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부

피용익

기자

시계 앞자리 뒷자리 시간전
위니아전자 박성관·대유에이텍 권의경, 사장 승진
시계 앞자리 뒷자리 일전
이재용의 뉴 삼성 첫 사장단 인사 키워드는 '안정 속 쇄신'
동그라미별표
시계 앞자리 뒷자리 일전
삼성전자, 반도체 사장 동시 교체…“메모리 초격차 확대하고 파운드리 1위”
시계 앞자리 뒷자리 일전
[프로필]정은승 삼성전자 DS부문 CTO 사장
시계 앞자리 뒷자리 일전
[프로필]진교영 삼성전자 종합기술원장

더보기

타봤어요 +더보기

  • [타봤어요]과거 위용 되찾은 올 뉴 렉스턴‥"쌍용차 DNA 느끼세요"
    과거 위용 되찾은 올 뉴 렉스턴‥"쌍용차 DNA 느끼세요"
    송승현 기자 2020.11.28
    [이데일리 송승현 기자] ‘풀체인지급 페이스리프트.’쌍용자동차(003620)도 자동차 업계에서 불고 있는 완전변경(풀체인지)과 가까운 부분변경(페이스리프트) 모델인 ‘올 뉴 렉스턴’을 야심 차게 내놨다. 전통적인 스포츠유틸리차량(SUV)의 강좌였던 쌍용차는 거대하고 웅장한 올 뉴 렉스턴을 통해 과거 무쏘에서나 느낄 법한 정통 SUV 감성을 현대적으로 구현하는 데 온 힘을 쏟은 느낌이다.쌍용자동차의 올 뉴 렉스턴. (사진=쌍용자동차 제공)지난 11일 인천 영종도 일대에서 접한 올 뉴 렉스턴은 첫인상에부터 웅장함을 선사한다. 특히 전면부 변화가 파격적이다. 덩어리째 절삭 가공된 라디에이터 프레임의 견고하고 단단한 이미지에 방패 형상의 패턴이 수를 놓고 있다. 이전 G4 렉스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도전적인 형상이다.여기에 리어 펜더부터 강조된 사이드 캐릭터 라인은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것 같은 역동적인 분위기를 부여한다. 특히 시승 차량으로 준비된 ‘더 블랙’ 모델의 짙은 검은 색상은 차를 한껏 고급지면서도 황소를 연상케 한다. 기존 G4 렉스턴이 대형 SUV에 어울리지 않게 수줍음을 품고 있어 어색한 느낌을 줬다면, 올 뉴 렉스턴으로 바뀌면서 강인함을 되찾은 느낌이다. 아울러 차체가 높은 탓에 탑승에 불편함을 겪을 수 있는 이들을 위해 1열문을 열면 발 받침대가 자동으로 내려오는 디테일함도 돋보였다.실내도 곳곳에서 변화가 있다. 계기판은 12.3인치 풀 디지털 클러스터로 기본적인 주행데이터는 물론 내비게이션 경로를 포함한 대부분의 정보를 보여주면서 운전편의성을 높였다. 4스포크 타입의 스티어링휠은 더블다이아몬드 스티치와 D컷으로 스포티함을 뽐내는 것은 또다른 작은 디테일함의 승리다. 새로 디자인된 센터콘솔은 컵홀더 배치를 세로 형태로 변경하고 덮개를 추가해 외관까지 깔끔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왕산 마리나에서 출발해 영종도 일대를 달려본 결과 주행성능은 거대한 차체로 인해 굼뜨다기보다 달리 기민하고 묵직해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였다. 올 뉴 렉스턴의 최고출력은 202마력(PS), 최대토크 45.0kg?m으로 이전 모델보다 각각 15마력과 2.0kg?m가 향상됐다. 올 뉴 렉스턴의 가장 큰 장점은 일상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1600~2600rpm에서 최대토크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쌍용자동차의 올 뉴 렉스턴 실내. (사진=쌍용자동차 제공)다만 주행 초기 가속감은 다소 떨어진다. 가속 페달을 밟고 속도감이 붙기 전까지 한 차례 울컥거림과 버퍼링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아쉽다. 디젤 엔진이 장착된 올 뉴 렉스턴이지만, 디젤 엔진을 감안하면 정숙성도 나쁘지 않았다. 고속주행이나 스포츠 모드로 변경하지 않으면, 디젤 엔진 특유의 엔진음이 타 엔진에 비해 조용한 편이다. 서스펜션의 성능도 부드러웠다. 감속 없이 과속방지턱을 넘는데도 흔들림이 적고 이후 주행에서도 안정감을 보였다.올 뉴 렉스턴의 또 다른 자랑은 능동형 주행안전 보조기술인 인텔리전트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IACC)을 포함한 첨단 주행안전 보조 시스템이 탑재돼 있다는 점이다. 트레일러의 움직임을 감지해 구동력과 브레이크를 제어하는 ‘트레일러 스웨이 컨트롤’ 기능도 적용돼 있어 어떤 상황에도 안전하게 운행할 수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올 뉴 렉스턴의 가격은 트림별로 △럭셔리 3695만원 △프레스티지 4175만원 △더 블랙 4975만원이다.쌍용자동차의 올 뉴 렉스턴. (사진=쌍용자동차 제공)
