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원권 뚫고 나온 여인…뼛속까지 그림쟁이

서울미술관 '사임당, 그녀의 화원' 전
시대는 어머니상 부각했지만
숙종·송시열 등이 극찬한 화가
풀·곤충 그린 '초충도' 14점
처음 공개한 '묵란도' 1점
디테일한 동식물 묘사 압권
  • 등록 2017-02-07 오전 12:30:05

    수정 2017-02-07 오전 12:30:05

감지에 채색한 신사임당의 ‘초충도’ 중 한 점. 꽃과 풀잎의 섬세한 묘사는 물론 나비와 도마뱀 등의 소소한 움직임까지 놓치지 않았다. 그림을 완성한 정확한 때는 알 수 없다(사진=서울미술관).


[이데일리 오현주 선임기자] “풀이며 벌레여 그 모양 너무 닮아/ 부인이 그려낸 것 어찌 그리 교묘할꼬/ 그 그림 모사하여 대전 안에 병풍 쳤네/ 아깝도다 빠진 한 폭 모사 한 장 더 하였네/ 채색만을 쓴 것이라 한결 더 아름다워/ 그 무슨 법인가 무골법이 이것이네.”

조선 19대 임금 숙종(1661∼1720)이 1715년 8월 상순쯤 썼다고 알려진 글.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고작 아녀자 그림 한 점에 이처럼 장황한 수사를 꺼내놓다니.

그이의 정확한 이름은 모른다. 성씨인 신(申)을 붙여 그저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이라고만 한다. 한때 ‘신인선’이란 이름이 오르내린 적이 있으나 확인할 수 없는 논쟁뿐이다. 이름이 없으니 낙관이 있을 리 없다. 조선사회가 만든 오류고 그 시대를 살아낸 아녀자의 비애다. 그럼에도 400년이 지난 지금껏 그이의 그림은 한 번도 의심받은 적이 없다. 그림뿐인가. 온갖 화려한 수식을 붙여 조선의 가장 이상적인 여인상으로까지 등극시키지 않았나. 결국 지폐에까지 들여놓고 보고 싶은 사임당만 만들어냈다.

“내 그림이 아니다” “내 그림이 분명하다”로 세상이 시끄러운 요즘. 그 흔한 사인조차 없는 조용한 그림들에 세간의 시선이 모이고 있다. 5만원권을 뚫고 나온, 박제에서 벗어난 사임당을 제대로 만날 기회다. 현모양처니 강한 어머니니 다 접어두고 ‘뼛속까지 그림쟁이’였던 한 예술가 말이다.

▲디테일도 조선 최고…‘동물도감’인지 ‘식물도감’인지

서울 종로구 부암동 서울미술관이 열고 있는 ‘사임당, 그녀의 화원’ 전은 군더더기가 없다. 치장 없이 그이의 예술혼만 들여다보자고 차린 자리다. ‘초충도’(草蟲圖) 14점과 ‘묵란도’(墨蘭圖) 1점을 걸었다. 모두 서울미술관의 소장품이다.

신사임당 ‘초충도’(연도미상)(사진=서울미술관).
‘초충도’는 한자어 뜻 그대로 풀과 벌레를 그린 그림이다. 중심에 꽃과 열매, 채소 등이 달린 풀을 배치하고 이들이 부른 벌레와 작은 동물을 박아넣는 식이다. 보이는 전경보다는 숨은 상징에 힘을 싣는다. 꽃과 나비가 말하는 ‘부부간의 사랑’, 오이가 뜻하는 ‘풍요와 다산’ 같은 것 말이다. 사임당의 ‘초충도’는 당대에 보기 힘든 의미 몇가지를 더 심었다. 자식교육의 소중함을 의미하는 사마귀라든가 다자와 다복을 가져다준다는 가지 등. 상식만을 고집한 것도 아니다. 수박과 들쥐를 묘사한 한 그림은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해 자연과 사투를 벌이는 씨앗에까지 시선을 옮겨놨다.

