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하, 왜 '날라리'를 싫어하셨나요

대중예술로 박정희시대 탐구
고고장 유흥층 데모 대학생
미국식 자유바람 한통속 몰아
운동권 넘어 대중문화와 대립각
박정희, 날라리를 포용했다면
박근혜 '블랙리스트' 없었을 것
……………………………………
동백아가씨는 어디로 갔을까
이영미|400쪽|인물과사상사
  • 등록 2017-02-22 오전 12:25:00

    수정 2017-02-22 오전 7:50:52

2015년 광주충장로축제에서 1970년대 청년문화를 재현했다. 흔히 통기타·장발·미니스커트를 저항적 청년문화의 상징으로 보지만 문화평론가 이영미는 “그렇게 단순치 않다”고 말한다(사진=이데일리DB).


[이데일리 오현주 선임기자] 때는 바야흐로 1961년. 5·16군사쿠데타 직후인 5월 24일자 한 일간지에 큼지막한 헤드라인이 걸렸다. ‘춤바람에 군벌의 심판’이란 기사. 춤에 미쳐 돌아가다가 검거된 ‘댄스광(狂)’들에게 계엄고등군법회의가 첫 재판결과를 내린 살벌한 내용이었다. 무허가댄스홀에서 춤을 춘 것이 죄였다. 포고령 1호와 계엄법 13·15조 위반인 줄도 모르고. 이후 무허가댄스홀은 급습 대상이었고 언론은 댄스족·댄스당 등의 신조어를 씌워 여론의 재판장으로도 내몰았다.

1964년은 한국 트로트의 길이 새롭게 열린 해다. 단 한 곡 덕분이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메가히트란 장르까지 열어젖혔다. 그런데 갑자기 ‘동백아가씨’는 금지곡이 됐다. 이유는 ‘왜색’. 이후 트로트는 잊을 만하면 왜색을 쓰고 도마 위에 올랐다. 따지고 보면 이런 비난도 그리 ‘한국색’은 아니었을 텐데.

문화평론가 이영미(56)가 문화를 매개로 한 역사보기를 시도했다. 대중문화, 그중에서도 박정희시대의 대중예술에 돋보기를 들이댔다. 1990년대부터 ‘딴따라 철학’에 독특한 분석틀을 만들어온 내공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역사를 문화로 읽는 것이, 대중예술로 시대를 읽는다는 것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저자는 잘 알고 있다. ‘빛나는 유산’과는 거리가 먼 ‘어중이떠중이 문화’라는 오명 탓이다.

그럼에도 저자의 신념은 확고하다. 지식인이 만들고 상류층만 향유하던 문화에 비해 대중예술은 시대의 민심이나 삶의 속살 엿보기가 유리하다는 이유에서다. 책은 언제랄 것도 없이 1960년 4·19혁명부터 1979년 10·26사태까지 20여년에 고른 관심을 뿌린다. 굳이 키워드를 꼽자면 자유부인, 동백아가씨, 아침이슬, 국가비상사태, 포크, 장발족, 금지곡, 대마초, 트로트 등. 그렇다고 사전식 설명만 하고 있진 않다. 정치·경제 상황을 보지 않고 대중예술의 변화를 볼 수 없어서란다.

▲자유부인은 춤만 춘 게 아니었다

1961년 ‘댄스당원’에게 가혹한 조치를 내렸던 그 사건. 살짝 뒤집어보자. 줄줄이 군법회의에 세울 정도로 댄스가 유행이었다면 1950년대는 되레 ‘자유로웠다’는 뜻이 아닌가. 다시 말해 자유라는 이름으로 욕망을 인정하는 게 1950년대에는 선진적인 트렌드였단 소리다.

가령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1954). 그저 춤바람에 패가망신한 부인이야기려니 짐작하는 건 문제가 있다. 왜냐고? 1950년대니까. 최소한 소설 속 부인은 춤추는 데 대한 죄책감은 없다. 오히려 사회엘리트층이 벌인 온갖 부조리가 문제였던 거다. 뒷돈으로 먹고사는 공무원, 부자스폰서와 공생하는 국회의원, 돈봉투로 성적을 올리는 대학생과 이를 챙기는 교수부인 등. ‘자유부인’을 두고 당시 황산덕 서울대 법대 교수는 ‘중공군 50만명에 해당하는 조국의 적’이라고 분개했다니. 그래도 저자는 정비석이 자유를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고 봤다. 가슴이 벅차면서도 대단히 불편한 그 양면성을.

