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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과 `화해` 역사의 뒤안길로
- [노컷뉴스 제공]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가 29일 종합보고서 발표를 마지막으로 5년간의 활동을 마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진실화해위는 이날 오전 서울 중구 위원회 건물 12층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6개월간 집필한 종합보고서를 공개했다. 앞서 진실화해위는 지난 6월말로 공식 조사 활동을 마쳤으며, 5년간의 활동 내용이 담긴 종합보고서는 지난 28일 대통령과 국회에 보고됐다. 진실위가 펴낸 종합보고서는 △위원회 활동 전체를 개괄한 제1권 △항일독립운동 및 해외동포사 사건을 요약한 제2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사건을 담은 제3권 △권위주의 통치기 인권침해사건을 담은 제4권 등 모두 4권으로 구성됐다. 위원회는 종합보고서를 통해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구제조치, 재발방지 조치, 법령 및 제도에 대한 시정 및 개폐, 법적 정치적 화해조치, 국민화해, 미신청 사건에 대한 조치' 등 17개 조항을 국가에 종합적으로 권고했다. 이영조 위원장은 이날 간담회에서 "그동안 위원회 활동을 아낌없이 성원해준 국민 여러분들께 감사드린다"며 "이번 종합보고서가 국민들은 물론 국내외 연구자들에게도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지난 2005년말 출범한 진실화해위는 공식 조사 활동이 끝난 지난 6월말까지 신청 사건 1만 860건과 직권조사 사건 315건을 모두 처리했다. 이 가운데 76.5%인 8450건은 진실을 규명했고, 4.7%인 510건은 규명하지 못했으며, 1729건(15.5%)은 각하했다. 특히 1980년대 언론인 해직 사건 등 6건을 직권조사해 "신군부가 정권 장악 목적으로 언론통폐합 사건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은 대표적 성과로 꼽힌다. 지난 2007년엔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을 조사한 끝에 국가 차원의 사과와 재심을 권고해 주목 받았다. 위원회는 또 활동 기간 전국 13곳에서 1617여 구의 유해와 6020여 점의 유품을 발굴했으며, 총 885건을 정부에 권고해 이중 41%인 361건이 이달 현재까지 이행 완료됐다. 또 재심을 권고한 73건 가운데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 등 20건은 무죄가 확정됐으며, '진보당 조봉암 사건' 등 42건은 재심이 청구됐거나 진행중이다. 진실화해위는 "지난 50여 년간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위법 또는 부당한 인권 침해로 고통받은 사람들의 인권을 옹호하고, 은폐된 진실을 밝혀내 왜곡된 과거사를 정리하는 계기가 됐다"고 활동 성과를 평가했다. ◈ 이영조 위원장 취임 후 구설수…씁쓸한 뒷맛 위원회는 그러나 현 정부 들어 '뉴라이트' 성향의 이영조 위원장이 취임한 이후 각종 구설수에 휘말리면서 씁쓸한 뒷맛을 남기기도 했다. 이 위원장은 지난달초 미국에서 외유성 심포지엄을 개최하는가 하면, 이 자리에서 제주 4.3항쟁과 5.18민주항쟁을 '공산당 폭동'이나 '반란'으로 규정해 비난을 샀다. 또 지난 6월 전원위원회가 이미 '진실 규명'으로 의결한 포항 미군 폭격 사건 등 3건에 대해 지난달 독단적으로 '불능 처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와 관련, 진실화해위는 전날 마지막 전원위원회를 열어 이의신청이 들어온 13건을 심의 의결했다. 하지만 이 위원장이 독단적으로 결론을 뒤바꾼 '포항 망천리 미군 폭격사건'은 끝내 '진실규명 불능'으로 처리됐다. 이로써 진실화해위의 공식 활동 기간은 끝났지만 사무처는 존속돼, 다음달 1일부터 3개월간 청산 절차를 밟게 된다.
