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쳤다…" 백자의 '선 넘은 유혹', 리움의 '칼을 간 야심'

리움미술관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전
하루 1천명씩…2주 앞선 예매 매일 매진
2004년 개관 이래 연 첫 도자기 기획전
간송·호림·이건희컬렉션·日기관 협력 등
흩어져 있던 조선백자 185점 한데 모아
국보·보물 지정 59점 중 31점 나오기도
  • 등록 2023-03-07 오전 5:10:00

    수정 2023-03-07 오전 11:31:08

서울 용산구 한남동 리움미술관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전 전경. 185점을 내놓은 전시에서 국보·보물 31점 등 대표주자로 뽑아낸 42점을 한곳에 모았다. 그중 ‘백자청화 보상화당초문 호’(16세기·보물)의 앞과 뒤. 뒤쪽 받침대에 정교하게 색과 도안을 이어 그린 리움미술관의 ‘보존처리’ 기술이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말문이 막힌다. ‘홀리자’ 작정을 하고 덤비는데 당해낼 재간이 있겠나. 빠져들 수밖에. 미혹될 수밖에. 그것도 하나둘이어야지 감당을 하지. 집단으로, 뭉텅이로 가슴팍을 파고드는 데야. 간신히 꺼낸 외마디는 이거다. “미쳤다.”

빛과 어둠으로 세상을 가르던 때가 있었다지만, 그건 이 광경을 못 봤을 때의 얘기다. 여기엔 하나가 더 있는데. 빛으로도 꺼낼 수 없고 어둠으로도 묻을 수 없는, 저들이 스스로 내는 광채. 눈앞에 믿기 어려운 자태로 도열한 ‘조선백자’ 42점이 말이다. 그래, 맞다. 살면서 백자에 홀리는 날을 맞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얘기를 이토록 ‘장황하게’,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게’ 하고 있는 거다. 혼을 빼놓고 마음을 훔쳤으면 다 가져간 게 아닌가.

리움미술관이 2004년 개관 이후 도자기만으로 꾸린 첫 기획전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전경. 185점을 내놓은 전시에서 국보·보물 31점 등 대표주자로 뽑아낸 42점을 한곳에 모아 스펙터클한 광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앞쪽에 ‘백자청화 홍치명 송죽문 호’(1489년·국보)가 놓였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서울 용산구 한남동 리움미술관.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전은 그렇게 시작한다. 리움미술관이 ‘도자기’를, 그것도 ‘국보’ ‘보물’이란 태그가 붙은 도자기를 전시장에 내놓은 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단연 처음이다. 2004년 미술관이 개관한 이래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도자기만으로 꾸린 기획전이라서다. 청화백자면 청화백자, 달항아리면 달항아리, 굳이 선을 긋지 않고 쪼개지 않고 조선 500여년 도자기역사를 ‘백자’란 단 하나의 키워드로 결집한 것도 처음이란다.

리움미술관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전 전경. 185점을 내놓은 전시에서 국보·보물 31점 등 대표주자로 뽑아낸 42점을 한곳에 모아 인위적인 조명보다 더한 광채를 내는 백자 도열을 만들어내고 있다. 앞쪽에 ‘백자청화 매죽문 호’(15세기·국보)가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쉽게 닿을 수 없던 곳에 ‘박혀’ 있던 백자를 한자리에 불러 모은 것 또한 처음이다. 리움미술관의 소장품은 당연한 거고, 도자기 하면 마땅히 줄 세울 국내 기관들의 소장품을 망라했다. 간송미술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호림박물관을 비롯해 이젠 국립중앙박물관의 식구가 된 이건희컬렉션 기증품 중에서도 뽑아왔다. 여기에 ‘조선백자’의 아픈 손가락까지 건드렸다. 일본으로 건너간 도자기를 수소문한 건데, 도쿄국립박물관·오사카시립동양미술관 등 6개 기관의 ‘기꺼운’ 협력을 받았다고 했다.

리움미술관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전 전경. 185점을 내놓은 전시에서 국보·보물 31점 등 대표주자로 뽑아낸 42점을 한곳에 모아 스펙터클한 광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앞쪽에 ‘백자철화 포도문 호’(18세기·국보)가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185가지 ‘백’의 향연…개막하자 마자 매진 행렬

낱낱이 산산이 흩어져 있던 ‘조선의 백자’ 185점(국내서 151점, 일본서 34점)이 그렇게 모였다. 하지만 이 역시 ‘되는 대로’는 아니다. 대표작을 엄선했다는데. 이 중 가장 앞줄에 세울 만한 국가지정문화재, 그러니까 국보·보물로 지정된 백자가 31점(국보 10점, 보물 21점)이다. 나라를 통틀어 59점인 국가지정문화재(국보 18점, 보물 41점) 중 절반 이상을 가져다 놓은 거다. 발끝이 머무는 데마다 국보가, 눈 돌리는 데마다 보물이 포진해 있다고 할까.

