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박찬숙의 폭로 12년 후

  • 등록 2019-01-22 오전 5:00:00

    수정 2019-01-22 오전 5:00:00

[정영훈 한국여성연구소 소장] 이런 내용의 기자 회견이 있었다.

‘남성 감독에게 성폭행 당해 임신한 뒤 반 강제로 퇴출당하거나 성폭행의 충격으로 자살까지 시도한 선수들이 있다. 어느 팀이라 말할 것도 없이 비일비재한 일이다. 지금 밝혀진 사건은 빙산의 일
각이다. 만약 남성 감독들의 성범죄를 이대로 방치한다면 여성 선수의 죽음은 시간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낯설지 않아 오히려 충격적인 이 기자회견은 2007년 6월 11일에 있었다. 무려 12년 전이다. 이러한 내용을 공개적으로 밝힌 사람은 농구인 박찬숙 씨였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75년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아시아 정상급 선수로 활약하다 1984년 LA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고 평생 농구 선수로, 지도자로, 체육인으로 살고 있는 농구계의 상징이다. 당시 모 프로 농구팀 감독이 모 선수에게 저지른 사건을 고발하면서 체육계의 고질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폭로한 것이다.

이 폭로를 모두들 무시했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문화관광부는 물론 교육부, 국가인권위원회, 국회 등이 나서서 스포츠계의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내놓았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작년 11월, 전 유도선수 신유용 씨가 용기를 내 자신이 당한 일을 공개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자신의 유도코치에게 반복적으로 폭행과 성폭력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몇 개월 전 경찰에 사건 접수를 했으나 수사가 제대로 진전되지 않자, 실명을 공개하고 나선 것이다. 가해자가 아닌 스스로를 원망하며 살고 있을 세상의 수많은 열일곱 살 신유용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불과 두 달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쇼트 트랙 선수인 심석희 씨의 고백을 듣고야 말았다. 그는 이미 자신의 코치를 폭행 혐의로 고발한 바 있으나, 차마 성폭력만은 밝히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현역 선수가, 그것도 세계 최정상의 선수가 자신의 선수 생명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에 용기를 내기는 정말 어려웠으리라. 단 한 명에게라도 힘을 주고 싶었다는 그의 결단에 경의를 표한다. 그는 진정한 챔피언이자 영웅이었다.

스포츠계의 성폭력은 쌍둥이처럼 닮아있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운동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지도자를 믿고 따랐다. 지도자는 선수의 미래까지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일상적인 폭력에 시달렸다. 폭력은 성과를 내기 위한 필요악이라고 여겨졌다. 합숙을 했다. 그러다가 성폭력을 당했다. 침묵을 강요당했다. 선수생활을 그만둘 각오를 하고 고발해도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시작하는 새 세대가 나온다. 이들도 운동 외에는 길이 없다.

종목과 시기는 다르지만 패턴은 반복되고 있었다. 참고로, 12년 전에 나온 대책은 성폭력 가해자의 영구 제명과 선수 접촉 및 면담 가이드라인 제시, 성폭력 신고 센터 설치 등이었다. 지금 나오는 얘기들과 똑같이 말이다.

그동안 우리는 무얼 하고 있었는가. 아니 지금 우리는 제대로 하고 있는가. 대책조차 반복되는 이런 사건 앞에서 어떻게 해야 저 패턴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것인가.

심 선수의 변호사는,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 내기를 요구하며 통제된 시스템 안에 선수를 넣어둔 것은 국가이니 그 안에서 벌어진 범죄 역시 국가가 책임을 갖고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어린 선수들에게 운동 외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자유롭게 운동을 선택할 수 있도록 공부의 기회를 막지 않아야 한다는 전문가도 있었다. 현재의 엘리트 체육은 공부하지 않을수록 유리한 구조여서 어릴 때부터 운동으로만 내몰린다는 것이다. 미국 체조대표팀 주치의였던 래리 나사르가 징역 360년형을 선고받은 사례를 들어, 가해자에 대한 엄벌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지적도 많았다.

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다 동시에 할 수 있는 일이다. 저 끔찍한 고리가 끊어질 수 있다면, 심석희 선수의 용기가 헛되이 버려지지 않을 수만 있다면, 해야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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