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유연한 원칙론자…전례없는 韓銀의 '독립성 실험'

전임 총재들 박수 친 李총재 연임
2016년 조선·해운 구조조정 당시
정부 '출자' 요구에 '대출' 역제안
국가자산 손실 최소화한 해법 찾아
李연임, 통화정책 독립성에 호재
외국처럼 '장수 총재' 가능성 열어
  • 등록 2018-03-05 오전 5:00:10

    수정 2018-03-05 오전 5:00:10

청와대가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를 연임한다고 밝힌 지난 2일 오후 서울 중구 한은 본관 기자실에서 이 총재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데일리 김정남 기자] 지난 2016년 5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사뭇 비장해 보였다. 박근혜정부가 기업 구조조정에 나서면서 ‘한은 역할론’이 비등했던 시기다. 정부·여당은 구조조정을 하는데 국책은행에 돈이 필요하니, 한은에 발권력을 동원해달라고 요구했다. 그것도 회수가 불가능한 ‘출자’였다.

이 총재가 일부 기자들과 만나서 강조했던 건 딱 하나. 원칙론이었다. “중앙은행은 국가의 자원을 배분하는 곳입니다. 손해 보면서 활용할 수 있는 권한은 없어요. 손실 최소화의 기본 원칙을 지켜야지요.” 정부의 출자 요구는 이에 어긋나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결국 정부는 이 총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담보를 잡고 회수가 가능한 ‘대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은을 둘러싸고 “나라가 어려운데 웬 한가한 원칙론이냐”는 압박이 만만치 않았다. 공교롭게도 당시 정부의 구조조정 기수가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이었다. 이 총재와 친분이 깊은 인사다. 정부와 맞선 이 총재의 고뇌는 생각보다 깊었을 것이다.

‘파격적인’ 한국은행 총재의 연임

수십년 전 그 옛날의 일이 아니다. 불과 2년도 채 안 된 일이다. 한은은 이제 ‘재무부의 남대문 출장소’가 아니라고들 하지만, 또 정부 관료들의 마음 속 그 어딘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일화다. 이 총재는 시간이 지난 후 이런 속내를 내비쳤다고 한다. “정부의 논리는 결국 ‘나라를 위해서’였습니다. 그걸(그 진정성을) 왜 모르겠습니까. 정부와 한은이 생각 차이가 좀 있었던 것이지요.”

한은이 설립된 건 1950년이다. 68년의 역사다. 하지만 사실상 독립기관이 된 건 불과 20년이다. 1998년 한은법 개정 이후다. 그제서야 한은 총재가 금융통화위원회 의사봉을 잡게 됐고, 정권과 무관하게 4년 임기가 보장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은은 정부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곳이다. 특정 정권의 문제는 아니다. 문재인정부가 출범한 직후인 지난해 8월 청와대 관계자는 본지 인터뷰에서 “1.25%의 기준금리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숨겨진 본심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일까. 경제계는 이 총재의 연임 소식을 파격적이고, 신선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지난 2일 오후 청와대의 연임 발표 직후 기자와 통화한 학계 교수들과 시장 인사들 다수의 반응은 이랬다. “허허허.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군요.” 한은 직원들도 반응은 비슷했다. 22대 한은 총재(2002~2006년)를 지낸 박승 전 총재는 감격스러워하는 분위기마저 느껴졌다. 그는 “연임의 전통을 세웠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아주 잘 됐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국회 청문회를 통과하면, 사실상 첫 연임 총재가 된다.

‘이주열 2기’의 과제는 산적하다. 미국과 기준금리 역전이 임박했다느니, 1450조원이 넘는 가계부채가 천문학적이라느니, 만성적인 저성장 흐름이 굳어졌다느니 하는 현안이 제시되고 있다. 장재철 KB증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대내외 여건이 녹록지 않은 만큼 통화정책 연속성을 생각하면 연임 결정은 긍정적”이라고 했다. 이 총재는 2003년 한은 조사국장 시절부터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에 직접 나왔다. 그 경험이 13년이다. 기준금리 결정 과정을 이 총재보다 오래 지켜본 이가 없다. 문재인 대통령의 바람대로 그는 무난하게 ‘안전운행’을 할 가능성이 높다.

‘독립성 실험’ 李총재 보여줄 차례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전례없는 한은의 ‘독립성 실험’이다. 현안을 다루는 건 누가 총재로 와도 했어야 하는 일이다. 이 총재만이 할 수 있는 건 선진국 같은 ‘장수 총재’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일이다. 국제금융 무대에서 ‘안면장사’에 능한 모습도 보여야 하고, 때에 따라 정부 정책이 무리하다 싶으면 쓴소리도 던질 줄 알아야 한다. 중앙은행이 왜 정권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지 보여줘야 한다. 문 대통령은 그 판을 깔아주는 결단을 내렸고, 이제 이 총재가 보여줄 차례다. 한 베테랑 거시경제 전문가는 “한은 독립성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라며 “실력으로 쟁취하고 책임도 져야 한다”고 했다. 그 정도 각오가 없다면 또 2년 전 출자 압박 같은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다.

‘세계 경제 대통령’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무려 19년 재임했다. 박승 전 총재는 “국제회의에 나가보면 다른 나라 총재들은 10~20년씩 나왔다”고 회상했다. 우리나라도 장수 한은 총재가 과연 가능할까. 4년 후 이 총재는 또 어떤 평가를 받을까.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1952년生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경제학 석사 △한국은행 입행(1977년) △한국은행 조사국장(2003~2005년) △한국은행 정책기획국장(2005~2007년) △한국은행 통화신용정책 부총재보(2007~2009년) △한국은행 부총재(2009~2012년) △한국은행 총재(2014년~)

[이데일리 문승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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