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들의 설]⑤"손주들 세뱃돈 주려면 노가다라도 해야…"

60세 안모씨, 설날 앞두고 공사 현장에서 아르바이트
손주들 세뱃돈 두둑히 주려면 수중 돈으로 태부족
"자식이 여행 보내준다는데" 친구 자랑에 "나도?"
  • 등록 2020-01-27 오후 12:05:19

    수정 2020-01-27 오후 12: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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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파트 건축 현장. 사진은 본 기사와 관련 없음.(사진=연합뉴스)


[이데일리 정병묵 기자] 올해 만으로 환갑을 맞은 안호성(60·가명)씨. 마흔부터 나이 앞자리 숫자가 바뀌는 데 익숙해졌지만 숫자 ‘6’이 주는 감회가 새롭다. ‘환갑 잔치’가 주변에 다 사라졌고 “60부터 청춘”이라고 외치는 친구도 많지만 숫자 6의 무게감은 왠지 남다르다.

안씨는 연휴 며칠 전 난생 처음으로 서울 구로구에 있는 인력시장을 찾았다. 그는 중소기업을 다니다 막냇딸 결혼 직후 퇴직한 뒤 별다른 소득이 없이 저축을 까먹고 지낸다. 그가 평소 갈 일 없던 인력시장에 간 이유는 ‘손주 세뱃돈’ 때문이다.

5년 전 부인과 사별한 안씨는 아들(33), 딸(31)을 뒀다. 둘 다 큰 속을 썩이지 않고 자립, 결혼해 각각 딸·아들 손주를 뒀다. 작년 설에는 큰 손주에게 10만원을 줬는데, 지난 가을 태어난 작은 손주에게도 비슷게는 줘야 하지 않을까. 아직 몸도 못 가누는 작은 손주이지만 딸이 분명히 세배를 시킬 것이다. 지난달에 냉장고가 갑자기 고장이 나 새로 장만하느라 현금이 굳어 20만원조차 수중에 없다.

인력시장에서는 안씨를 서울 시내 아파트 건설현장으로 보냈다. 건물 내부 페인트칠을 하기 전 내벽에서 튀어나와 있는 전선 등을 잘라 처리하는 단순 업무였다. 처음 해 보는 일이지만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어 앞으로 종종 아르바이트 삼아 해 봐야겠다고 안씨는 생각했다. 사흘 동안 20만원 넘게 벌어 손주 세뱃돈에 보탰다.

서울 송파구의 한 어린이집 원생들이 설을 맞아 할머니들에게 합동 세배를 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사진=연합뉴스)


안씨는 연휴 마지막 날 친구들과 만났다. 기원에서 바둑을 한 판 두고 난 뒤 거나한 술자리가 벌어졌다. 만 60이 되다 보니 나이, 건강, 자식 얘기가 부쩍 많아진다. 3년 전 암으로 먼저 죽은 친구 이야기로 잠시 숙연해졌다가 결국 ‘자랑 배틀’이 벌어진다. 자랑할 게 많을 수록 말이 많아지고 없을 수록 잠자코 듣고 있게 된다.

“요새 환갑의 ‘ㅎ’이라도 먼저 말하면 그거 만큼 주책이 없어. 그래도 애들이 어떻게 그냥 넘어가느냐며 마누라랑 유럽여행을 보내준다지 않냐 글쎄.” 성동구에 사 놓은 아파트값이 엄청나게 올랐다며 시작된 친구 A의 자랑은 자식 자랑까지 이어졌다.

아파트값이 올랐다는 것도 부럽지만 자식들이 보내주는 유럽여행이라니. 안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들·딸한테 “A는 자식들이 여행 보내준다더라”고 해 볼까. 당연히 부담을 느끼겠지. 하지만 평생 키워줬는데 그 정도는 말할 수 있는 거잖아. 웃음과 고성이 오가는 술판 속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안씨의 쥐띠해 설 마지막 날이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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