- 명동성당서 23년만에 ‘4대강 반대’ 시국미사
- [노컷뉴스 제공] 민주화운동의 ‘성지’인 서울 명동성당에서 6월항쟁 이후 처음으로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시국미사가 열렸다. 학계와 언론계, 시민단체 등 각계 인사 77인도 4대강 사업을 일단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강은 생명이다, 4대강 삽질 중단하라” “6.2선거 참여하여 4대강 삽질 막아내자”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손에는 4대강 사업 중단과 지방선거 투표 참여를 촉구하는 팻말을 든 수천명의 천주교 신도들이 서울 명동성당에 운집했다. “생명을 살립시다”라는 구호 아래 촛불이 새겨진 하얀색 조끼는 명동성당 들머리를 가득 메우며 4대강 사업에 대한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 4대강 사업저지를 위한 천주교연대는 10일 오후 명동성당 본당에서 4대강 사업중단을 촉구하는 생명ㆍ평화 미사를 올렸다. 한국 민주화의 상징인 명동성당에서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시국미사가 열린 건 지난 1987년 6월항쟁 이후 23년 만에 처음이다.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윤종일 신부는 강론을 통해 “4대강 사업은 생태환경을 만든다면서 자연을 파괴하고, 깨끗한 물관리를 주장하면서 물을 오염시키고 있다”며 “국민의 눈물을 닦아줘야 할 대통령이 국민의 가슴에 못을 박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전국에서 모여든 300여명의 사제와 신도 등 8천여명의 미사 참가자는 성당 들머리에 나서 4대강 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생명의 강’ 잇기를 상징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4대강 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전국 사제ㆍ수도사 5,005인 선언도 발표됐다. 지난 3월 사제 천여명이 참여한 1차 선언의 5배 규모이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강에는 땅과 물과 동식물, 그리고 주변에서 농사짓는 농민들을 비롯한 모든 공동체의 삶이 담겨 있다”며 “강가의 모든 생명을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일은 우리 신앙인의 몫이고 의무이며 소명”이라고 밝혔다. 이어 “우리는 6.2 지방선거에 적극 참여해 ‘강의 생명’을 약속하는 후보들을 선택하고 4대강 사업에 대해 분명히 심판할 것”이라면서 “정부와 선관위는 종교ㆍ시민단체에 대한 정치적 개입과 압박을 중단하고 지금 당장 4대강 사업을 멈추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4대강 사업 저지를 위한 천주교연대는 이날 시국미사에 이어 한강과 낙동강 등 4대강 주변에서 권역별 기도회와 강 순례에 나서고 생명ㆍ평화 미사를 계속해서 봉헌할 예정이다. 앞서,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와 최열 환경재단 대표, 박종화 목사 등 학계와 종교계, 시민단체 등 각계 인사 77인은 이날 오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4대강 사업의 새로운 해법을 위한 77인 특별제안’을 발표했다. 이들은 “4대강 사업에 대한 국민의 걱정은 커지고 있고, 우리는 무엇보다 첨예한 사회갈등과 국론분열 현상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면서 “4대강 사업을 일단 중단하고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수립하는 등 근본적인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 (김前대통령서거)3김 시대의 물리적 종언
- [이데일리 김세형기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우리나라 정치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3김` 시대도 `물리적 종언`을 맞게 됐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정착에 이들이 기여한 것에 대해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지만 이들은 `지역 할거주의`라는 고질적인 병폐도 양산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집권을 계기로 이들은 모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고, 3김 시대는 공식적으로 마감했다. 하지만 이들이 남겨 놓은 지역주의가 여전히 한국 정치판에 어슬렁거리고 있다. 호남권의 맹주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정치권에 `지역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 문화가 형성될 지 관심이다. ◇ 3김의 태동..`서울의 봄` 김대중 전 대통령(1924년생), 김영삼 전 대통령(1927년생),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1926년생)를 한묶음으로 일컫는 `3김`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통상 지난 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직후로 볼 수 있다. 그전까지 이들이 정치 일면에 없었던 것은 아니나 박정희 대통령의 피격당하면서 이들이 권력의 최상층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늘상 야권의 대표주자들이었다. 이승만 정권 붕괴와 5·16 군사 쿠데타로 약화된 해방 이후의 정치권을 대체하는 신세대의 기수들이었다. 둘은 박정희 정권에 맞서 그들의 경력을 쌓아갔고, 야권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서로 맞붙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가 심해질 때 핍박을 받았던 것 역시 같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살해 위험에 처하기도 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 역시 박정희 정권 말기에 국회의원직에서 영구제명되기도 했다. 이에 비해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는 군사 쿠데타에 가담해 정치권에 등장한 인물로,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것을 필두로 박정희 정권에서 국무총리를 두 차례 지냈을 정도로 실력자였다. 그러나 항상 2인자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총격에 의해 사망하면서 대한민국은 정권에 공백이 생겼다. 이른바 `서울의 봄`이다. 이같은 공백기에 부상한 것이 이들 3김이다.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야권의 대표주자로서, 김종필 전 총재는 전 정권의 지분 보유자격이 감안됐다. 작고한 종교계 지도자 강원용 목사의 중재 아래 이들 3김의 권력 분점이 막바지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서로 권리를 주장하면서 시간이 흐르는 사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신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해 버렸다. 