  • [타봤어요]"이렇게 부드러운 SUV가 이쁘기까지"..르노삼성 QM6
    "이렇게 부드러운 SUV가 이쁘기까지"..르노삼성 QM6
    이승현 기자 2020.11.21
    [이데일리 이승현 기자] “SUV가 왜 이렇게 부드럽지?” 르노삼성자동차가 새롭게 출시한 뉴 QM6를 직접 타고 70여km를 달려봤다.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가는 35km는 가솔린 모델을, 목적지에서 다시 출발지까지 돌아올 때는 LPG 모델을 탔다. 가솔린 모델은 처음 출발부터 부드럽게 나가더니 100km 넘는 고속주행을 해도 고급세단처럼 빨리 달린다는 느낌 없이 조용하게 차가 나갔다. 부드러운 주행의 비결은 QM6의 엔진에 있다. 중형 SUV 유일의 2.0리터 자연흡기 가솔린 엔진을 장착, 144마력의 출력과 20.4kg·m에 이르는 토크로 안락한 일상주행을 구현한다. 승가감도 탁월했다. 웬만한 높이의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도 부드럽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뿐만 아니라 디젤 모델에 사용해온 흡차음제와 사일런스 타이밍 체인을 적용해 수준 높은 정숙성과 내구성을 두루 확보했다. 실제로 주행 중 라디오를 켜고 창문을 조금만 열었는데도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다시 창문을 닫으니 고속 주행 중임에도 작은 볼륨으로도 소리를 잘 들을 수 있었다. 보통 중형 SUV에서 느낄 수 없는 정숙성이었다. 돌아올 때 탄 LPG 모델은 기대 이상이었다. 주최측에서 미리 얘기를 해 주지 않았으면 LPG 차량인지 모르고 왔을 정도로 가솔린 모델과 차이가 없었다. 보통 LPG 차량하면 연료비가 싸 경제적인 반면 주행능력이 가솔린이나 디젤에 비해 떨어진다는 선입견이 있다. 하지만 QM6 LPG 모델은 이런 선입견을 깨기에 충분했다. 고속주행 중에도 밟는대로 나간다는 느낌이었고 시승 코스 마지막에 있는 높은 경사의 언덕을 올라갈 때도 힘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안들었다. QM6 LPG 모델은 액체상태의 LPG를 각 기통에 분사하는 LPLi(Liquid Petroleum Liquid Injection) 방식을 채택하고 있어 출력 개선은 물론, 겨울철 시동 불량 문제까지 해결한다. 최고출력은 140마력이며, 19.7kg·m의 최대토크가 상대적으로 낮은 회전대(3700rpm)에서 나옴으로써 실용영역에서는 GDe와동일 수준의 체감 토크를 발휘한다는 것이 회사 측의 설명이다. 특히 르노삼성은 뉴 QM6를 출시하면서 LPG모델에도 최상위 트림인 ‘프리미에르’를 적용, LPG 차량 고객들의 선택의 폭을 넓혔다. 지난 6일 출시된 뉴 QM6의 가장 큰 개선점은 디자인이다. 프런트 그릴 중심으로 외관 디자인이 획기적으로 변화했다. 특히 크롬 라디에이터 그릴을 감각적이면서도 세련된 메시 패턴으로 변경했고, 태풍 로고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펼쳐진 퀀텀 윙을 적용, 힘차게 비상하는 기운을 형상화했다. 퀸텀 윙은 르노삼성의 뉴아이덴티티로 이번 뉴 QM6에 처음 적용된 것이다. 여기에 그릴 하단에 ‘QM6’ 로고를 새겨 넣었다. NEW QM6 가격은 2.0 GDe △SE 트림 2474만원 △LE 트림 2631만원 △RE 트림 2872만원 △RE 시그니처 트림 3039만원 △프리미에르 3324만원이며, 2.0 LPe △SE 트림 2435만원 △LE 트림 2592만원 △RE 트림 2833만원 △RE 시그니처 트림 3000만원 △프리미에르 3245만 원(개소세 3.5% 기준)이다.
  • [타봤어요]트래버스의 새로운 매력..“자동차극장의 제왕”
    트래버스의 새로운 매력..“자동차극장의 제왕”
    이승현 기자 2020.11.14
