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졸도'할 건가, 따로 '졸혼'할 건가

살자니 지겹고 이혼하긴 버겁고
혼인관계 유지하되 따로사는 '졸혼'
위기 중년부부 해결책으로 부상
부모봉양·경제문제·자식부양 과제
'결혼 졸업' 전 사전협의 필요해
……………………………………
졸혼 시대
스기야마 유미코|240쪽|더퀘스트
  • 등록 2017-03-29 오전 12:10:00

    수정 2017-03-29 오전 12:10:00

‘결혼을 졸업한다’ 뜻의 ‘졸혼’이 결혼유지 혹은 결혼파국의 대안으로 부상 중이다. 부부의 관계성을 유지하며 각자의 삶을 살아보자는 것이다. 고정적인 역할을 벗겨내지만 결혼생활을 깨는 게 아니라 파격적으로 바꾸는 것이 목적이다(이미지=이데일리 디자인팀).


[이데일리 오현주 선임기자] “이제 좀 혼자 나가 놀 수 없어?” 아, 이게 뭔가. 날벼락 같은 경고도 모자라 잔인한 통보다. 오만 가지 생각이 스친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젊은 시절부터 일을 핑계로 밖에서만 떠돌던 한 남자. 신조는 일관되고 확고했다. ‘집안일? 그게 뭐야. 아이들? 잘 크겠지.’ 예순을 넘겨 임원으로 퇴직할 때는 자부심으로 가슴까지 벅차올랐다. 사실 아내에게 미안함이 없지 않았지만 은퇴하고 보상해 나가리라 다짐했다.

‘그래, 드디어 때가 왔어!’ 퇴직하자마자 당장 해외여행부터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신혼여행 이후 처음이었다는데 둘만의 시간은 즐거웠고 아내도 그래 보였단다. 필드에도 늘 함께 나섰다. 예전에 다니던 골프와는 달랐다. 아무리 채를 휘둘러도 늘지 않는 실력 대신 아내는 목청이 터져라 뒤에서 ‘나이스샷!’을 외쳐줬으니. 어떤 캐디가 이렇게 충직할까 싶었다.

쑥스러운 ‘짓’도 해봤단다. 백화점 쇼핑길에 여자화장실 앞에서 아내의 가방을 들고 서 있는 일. 옆에 선 비슷한 자세의 남자들과 확 친밀감이 생겼다. ‘잠시 창피한 거야 뭐. 100세 시대라잖아. 앞으로 40년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꿈같은 나날’이 흐른 몇 달 뒤. 어느 날 아침 아내는 얼굴 표정 하나 구기지 않고 밥상 위로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그만 이제 나가 놀아.”

정작 당사자는 충격에서 헤매고 있다지만 그나마 이 경우는 양반 축에 든다. 서로 죽일 듯이 싸우고 할퀴는 전쟁에까진 이르지 않은 듯하니. 그렇다면 이들 부부의 남은 40년은 어찌 될 건가. 요즘 많이들 한다는 황혼이혼으로 갈라설 건가, 행복을 가장한 무늬만 부부로 살 건가. 정말 선택은 이 둘뿐인가. 아니다. 방법이 있다. ‘결혼을 졸업’하는 것, ‘졸혼’(卒婚)이 있다.

실로 파격적인 단어인 졸혼은 일본에서 건너왔다. 여성의 삶에 대한 글을 주로 써온 에세이스트인 저자가 만든 신조어다. 스스로 결혼생활에 갈등을 겪던 저자가 문득 다른 부부는 어떻게 사는가가 궁금해 취재에 나섰단다. 그러곤 자신들 상황에 맞게 부부의 관계와 역할을 바꾼 몇몇 커플을 만난 뒤 이들의 공통점에 졸혼이란 타이틀을 붙이게 됐다는 것. 책은 실제 일본서 졸혼을 실천한 여섯 쌍의 부부를 ‘디테일’하게 소개한다. 아내와 남편이 각자의 일을 하며 떨어져 사는 가장 일반적인 사례부터 전업주부이던 아내가 요양복지사로 새 인생을 시작하고 남편은 산속 오두막으로 들어가 자유로운 ‘백수’가 된 사례 등등.

으레 나올 법한 결론 식 주장이나 의견은 거의 없다. 저자는 자신을 포함해 여섯 쌍의 간접체험을 전달하며 졸혼의 가능성을 구체화할 뿐이다. 지향은 한 가지. ‘열린 부부관계’다.