이때 3김이 권력 분점에 합의했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시대가 좀 더 빨리 왔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있는 게 사실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이들 3김은 정계 은퇴와 가택연금 등 정권의 탄압을 받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다만 이때는 지역주의 색채가 그리 강하지 않았다는 것이 통설이다. ◇ 민주화와 함께 열린 3김 시대..`지역분할과 야합` 87년 정권 막바지에 이른 전두환 정권은 장기집권을 시도하고 국민들은 피로 얼룩진 6월 항쟁으로 결국 직선제 개헌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퇴진을 이끌어 내게 된다. 이는 3김 시대가 꽃을 피우는 계기가 됐다. 정치 활동 금지가 풀린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손을 잡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해 정권 창출에 나섰고, 김종필 전 총재도 미국에서 귀국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한 뒤 정계에 복귀했다. 이들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후계자격인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와 그해말 대통령 선거에서 대결하게 된다. 이때 대통령 당선에 가장 앞서 있던 것은 통일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다. 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은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결국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당선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때 평화민주당을 창당, 대통령 선거에 나섰는 데 이것이 결국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호남,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남, 그리고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충청도 등 지역 할거주의가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각자 후보마다 100만명 넘는 지지파를 동원해 여의도에서 유세를 가진 것은 지역 할거주의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집권은 했지만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의 열망은 매우 강렬했다. 이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소야대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민정당은 국정 안정을 위해 야권에 손을 내밀게 된다. 이것은 3당 야합으로 일컫어지는 1990년의 민정당, 통민당, 신민주공화당의 전격 합당으로 귀결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표라는 직함을 얻었고, 김종필 전 총재는 내각제라는 꿈을 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안정적 국정운영이라는 소득을 얻었다. 이때부터 분할과 야합이라는 부정적 평가도 얻었다. 서로 각기의 지역 기반을 갖고, 정권 획득에 전력하는 것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9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권 경쟁에서 승리한 김영삼 후보가 민자당 후보로 나온다. 영남과 충청권을 등에 업은 김영삼 후보는 호남을 기반으로 재차 출마한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의 꿈을 이루게 된다. 김대중 후보가 선거 패배 여파로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런던으로 갔지만 3김 시대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김종필 전 총재는 정권 창출에 기여한 공으로 김영삼 정부 초기 집권 민주자유당의 대표가 됐지만 결국 불화를 참지 못하고 1995년 2월 자유민주연합이라는 독자정당을 다시 창당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이를 전후해 정계에 복귀하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여권과 김대중, 김종필의 야권이라는 3각 분할구도가 이뤄진다. 이때가 3김의 절정이랄 수도 있다. 97년 대선에서는 재차 합종연횡이 이뤄진다. 3당 합당시 야합이라고 극렬 비난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측과 김종필 전 자민련측이 일명 DJP연합 전선을 구축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후보로 내세운 것. 때마침 불어닥친 IMF 경제위기라는 시대 상황도 유리하게 돌아가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네번의 도전끝에 결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3김도 한풀 꺾였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3년 퇴임하고 2004년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가 국회의원 선거 참패를 이유로 정계은퇴를 선언하면서 사실상 3김 시대는 막을 내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집권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영남권 출신의 호남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고, 스스로도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등을 제안하면서 3김 시대 종식에 앞장 서기도 했다. ◇ 김대중 서거..지역주의 끝나나노무현 정부시절 3김이 완전히 끝난 줄 판단했지만 3김의 지역주의 유산은 2007년 대선에서 고스란히 되살아 났다. 영남권을 기반으로한 박근혜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막판까지 접전을 벌이는가 하면 정계밖에 있던 이회창 자유선진당 후보가 충청권을 등에 업고 재차 정계에 들어 왔다. 집권 여당도 마찬가지였던 터라, 열린우리당은 전주 출신의 정동영 의원을 후보로 내세우면서 여전히 지역주의의 한계를 표출했다. 이명박 정권이 집권한 지 1년반으로 접어 들고 있지만 이런 지역주의는 여전한 모습이다. 지역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인물에, 그 인물이 현직에 있건 이선으로 후퇴해 있건 정치인들이 줄을 대는 양상이다. 이명박 대통령마저도 통합을 이야기하면서 지역 갈등을 척결대상으로 꼽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사실상 막을 내렸던 3김 시대는 이제 물리적으로도 종언을 맡게 됐다. 하지만 가장 손쉽게 지지세력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우리가 남이가`로 대표되는 지역주의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는 이상, 지역주의 척결까지는 아직 멀기만 해 보인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은 90년 3당 합당을 계기로 완전히 등을 돌린 뒤 최근까지도 화해하지 못했다. 그러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직전 병상을 직접 찾아 화해를 모색했다. 이 둘의 화해가 양편으로 갈라섰던 대한민국의 갈등을 봉합하는 계기가 될 지 지켜볼 일이다.
