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중립의 어려움

  • 등록 2018-07-31 오전 5:00:00

    수정 2018-07-31 오전 5:00:00

[유영근 서울남부지방법원 부장판사] 중립은 외롭다. 중립을 지키려는 사람에게는 적이 없는 만큼 동지도 없다. 하지만 중립을 의심받거나 포기했을 때에는 적은 생기지만 동지가 생기지는 않는
다. 중립은 그 실체가 모호하기도 하거니와 재미와 열정도 한쪽 편에 서는 것보다 훨씬 덜하다. 월드컵 축구경기만 봐도 그렇다. 우리나라의 경기는 조별 리그만 해도 긴장되고 흥미진진하지만, 남의 나라간 경기는 결승전을 보아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

최근 별세한 작가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주인공 이명준은 북한으로 가 고위직에 오른 아버지로 인해 고통을 겪다 월북을 선택한다. 북한군 장교로 6·25전쟁에 나가 포로가 된 명준은 석방되면서 남한도, 북한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한다. 자기편으로 오라는 양측의 설득을 뿌리치고 명준은 거듭해서 “중립국”이라고만 짧게 답한다. 그가 꿈꾸던 광장은 인간적인 교감이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공간이었지만 남한도, 북한도 그에게 광장은 아니었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중립국 역시 새로운 희망은 아니었다. 끝내 명준은 중립국으로 가지 않고 인도로 가는 배 ‘타고르호’에서 푸른 광장인 바다로 뛰어들어 생을 마감한다.

문학작품에서 중립은 대부분 희망에 찬 선택이 아니라 고뇌하는 지식인의 무기력한 현실도피 정도로 그려진다. 마키아벨리도 ‘군주론’에서 중립보다는 확실한 동맹이 낫다고 하면서, 우유부단한 군주들은 언제나 당장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중립으로 남으려 하지만 거의 대부분 파멸하고 만다고 했다. 역사적으로 영세중립국이란 개념이 정립된 것은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1815년 비인회의에서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같은 강대국들이 스위스의 중립을 승인하는 조약을 맺으면서부터이다. 유럽의 작은 나라 스위스는 생존을 찾아 중립을 선언했지만, 그것이 유지된 것은 강대국간 세력균형이라는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교전국이 마음만 먹으면 중립국은 언제든지 침공할 수 있다. 기존에 중립을 선언했던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같은 나라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침공에 별다르게 저항도 못하고 점령당했다. 중립을 표방한 스웨덴은 독일에 철광석과 통행로를 제공하고 국토가 유린당하는 것을 면했지만, 두고두고 더러운 거래를 했다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나마 스위스가 침공당하지 않은 것은 국제법상 영세중립국의 상징성이 있었고, 48시간 내에 동원 가능한 예비군 50만 명을 보유할 정도의 자위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상 나치에 협력했기 때문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쪽 편을 들기는 쉽지만 중립을 지키기는 어렵다. 양측이 대립할 때 우호세력에게는 자기편이 되어줄 것을 기대하지 중립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중립을 표방하는 것은 쌍방에 대하여 적어도 당신 편은 아니라는 것을 선언하는 셈이니 누가 이기든 정치적으로는 좋은 선택이 아니다. 중립이 가장 곤혹스러운 경우는, 중립을 가장하여 한쪽의 편을 든다는 지적을 받을 때이다. 정치적 중립은 이처럼 본질적으로 외롭고, 위태롭고, 어려운 영역이다.

사법부는 숙명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하는 곳이다. 정치 영역의 중립과 달리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법부는 중립을 의심받고 있다. 중립이 유지될 수 있으려면 기본적으로 주변의 세력균형이 유지되어야 하고,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역사적 경험을 통해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는 절대권력 아래에서 사법부의 독립과 중립은 헌법상의 이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충분히 깨달았다.

그런데 사법부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은 정치권력과 달리 강한 자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커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사법부의 힘은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정당한 권위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누군가의 우호세력이 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양쪽에 대하여 당당히 중립을 선언함으로써 더욱 커지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고단하고 외롭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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