    쉐보레 트래버스[이데일리 이승현 기자] 최근 자동차 시장의 최대 화두 중 하나는 ‘사이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인적이 많지 않은 곳에서 캠핑이나 레저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늘면서 크고 넓은 공간을 갖춘 차들이 부상하고 있다. 대표적인 모델은 쉐보레 트래버스다. 5미터를 훌쩍 뛰어넘는 대형 SUV로, 크기 자체로 압도하는 면이 있다. 직접 타본 트래버스는 실내 공간부터 크기가 남달랐다. 1, 2열 좌석 공간부터 여유로웠다. 2열에도 키가 185cm인 기자가 앉아도 넉넉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적재공간은 더욱 놀랍다. 기본 적재공간이 651L로 국내 출시된 차 중에서 가장 큰 수준이다. 동급 대형 SUV들과 비교해도 최대 300L까지 차이를 보인다. 트렁크 하단에도 숨은 적재 공간이 있다. 캠핑족에게는 워너비 차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굳이 3열을 접지 않아도 웬만한 캠핑 장비나 짐을 싣는데 문제가 없을 정도다. 여기에 3열을 접으면 1636L의 평평한 공간이 생긴다. 2열과 3열 시트를 모두 접으면 최대 2780L까지 공간이 확장돼 커다란 가구까지도 실을 수 있다. 최근 유행한다는 ‘차박’ 캠핑 시에도 성인 두세 사람이 편히 누울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 트래버스를 2열까지 접으면 커다란 가구도 실을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경쟁모델 대비 최대 50mm 이상 넓은 3열 레그룸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보통 대형 SUV들도 3열 레그룸의 공간이 좁아 어린이들이 앉는 자리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트래버스의 3열 레그룸은 웬만한 성인이 앉아도 무리가 만큼 넓다. 차가 크니 주행성능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서울에서 경기도 광주 곤지암까지 차량을 운행해 봤다. 시동을 걸고 가속패달을 밟으니 묵직하게 출발하는 느낌이 좋았다. 최고출력 314마력을 발휘하는 3.6리터 V6엔진은 두터운 토크감과 정숙성이 돋보였다. 고속도로에 있는 요철을 넘을 때도 진동을 부드럽게 상쇄시키며 안락한 승차감을 유지했다. 고속 주행할 때는 보다 서스펜션이 묵직해지며 안정감 있는 하체를 구현했다.승용 모델과의 차이점은 지방국도를 달릴 때 더욱 잘 드러났다.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굽이진 도로에서 들어서자 끈끈한 접지력이 곧바로 느껴졌다. 트래버스에 기본으로 탑재된 사륜구동 시스템 덕분이다. 사륜구동 시스템은 온로드는 물론, 오프로드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통합 오프로드 모드는 진흙, 모래 등의 오프로드 환경에서 지면의 상황을 스스로 감지해 최적의 주행성능을 이끌어낸다. 또 트래버스의 사륜구동 시스템은 스위처블 AWD(Switchable AWD) 기술이 적용돼 주행 중 필요에 따라 FWD(전륜구동) 모드 및 AWD(사륜구동) 모드를 상시 전환할 수 있다. 특히 FWD 모드 시에 프로펠러 샤프트의 회전을 차단해 불필요한 동력 손실을 줄일 수 있어 사륜구동임에도 상황에 따라 연료 효율을 끌어올릴 수 있다.이밖에도 트래버스에는 캠핑에 최적화된 쉐보레의 RV DNA가 곳곳에 녹아있다. 6개의 USB, 2개의 12V 파워아울렛이 갖춰 차량 내에서 스마트 디바이스를 사용하는데 편리하며, 220V인버터까지 준비돼 있어 캠핑 시에 헤어 드라이어 등 간단한 가전제품도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다.트래버스의 3열 레그룸은 성인이 앉아도 무리가 없을 만큼 넓다.마지막으로 발견한 트래버스의 매력은 자동차 극장에서였다. 최근 들어 코로나19로 인해 일반 극장대신 안전한 자동차 극장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트래버스를 타고 자동차 극장에 가보자. 탁트인 전면 유리창을 통해 보는 스크린은 가려지는 게 하나도 없었다. 일반 세단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쾌적한 시야를 선사했다. 여기에 넓은 실내공간에서 영화를 보는 맛은 트래버스만의 매력이었다.