- (김前대통령서거)인동초 인생..결코 패배하지 않았던 삶
- [이데일리 이숙현기자] `인동초`. 김대중에 대한, 말하자면 비유라기보다 묘사다. 그는 한 때 (혹은 누군가에게는 영원히)`빨갱이`였다. 71년 신민당 대선 후보로 결정될 당시부터 심지어 1997년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이 진부한 색깔론은 언제든 `필요할 때마다` 살아나 그와 그 주변을 괴롭혔다. 사고를 가장한 암살 위협, 납치와 가택연금, 망명, 사형선고 그리고 4번의 대선 도전 끝 대통령 당선과 노벨평화상 수상에 이르기까지 단 한순간도 그는 `인간 김대중`일 수 없었다. 세상사 모든 것이 정치라지만 그는 유독 `정치인 김대중`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지나치게 뛰어난 사람에게 질투와 질시는 천형과 같은 법. 그가 짊어졌던 삶이 본인의 온전한 선택이었는지, 보이지 않는 운명의 강요였는지 눈 감아 버린 그만이 알 것이다. 그의 삶은 곧 영욕이자, 자체로 소설이었다.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에서 3차례 국회의원에 도전했다. 모두 실패였다. 4수 끝에 1961년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지만 5·16쿠데타로 당선 이틀 만에 의원선서도 하지 못하고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45세이던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40대 기수론`을 앞세우며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향토예비군 폐지, 노동자·자본가 공동위원회 구성, 비정치적 남북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선거공약을 내걸고 박정희 후보와 맞섰다. 김대중은 과감한 공약과 호소력 있는 연설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으나 박정희에 95만 표 차이로 패배했다. 하지만 쿠테타 세력에 의한 온갖 부정선거 의혹 속에서도 김대중은 46%를 득표, 박정희 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 `사건`은 곧 김대중 수난사를 본격적으로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72년 유신이 선포되자 김대중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73년 8월에는 그 유명한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난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다시 동교동으로 돌아왔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가택 연금. 이제 투옥, 살해 위협, 연금과 감시는 그의 일상사가 된 듯 했다. ▲ `김대중 내란음모죄` 재판 장면1980년 초 `서울의 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듬 해(1980년) 2월 사면복권된 김대중은 이 시기에 김영삼·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활동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1979년 12·12사태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이때 김대중은 26명의 정치인들과 함께 또 다시 체포, 수감됐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시기를 감옥에서 보낸 그는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에서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1981년 1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이에 미국·일본·독일·프랑스 등을 중심으로 현지 교포들과 각국의 양심적 지식인·문화인·정치인들이 대거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자 군사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한 데 이어 1982년 12월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19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미국에서 전격적으로 귀국한 그는 김영삼과 함께 급조한 신한민주당을 통해 당시 어용야당이던 민주한국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하는 저력을 보였다.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87년 6월 민주항쟁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자 군사정권은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 수용 등을 담은 `6·29선언`을 내놓았다.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이끌어냈지만 그것을 내용적으로 실현할 민주화 세력의 통합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김대중은 1987년 12월로 예정된 제1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통합민주당 총재였던 김영삼과의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통령선거에 나섰다. 야당의 분열 속에 집권당인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의 승리는 예견된 일이었다. 동시에 민주화세력에게 적전 분열은 재앙을 의미했다. 대통령선거에 패한 후 야당분열에 대한 국민적 비난, 평화민주당 총재직 사퇴, 제13대 총선에서 제1야당으로 부상 그리고 1990년 `3당 합당`. 그의 정치인생 놓인 시련과 굴곡은 끝이 없어 보였다. ▲ 1985년 미국서 귀국 당시 모습그는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또 다시 출마한다. 그리고 패배. 이후 전격 정계은퇴 선언을 했으나 곧 95년 정치활동을 재개하며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다. 마침내 1997년 12월. 그는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도전해 성공을 거두었다. 4번째 도전 끝에 `준비된 대통령`으로서 첫 발을 내딛게 된 순간이자, 71년 대선 첫 도전 이후 26년만에 이룬 꿈이었다. 