 그때도 표정이 늘 좋지 않았었다. 처음에는 학교를 안 가도 된다는 사실에 좋아했지만, 뒤로 갈수록 짜증 내는 일이 잦아졌다. 아빠는 상희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이면서 말했어요.“상희야, 이번 주를 우울하게 보내지 말고, 이 상황과 관련된 수수께끼를 풀어보면서 나름 즐겁게 보내려고 노력하면 어떨까?”아빠도 이번 기회에 상희가 집에만 있어야 하는 상황일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보고 싶었어요. “여섯 번째 수수께끼 나갑니다.”■ 수수께끼 6 : 집에서 선생님,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고 얘기하고, 또 놀 방법은 없을까요? 화상회의나 가상현실 등을 키워드로 상희가 직접 조사하고 나름의 방법을 생각해보세요. 상희는 집 근처의 도서관에도 자전거를 타고 스스로 가고, 온라인으로 검색도 많이 하는 것 같았어요. 다음번 수수께끼는 자료 검색과 관련된 것을 해야겠다고 아빠는 생각했어요. 자료를 한참 찾고 검색하던 날은 작업이 끝나고 그대로 쉬었지만, 다음날부턴 며칠 동안 자료를 읽어보고 다시 추가 자료를 찾는 것 같았어요. 아빠가 기대하지 못한 효과였어요. 그리고 목요일에 상희는 주기장을 들고 왔어요. 아무것도 아닌 것을 넘기는 듯한 시크한 표정이었지만, 이번엔 상희가 공을 꽤 들인 만큼 상희의 눈빛에서 자신감과 긴장감이 깃들여 있는 것을 아빠라서 눈치챌 수 있었어요. 아빠 역시 기대하고 주기장을 펼쳐보았어요. 이번엔 수수께끼도 아빠의 말을 그대로 옮겨 적지 않고, 자신 나름대로 정리하고 요약했어요. 그리고 주기장의 목차도 바뀌어 있었어요. 원래는 수수께끼/해결 방법/문제점/문제점을 생각한 이유/문제점 해결책 순서대로 적게 했지만, 이는 주기장을 쓰는 처음부터 헤매지 않도록 한 장치였을 뿐이고, 주기장 목차도 그때 상황에 맞게 상희가 바꿔 쓰면 되는 거였거든요. 벌써 주기장의 효과가 클 수는 없을 거라고 아빠는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일에 일희일비하지 말자고 다시 다짐했어요. 적어도 1년 이상은 해야 효과가 나올 것이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적어도 3년은 해야 입시나 평생 학습을 위한 기본기를 닦을 수 있을 거라고 아빠는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 수수께끼 6 : 집에서도 학교에서처럼 공부하고 노는 방법 생각해보기● 해결 방법을 생각한 배경 : 아무리 생각해봐도 진짜 선생님, 친구들과 있다는 기분이 드는 게 중요한 것 같다. 화상회의는 아무래도 진짜 같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PC 화면 속 친구들의 얼굴은 조그만 격자 속에 들어가 있어, 정말 떨어져 있다는 생각만 오히려 들게 한다. 그리고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내 방이 그대로 보이니까. 가상현실이란 키워드로 여러 자료를 찾아봤다. 안대 같은 디스플레이를 장착하면 진짜 놀이공원, 미술관에 간 기분이 든다고 한다. 그런 현실감 때문에 소방관들과 의사들은 가상현실 장치를 통해 훈련을 하기도 한다. ● 해결 방법 : 선생님, 학생들이 모두 특정한 가상공간에서 만나는 것이다. 각자 가상현실 장치를 쓰고, 특정한 채팅방에서 만나듯 특정한 가상공간에 접속해 만나는 것이다. ● 문제점 1 : 굳이 교실 같은 곳을 가상현실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교실에 못 가서 가상현실을 만들어 공부하는 것이지만, 이왕에 만들 거면 칠판 있는 교실 말고 다른 곳을 배경으로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 문제점 2 : 기본적으로는 공부하려고 가상현실에 모인 것인데, 우리가 제멋대로 가상현실 공간에서 흩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문제점 해결책 : 공란문제점 해결책에는 “공란”이라고 쓰여 있었어요. 아무것도 쓰지 않았지만, 아빠는 오히려 더 기뻤어요. 해결책을 제시하고 싶어 했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아빠는 이번에는 주기장 오른쪽에 바로 글을 쓰지 않고, 아빠는 공부하는 시간을 조금 가졌어요. 상희가 궁금해할 만한 내용을 찾아보려고 애썼어요. 구글의 특허 중에 “가상 현실 탐사를 위한 리더 디바이스 및 참가자 디바이스들을 포함하는 시스템들”의 내용이 상희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아빠는 주기장 오른쪽에 상희가 생각한 문제점 1, 2, 3에 대해 특허 내용을 적어주었어요. 특허 내용이 정답은 절대 아니니, 참고만 하고 더 생각해보라는 코멘트와 함께. ● 문제점 1 : 굳이 교실 같은 곳을 가상현실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교실에 못 가서 가상현실을 만들어 공부하는 것이지만, 이왕에 만들 거면 칠판 있는 교실 말고 다른 곳을 배경으로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 → (구글 특허 내용) 교사와 학생들이 가상현실에서 만날 때에는 세계 곳곳의 산호초, 우주 공간, 세계 7대 불가사의, 세계 곳곳의 박물관 등 미디어가 풍부한 몰입형 가상현실 탐사를 즐길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고, 구독형 시리즈로 만들어 학기 내내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가능하다. ● 문제점 2 : 기본적으로는 공부하려고 가상현실에 모인 것인데, 우리가 제멋대로 가상현실 공간에서 흩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 (구글 특허 내용) 교사가 학생들이 학습에 몰입할 수 있도록 별도의 권한을 준다. 각 학생이 착용한 가상현실 장비의 카메라를 통해 시선을 쫓아, 학생들이 과연 교사가 가리키는 것을 잘 보고 있는지 확인하는 권한 같은 것을 주는 것이다. 또 학생들이 질문을 하고 싶으면 가령 엄지손가락을 위로 올리면 그것이 캡쳐돼 교사에게 전달되고 답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편석준 작가는아이와 성인을 대상으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 연습을 돕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책으로 특허동화 『상상이상 미래세상』, 일반동화 『이제 내가 대장이야』 『토끼 손잡이와 여섯 손가락』을 출간했으며, 어른들을 위한 책으로 에세이 『너는 내일부터 치킨집 사장이다』, 인문교양서 『구글이 달로 가는 길』, 소설 『10년 후의 일상』, 경제경영서 『사물인터넷』, 『사물인터넷, 실천과 상상력』, 『가상현실』, 『스타트업 코리아』, 『왜 지금 드론인가』, 『전기차 시대가 온다』 『4차산업혁명 IT트렌드 따라잡기』, 『미래의 직업전망』 등을 출간했습니다.