리움미술관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전 전경. 185점을 내놓은 전시에서 국보·보물 31점 등 대표주자로 뽑아낸 42점을 한곳에 모아 인위적인 조명보다 더한 광채를 내는 백자 도열을 만들어내고 있다. 왼쪽은 ‘백자청화 매죽문 호’(15∼16세기), 오른쪽은 ‘백자철화 포도문 호’(18세기·국보)다. 이 중 ‘백자청화 매죽문 호’는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서 왔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렇다면 전시장 초입, 어둠 속에 광채로 우뚝 선 저 42점은? 말 그대로 ‘대표선수’란다. 왕중왕 전에서 뽑아낸, 위엄과 품격으로 견줘 나무랄 데 없는 ‘하늘 아래 최상품’이라고 할까. 넉넉한 품을 가진 ‘백자청화 매죽문 호’(15세기·국보·개인), 잘록한 허리선을 가진 ‘백자청화 홍치명 송죽문 호’(1489·국보·동국대박물관), ‘뚜껑’으로 함구한 ‘백자청화 매죽문 호’(15세기·국보·호림박물관), 고된 타향살이를 견뎌냈을 ‘백자청화 매죽문 호’(15∼16세기·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등이 첫 줄에 섰다.

리움미술관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전 전경. 185점을 내놓은 전시에서 국보·보물 31점 등 대표주자로 뽑아낸 42점을 한곳에 모아 인위적인 조명보다 더한 광채를 내는 백자 도열을 만들어내고 있다. 왼쪽은 ‘백자 달항아리’(18세기·국보), 오른쪽은 ‘백자 개호’(15세기·국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 줄이 끝인가 한다면 대단히 섭섭하다. 뒤이어 ‘철화·동화백자’와 ‘순백자’까지 줄줄이 나섰으니까. ‘백자철화 포도문 호’(18세기·국보·국립중앙박물관), ‘백자철화 운죽문 호’(17세기·보물·개인), ‘백자상감 연화문 묘지 일괄’(1466·국보·리움미술관), ‘백자청화철채동채 초충난국문 병’(18세기·국보·간송미술관) 등을 거쳐 ‘백자 개호’(15세기·국보·개인), ‘백자병형 주자’(15∼16세기·국보·호림미술관), ‘백자 달항아리’(18세기·국보·개인) 등등.

리움미술관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전 전경. ‘백자 달항아리’(18세기·국보·가운데)를 중심으로 넓고 길게 늘어선 백자 도열을 내려다봤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아끼는 건 미뤄두고 클라이맥스는 뒤로 빼는 게 ‘업계’의 불문율이 아닌가. 그런데 비장의 카드를 첫판에 꺼내놨다? 그래, ‘자신 있다’는 얘기다. 이 ‘백자군단’으로 세상을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다고 확신한 거다. 확신은 ‘팩트’가 됐다. 28일 개막한 뒤 이제 한 주 남짓, 하루 1000여명이 찾고 있단 후문이다. 100% 온라인 예매로 관람객을 받는 전시는 관람을 예정한 14일 전 개인예매를 할 수 있는데, 매일 하루씩 창이 열릴 때마다 족족 매진을 ‘쓰고’ 있는 거다.

세상 홀린 ‘군자’…철화백자의 재발견

‘군자지향’이라고 했다. 전시명에 굳이 군자를 빼낸 이유가 말이다. 군자가 향하는 발아래 사뿐히 즈려밟기도 어려운 백자를 깔아뒀단 얘기인가. 아니다. 슬쩍 눈치챘겠지만 전시에서 ‘군자’는 백자의 다른 말이다. 전시를 기획한 이준광 리움미술관 책임연구원의 눈에 그렇게 비쳤단다. “500여년 다사다난한 역정을 거쳤으니 백자 안에는 시대의 초상이 담겼을” 거고, 바로 거기서 그 거친 세월을 견뎌낸 “군자의 풍모가 보이더라”고.

