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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검색결과 1,361건

  • 5.18 보상법 개정안 6월 임시국회 통과 ''긍정적''
  • [노컷뉴스 제공] 지난 1990년 한시법으로 제정된 '5.18 보상법' 개정안이 오는 6월 임시국회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높아 5.18 관련자들에게 추가 구제의 길이 열릴 전망이다.민주당 김재균 의원은 17일 오후 5시부터 1시간 동안 진행된 광주CBS 시사프로그램인 'CBS 매거진' 특별토론에서 김 의원이 발의한 "5.18 보상법 개정안이 6월 임시국회에서 통과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지난 1990년 8월 제정된 5.18 보상법은 법이 다섯 차례 개정되면서 보상이 6차까지 연장됐으나 6월 개정안이 통과되면 5.18 보상이 한 차례 더 연장된다. 이렇게 되면 보상 신청 시기를 놓쳤거나 보상을 신청했다가 기각된 사람들은 7차 보상을 통해 추가로 구제받을 수 있게 된다. 김재균 의원과 함께 토론자로 나선 전남대 법학전문대학원 민병로 교수는 "한시법을 개정해 시한을 계속 연장하는 것보다 5.18 보상을 상시 보상 체제로 바꾸기 위한 법 개정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김재균 의원은 또 "5.18 민주화운동은 국가가 원인행위를 한 만큼 5.18 관련자들의 진정한 명예회복을 위해 '5.18 보상법'의 명칭을 국가의 불법행위를 인정하는 차원에서 '5.18 배상법'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이와 함께 지난 2004년 제정된 5.18 유공자 예우법도 5.18 유공자들에 대한 연금 지급 등의 조항이 빠져 5.18 유공자에 대한 예우가 미흡한 만큼 개정이 필요하다는 데 토론자들이 의견을 같이 했다.다음은 토론회 내용앵커 : 5.18 보상법은 어떻게 만들어졌나?민 교수 :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0년 8월 제정됐다. 이 시기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광주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정치권과 시민들의 열망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던 때였다.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5.18 가해자였던 노태우 정부는 5.18에 대한 치유와 화합 차원에서 5.18 관련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실질적 보상을 위해 5.18 보상법을 마련한 것이다.앵커 : 5.18보상법 제정 의미는?김 의원 : 1990년대에 들어서 3당 합당이 이뤄지면서 여소야대 구도가 여대야소 정국으로 바뀌고 이후 당시 민자당이 5.18 보상법을 날치기 처리해 5.18의 진상규명보다는 피해자에 대한 금전적 보상에 머무는 선으로 법이 제정돼 버렸다. 민자당이 광주시민들의 5.18 정서와 5.18 관련자들을 분리시키는 분할정책의 일환으로 보상책을 구상한 끝에 진상규명 없는 입막음을 시도한 것이다.앵커 : 5.18 보상법의 한계와 문제점은?민 교수 : 집권당의 안정적 집권을 위해서라는 정치적 목적 아래 법이 만들어지다보니 5.18에 대한 치유와 화합 차원에서 신체적 희생에 대한 금전적 보상에 중심을 두게 되면서 5.18의 숭고한 정신이 제대로 반영되거나 평가되지 못했다.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 희생과 공헌에 대한 국가적 예우의 관점이 빠져 있는 것이다.앵커 : 보상 심사기준이 들쭉날쭉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는?민 교수 : 5.18 보상법 자체에 문제가 있다. 법을 보면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한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자, 상이를 입은 자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적, 공간적 내용이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앵커 : 한시법의 문제점은?김 의원 : 아직도 상당수가 보상신청 기간과 방법을 몰라 보상 신청을 하지 못하고 있다.신청기간이 1차에서 6차에 이르기까지 한달에서 두달 밖에 안 됐기 때문이다. 한시법이라는 이유로 신청 기간을 제한해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신청 기간을 제한하지 않고 항상 신청할 수 있도록 상시 보상 체제로 가야 한다.앵커 : 5.18 보상법의 명칭을 배상법으로 변경해야 하는 이유는?김 의원 : 지난 1995년 만들어진 5.18특별법이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5.18 민주화운동은 국가가 원인 행위를 했고 5.18 관련자들은 국가 폭력으로부터 피해를 당했기 때문에 5.18보상법을 배상법으로 그 명칭을 변경해 전적으로 국가에 책임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앵커 : 김 의원이 5.18 보상법 개정안을 발의했는데 국회 처리 전망은?김 의원 : 지난 4월 12일 소관 상임위원회인 행정안전위 전체회의에 상정돼 법안 소위에 계류 중이다. 오는 6월 임시국회에 논의가 되려면 여야 간사간 협의를 통해 안건으로 돼야 하는데, 야당 간사인 백원우 의원도 충분히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소관 전문위원의 검토 의견도 긍정적이어서 임시국회에서 통과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앵커 : 5.18 보상법에 대한 마무리 발언은?김 의원 : 지난 2004년 제정된 5.18 유공자 예우법도 5.18 당시 능동적 참여자들에 대한 배려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고 5.18 유공자들에 대한 연금 미지급 등 실제적인 예우 내용이 없다는 이유로 개정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따라서 5.18 유공자 예우법 개정안을 발의할 때 이 같은 내용들을 묶어서 발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정부는 군부정권이 날치기 한 5.18 보상법에 따른 일괄 금전배상을 5.18 유공자에 대한 예우로 일괄해 판단하면서, 일반 유공자와의 형평성 차원에서 연금을 추가 지급할 수 없다는 입장인 것 같다. 이는 정부가 국가의 불법 행위에 대한 배상 개념과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의 개념을 구별하지 못한 결과이다. 민 교수 : 5.18 유공자 대부분이 극심한 생활고를 겪고 있다. 국가가 법을 제정해 놓고 이들을 제대로 예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국가가 나서서 다른 국가유공자와의 형평성 차원에서라도 합당한 예우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1박2일',검은 정장 입고 제주4·3사건 추모?