2022.12.12 I 김현아 기자
그림이 삶이고 삶이 곧 그림
  • [책]그림이 삶이고 삶이 곧 그림
  •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한국의 옛 그림 속에서 삶과 문화를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면면히 전해져 내려오는 불교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책이다. 여행사에서 근무하던 저자는 마흔 무렵 우연히 한국 미술과 옛 그림에 매료돼 미술관, 고서화점 등을 찾아다니며 한국미술 연구에 몰두해왔다. 현재 미술학 박사로 예술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는 저자는 ‘그림이 삶이고 삶이 곧 그림’이라는 생각으로 이번 책을 집필했다.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그림을 볼 때도 통한다. 특히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한국 옛 그림에 담긴 불교 정신이다. 위기 때마다 한국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담당한 것이 불교 정신이라는 생각에서다. 빛바랜 옛 그림에 담긴 메시지는 현대적 관점으로는 제대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이에 저자는 120여 점의 그림이 그려진 시대로 가서 오래된 풍경을 생생하게 복원해 내고, 그림이 그려지게 된 사상적 배경과 그림 속 상징을 살펴보며 인문·철학·종교를 아우르는 깊이 있는 통찰의 세계로 독자를 안내한다.총 3부로 구성된 책은 각각 ‘마음의 평안’, ‘자연과 생명의 존엄함’, ‘화합과 평등’을 테마로 삼고 있다. ‘협롱채춘’을 통해 조선 후기 여성의 삶을 들여다보고, ‘뇌공도’를 통해 민중의 정신적 기반이 된 토속신앙을 조명하며, ‘오명항 초상’을 통해 두창이 휩쓸던 시대의 풍경을 그려낸다. 또한 ‘노승탁족도’를 통해서는 세속에서 벗어난 선비의 초탈한 마음을 되짚어 본다.이를 통해 저자는 옛 그림 속에 당대의 역사와 풍속, 세태뿐만 아니라 현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면면히 전해져 내려오는 가르침과 깨달음의 열쇠가 숨어 있음을 전한다. 더 나아가 그림이 삶에 대한 수행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현재 한국문화예술조형연구소 연구이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데일리에서 ‘손태호의 그림&스토리’를 연재하기도 했다.
2022.12.07 I 장병호 기자
①21만점 떠도는데 환수는 0.5%…왜 돌아오지 못하나
  • [나라밖 문화재]①21만점 떠도는데 환수는 0.5%…왜 돌아오지 못하나
  •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나라밖 우리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얼마 전 그룹 방탄소년단(BTS) 리더 RM은 국외소재 문화재 보존·복원과 활용해 써달라며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2년 연속 1억원을 기부해 관심을 환기시켰다. 이와 맞물려 국립중앙박물관은 프랑스에 약탈당했다가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의 귀환 10년을 기념한 특별전을 이달 1일 개막해 관심을 더했다. 외규장각 의궤 297책 전권이 공개되는 것은 2011년 이후 처음이다.나라밖 문화재는 여러가지 이유로 우리나라 영토 밖으로 나가 있는 문화재를 지칭하는 말로 국외소재 문화재로도 부른다. 현재 각 국가별로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는 21만4208점에 이른다. 각국의 박물관·미술관 소장품에서 공식 확인된 숫자로 개인소장품 등 미공개 문화재를 포함하면 실제로는 2배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별로는 △일본 9만4341점(44%) △미국 5만4185점(25%) △독일 1만5402점(7%) △중국 1만3000점(6%) 등이다. 4개국에 83%인 17만6928점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문화재는 고고학, 역사학, 예술, 민속, 생활양식 등이 축적돼온 인류 문화활동의 소산이다. 우리의 문화를 지키고 역사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중요한 가치를 지녔다. 한국미술사연구소 소장인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는 “문화에 대한 투자를 하지 않으면 국가는 아주 낮은 수준으로 전락해 버린다”며 “문화재 환수는 곧 잃어버린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국외에 있는 문화재 21만점이 모두 환수 대상은 아니다. 문화재가 해외로 나가게 되는 경로는 문화 교류나 구입·교환·기증 등 합법적인 경로와 약탈과 분실, 도난 등 불법적인 경우가 있다. 불법적인 경로로 반출됐다면 환수의 대상이지만, 합법적으로 해외에 나갔다면 우리 문화를 알리는 순기능도 있기에 환수 대상은 아니다.국외 문화재 환수는 국제법상 강제 수단이 미비할 뿐 아니라 국가들간의 정치·경제·문화적 이해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쉽지 않은 문제다.외규장각 의궤 중 ‘효종국장도감의궤(상)’(사진=국립중앙박물관).◇협상·경매 통해 환수…기업·개인이 힘 보태기도해외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를 환수하는 방법은 대략 세가지로 요약된다. 민간과 정부가 힘을 합쳐 해당 국가에 요구하는 방법, 유물을 소유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해당 국가에 돌려주는 방법, 그리고 경매 등 매입을 통해 들여오는 방법이다.정부 간 협상에 의한 것은 2011년 ‘한일 도서협정’에 의해 일본 궁내청에서 보관하던 조선왕실의궤를 비롯한 도서 1205점을 들여온 것이 대표적 사례다. 미국 정부가 2014년 오바마 미국 대통령 방한에 맞춰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반출됐던 대한제국 국새 등 인장 9점을 반환한 것도 정부 간 협상의 성과다.해외 유물은 대다수가 개항기와 일제강점기, 6·25전쟁 중에 불법으로 흘러나갔다. 오대산사고에 보관돼 있던 조선왕조실록은 1913년 일본 도쿄제국대학(현 도쿄대학교)으로 불법 반출된 경우다. 불법 반출된 문화재와 관련해서는 유네스코가 1970년 제정한 ‘문화재 불법 반·출입 및 소유권 이전 금지와 예방수단에 관한 유네스코 협약’ 등의 국제 협약이 있지만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화재 약탈국인 강대국들의 비협조와 소급적용 불가 조항 등으로 실효성이 적다는 이유에서다.