피용익의 록코노믹스 +더보기

  • [피용익의 록코노믹스]탐욕이 불러온 반 헤일런의 침몰
    탐욕이 불러온 반 헤일런의 침몰
    피용익 기자 2020.10.10
    [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이제 모두 옛날 얘기가 됐다. 미국 하드록/헤비메탈 밴드 반 헤일런의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 프로듀서였던 에디 반 헤일런이 2020년 10월 6일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1970년대 말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해 록 음악계에 충격을 안겨줬던 에디 반 헤일런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됐다.그가 이끌었던 밴드 반 헤일런은 12장의 스튜디오 앨범을 통해 전 세계에서 800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이 중 ‘1984’를 비롯한 5개 앨범은 미국에서만 1000만장 이상씩 팔렸다. 1983년에 발표한 “Jump”가 빌보드 싱글 차트(Hot 100) 1위에 올랐고, 빌보드 메인스트림 록 차트 1위에 오른 곡은 총 13개에 달한다.그러나 역사상 가장 성공한 기타리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에디 반 헤일런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위기는 탐욕에서 비롯됐다. 마이클 잭슨의 “Beat It” 기타 솔로를 ‘공짜로’ 녹음해줬던 그가 돈을 밝혔으리라고는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에디 반 헤일런의 매니저로 활동했던 노엘 몽크의 회고록을 읽어보면 밴드의 성공이 멤버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알 수 있다. 여느 밴드와 마찬가지로 반 헤일런도 단지 음악이 좋아 모인 젊은이들이었다. 에디 반 헤일런(기타), 알렉스 반 헤일런(드럼), 데이비드 리 로스(보컬), 마이클 앤서니(베이스)는 1970년대 중반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유명 클럽인 위스키 어 고 고 등에서 연주를 하며 인지도를 쌓았다.반 헤일런은 출발부터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이들은 메이저 음반 회사 워너 브러더스 레코드의 모 오스틴 회장에게 직접 발탁돼 1978년 첫 앨범 ‘Van Halen’을 발표했다. 록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앨범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밴 헤일런의 데뷔 앨범은 발매 직후 빌보드 앨범 차트 19위에 오르는 대성공을 거뒀다.문제는 ‘노예 계약’이었다. 반 헤일런의 데뷔 앨범은 발매 몇 달 만에 플래티넘(100만장 판매)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는데도, 멤버들은 돈을 손에 쥐지 못했다. 오히려 활동을 할수록 회사에 갚아야 하는 빚이 늘어나는 구조였다. 심지어 워너 브러더스는 반 헤일런이 2년마다 ‘똑같은’ 조건으로 ‘평생’ 계약을 갱신하도록 하고 있었다. 결국 반 헤일런은 로드 매니저였던 노엘 몽크를 새 매니저로 고용해 잘못을 바로잡기로 했다. 몽크의 첫 번째 임무는 반 헤일런이 과거 무명 시절에 워너 브러더스와 체결했던 노예 계약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었다. 몽크는 “레코드 회사에 로열티와 회계 장부를 요구하는 서류를 끊임없이 제출해서 그들은 나를 지긋지긋하게 여겼다”고 회고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일이 일어났다. 몽크가 보내는 서류들에 질려버렸던 탓인지 워너 브러더스가 반 헤일런과의 재계약 시기를 놓쳐 버린 것이다. 몽크는 기다렸다는 듯이 워너 브러더스의 모 오스틴 회장과 만난 자리에서 반 헤일런이 이제 ‘자유의 몸’이 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진행된 재계약 협상을 통해 몽크는 반 헤일런 멤버들이 곧바로 백만장자가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몽크의 수완은 뛰어났다. 1983년 5월 29일부터 6월 4일까지 열린 ‘US 페스티벌’ 당시에는 주최측과 협상해 반 헤일런보다 높은 출연료를 받는 밴드가 없도록 한 일화는 유명하다. 반 헤일런은 이 페스티벌에서 단 1회 공연으로 150만달러를 받았다. 몽크에 따르면 반 헤일런의 위기는 이 때부터 시작됐다. 손에 돈이 들어오고 여자와 술과 마약을 마음껏 접할 수 있게 되면서 멤버들 사이에 불화가 싹텄다. 서로 더 많은 돈을 가져가겠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무명 시절 밴드의 수입을 4명이 똑같이 나누기로 했던 약속은 깨져버렸다.갈등의 두 축은 보컬리스트인 데이비드 리 로스와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인 에디 반 헤일런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밴드의 작곡가였고, 가장 인기가 높은 멤버들이었다. 두 사람이 없는 반 헤일런은 있을 수 없었다. 알렉스 반 헤일런은 동생 에디의 보호를 받았다. 갈등과 불화의 희생양으로 선택된 것은 베이시스트였던 마이클 앤서니였다. 멤버들은 앤서니를 불러 음반의 로열티를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는 반 헤일런의 상업적 성공이 정점에 이르렀던 앨범 ‘1984’를 발표한 직후였다. 