▲혁명주체 ‘날라리’ 대마초사건에 연루되기까지

저자가 박정희시대를 통틀어 마음을 쓴 대상이 있다. ‘날라리’다. 1960년대에는 다소 문란한 연애를 즐기며 공부보다 놀이에 집중하는 대학생이 그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4·19혁명에 참여해 목숨을 잃는 참변이 벌어진다. 말 그대로 날라리의 혁명이었던 거다. 박계주의 ‘장미와 태양’(1960)에 나온 내용. 그럼에도 저자는 거품뿐인 자유가 날라리까지 시민명의 주체를 키워낸 동력이었다고 봤다.

날라리가 다시 주역으로 등장한 건 1970년대 중반. 통기타와 고고장만 좇는 부류를 데모 대학생과 싸잡아 ‘미국식 자유바람이 든 젊은애들’로 몰아세웠다. 이들을 어쩔 텐가. 그러던 차에 방법을 찾았으니 유신헌법이다. ‘한국식 민주주의 토착화’를 모토로 미국만 따라 하는 ‘싸가지 없는’ 날라리를 제압할 논리를 얻었다. 1975년 긴급조치 9호가 공안정국을 만들고 군기를 잡았다. 대중가요에 ‘금지곡’을 때리고 급기야 대마초사건을 터뜨린다. 희생은 날라리의 몫이었다. 저자가 저항에 대한 탄압보다 퇴폐근절의 정책으로 당시의 대중예술 억압을 본 근거가 여기에 있다.

▲데모꾼은 ‘김민기 노래’를 즐기지 않아

학생운동권에선 거의 신격화한 김민기의 노래가 박정희시대에 동일한 조건으로 유통된 건 아니었나 보다. 저자는 정권에 가장 치열하게 맞섰던 학생운동의 주체조차 청년문화의 껄렁대는 자유주의, 개인주의적 감수성을 못마땅해했단다. 그나마 김민기가 다니던 서울대 미대생들은 그의 노래에 흥미를 가졌지만 문리대와 법대로 넘어오면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는 거다. 그런 그들이 신중현의 ‘미인’이나 트윈폴리오의 ‘하얀손수건’을 어떻게 여겼겠느냐고.

이를 통해 저자는 박정희시대의 청년문화란 것이 결코 한 갈래가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그 시대의 청년 모두가 동질의 청년문화를 향유하지 않았으며 호불호와 평가도 매우 복잡했다는 걸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금지곡’과 ‘블랙리스트’ 상관관계

그런데 왜 하필 지금 박정희시대인가. 우선 타이밍을 꼽는다. 박정희시대가 시작된 지 60년, 끝난 지도 40여년. 시간적인 거리로 보자면 이제부터 본격적인 역사연구의 대상이 아니겠느냐고. 때마침 박근혜시대도 끝이 보이니 이제야 이들 부녀가 교묘히 엮인 시대와의 질긴 인연을 정리할 때라고.

“박정희시대에나 있을 법한….” 요즘 우리는 이런 농담이 현실이 되는 놀라운 경험 중이다. 박정희시대와 박근혜시대의 ‘통제’는 연결돼 있다. 금지곡의 리스트를 뽑는 일이나 좌파성향의 예술인 리스트를 만드는 일이나 목적은 같다. 하던 일을 못하게 막는 거 아닌가. 1975년 박정희시대는 김민기·이장희·신중현을 동시에 퇴출했다. 만약 그 시대가 머리를 기르든 노래를 하든 혈기왕성한 문화적 자유주의를 모르는 척 포용했더라면? 팬들조차 ‘진짜 너무 하네’란 생각은 못했을 거란 얘기다. 이는 후일 한국의 청년문화와 정치진보성과의 관계를 과장 혹은 단순화하는 빌미가 됐다. 박근혜시대의 ‘블랙리스트’도 다를 게 없다. 결국 한국의 대중문화·예술이 정치진보성과의 관계맺기를 다시 하게 했으니.

‘이 세상에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나비효과를 두고 저자의 탄식이 길다. 그럼에도 책은 재미가 있다. “고생 모르고 산 놈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가 그중 하나. 이 레퍼토리가 이토록 장구한 역사성을 갖게 될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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