경매를 통해 최근 국내로 돌아온 문화재로는 조선시대 보물급 그림인 ‘독서당계회도’가 있다. 16세기 선비들이 뱃놀이를 즐기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으로, 당초 소장자인 일본인 간다 기이치로(1897∼1984·교토 국립미술관 초대 관장)의 사망 이후 다른 일본인이 갖고 있다가 지난 3월에 열린 미국 경매 시장에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서 해당 내용을 파악한 후 입찰에 나서 매입에 성공했다. 낙찰가는 69만 3000달러(한화 9억 8322만원)였다.민간 기업과 개인이 환수에 힘을 보태기도 한다. 게임사 라이엇게임즈는 최근 영국을 떠돌던 조선왕실 유물인 ‘보록’의 환수를 지원한 것을 비롯해 ‘석가삼존도’ 등 지금까지 여섯 번의 국외 문화재 환수를 지원했다. 일본 도쿄에서 ‘청고당’을 운영하는 재일동포 김강원 씨는 지난 9월 ‘백자청화 김경온 묘지’와 ‘백자철화 이성립 묘지’를 일본에서 매입해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무상으로 기증하기도 했다.재일동포 김강원 씨가 매입해 기증한 ‘백자청화 김경온 묘지’(사진=국외소재문화재재단).◇실태조사 인력 태부족…“사안 따라 실적 달라”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총 1만855점의 문화재가 국내로 돌아왔다. 환수경위별로 살펴보면 공공기관(정부기관, 지자체)의 환수문화재는 총 1만13건으로 △협상 3305건 △구입 516건 △기증 6180건 △수사공조 12건이었다. 민간(개인, 사립박물관)의 경우 총 842건의 환수문화재 중 △기증 458건 △구입 351건 △협상 33건 순이었다. 특히 지난 10년간(2012~2021년)의 환수 실적은 1086건으로 전체의 0.5%에 불과했다. 2019년과 2020년에 각각 349점과 344점이 환수됐으나 지난해에는 열한 점에 그쳤다.문화재청 관계자는 “문화재 환수의 경우 건수로만 평가해서는 안된다”며 “문정왕후 어보의 경우 한건을 회수하는데 7년이 걸렸지만, 조선왕조 도서는 1200여점이 한번에 환수되는 등 사안에 따라 연도별 실적이 달라진다”고 설명했다.국외 문화재 환수작업에 앞서 선행돼야 할 것은 면밀한 실태조사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2012년 출범 이후 10년간 전체의 22%에 불과한 4만7103점만을 조사했다며 지난 국정감사에서 지적을 받기도 했다. 실태조사 전담 인력은 단 2명에 불과하다.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지원활용부장은 “매년 실태조사를 통해 우리의 중요한 문화재가 어디에 흩어져 있는지 조사할 예정”이라며 “환수해야 할 문화재에 우선순위를 두고 꼭 국내로 들여와야 하는 문화재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방법을 강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국가별 국외소재문화재 현황 통계(자료=국외소재문화재재단).국가별 국외소재문화재 현황(자료=국외소재문화재재단).
2022.11.29 I 이윤정 기자
'사라져버린 물글씨'가 '버릴 수 없는 것'에 묻는다<6>
  • '사라져버린 물글씨'가 '버릴 수 없는 것'에 묻는다[정하윤의 아트차이나]<6>
  • 국제무대에서 크게 주목받는 개념미술가인 쑹둥의 ‘버릴 수 없는’(Waste Not·2005). 2009년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개인전에 출품했을 당시 설치전경이다. 쑹둥은 공연·설치·비디오·조각·회화·서예 등을 비롯해 다양한 매체를 결합하는 작업으로 가는 곳마다 파란을 일으켜왔다. 어머니가 평생 모은 잡다한 일상용품을 통째 옮겨내 자신의 가정사까지 드러낸 이 작품은 ‘쑹둥’이란 이름을 세상에 알린 대표작이 됐다. 한국과도 인연이 깊어, 2006년 광주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버릴 것 없는’이란 작품명으로, 산업화로 급변하는 중국인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가변크기, ⓒ쑹둥·페이스갤러리 제공.중국 그림을 보지 못한 지 한참입니다. 한국 미술시장이 자못 뜨거웠던 지난해와 올해, 세계의 작가와 작품이 우리를 기웃거리던 때도 중국은 없었습니다. 중국 ‘큰손’ 컬렉터의 규모와 수가 미국을 제쳤다는 얘기도 이미 2~3년 전입니다. ‘으레 미술은, 그림은 그런 것’이라며 반쯤 우려하고 반쯤 체념했던 한국화단을 뒤흔든, 기발한 감수성으로 뒤통수를 내리쳤던 중국 작가들이 하나둘 사라졌습니다. 예술을 예술이 아닌 잣대로 들여다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술에 기대하는 희망 역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정치에도 경제에도 답이 없다 생각할 때 결정적인 열쇠를 예술이 꺼내놨습니다. 오랜시간 미술사를 연구하며 특히 중국미술이 가진 그 힘을 지켜봤던 정하윤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지점 그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때마침 ‘한중 수교 30주년’입니다. 다들 움츠리고 있을 때 먼저 돌아보는 시간이고 먼저 찾아가는 길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깊고 푸른 ‘아트차이나’로 안내합니다. <편집자 주> [정하윤 미술평론가] 스산한 늦가을이다. 꽃이 시들고, 나무가 우수수 낙엽을 떨구는 계절. 눈에 보이는 많은 것이 소멸하는 이때면 생각나는 미술가가 있다. “삶이 곧 작업”이라 말한 중국 미술가 쑹둥(宋冬·56)이다. 1966년 베이징에서 태어나 어느덧 국제적인 작가로 우뚝 선 쑹둥. 젊은 시절 그는 ‘사라짐’을 작업의 주제로 삼았다. 예를 들면 ‘물로 쓴 일기’(1995∼). 작품명이 그렇듯, 이 작업에서 쑹둥은 매일 일기를 썼다. 먹이 아닌, 물만 묻힌 붓을 들고. 종이가 아닌, 돌 위에. 하지만 붓에는 물만 묻어 있기에 아무리 열심히 써도 돌 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기억하기 위해 쓰는 하루가 그렇게 사라진다. 1990년대 쑹둥의 작업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주전자에 담긴 뜨거운 물을 흘리며 베이징의 좁은 골목을 달리거나 골목의 흙바닥에 물 묻은 붓으로 시각을 썼다. 발이 닿는 방향으로 남겨지던 물의 선은 금세 사라졌고, 순간을 붙잡으려는 듯 써내려간 숫자도 금방 증발해버렸다. 사라지는 것들을 그는 애써 잡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 과정을 카메라로 담을 뿐. 