▲같이 살 이유가 없다면 ‘졸혼’할 때

최근 중년 기혼자 사이에 들불 번지듯 입을 타고 있다는 졸혼. 왜 아니겠나. 몇십 년을 같이 살았다지만 도대체 이 사람과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얼굴만 봐도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에 시달린다면 이만한 매력거리는 없다. 게다가 파국도 아니고 결혼생활 위기탈출 프로젝트가 아닌가.

맞다. 저자는 위기든 권태든 결혼생활이 평탄치 않다면 적극 고려해볼 방안으로 졸혼을 꺼냈다. 결혼파괴를 뜻하는 이혼의 후유증 없이 부부의 관계성을 유지하며 각자의 삶을 살아보자는 것이다. 다만 요건은 필요하다고 했다. 결혼생활과 유사한 긴장감이다. 내 삶에 충실하면서 상대의 삶을 존중할 것, 남들을 의식하지 말고 오로지 부부관계를 중심에 놓을 것.

‘내 삶에 충실한 부부관계’라.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쉬운가. 당장 정해진 것도 없는데. 가령 ‘졸혼이 별거와 뭐가 다르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궁색해진다. 따로 떨어져 살면 벌거고 같이 살 수도 있으면 졸혼인가? 사이가 나빠져 갈라서면 별거고 좋게 정리하면 졸혼이고? 이혼서류에 도장찍자고 덤벼들면 별거고 이혼서류에 도장찍기를 유보하면 졸혼이 되나?

‘법적 관계를 깨는’ 이혼처럼 분명한 건 어디에도 없다. 졸혼은 그냥 ‘알아서’ 하는 거다. 전제가 있다면 이제까지의 결혼생활과는 달라야 하는 것. 100쌍의 부부는 100가지의 졸혼을 할 수 있는 거다.

▲‘따로 또 같이’…다른 대안은 없다

책의 시작에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이 얹은 한 수가 현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지금 부부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면 “갑자기 너무 오래 살게 됐기 때문”으로 진단해야 한단다. “새로운 빙하기가 닥치거나 우주인의 침공이 없다면 누구나 100세까지 살 수 있으니” 해결도 그 지점에서 더듬어야 한다는 뜻이다. 평균수명이 50세도 채 안 되던 시대의 유물인 가치관·윤리의식·도덕성이 어찌 100세 시대를 관통하겠느냐는 거다.

‘일부일처제’를 깨면 되겠나. 그건 곤란하단다. 인류가 발명해낸 가장 합리적인 이 제도를 대체할 프로그램은 아직 없다고. 그래서 오로지 단 하나, 졸혼이란다. 각자 하고 싶은 건 따로 하고 같이 하고 싶은 건 같이 하는, 말 그대로 ‘따로 또 같이’란 얘기다.

그렇다고 학창시절에 때가 되면 안겨주던 졸업장처럼 반자동적인 시스템일 리는 만무하다. 관건은 콘텐츠다. 내용은 없이 형식만 갖춰서야 ‘진정한 졸업’이라고 하겠느냐는 말이다.

▲‘졸혼’ 문화꼼수인가 관계혁명인가

분명한 것은 결혼생활을 깨는 게 아니라 바꾸는 것. 이를 위해 저자는 최소한 기본은 정해두라고 말한다. 노부모와의 관계유지, 상속을 포함한 경제문제, 자식을 돌보는 역할분담. 이쯤 되면 졸혼이 결코 중년부부의 나른한 권태를 자극할 짜릿한 일탈은 아닌 거다. 삶의 가치를 치열하게 탐색해야 비로소 틈이 보이는 만만치 않은 숙제다. 슬쩍 시대의 자유로움에 편승한 문화꼼수가 될지, 결혼에 버금가는 인간연결의 관계혁명이 될지는 좀더 두고 볼 일이지만. 이조차도 각자에게 달린 게 아닌가.

나이 들어 고민해봐야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점도 넌지시 이른다. 그러니 젊을 때 미리미리 생각해두는 게 좋다고 다들 입을 맞춘다. 어느 날 갑자기 경고니 통보니 날벼락이니 최후통첩이니 이런 험악한 공습을 피하려면 ‘연습문제 풀 듯’ 대비하는 게 현명하다는 소리다. 그러다가 주위에 눈치 보지 않고 이렇게 외칠 정도면 경지에 오른 거다. ‘내 결혼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우리 졸혼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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