디테일한 묘사는 가히 조선 최고라 할 만하다. 도마뱀의 유려한 꼬리나 잠자리의 날개, 풀잎의 섬세한 솜털까지 잡아낸 그림은 ‘동물도감’ ‘식물도감’을 넘나든다. 여기에 무골법, 숙종이 감탄을 거듭한 그 화법이 정점을 찍는다. 윤곽선 없이 한 붓에 그리는 기법이다. 몰골법이라고도 하는데 밑그림 없이 물감을 묻힌 붓을 바로 들이대 채색하는 것이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라면 쉽지 않다. 아웃라인을 만든 뒤 그 안을 채워넣는 소심한 붓질이 아니란 뜻이니까. 남성적이란 평가는 그래서 나온다. 한편에선 여성에 유리하다는 얘기도 있다. ‘수’를 놓는 방식이 이와 흡사하기 때문이란다.

늦은 봄부터 초가을까지 앞마당에서 움직이는 생물은 모두 소재로 삼은 듯하다. 상상이 빚은 형상은 없다는 얘기다. 다만 자신의 눈에 든 ‘특별한 주인공’에 대해선 구도와 비율을 깨는 파격도 선뵀다. 예컨대 그날의 주인공이 나비면 나비, 개구리면 개구리, 맨드라미면 맨드라미에 방점을 찍었던 거다. 특별한 게 하나 더 있다 ‘감지’다. 감물을 들여 만든 감지는 조선 최고의 종이로 꼽혔다. 금가루로 쓴 불경인 금사경에도 쓰였다니. 감지는 세월이 지나면 푸른빛으로 변하는 특성이 있으나 일단 병충해에 강한 것이 대단한 장점이다. 전시를 기획한 서울미술관의 안진우 큐레이터는 “상당히 비싼 종이인 감지에 그렸다는 건 사임당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림에 대한 수요층이 적잖았다는 방증”이라고 설명한다.

우암 송시열이 극찬한 신사임당 ‘묵란도’(연도미상)(사진=서울미술관).
‘초충도’와는 다소 다른 형식인, 단 한 점 ‘묵란도’에 대한 재조명도 눈여겨볼 부분. 미술관 개관 이래 처음 공개했다는 ‘묵란도’는 2005년 진품을 가리는 TV 프로그램에 소개되며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1년 6개월여의 수소문 끝에 서울미술관 설립자인 안병광 회장이 소장하게 됐다고. 실물로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 안 회장보다 먼저 알아본 이가 있었으니 율곡 이이의 제자였던 우암 송시열(1607∼1689)이다. “그 손가락 밑에서 표현한 것으로도 오히려 능히 혼연히 자연을 이뤄 사람의 힘을 빌려 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스승의 어머니에 대한 예우였나. 격찬이 대단했다.

▲박제 벗겨낸 예술혼 조명

사임당은 시와 글, 그림에 능한 ‘시·서·화’ 삼절의 효시라 평가받는다. 예술성에 관한 한 이견이 없다. 다만 인물 자체에 대한 분석은 시대에 따라 가감을 입었다. 당대에는 정물화·산수화에 탁월한 여류화가였다. 하지만 아들 율곡이 주목받는 인물로 등장하자 예술가로서의 위상은 시들해졌다. ‘어머니상’이 중요해진 것이다. 근대에 와선 여성계몽에도 휩쓸렸다. 현모양처는 물론이고 깨어 있는 여성성이 필요했던 터다. 최근 이미지는 ‘슈퍼우먼 혹은 워킹맘’. 가장으로서 무능한 남편을 대신해 100여명에 달하는 식솔을 그림으로 먹여살렸다는 이야기가 돌면서다.

슈퍼우먼이든 워킹맘이든 사실 그건 전시에서 밝힐 일은 아니다. 그저 그림만이면 족하지 않겠나. 그럼에도 끝까지 평탄한 사임당일 수는 없을 듯하다. 전시는 때마침 시작한 TV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와 연결돼 있다. 아마 예술가 그 이상의 사임당을 다룰 것이다. 참고로 드라마에 비치는 ‘초충도’ 등 사임당의 작품은 서울미술관에서 제공한 이미지란다.

전시는 6월 11일까지. 사임당의 화원에 풀이 우거지고 벌레가 몰려들기 시작할 때까지다. 그즈음 밖으로 나서면 계절에 앞서 눈에 담아뒀던 ‘초충도’가 아른거릴 거다.

서울미술관 ‘사임당, 그녀의 화원’ 전 전경(사진=서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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