물 묻은 붓으로 글자나 숫자를 쓰는 것은 중국의 오랜 전통이다. 쑹둥은 어릴 때 그 전통을 따라 붓에 물을 묻혀 한자를 쓰며 글을 배웠다. 유년의 기억은 성년의 퍼포먼스 작업이 됐다. ◇중국 전통 따른 유년의 기억, 퍼포먼스 작업으로 연결 1990년대 국제 미술계에서 퍼포먼스는 이미 흔한 방식이었지만, 중국에서는 완전 새로운 것이었다. 30년 가까이 외부와 교류가 차단된 채 오직 정치적 구호를 전면에 드러낸 구상회화만이 미술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마오쩌둥의 사망 이후였다.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했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서양미술에 대한 정보가 한번에 쏟아져 내렸다. 마치 댐의 수문이 열린 것처럼. 인상주의자 클로드 모네부터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까지, 다다이스트 마르셀 뒤샹부터 대지미술가 크리스토 부부까지. 더 자유로운 내용과 새로운 형식을 갈구하던 중국의 젊은 미술가들은 100년에 걸친 서양미술 모두를 게걸스럽게 탐식했다. 수많은 방식 중 쑹둥은 퍼포먼스를 취했다. 퍼포먼스의 미술이라면, 물 묻은 붓으로 글씨를 쓰던 유년의 행위도 예술일 수 있었던 것이다. ‘퍼포먼스’란 형식이 유년의 기억과 서구의 영향에서 비롯됐다면, ‘사라짐’이란 내용은 성년시절의 체험에 기인한다. 1990년대의 중국은 덩샤오핑의 경제발전계획에 따라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수도 베이징의 변화는 특히나 급격했다. 쑹둥은 후통이라 불리는 베이징의 오래된 골목에 살았는데, 그곳에서는 아침에 서 있던 건물이 저녁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쑹둥은 붙잡을 수 없었다. 변화의 바람은 거대했고, 그는 너무 작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바라보는 일뿐이었다. 허망하게 사라져버리는 것들을 덤덤하게 시각화하는 쑹둥의 작업은 그렇게 탄생했다. 쑹둥의 ‘물로 쓴 일기’(Water Diary·1995). 중국 아방가르드 예술계의 강력한 주자로 꼽히는 쑹둥이 초기 시절부터 이어온 퍼포먼스. ‘사라짐’이란 주제를 위해 ‘물’을 선택해, 돌 위에 물 묻힌 붓으로 글 쓰는 과정을 기록했다. 퍼포먼스 대부분을 ‘관람객 없이’ 진행해, 행위를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는 사진·영상이다. 사진, 40×60㎝, ⓒ쑹둥·페이스갤러리 제공.그런데 쑹둥의 2000년대를 대표하는 설치작품 ‘버릴 수 없는’(2005)은 전혀 다른 성격을 보인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 거대한 설치작업은 방대한 양의 물건으로 구성돼 있다. 수만가지의 살림살이, 예를 들면 옷, 신발, 치약, 칫솔, 페트병, 의자, 책, 비닐봉지, 펜, 손목시계, 머리빗, 병뚜껑, 보온병, 망치 등등. 말하기도 구차한 자질구레한 일상의 잡기들이 작품의 재료이자 주제다. 하나의 종류가 수십, 아니 수백개를 이루는 것도 있다. 모두 낡고 오래된 것이다. 신발만 해도 할머니의 것부터 조카의 것까지 아우른다. 한 사람이 모은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양이지만, 이 모두는 쑹둥의 어머니가 직접 모아 오랜 시간 간직해온 물건이다. 엄마와 아들이 어쩜 이렇게 다를까. 어머니가 아무것도 버리지 못했던, 어떤 것도 사라지게 놔두지 못한 이유는 뭘까. 쑹둥의 어머니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그 시대 여느 가정처럼 마오의 시절에 급격히 쇠락했다. 남편마저 반동분자로 몰려 ‘재교육’을 받기 위해 집을 떠나야 했고, 오래도록 가족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 사이 어머니는 가난을 배웠다. 배급품은 늘 부족했고, 식구들은 항상 배가 고팠다. 정부가 약속했던 풍요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부족하니 아껴야 했다. 다신 갖지 못할 수도 있으니 아무것도 버려서는 안 됐다. 아껴야 잘 산다는 자린고비 정신도 아니고, 추억의 물건을 간직하겠다는 낭만도 아니다. 절박한 상황이 개발한 처절한 생존전략이다. ◇‘아무것도 못버린다’는 처절한 생존전략, 거대 설치로 어머니의 강박은 중국의 수장이 바뀌고 사회가 변해도 계속됐다. 여전히 무엇도 버릴 수 없었고, 물건은 반세기에 걸쳐 켜켜이 쌓여 갔다. 그 물건들이 작품이 된 것은 2002년, 쑹둥의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나면서다. 급작스레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절망에 빠졌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남겨진 물건들 속에 홀로 파묻혀 있었다. 쑹둥은 어머니를 슬픔에서 건져 올리고자 집안의 물건 일부를 정리했다. 어머니가 산뜻하게 새출발하기를 바라는 효심에서였지만, 그녀는 극도로 화를 냈다. 쑹둥은 ‘어떤 것도 버릴 수 없다!’는 어머니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그녀가 모은 물건들을 가지고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쑹둥과 어머니는 일일이 셀 수도 없는 물건들을 종류별로 나누고, 상자에 담아 옮기고, 전시장에서 다시 배치하는 과정을 함께 했고, 아들은 이 작업에 ‘버릴 수 없는’이란 제목을 붙였다. 주어는 생략돼 있지만 관람자는 안다. 그것이 무엇이라도 버릴 수 없던 쑹둥의 어머니, 나아가 무엇도 버릴 수 없던 그녀의 세대라는 것을. 쑹둥은 이 작품을 처음 선보이는 전시에서 “걱정마세요 아버지, 저희는 잘 있어요”란 문장을 벽면에 적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안심시키는 문장이지만, 곁에 있는 어머니를 위로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떠나보내지 못하던 어머니는 2009년에 세상을 떠났고, 쑹둥은 이제 작품을 통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억한다. 증발해버린 물의 흔적을 기억하는 것과 꼭 같은 방법으로. 둥의 ‘같은 침대 다른 꿈 No.3’(2018). 중국 도시개발사업 때 철거된 개별 가옥에 있던, 실제 가정에서 사용한 문짝·창문·조명 등을 모아 제작했다. 사소하고 일상적인 소재로 ‘가치 없는 것’을 재조명해 새로운 가치를 찾아가는 쑹둥의 작품세계가 구조물로 섰다. 철·나무창·문·침대·거울·조명·일상잡기·도자기·채색유리, 254.5×224.5×361㎝, ⓒ쑹둥·페이스갤러리 제공.요즘 쑹둥은 사라지는 것들을 모아 견고한 작품을 만든다(‘같은 침대 다른 꿈 No.3’ 2018). 