생전에 노무현은 김대중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분은 그 시기에 가장 탁월한 정치인이었습니다. 지금 보면 완전한 정치인이라고 볼 수 없지만, 그 시기에 가장 탁월한 정치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시대의 역사적 가치의 상징이었죠. 민주주의라는 역사적 가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분을 평가할 때 그 점을 우리가 인정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칭찬을 하든, 비판을 하든 그 기본적인 전제를 먼저 우리가 인정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2009년 8월18일. 그는 떠났다.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히며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갔다. 그렇게 86년 인생을 쉼없이 살다갔다. 김대중의 죽음은 멀지 않은 우리의 과거, 통한의 역사를 돌아보게 한다. 2009년 5월 29일, 후배 대통령의 영정 앞에서 아이처럼 울던, 그리고 또다시 민주주의를 외치던 그의 빈 자리를 이제 누가,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좋든 싫든 그처럼 역사를 몸으로 웅변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는 이제 쉽지 않아 보인다. 수많은 현실적 패배 속에서도 결코 패배하지 않았던 한 `인간`을 다시 만나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의 죽음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이유다. "다섯 번 죽을 고비를 넘겼고, 6년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수십 년을 망명과 연금, 감시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 사이에 수많은 치욕과 고통도 있었고 수많은 유혹도 있었습니다. 신군부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죽는 것이 몹시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역사는 결코 불의에게 편들지 않고, 역사를 믿는 사람에겐 패배가 없습니다." (2003년 2월 24일, 대통령 퇴임사)
- "대통령은 사과하라" 시국선언 교수 1천명 넘어섰다
- [노컷뉴스 제공] 상아탑으로 번진 시국선언의 열기가 시간이 지날수록 확산되고 있다. 지난 3일 서울대 교수 124여명이 현 정부의 기조를 비판하는 시국선언의 첫 테이프를 끊은지 5일만에 17개 대학 1163명의 교수들이 시국선언문에 이름을 올렸다. ◈ 17개 대학 1,163명 선언, 이 대통령 모교 고려대 가장 많은 인원 기록지금까지 시국선언에 동참한 대학교는 서울대 (124명), 고려대 (131명), 중앙대 (68명), 서강대 (45명), 성균관대 (35명), 신라대 (39명), 동아대 (56명), 경상대 (66명), 경북대, 영남대, 계명대, 대구대, 대구보건대 연합 (309명), 충북대 (80명), 한신대 (88명), 우석대 (85명), 인천대 (37명) 등 17개 대학 1,163명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모교인 고려대 교수들도 8일 시국선언 대열에 동참했다. 고려대 교수 131명은 이날 시국선언문을 통해 "정부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추모 행렬에서 나타난 민의를 헤아리기 보다는 오만한 권력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우려하며 국정쇄신을 요구했다.특히 고려대는 지금까지 학교단위에서는 가장 많은 교수 참석인원을 기록하기도 했다. 성균관대 교수 35명도 이날 본교 호암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의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성균관대 교수들은 “검찰의 불법적인 표적 수사 행태, 추모에 대한 경찰의 폭력적 대응과 몰상식한 언행은 과거 군사정권의 악몽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면서 정부를 강하게 질타했다. 교수들은 이어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함과 동시에 정부가 표현과 집회의 자유를 억압하지 말고, 언론 장악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는 9일에도 연세대를 비롯해 건국대, 부산대, 전남대 등 전국의 각 대학 교수들이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기로 해 6월 민주항쟁 기념일인 10일을 전후로 이같은 시국선언의 물결이 최고조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민주화의 고비마다 사회 정의를 외치면서 역사의 전환점이 됐던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다시 한번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현 정부의 운영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 문인들도 시국선언 나서…보수 성향 단체 · 교수들 맞불이에 동참해 시인, 소설가, 평론가 등 문인들도 시국선언에 나선다.188명의 작가들은 9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현 시국에 대한 작가들의 목소리를 담은 '이것은 사람의 말-6ㆍ9 작가선언'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들은 이날 선언문을 통해 "민주주의의 일반 원리와 보편 가치를 무자비하게 짓밟으면서 달려온 이명박 정권 1년은 이토록 참담하다."고 비판한 후 개별 작가의 목소리를 담은 '한줄 선언'을 낭독할 예정이다. 한편 보수 성향의 단체와 교수들을 중심으로 릴레이 시국선언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보수 단체측에서는 "교수들이 시국선언을 통해 반정부 분위기를 정치적으로 선동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9일 오전에는 서강대 안세영 교수와 서울대 박효종 교수, 서울시립대 윤창현 교수 등 보수성향의 교수들이 최근의 릴레이식 시국선언을 우려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하며, 뉴라이트전국연합 등 보수진영 시민사회단체들도 이날 오후 국가위기극복을 위한 '맞불' 시국선언을 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