반 헤일런의 탐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밴드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다 준 매니저 노엘 몽크를 해고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밴드 수입의 20%를 가져가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반 헤일런은 7년 동안 몽크와 일하면서 월 단위로 계약을 갱신했던 것도 모자라, 해고할 때는 7년간의 회계장부를 들여다보며 매니저의 횡령이 있었는지를 조사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해고당한 옛 매니저의 주장을 그대로 믿기는 어려운 부분도 있다.)밴드 멤버의 로열티를 빼앗고 매니저를 해고한 것으로도 갈등은 봉합되지 않았다. 데이비드 리 로스는 ‘1984 투어’ 직후 반 헤일런을 탈퇴했다. 밴드의 사운드, 이미지, 스케쥴 등과 관련해 에디 반 헤일런과의 주도권 싸움 끝에 탈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솔로 활동을 하면 수입을 나누지 않고 더 많은 돈을 벌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실제로 많은 보컬리스트들이 이러한 이유로 밴드를 탈퇴한다.반 헤일런은 새미 헤이거, 게리 셰론을 새로운 보컬리스트로 차례로 영입해 계속 활동했다. 하지만 “Eruption”의 혁신도 “Jump”의 인기도 재현되지 못했다. 로스를 다시 받아들여 2012년 내놓은 12집 ‘A Different Kind of Truth’는 웬만한 팬이 아니라면 발표됐다는 사실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돌이켜 보면 반 헤일런은 커리어의 정점에서 서서히 침몰했고, 침몰의 원인이 된 갈등의 중심에는 돈이 있었던 셈이다.그래서 에디 반 헤일런은 평생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을까? 유명인들의 자산 가치를 평가하는 셀레브리티 넷 워스에 따르면 에디의 사망 직전 자산 가치는 1억 달러로 추산됐다. 그의 유명세에 비하면 적은 돈이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 록 기타리스트로서 이만한 부를 쌓은 사람도 드물다는 반론도 있다.다만 에디 반 헤일런 스스로는 자신의 생애가 꽤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네덜란드 태생인 그는 지난 2015년 스미스소니언 미국사박물관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우리 가족은 약 50달러와 한 대의 피아노를 갖고 이곳에 왔다. 그리고 우리는 영어도 할 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을 보라. 이것이 아메리칸 드림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느냐”라고 말했다. 위대한 기타리스트 에디 반 헤일런의 명복을 빈다.반 헤일런의 옛 매니저 노엘 몽크가 쓴 회고록 표지.
  • [피용익의 록코노믹스]한국은 어쩌다 록의 불모지가 됐나
    한국은 어쩌다 록의 불모지가 됐나
    피용익 기자 2020.10.03
    [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지난 2010년 8월 10일,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에 있는 한 서점에서 메가데스(Megadeth)의 리더 데이브 머스테인(Dave Mustaine)과 잠깐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당시 메가데스는 12집 ‘Endgame’ 투어에 이어 ‘Rust in Peace’ 앨범 발매 20주년 투어로 바쁜 시기였지만, 내한공연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한국 방문 계획을 묻자 머스테인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안 그래도 에이전시와 얘기 중인데, 잘…”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결국 메가데스는 한국에 오지 않았다.앞서 메가데스는 1998년, 2000년, 2001년, 2007년, 총 네 차례에 걸쳐 내한공연을 했다. 한 번도 한국에 오지 않은 밴드가 수두룩한 가운데 메가데스의 내한공연은 결코 적은 횟수는 아니다. 하지만 이후로 10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다. 일본은 수시로 가고 중국 공연까지 하면서 한국에 오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관객이 모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록 음악이 인기를 끌지 못하는 나라도 드물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미국이나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아 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두 나라에서 인기를 끄는 록 음악이 유독 한국에서 푸대접을 받는 현상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헤비메탈은 말할 것도 없다. 그냥 머리 긴 남자들이 하는 시끄러운 음악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그렇다고 한국이 처음부터 록 음악의 불모지는 아니었다. 대중음악사를 살펴보면, 한국은 오히려 록의 태동기 때부터 영미권과 호흡을 같이 했다. 1950년대 주한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연주 활동을 하던 뮤지션들은 1960년대부터 대중음악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미 8군 연예단 출신 신중현이 대표적이다. 그는 1962년 한국 최초의 록 밴드 에드 포(Add 4)를 결성하고 “빗속의 여인”을 발표했다. 비틀즈(The Beatles)가 영국에서 본격적인 록의 시대를 열었을 당시 이미 한국에도 그럴듯한 록 밴드가 존재했다는 얘기다. 