베이징의 재개발로 철거돼 버려지는 문짝이나 창문·조명 등을 모아 크고 작은 조각 또는 구조물을 만드는 거다. 사라지는 것들을 그저 바라만 보던 청년 쑹둥이 아무것도 사라지지 못하도록 몸부림치는 어머니와의 작업을 거쳐 고안한 작품이다. 사라져버리는 것을 붙잡는 그만의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젊은 시절의 그보다는 적극적이고, 어머니보다는 자유스럽다.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물은 증발하고, 꽃은 시들고, 잎은 떨어진다. 영원한 재물이나 명예도 없다. 관계는 변하며, 숨도 언젠가는 사그라진다. 이 모든 사라짐을 대하는 당신은 어떠한가. 1990년대의 쑹둥처럼 무기력한가, 아니면 그의 어머니처럼 강박적인가. 다 사라져 버린다고 체념하자니 삶이 허무하고, 사라지지 못하도록 발버둥치자니 인생이 딱하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태도를 취하겠는가. 이 가을에 쑹둥의 작품이, 떨어지는 낙엽이 묻는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1983년 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고 싶었단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작가는 일찌감치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관심은 한국현대미술이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보려면 아시아란 큰물이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 꼭대기에 있는 중국을 파고들어야겠다 했던 거다. 귀국한 이후 미술사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2022.11.11 I 오현주 기자
'잃어버린 10년'…잊혀져가는 기억 잊어야하는 기억<3>
  • '잃어버린 10년'…잊혀져가는 기억 잊어야하는 기억[정하윤의 아트차이나]<3>
  • 장샤오강의 ‘핏줄-대가족: 가족 no.1’(1993). 중국 현대미술의 4대 천왕(장샤오강, 쩡판즈, 팡리쥔, 웨민쥔)에 드는 작가를 대표하는 연작 중 한 점. 문화대혁명 시절, 가족의 고된 역사를 기억해낸 뒤 중국의 척박한 역사까지 기억해내게 한 작품이다. 어느 날 문득 꺼내든 가족사진에서 발견한 ‘중국인의 얼굴’로, 개인은 없고 집단만 있던 그 시절을 옮겨냈다. 작가 이전까진 없던 새로운 소재와 색·구성, 그러면서도 ‘기억’과 ‘불안’이란 보편적 인간의 서정을 자극해내면서 세계미술시장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캔버스에 유채, 100×130㎝, ⓒ장샤오강·페이스갤러리 제공.중국 그림을 보지 못한 지 한참입니다. 한국 미술시장이 자못 뜨거웠던 지난해와 올해, 세계의 작가와 작품이 우리를 기웃거리던 때도 중국은 없었습니다. 중국 ‘큰손’ 컬렉터의 규모와 수가 미국을 제쳤다는 얘기도 이미 2~3년 전입니다. ‘으레 미술은, 그림은 그런 것’이라며 반쯤 우려하고 반쯤 체념했던 한국화단을 뒤흔든, 기발한 감수성으로 뒤통수를 내리쳤던 중국 작가들이 하나둘 사라졌습니다. 예술을 예술이 아닌 잣대로 들여다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술에 기대하는 희망 역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정치에도 경제에도 답이 없다 생각할 때 결정적인 열쇠를 예술이 꺼내놨습니다. 오랜시간 미술사를 연구하며 특히 중국미술이 가진 그 힘을 지켜봤던 정하윤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지점 그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때마침 ‘한중 수교 30주년’입니다. 다들 움츠리고 있을 때 먼저 돌아보는 시간이고 먼저 찾아가는 길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깊고 푸른 ‘아트차이나’로 안내합니다. <편집자 주> [정하윤 미술평론가]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화려했던 전성기일 수도, 사무치게 후회되는 순간일 수도, 아름다웠던 유년일 수도 있다. 중국의 스타작가 장샤오강(張曉剛·64)에게 그것은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리는 문화대혁명(1966∼1976)이다. 1958년 따뜻한 남쪽지방 쿤밍에서 태어난 장샤오강은 문화대혁명이 시작됐던 1966년, 여덟살이었다. 극도로 불안한 시절이었다. 정부에서는 우파, 다시 말해 반동분자 색출을 대대적으로 실시했고, 지역단위마다 일정비율 이상을 지명해 보고하라고 했다. 네가 아니라면, 내가 우파가 돼야 하던 때. 사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 희생양일 될 것인가만 필요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 주민들이 장샤오강의 집에 들이닥쳐 그의 부모에게 잘못을 자백하라고 협박했다. 결국 그들은 3년 동안 ‘재교육’을 받으러 집을 떠나야 했다. 여덟살부터 열여덟살까지, 소중한 유년의 때를 장샤오강은 그렇게 보냈다. 딱히 힘들다고 느끼진 못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17년이 지나 우연히 발견한 그 시절의 가족사진은 그의 안에 숨죽이고 있던 기억을 기어이 소환해냈다. 과거를 피해버리지 않고 직시한 덕분에 장샤오강은 ‘핏줄-대가족’ 시리즈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를 일시에 월드스타로 만들어준 바로 그 작품이다. 그중 한 점인 ‘핏줄-대가족: 가족 no.1’(1993)은 부모와 아이가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그대로를 그린 것이다. 특별한 구성도, 구도도 아니지만, 그의 그림은 묘하다. 괴이한 느낌까지 풍긴다. 몇 가지 요소 때문이다. 먼저는 인물이다. 어머니는 화면 밖 어딘가를 응시한다. 아이는 사시다. 정면을 보는 이는 아버지뿐이지만, 그 눈동자조차 멍하다. 가족 모두 표정이 없다. 몸은 사진관에 있지만 영혼은 다른 세상에 있는 듯하다. 화면 전체에 사용한 흐리멍덩한 회색까지 몽롱함을 더한다. ◇개인은 없고 집단만 있던 시절의 ‘기억’과 ‘불안’ 이 그림은 장샤오강의 부모와 형을 그린 것이지만, 당시 중국 어떤 가족의 사진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마오쩌둥 시대에는 모두 같은 옷에 같은 모자, 같은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이 결코 ‘모두가 똑같이 생활하고 생각한다’가 아님에도 개성이 허용되는 범위는 너무 작았다. 