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은 정전 이후 북한의 남침 억제는 물론 한국의 안보 비용을 절감시켜 줌으로써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는데 기여한게 사실이다. 하지만 안보상황에 따른 미국의 아시아 전략 변화와 비중 축소 등을 이유로 그동안 일부 병력과 규모가 감축됐다.
1954년 참전 미군 30여 만 명 가운데 2개 사단만 남기고 대규모 철수를 한 후, 1960년대까지 주한미군의 규모는 6만3000명 정도였다. 미 제1기병사단과 7사단이 주둔했다가 1965년 7월 제1기병사단이 1개 대대를 잔류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철수한 대신에 미 제2사단이 교대해 들어왔다. 베트남 전쟁이 확대되면서 한국에서는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우려가 나왔지만 미국 정부는 한국에 대한 지원약속을 재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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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 정부들어서서 또 주한미군 철수 주장이 제기됐다. 카터 대통령은 1976년 8월 판문점에서 북한군에 의한 도끼 만행 사건이 일어나는 등 북한의 위협이 현실적으로 나타났는데도 불구하고 1977년 1월 취임 후 선거공약 이행을 위해 주한 미 지상군 3만3000명을 4∼5년 내 철수하겠다는 계획을 재확인했다. 이에 따라 1977년 6월과 8월 사이에 1023명이 철수한데 이어 1978년말까지는 3400명이 추가로 철수했다. 주한미군의 철군이 추진되면서 한국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 1976년 팀스피리트 훈련이다. 또 1978년에는 한미연합군사령부가 창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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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의 규모 변화와 더불어 역할 역시 한국방위의 주도적 역할에서 지원적 역할로 바뀐게 사실이다. 이같은 역사를 고려할 때 종전선언과 이에 따른 평화협정 체결은 주한미군의 역할 변화를 야기할 가능성이 크다. 북한이 철수를 요구하지 않더라도 지위와 역할을 변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과 동북아 지역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 입장에선 평화체제 이후 계속해서 주한미군이 주둔하는게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지역 내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조정자 역할로 전환하고, 지역 분쟁에 대비한 신속대응군으로 바뀔 수 있다는 의미다. 주한미군 문제는 결국 한미동맹의 조정 여부와도 관련돼 있어 가장 민감한 쟁점 중 하나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