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용익의 록코노믹스]노래를 거꾸로 틀면 악마의 메시지가?

  • 등록 2018-03-17 오전 6:06:06

    수정 2018-03-17 오전 6:06:06

[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로큰롤이 태동한 직후부터 기독교계는 록이 ‘악마의 음악’이라는 프레임을 씌웠다. 1950년대에는 흑인 음악인 로큰롤이 백인 청소년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준다는 이유에서였지만, 1970년대 후반 들어선 나름대로 그럴듯한 근거를 들고 나왔다. 록 음악 레코드판을 거꾸로 틀면 악마의 메시지가 나온다는 주장이었다.

음악을 거꾸로 재생하면 특정 메시지가 나오도록 하는 녹음 기술을 백마스킹이라고 하고, 이렇게 재생된 소리를 백워드 메시지라고 한다. 실제로 1966년 비틀스가 백마스킹을 시도한 이후 록 밴드들은 노래에 백워드 메시지를 숨겨놓곤 했다. 당시 록 마니아들 사이에선 백마스킹 찾기가 유행하기도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를 거꾸로 틀면 ‘피가 모자라’라는 백워드 메시지가 나온다는 논란이 한국에선 가장 유명한 백마스킹 사례다.

음악업계 종사자들의 말에 따르면 백마스킹은 매우 번거로운 작업이며, 논란이 일고 있는 대부분의 백워드 메시지는 우연의 일치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기독교계는 록 음악인들이 의도적으로 백마스킹을 이용해 악마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주장은 소비자의 잠재의식을 공략하는 서브리미널 광고가 인기를 끌면서 설득력을 얻었다. 서브리미널 광고는 인간의 감각이 인식하지 못하는 메시지를 잠재의식이 인지한다는 이론에 착안한 마케팅 기법이다. 영화 상영 중 ‘배고프세요? 팝콘을 드세요’라는 메시지를 3000분의 1초 동안 반복적으로 보여줬더니 극장 내 팝콘 매출이 늘었다는 실험은 유명하다. 기독교계는 서브리미널 광고와 마찬가지로 백마스킹이 삽입된 노래를 정상적인 방향으로 재생해도 잠재의식은 백워드 메시지를 인식한다고 경고했다.

기독교계의 공세는 1985년 티퍼 고어 여사가 주도해 설립한 학부모음악연구소(PMRC)가 가세하면서 더욱 불붙었다. 레드 제플린과 핑크 플로이드를 비롯한 몇몇 밴드들은 백마스킹으로 사타니즘을 홍보했다는 혐의로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1980년대는 록의 시대였다. 기독교와 학부모 단체가 유명 밴드들의 인기를 잠재우진 못했다. 특히 기독교계는 틈만 나면 록과 악마주의를 연결시켜 공격해 왔다는 점에서 백마스킹을 문제삼은 것이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이들이 뭐라고 떠들건 대중은 광신도들의 헛소리로 치부했다.

AC/DC의 ‘Highway to Hell’ 앨범 표지
백마스킹이 대중의 주목을 받은 사건은 1988년에 일어났다. 22세 여성 등 13명을 잔인하게 죽인 연쇄 살인마 리처드 라미레즈가 캘리포니아주에서 열린 재판에서 AC/DC의 “Night Prowler”를 듣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하면서다. 이 곡에서는 백마스킹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같은 앨범에 수록된 “Highway to Hell”은 ‘I′m the law’(내가 법이다), ‘my name is Lucifer’(내 이름은 루시퍼), ‘she belongs in hell’(그녀는 지옥이 알맞아) 등의 백워드 메시지가 담겨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록 음악계에는 악재가 이어졌다. 1990년 주다스 프리스트는 네바다주에 살던 한 청년의 자살을 조장했다는 혐의로 법정에 섰다. 함께 자살 기도를 했다가 살아남은 청년과 유족들은 “Better By You, Better Than Me”에 숨어있는 메시지 ‘try suicide’(자살해봐), ‘do it’(해봐) 등이 자살을 부추겼다고 진술했다. 법원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기각했지만, 일련의 사건을 통해 록이 악마의 음악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기독교계는 승리감에 도취됐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악마주의 논란이 록 밴드들의 매출에는 별로 영향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노이즈 마케팅 효과가 더 컸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록을 듣지 않던 사람들도 AC/DC와 주다스 프리스트를 알게 됐다. 기독교와 학부모 단체가 설쳐대는 꼴에 반발한 일부 청소년들은 악마주의에 매료되기도 했다.

연쇄 살인범 재판 2년 후인 1990년에 발매된 AC/DC의 ‘The Razor′s Edge’ 앨범은 빌보드 앨범 차트 2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고, 앨범 발매를 기념한 공연은 매진됐다. 자살 소송 직후 나온 주다스 프리스트의 ‘Painkiller’ 앨범은 빌보드 26위까지 올랐으며, 지금까지도 헤비메탈 필청 음반으로 꼽힌다. 악마적인 이미지를 내세운 헤비메탈 밴드들은 그런지(grunge) 열풍이 불어닥친 1990년대 중반까지 인기를 지속했다.

백마스킹은 지금도 종종 이뤄지고 있다. 다만 음악인들은 백마스킹을 통해 사타니즘을 홍보한다는 기독교계의 주장에 대해선 어이가 없다는 입장이다. 청소년 자살 사건으로 인해 법정에 출두했던 주다스 프리스트의 롭 핼포드는 훗날 “우리가 음악에 서브리미널 메시지를 넣었다면 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비생산적인 명령을 하기보다는 ‘우리 음반을 더 사라’는 명령이 더 좋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애초부터 백워드 메시지가 인간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기독교계의 주장은 억지스러웠다는 지적이 많다. 티모시 E. 무어 요크대학교 교수는 1988년 연구에서 “백워드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영향을 받는다는 증거는 없다”고 결론내렸다. 마크 D. 앨런 버밍엄영대학교 교수는 1992년 논문에서 “백마스킹을 통해 서브리미널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고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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