그럼에도 장샤오강은 ‘남과 다름’에 유달리 공포를 느꼈다. 어머니가 앓던 정신질환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조현병을 앓았는데 그로 인해 이웃에게 질타를 받을까 늘 염려했던 것이다. 막내아들이던 장샤오강은 깔깔 웃다가도 돌연 화를 내는 어머니가 때때로 두려웠고, 혹여 그 병이 자신에게도 발현될까 걱정했다. ‘핏줄-대가족’ 시리즈에서 어딘지 모를 불안이 느껴지는 것은 그의 이런 심리가 반영돼서다. 그림에서는 사람의 얼굴 쪽에 색채가 갑자기 이상해지는 부분이 드문드문 보인다. ‘컬러패치’라고도 불리는 이 장치는 장샤오강이 화면에 랜덤하게 삽입한 것으로 급작스레 기분이 변하던 어머니의 증상을, 누구라도 숙청 대상이 될 수 있던 당시 중국의 사회를, 그 안에서 장샤오강이 느꼈을 불안감을 함축한다. 화면 전반에 아주 가늘게 그어진 붉은 선도 불안함을 증폭시킨다. 아버지의 귀에서 아이의 배꼽으로, 다시 어머니의 가슴으로, 또 아이의 귀에서 아버지의 심장으로, 규칙 없이 끊어질 듯 이어진 가느다란 선은 제목이 말하듯 ‘핏줄’이다. 가족이 무한정 확대돼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중국의 문화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 연결이란 게 사실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암시하기도 한다. 30대 중반에 이미 대스타로 떠올랐지만 사실 장샤오강의 청춘은 답답했다. 미술대 졸업 후 실직기간을 거치기도 했고, 마음고생으로 술을 많이 마신 탓에 위출혈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소련식 사실주의부터 장 프랑수아 밀레, 빈센트 반 고흐, 초현실주의까지 섭렵했지만 세상을 뒤집을 만한 작품을 내놓지는 못했다. 전환을 맞은 것은 유럽 땅을 밟은 1992년이었다. 우상이던 반 고흐의 ‘해바라기’와 마주한 뒤, 서양의 명화만 좇다간 ‘아류’밖에 되지 않겠다는 위기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중국의 화가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결심했다.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 헤매던 중 10여년 전 가족사진에서 중국인의 얼굴을 본 것이었다. 장샤오강의 작품은 중국의 작가가 중국의 사회, 그 안에서 살던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다. 등장인물조차 중국인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중국적이다. 그러나 보편적이기도 하다. 누구나 가족사진을 찍어서만은 아니다. 작품을 관통하는 본질, ‘기억’과 ‘불안’이란 주제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누구나 하나쯤 마음속에 품고 있는 빛바랜 기억,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내면의 불안을 건드린다. 이국적이기에 새로우면서도 보편적이기에 공감하기 쉽다는 점. 이것이 국제미술계에 소개되자마자 미술관과 갤러리, 학계와 시장 모두에서 전례 없는 주목을 받은 이유다. 장샤오강의 ‘망각과 기억 no.21’(2003). ‘핏줄-대가족’을 시작한 지 10여년 만에 나온 새 연작 중 한 점이다. 가족의 얼굴 대신 일상의 물건·건물 등을 들여 중국 사회와 문화를 옥죄던 문화대혁명 시절을 떠올린다. 불 나간 전구를 통해 기억과 망각의 문제를 건드리며 중국인의 마음과 역사까지 내보인다. 캔버스에 유채, 249×301㎝ ⓒ장샤오강·페이스갤러리 제공.◇역사, 무엇을 망각하고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핏줄-대가족’ 시리즈를 10여년 정도 지속한 뒤 장샤오강은 새로운 시리즈를 선보였다. 이번에는 가족의 얼굴 대신 일상의 물건과 건물을 큰 화폭에 담았다. 그리는 대상은 달라졌지만 소재는 다시 한번 마오쩌둥의 중국을 연상시킨다. 천편일률적인 디자인의 침대와 소파, 역시나 찍어낸 듯 똑같은 이층짜리 시멘트 건물. 여기에 회색조의 화면이 이 개성 없는 사물들을 다시 흐릿하게 만든다. 결정적으로 전구는 불이 나갔다. 기억의 불이 꺼져버렸다는 뜻일까. 반짝하며 과거의 기억이 돌아오는 것도, 그것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도 두렵기는 매한가지다. 장샤오강은 이 시리즈에 ‘망각과 기억’이란 제목을 붙였다. 잊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기억하고 싶었던 것일까(‘망각과 기억 no.21’ 2003). 어느덧 60대 중반이 된 장샤오강의 그림에는 여전히 문화대혁명 시기를 떠올리게 할 도상이 등장한다. ‘눈을 가린 무희(2016)와 같은 그림이 그 예다. 시공간이 명확하지 않은 방안에는 확성기가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서 있고, 오른쪽으로는 벽돌로 막힌 창문이 보인다. 마오쩌둥 시대, 하루에도 몇번씩 마을 전체에 당의 메시지를 전하던 확성기와 홍위병들이 쏘아대던 총알 때문에 벽돌로 막아야 했던 창문을 기억하며 그린 것이다. 장샤오강의 ‘눈을 가린 무희’(2016). 60대가 된 작가의 내면에 여전히 남아있던 문화대혁명을 좀더 적극적으로 풀어냈다. 닫히고 가둔 시대가 만든, 닫히고 갇힌 사람·현실을 벽돌창·확성기·석고상 등의 장치로 표현하고 있다. 무엇을 보고, 보지 말아야 하는지, 또 무엇이 들리고, 들리지 않는지를 격동의 한 시절을 축소한 공간을 배경으로 중국인·중국사회의 자화상처럼 그려냈다. 캔버스에 유채, 160×200㎝, ⓒ장샤오강·페이스갤러리 제공.하지만 요즘 중국의 젊은 세대는 문화대혁명에 대해 잘 모른다. 아버지 장샤오강이 지금까지도 그때의 기억을 그리는 것과는 달리, 1994년에 태어난 그의 자녀 역시 그 시절에 관심이 없다. 그래선가. 그림에 등장하는 소년과 소녀도 주변에 일어나는 상황에 무관심하다. 소년은 서랍 안에 쭈그리고 앉아 책에 빠져 있고, 소녀는 아예 눈을 가려버렸다. 저 멀리 열린 문 뒤로는 아그리파 석고상이 마치 감시자처럼 이상한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다. 장샤오강의 최근 그림에는 초현실적인 면모가 눈에 띄게 강해졌다. 이는 그가 기억하는 문화대혁명 시기가 비현실적이기도 했지만, 엄연한 그 역사적 사실이 점점 잊히는 현재의 상황 또한 비현실적이기 때문일 거다. 개인의 기억과 집단의 기억. 다시 말해 역사는 어떻게 기억되는가, 또는 망각되는가. 우리는 무엇을 잊고, 또 기억할 것인가. 장샤오강의 작품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1983년 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고 싶었단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작가는 일찌감치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관심은 한국현대미술이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보려면 아시아란 큰물이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 꼭대기에 있는 중국을 파고들어야겠다 했던 거다. 귀국한 이후 미술사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2022.10.21 I 오현주 기자