신중현은 1970년대에도 신중현과 엽전들을 결성해 “미인”을 발표했고, 당대 최고 스타 김추자를 발굴하며 트로트 일색이었던 가요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 넣었다. 1960~1970년대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은 ‘음악 다방’을 통해 팝송과 함께 다양한 해외 록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이러한 영향으로 가요계에서도 록 밴드가 연주하는 ‘탈(脫) 트로트’ 노래들이 점점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그러나 록 음악이 한국에 뿌리를 내릴 무렵 대형 악재가 발생한다. 1975년 ‘록의 대부’ 신중현을 비롯해 포크 록 뮤지션인 윤형주, 김세환, 이장희 등이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로커들은 ‘약쟁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됐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안타깝게도, 1980년대 들어선 들국화의 전인권과 부활의 이승철, 1990년대에는 신성우, 신해철 등이 대마초 혐의로 구속되면서 록 뮤지션들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좋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심지어 로커의 상징과도 같은 장발은 1970년대엔 단속 대상이었고, 1990년대 말까지도 공영방송인 KBS에는 머리를 뒤로 묶고 출연해야 했다.그나마 1980년대는 한국에서도 록 음악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이다. 그 당시처럼 밴드 뮤직이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 때는 한국 대중음악사를 통틀어 한 번도 없었다. 송골매, 들국화, 부활 같은 록 밴드들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신중현의 아들 신대철이 결성한 한국 최초의 헤비메탈 밴드 시나위, 트로트 가수에서 헤비메탈 보컬리스트로 전향한 유현상의 백두산은 TV 가요 프로그램에도 출연할 정도였다. 특히 1980년대 말에는 한국 헤비메탈의 저변이 본격적으로 확대됐다. 블랙 신드롬(Black Syndrome)이 1988년 발표한 데뷔 앨범 ‘Fatal Attraction’은 그동안 한국 밴드의 음악을 은근히 무시하던 리스너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시나위 등 먼저 데뷔한 헤비메탈 밴드들이 다분히 한국적인 사운드를 들려준 반면, 블랙 신드롬의 음악은 마치 미국이나 영국의 정통 헤비메탈을 듣는 듯한 착각을 불려 일으켰기 때문이다. 같은 해 발매된 한국 최초의 헤비메탈 컴필레이션 앨범 ‘Friday Afternoon’에는 블랙 신드롬 외에도 미국적인 글램메탈을 연주하는 크라티아(Cratia), 한국 최초의 스래시메탈 밴드 아발란시(Avalanche) 등 해외 음악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밴드들이 한국에도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만약 그 당시 자본력이나 유통망 같은 여건만 조성됐더라면, 한국 헤비메탈 밴드들은 K팝에 훨씬 앞서 K메탈의 시대를 열었을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해본다. 그러나 역사에 ‘만약’은 없다. 1990년대 초부터 미국에서 헤비메탈의 인기가 식으면서 한국의 밴드 뮤직도 영향을 받게 됐다. 때마침 유명 록·메탈 밴드 보컬리스트들의 솔로 전향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핵심 멤버의 이탈은 밴드의 활동 중단으로 이어졌다.1990년대에는 록 음악의 요소를 가미한 가요가 드라마 주제곡 등으로 인기를 얻었고, 시나위 출신 서태지가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을 통해 록과 댄스뮤직을 융합하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언더그라운드에서 마니아 층을 형성하고 있던 스래시메탈 밴드 크래쉬(Crash)는 서태지와 아이들 콘서트에 등장하며 인지도를 높였다. 이 시기 록·메탈 음악은 대중에게 더 다가갔다고 볼 수 있겠지만, 정통 밴드 중심의 음악은 이때부터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사실, 록이 한국에서 부흥할 수 있는 기회는 또 있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는 홍대 앞 클럽을 중심으로 이른바 ‘인디 밴드’들이 활발한 공연 활동을 했다. 크라잉 넛(Crying Nut), 노브레인(No Brain) 등 펑크 밴드들과 델리스파이스(Delispice), 언니네이발관 등 모던록 밴드들은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부류에 속한다. 언론도 인디 밴드 신을 주목했다. 하지만 2005년 7월 30일 MBC ‘생방송 음악캠프’에 출연한 럭스(Rux)의 공연 도중 카우치(Couch)와 스파이키 브랫츠(Spiky Brats)의 멤버가 성기를 노출하는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하면서 인디 밴드 전체에 불똥이 튀었다. 이후 경찰은 클럽에서 성기 노출이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한 조사까지 진행했고, 결국 사회적으로 록 음악 전체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줬다. 약쟁이들의 음악이라는 평가에 이어 변태들이 하는 음악이라는 인식까지 생긴 것이다.현재 한국에서 록의 위치는 멜론 차트를 보면 알 수 있다. 2020년 9월 한 달 간 가장 많이 스트리밍된 음원 가운데 록이라고 할만한 노래는 단 한 곡도 없다. 댄스, 힙합, 발라드, 아니면 트로트다. 록 음악의 부재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한국에서 유독 두드러진다.그렇다고 한국 땅에서 록이 사라진 건 아니다. 