리움미술관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전 전경. 전시작 185점 중 기획전시실에 따로 모아둔 143점, 그 가운데 철화백자 2점이다. 왼쪽은 ‘백자철화 죽문 편병’(17세기), 오른쪽은 ‘백자철화 용문 편병’(17세기). ‘백자철화 용문 편병’은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서 왔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다만 시대상은 백자에게도 ‘변화’를 요구했나 보다. 흔히 백자에 올린 도안, 그 안료의 색으로 구분하는 ‘청화백자’ ‘철화·동화백자’ ‘순백자’가 괜히 나온 게 아니란 뜻이다. 왕실에서 주로 쓰던 값비싼 ‘청화’로만 백자를 만들던 시기를 지나, 왜란·호란으로 나라살림이 어려워진 시절을 이기려 ‘철화·동화’가 등장했던 거다. 중앙에만 머물던 백자가 지방으로 퍼져나갔던 계기도 이 덕이다. 가시만 남은 물고기(‘백자철화 어문 병’ 17세기), 지렁이처럼 친근한 용(‘백자철화 운룡문 호’ 17세기) 등 개성 넘치는 표현은 이 시절의 상징이 됐다. 하지만 되레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터. 그간 그렇게 뒷전에 밀렸던 그 ‘철화·동화백자’를 당당히 한축으로 세운 것도 이번 전시의 적잖은 성과다.

리움미술관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전 전경. 전시작 185점 중 기획전시실에 따로 모아둔 143점, 그 가운데 동화백자 2점이다. 왼쪽은 ‘백자동화 산수문 호’(18세기). 2021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이건희컬렉션 중 하나다. 오른쪽 ‘백자동화 화판문 각호’(19세기)는 리움미술관 소장품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순백자’는 ‘청화’와 ‘철화’의 모든 시기를 관통했던 셈인데, 그렇다고 ‘순백자’가 일색인 건 아니다. 우윳빛·눈빛·회색빛·푸른빛을 거쳐 세월의 상흔이 색이 된 ‘얼룩빛’까지 말이다. 흔히 창백한 얼굴을 오롯이 들이밀던, 그 정갈한 단아함의 ‘달항아리’가 우리가 아는 조선백자의 전부는 아니란 얘기다.

받침대에 슬쩍 ‘그린’…리움미술관 복원기술 감상도

하늘을 찌르는, 아니 전시장 천장을 뚫을 듯한 조선백자의 자존감을 회복시킨 건 물론 리움미술관이다. 우선 벽에 밀어넣듯 일렬로 세우던, 이제껏 정석처럼 알려진 밋밋한 전시방식을 깼다. 한점 한점을 도드라지게 입체적으로 배치한 건데. 당당한 앞모습은 물론 수줍은 뒷모습까지, 어느 한구석도 놓치지 않고 360도로 백자를 돌아보는 게 이 전시에선 가능하다.

리움미술관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전 전경. 7.4∼8.4㎝ 크기의 인형 6개와 가마 1개로 이뤄진 ‘백자철재 인물명기 일괄’(17세기)의 뒷모습이다. 인형들의 눈을 통해 전시장을 바라봤다. 185점 전시작 모두를 360도 돌아볼 수 있게 한 건 ‘조선의 백자’ 전의 중요한 포인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덕분에 발견하게 되는 ‘덤 같은’ 장면도 있다. 대놓고 꺼내지 않았어도 모른 척 넘어가긴 아까운 리움미술관의 ‘보존처리’ 기술 말이다. 전시작 중 간혹 제대로 설 수 없는 백자를 위해 받침대를 설치하기도 하는데, 그로 인해 도안이 끊기지 않도록 그 얇은 받침대에 붓으로 슬쩍 이어 그린 또 다른 ‘작품’이 보이는 거다. 마치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리움미술관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전 전경. 전시작 185점 중 기획전시실에 따로 모아둔 143점 가운데 ‘백자청화 모란문 병’(19세기)의 앞과 뒤. 뒤쪽 받침대에 정교하게 색과 도안을 이어 그린 리움미술관의 ‘보존처리’ 기술이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리움미술관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전 전경. 붉은 안료가 강렬한 ‘백자청화동채 운룡문 병’(19세기)이 수줍은 뒷모습을 내보인 채 전시장을 향해 오뚝이 섰다. 받침대에 리움미술관이 정교하게 이어 그린 색과 도안이 선명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렇듯 서로 동화되는 조화·조율은 전시가 의도한 선명한 갈래다. “바탕이 외관보다 나으면 거칠고, 외관이 바탕보다 나으면 호화스럽다. 외관과 바탕이 어울린 뒤에라야 군자답다”(‘논어’ 옹야 편)를 신념처럼 삼았다고 할까. 적어도 이 전시에서 군자는 위와 아래를 가르는, 중앙과 주변을 나누는 잣대는 될 수 없단 얘기다. 군자, 아니 백자가 끝끝내 살아남아 이런 날을 봤다. 전시는 5월 28일까지.

리움미술관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전 전경. 마지막에 세운 ‘백자 대호’(18세기)로 전시의 대미를 장식하게 했다. 단단하면서 부드럽고, 단순하면서 오묘한, 순백자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힌다. 높이 60.2㎝, 몸지름 46.1㎝로 매우 드문 대형작품이기도 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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