'인민의 태양' 진 자리 '고흐의 달' 떴소이다<1>
  • '인민의 태양' 진 자리 '고흐의 달' 떴소이다[정하윤의 아트차이나]<1>
  • 장훙투의 ‘석도-반 고흐’(Shitao-Van Gogh·1998). 회화·조각·콜라주·도자기·설치 등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가 그림으로 시도한 ‘동서양 연결’ 작업 중 하나다. 1990년대 후반부터 중국 풍경의 구성을 가져다가 유럽 인상파 화풍으로 캔버스 유화를 그렸는데, 작품은 중국 청나라 초기의 화승인 석도의 산수화에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녹여낸 것이다. 중국 미술과 서양미술의 가치·관습을 동시에 탐구한 동시에 모더니즘의 본질까지 파고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캔버스에 유채, 147.32×172.72㎝.중국 그림을 보지 못한 지 한참입니다. 한국 미술시장이 자못 뜨거웠던 지난해와 올해, 세계의 작가와 작품이 우리를 기웃거리던 때도 중국은 없었습니다. 중국 ‘큰손’ 컬렉터의 규모와 수가 미국을 제쳤다는 얘기도 이미 2~3년 전입니다. ‘으레 미술은, 그림은 그런 것’이라며 반쯤 우려하고 반쯤 체념했던 한국화단을 뒤흔든, 기발한 감수성으로 뒤통수를 내리쳤던 중국 작가들이 하나둘 사라졌습니다. 예술을 예술이 아닌 잣대로 들여다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술에 기대하는 희망 역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정치에도 경제에도 답이 없다 생각할 때 결정적인 열쇠를 예술이 꺼내놨습니다. 오랜시간 미술사를 연구하며 특히 중국미술이 가진 그 힘을 지켜봤던 정하윤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지점 그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때마침 ‘한중 수교 30주년’입니다. 다들 움츠리고 있을 때 먼저 돌아보는 시간이고 먼저 찾아가는 길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깊고 푸른 ‘아트차이나’로 안내합니다. <편집자 주> [정하윤 미술평론가] 어디 보자. 두껍게 발라올린 물감, 힘차게 요동치는 붓질, 선명한 노란색과 파란색의 대비.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인데. 누구더라. 오호라!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구나. ‘별이 빛나는 밤’(1889)이란 작품이 아닌가. 그런데 가만 보자니 반 고흐 작품이라기엔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그림 속 판잣집 안에는 웬 선비가 앉아 책을 읽고 있고, 산세 또한 지나치게 험준하다. 왼쪽 상단에 올린 붉은 낙관은 또 무엇인가. 사실 이 그림은 재미 중국화가 장훙투(張宏圖·79)의 ‘석도-반 고흐’(Shitao-Van Gogh·1998)다. 그런데 중국 미술가가 죽은 지 100년도 훌쩍 넘은 네덜란드 화가를 자신의 작품에 소환한 이유는 뭘까. 장훙투의 파란만장한 인생스토리가 그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다. 장훙투는 1943년, 신장위구르와 몽골이 접한 중국 서북부의 간쑤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독실한 무슬림이었다. 아버지는 아랍어를 연구했고, 아랍어를 사용하는 학교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중국 전역을 누비기도 했다. 어머니 또한 중국이슬람교협회에서 일했다. 하지만 마오쩌둥(1893∼1976)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한 이후, 중국에서 종교를 갖는다는 것은 점점 더 위험한 일이 됐다. 토종이든 외래종이든 상관없이, 종교는 ‘봉건시대 착취의 잔재’로 여겼기 때문이다. 공자의 흉상이 부서지고, 유교 서적과 십자가가 불태워졌으며, 사찰은 파괴됐다. 또한 위구르의 무슬림은 무참히 학살됐다. 골수 무슬림이던 장훙투의 집안은 ‘우파’로 단단히 낙인찍혔고, 그의 부모는 직장을 잃었고 사회의 멸시를 받았다. ◇中 사회주의 영원불멸 리더를 美 자본주의 상품 캐릭터로당시 많은 중국의 청년들처럼 장훙투도 한때 마오쩌둥의 정책을 지지했다. 그러나 부모가 사회에서 매장당하고, 삼촌이 죽도록 맞아 시신이 강물에 버려지는 것을 목격한 뒤론 달라졌다. 친한 줄만 알았던 친구가 ‘좋지 않은 성분’으로 낙인찍힌 자신의 일기장을 몰래 검열해 보고하는 일도 겪었다. 서로 감시하고, 혐오하고, 매도하고, 심지어 죽이는 세상. 그것은 공포 그 자체였다. 장훙투는 스물아홉 살에 직장을 얻었다. 뛰어난 그림 실력 덕분인지 보석 수출입을 담당하는 회사의 디자이너로 일하도록 배정받았고, 거기서 9년을 일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던가. 그 9년 사이, 세상은 정말로 달라졌다.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사망했고, 덩샤오핑은 서서히 개혁과 개방을 추진했다. 그 변화의 바람을 타고 장훙투는 회사를 통해 미국 뉴욕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Art Students League)에서 미술을 공부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냈다. 1982년 뉴욕으로 건너간 그는 이후 다신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뉴욕에서의 생활은 곤궁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던 날들이었다. 그러던 1987년 어느 아침, 여느 날처럼 식료품점에서 산 오트밀 가루를 개어 아침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식탁 위에 놓아둔 오트밀 포장상자가 눈에 꽂히는 게 아닌가. 그 위에 인쇄된 퀘이커 오츠(Quaker Oats)의 마스코트 ‘미스터 퀘이커’(Mr. Quaker)를 바라보고 있자니, 아뿔싸. 누군가가 떠올랐다. 