헤비메탈도 여전히 건재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멤버 교체는 여러 번 겪었지만, 블랙 신드롬과 크라티아는 물론 ‘Friday Afternoon’ 2집(1989년)과 3집(1990년)을 통해 데뷔한 제로 지(Zero G), 크럭스(Crux) 등은 2020년 현재까지도 활동하고 있다. 디아블로(Diablo), 메써드(Method), 해머링(Hammering) 등 비교적 뒤에 데뷔한 밴드들의 활동도 꾸준하다. 혹자는 현재 한국의 헤비메탈 신이 1980년대만큼이나 활발하다고 평가한다. 안타깝게도, 음원을 듣고 공연을 보는 사람이 드물 뿐이다. 방탄소년단(BTS)이 빌보드 싱글 차트(Billboard Hot 100) 1위를 차지하면서 K팝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이런 세상이 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K록, K메탈에도 언젠가 기회가 찾아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방탄소년단 (사진=빅히트엔터테인먼트)
  • [피용익의 록코노믹스]일본 거품경제와 함께 무너진 비주얼록
    일본 거품경제와 함께 무너진 비주얼록
    피용익 기자 2020.08.22
    [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미국에서 글램 메탈이 인기를 끄는 동안 일본에서는 이른바 비주얼계(Visual kei) 밴드들이 록 음악의 메인스트림으로 등장했다. 화려한 패션과 짙은 메이크업, 과장되게 부풀린 헤어스타일로 치장한 로커들은 중성적인 외모와 상반되는 하드하고 헤비한 음악으로 반전 매력을 뽐냈다. 비주얼계 뮤지션들의 패션은 영국과 미국의 글램 로커들에게서 영향을 받으면서도, 이를 일본화하고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다. 음악 스타일은 하드록에서부터 헤비메탈까지 다양했지만, 일반적으로 비주얼 록(visual rock)이라는 이름으로 통칭한다. 이 명칭은 비주얼계 대표 밴드였던 엑스(X)의 슬로건인 ‘Psychedelic Violence Crime of Visual Shock’에서 유래했다는 게 정설이다.1980년대 초 일본 언드그라운드 신에서 시작된 비주얼계는 엑스, 데드 엔드(Dead End), 벅-틱(Buck-Tick) 등에 의해 주도되면서 1980년대 말에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데드 엔드가 1986년 앨범 ‘Dead Line’으로 2만장의 판매고를 올린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벅-틱의 1988년 노래 “Just One More Kiss”는 오리콘 싱글 차트 6위에 오르며 대중적인 인기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비주얼계의 대중화에 가장 크게 기여한 밴드는 엑스였다. 리더인 요시키(Yoshiki)가 설립한 인드 레이블 엑스타시 레코드(Extasy Records)를 통해 1988년 발표한 1집 ‘Vanishing Vision’은 10만장 이상 팔리며 오리콘 인디뮤직 차트 1위에 오른 데 이어 오리콘 앨범 차트 19위에 랭크됐다. 엑스는 대중성과는 거리가 먼 헤비메탈 사운드를 추구하면서도 상업적으로 굉장한 성공을 거뒀다. 특히 엑스가 메이저 레이블인 CBS/소니와 계약한 후 내놓은 1989년작 ‘Blue Blood’는 오리콘 앨범 차트 6위에 올랐고, 차트에 100주 이상 머물렀다. 이 앨범에 수록된 록 발라드 “Endless Rain”은 일본 음악을 들을 수 없던 당시 한국에서도 음악 좀 듣는 사람은 다 아는 노래였을 정도로 인기였다. 그리고 1991년 발표된 엑스의 3집 ‘Jealousy’는 오리콘 앨범 차트 1위에 오른 데 이어 지금까지 100만장 이상 판매됐다. 엑스의 성공을 통해 상업성이 확인된 비주얼 록 밴드들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맞았다. 루나 시(Luna Sea), 라크~앙~시엘(L’Arc~en~Ciel), 라크리마 크리스티(La’cryma Christi), 페니실린(PENICILLIN) 등이 잇따라 데뷔했다. 흥미로운 것은 비주얼 록 밴드들의 흥망성쇠가 그 당시 일본의 경제의 모습과 판박이라는 점이다. 1980년대 말 일본 경제를 표현하는 단어는 ‘거품 경제’다. 마치 비주얼계 뮤지션들의 헤어스타일처럼 한껏 부푼 상태였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급격한 엔화 가치 상승은 일본은행의 정책금리 인하로 이어졌고, 주식과 부동산 가치가 급등했다. 1989년 12월 29일 닛케이 지수는 3만8915.87 포인트로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이후 일본 증시에서 다시는 볼 수 없는 숫자다. 2020년 8월 닛케이 지수가 2만3000 포인트 선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주가가 얼마나 폭등했었는지 알 수 있다.일본의 거품 경제는 1990년대 초 실물경제가 후퇴하면서 빠르게 무너졌다. 닛케이 지수는 1991년 2월부터 급락했고, 부동산 가격은 고점 대비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1992년부터 2002년까지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으로 표현되는 장기 불황을 겪게 된다.비주얼계의 인기가 급속하게 식은 것도 1990년대 초부터다. 화려한 의상과 짙은 메이크업의 로커들은 당장 하루하루 살기가 힘들어진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았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비주얼 록 밴드들이 일본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인기는 예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다. 엑스에서 이름을 바꾼 엑스 재팬(X Japan)이나 루나 시 같은 메이저 밴드들은 비주얼계의 이미지를 조금씩 벗어 던졌다.X