중국의 영원한 아버지, 마오쩌둥이었다. 장훙투는 재빨리 붓을 들었다. 미스터 퀘이커를 마오쩌둥으로 만드는 데는 붓질 몇 번이면 충분했다. 단 몇 분 만에 서양의 자본주의 상품경제의 캐릭터는 중국 사회주의의 영원불멸한 리더로 탈바꿈했다(‘마오 주석 만세’ 시리즈 중 ‘퀘이커 오츠 마오’ 1987). 장훙투의 ‘마오 주석 만세’ 시리즈 중 ‘퀘이커 오츠 마오’(1987). 오트밀 퀘이커 오츠 상자에 찍힌 마스코트 ‘미스터 퀘이커’를 마오쩌둥으로 둔갑시켰다. 서구에 거주하는 중국 미술가가 중국 당국을 비판할 수 있는 ‘자유’를 충족시킨 장훙투의 작품은 중국식 팝아트를 대표하는 동시에 정치인의 형상과 팝의 형식을 접목했다고 해 ‘정치적 팝’이라 불리기도 한다. 퀘이커 오츠 박스에 아크릴, 24.63×12.7㎝.퀘이커 오츠에서 마오쩌둥을 발견한 이후, 장훙투는 마오쩌둥의 도상을 꾸준히 재생산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마오쩌둥의 얼굴을 마음껏 놀려댄 ‘마오 주석’(12유닛·1989) 같은 작품을 만들 때 그는 두려웠다고 고백한다. 여전히 신성시되는 절대 권력자의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콧수염을 달고, 호랑이 분장을 시키는 것은 분명 손이 덜덜 떨리는 일이었으리라.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그 대상과 마주하는 것뿐임을 알고 있었다. 마오쩌둥의 형상을 다루면서 그는 자기 안에 남아 있던 과거의 상처를 매만졌다. 관람자를 그 과정에 초대한 작품(‘핑퐁 마오’ 1995)도 있다. 관람자는 전시실에 놓인 탁구대에서 직접 탁구를 칠 수 있다. 일반 탁구대 크기와 똑같지만, 네트를 사이에 둔 양쪽에는 마오쩌둥의 형상을 파낸 구멍이 있다. 관람자가 탁구에, 다른 말로 작품에 몰입할수록 마오쩌둥의 형상은 단지 피해야 할 장치로만 느껴지고, 아우라는 증발된다. 바로 마오쩌둥을 둘러싼 정치적 의미가 완전히 제거되는 순간이다. ‘핑퐁 마오’는 누군가에게는 재미있기만 한 현대미술일 거다. 그러나 장훙투처럼 마오쩌둥, 또는 그로 대변되는 그 시대에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치유의 과정이기도 하다. 도려낸 마오쩌둥의 형상을 피해 탁구를 치면서 자신 안에 남아 있는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완화할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장훙투의 ‘마오 주석’ 12유닛(1989). 마오쩌둥의 얼굴을 마음껏 놀려댄 작품이다.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콧수염을 달고, 호랑이 분장을 시키면서 그는 자기 안에 남아 있던 과거의 상처를 매만졌다. 서구에 거주하는 중국 미술가가 중국 당국을 비판할 수 있는 ‘자유’를 충족시킨 장훙투의 작품은 중국식 팝아트를 대표하는 동시에 정치인의 형상과 팝의 형식을 접목했다고 해 ‘정치적 팝’이라 불리기도 한다. 종이에 사진 콜라주·아크릴, 각 21.59×27.94㎝.20세기에 끔찍한 세계대전을 두 차례나 겪었기에 현대미술에서는 장훙투처럼 개인 또는 집단의 트라우마를 다루는 작업을 종종 볼 수 있다. 무겁고, 어둡고, 울퉁불퉁한, 할라치면 한없이 심각할 수 있는 것이 이런 종류의 작품이다. 그렇지만 장훙투는 전혀 다른 어법인 ‘유머’를 택했다. 그의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언제나 피식 웃게 만든다. 아프고 어두운 이야기를 유쾌하게 푸는 것. 이것이 장훙투 작품의 힘이다. ◇마오쩌둥 그리고, 파내고, 변형한 10년 뒤…‘동서양 결합’1990년대 후반, 장훙투는 새로운 작품 시리즈를 시작했다. ‘석도-반 고흐’와 같이 반 고흐나 클로드 모네, 폴 세잔이 그린 풍경화와 석도(중국 청나라 초기의 화승)나 동기창(중국 명나라 말기의 문인·화가·서예가)이 그린 산수화를 한 작품에서 만나게 한 그림이다. 전형적인 해석과 같이, 이 시리즈는 동서양의 결합이다. 서양의 미술을 본토의 미술과 결합하는 것은 19세기 말부터 동아시아 미술의 숙명 같은 것이었고, 미국으로 이주해 문화충돌을 겪은 장훙투가 이 주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주목하고 싶은 것은 새 작품이 탄생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장훙투가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한 것은 마오쩌둥을 처음으로 다룬 1987년부터 근 10년이 지난 후였다. 또 한 번 강산이 변하는 그 기간동안 장훙투는 유머를 잃지 않은 채 마오의 형상을 그리고, 파내고, 변형했다. 그후에야 비로소 자신을 옭아매던 과거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장훙투의 ‘핑퐁 마오’(1995). 관람자가 전시실에 놓인 탁구대에서 직접 탁구를 칠 수 있게 한 설치작품이다. 일반 탁구대의 네트를 사이에 둔 양쪽에는 마오쩌둥의 형상을 파낸 구멍이 있다. 1971년 마오쩌둥이 탁구를 통해 중국과 미국의 수교를 텄던 스포츠외교를 풍자한 것이기도 하다. 혼합재료 설치, 76.2×152.4×274.32㎝.아픈 과거란 것이 어찌 장훙투나 그 세대에게만 국한된 것이겠나. 꼭 정치적인 사건이 아니더라도 가정에서, 관계에서, 커리어에서, 심지어 내 자신으로부터 우리는 자주 마음을 다치지 않던가. 강도와 빈도가 다를 뿐 누구의 마음에나 생채기는 있다. 장훙투의 작품과 삶은 그러한 크고 작은 과거의 아픔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이 원망이나 비난에 있지 않음을, 나아가 그것을 직시하며 충분히 만져주는 시간이 필요함을 일러준다. 장훙투의 작품에 ‘인민의 태양’ 마오가 아닌, 밤하늘을 환히 밝히는 달이 떴다는 사실이 무척 반갑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1983년 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고 싶었단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작가는 일찌감치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관심은 한국현대미술이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보려면 아시아란 큰물이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 꼭대기에 있는 중국을 파고들어야겠다 했던 거다. 귀국한 이후 미술사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2022.10.07 I 오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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