산업부 뉴스룸

17분만에 현장서 코로나19 진단···나노PCR 기술 개발

강민구 기자 2020.12.03

에이스침대, 노르웨이 명품 리클라이너와 산후조리원 콜라보

박민 기자 2020.12.03

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연구소장 "中 위협적…소재 밸류체인 구축 필요"

경계영 기자 2020.12.03

삼성, 하만인수에 공 세운 손영권 사장 퇴임…고문으로 남는다

배진솔 기자 2020.12.03

‘CES 2021’ 한 달 앞으로..스마트홈·디지털 헬스가 뜬다

김종호 기자 2020.12.03

네이버 엑스퍼트, 출시 1년만에 70개분야 6000명 전문가 확보

장영은 기자 2020.12.03

파미셀, 간경변 줄기세포 치료제 임상 3상 승인(종합)

노희준 기자 2020.12.03

SK, 박정호·유정준 부회장 승진..미래성장사업에 과감한 인재 발탁(종합)

김영수 기자 2020.12.03

힘 실린 박정호 부회장, IPO·글로벌 기업과 협력 가속..중간지주사도 고민

김현아 기자 2020.12.03

e스포츠판 블리즈컨…아프리카TV ‘프리콘’ 개막

노재웅 기자 2020.12.03

[현장에서]한국지엠 노조, 성과급 더 받자고 두른 머리띠 풀어야

이소현 기자 2020.12.03

11월 누적 판매 40% 증가한 대형 SUV‥`패밀리카` 지형 바뀌나

송승현 기자 2020.12.03

엔비에스티, '붙이는 체온계' 충북교육청 기부

강경래 기자 2020.12.03

치협, '국회의 의료인 1인 1개소법 보완 입법 통과 환영'

이순용 기자 2020.12.03

장석영 2차관, 국가중요통신망 운용센터 현장방문

이후섭 기자 2020.12.03

50년 정밀주조 기업이 만든 쿡웨어…“세계 최고 품질 자신”

김호준 기자 2020.12.03

"중대형전지 흑자전환"…본격 성장궤도 오른 삼성SDI

신민준 기자 2020.12.03

위니아전자 박성관·대유에이텍 권의경, 사장 승진

피용익 기자 2020.12.03

"개소세 막차 타세요"..車업계 연말 할인 경쟁

이승현 기자 2020.12.02

부광약품 덴마크 자회사 ‘콘테라파마’에 무슨 일이

류성 기자 2020.12.02

KAI, 임원인사 단행…사업다각화·신사업 초점

김정유 기자 2020.12.01

[데스크의 눈]검찰권 절제 강조했던 박영수 특검이 그리운 이유

선상원 기자 2020.11.09

삼성물산, 삼성생명공익재단에 11억 기부

유태환 기자 2020.10.27

휴온스그룹 상장 3사, 120억원 규모 자사주 매입

박일경 기자 2020.08.14

어지럼증, 뇌가 보내는 이상 신호일 수 있다

임현영 기자 2020.07.24

이데일리

  • 04517 서울시 중구 통일로 92 케이지타워 18F, 19F 이데일리
  • 대표전화 02-3772-0114 I 이메일 webmaster@edaily.co.kr
  • 등록번호 서울 아 00090 I 등록일자 2005.10.25 I 발행인 곽재선 I 편집인 이익원
  • ⓒ 이데일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