  • '1박2일',검은 정장 입고 제주4·3사건 추모?
  • ▲ KBS 2TV '해피선데이-1박2일' 여섯 멤버들이 검은색 양복을 입고 제주도를 찾았다.[이데일리 SPN 양승준 기자] KBS 2TV '해피선데이-1박2일'(이하 '1박2일')여섯 멤버들이 검은색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방송을 해 화제다. 단순히 근사해 보여서만은 아니다. 3일 방송에서 '1박2일' 멤버들이 찾은 곳은 제주도. 이날은 바로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날이다. 이에 일부 네티즌은 '1박2일' 멤버들이 검은 양복을 입고 제주도를 찾은 것을 추모의 의미로 해석했다.  제작진이 방송 날짜를 고려해 제주 4·3사건의 의미를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1박2일' 멤버들에게 '근조 양복'을 입게했다는 생각에서다. 제주 4·3사건은 광복 후인 1948년 미 군정에 의해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것에 반대해 일어난 민중항쟁이다. 강호동·엄태웅·이수근·은지원·김종민·은지원은 3일 방송에서 검은색 정장에 넥타이를 하고 제주에 있는 가파도로 향했다. '1박2일' 멤버들이 단체로 검은색 정장을 입고 촬영을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1박2일' 멤버들도 의아해했다. 이날 '1박2일' 멤버들이 검은색 양복을 입고 촬영장에 온 이유는 제작진의 사전 주문 때문. 이수근도 "경조사 때나 입는 옷을..."이라며 낯설어했다. 나영석 '1박2일' PD는 이에 방송에서 "연예인들이 공항에 나타나면 '공항 패션'이라고 해서 기사가 많이 나더라"며 "우리 팀도 옷 잘 입었다고 기사 좀 났으면 좋겠다"고 장난스럽게 답했다. ▲ KBS 2TV '해피선데이-1박2일' 여섯 멤버들이 검은색 양복을 입고 제주도를 찾았다.하지만 상당수 네티즌은 '1박2일' 멤버들이 입고 나온 검은 양복을 제주 3·4사건에 대한 '숨은 추모'로 봤다. 그런 의미에서 '1박2일'을 '개념 예능'으로 보기도 했다. 실제 이날 방송에서 나영석 PD도 검은색 재킷을 입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방송을 본 네티즌은 트위터 및 시청자 게시판 등에 "제주 4.3항쟁을 기리는 '1박2일' 검은 양복 콘셉트는 정말 멋지다. 예능에 저런 철학과 역사인식이 녹아있다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fortuneu),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까지. '1박2일' 멤버들 복장보고 예능과 어울리지 않게 문상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제주 4.3항쟁일. 제주의 아픔도 함께 생각하는 시간이 되길"(kwonws), "'1박2일', 연예인답게 정장을 입으란 주문이었지만 하나같이 검은 넥타이인걸 봐서는 추모의 의도라고 볼 수 있겠다. 조금이라도 제주도민에게 위로가되길"(whitesh06), "4월3일은 위령제가 열리는 날이니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의미가 있는 차림이었다. 제작진 감동"(freudeleid)이라며 의미를 뒀다. 정호희 민주노총 대변인도 트위터에 "'1박2일' '제주도 편' 보시면서 '오늘 하루만이라도 소리 내 실컷 울고싶습니다'는 제주민중들의 한을 생각해주시길. 출연자들의 검은 정장과 넥타이가 예사롭지 않다"라는 글로 공감을 표했다. 한편 방송에 앞서 이날 오전 11시에는 제주4·3평화공원에서 제63주년 제주4·3사건희생자위령제가 진행됐다.
2011.04.04 I 양승준 기자
강형철·김지훈·장훈…흥행감독 `대거 귀환`
  • 강형철·김지훈·장훈…흥행감독 `대거 귀환`
  • ▲ 영화 `써니` `7광구` `고지전`(왼쪽부터)[이데일리 SPN 장서윤 기자] 대한민국 흥행신화를 만들어 낸 대표 감독들이 대거 귀환한다. `과속스캔들`로 830만 흥행신화를 세운 강형철 감독의 `써니` 올 여름 개봉을 앞둔 김지훈 감독의 `7광구` 장훈 감독의 `고지전` 등 올해 다양한 흥행 감독들의 작품이 관객들과 만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는 것. 우선 2008년 `과속스캔들`로 830만 명이라는 흥행 돌풍을 몰고 온 강형철 감독은 올 봄 `칠공주 프로젝트`로 명명된 `써니`로 돌아온다. `써니`는 학창시절을 함께한 칠공주 써니가 25년 만에 다시 모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되찾는 유쾌한 감동을 담은 이야기. 전작 `과속스캔들`의 코믹한 이야기로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일깨워 준 강 감독은 `써니`에서는 학창시절 소중한 친구들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관객들에게 유쾌한 웃음과 공감을 이끌어낼 예정이다. 칠공주 `써니`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2인 1역 캐스팅에 관해 강형철 감독은 "마치 전쟁과도 같았다. 제 2의 박보영, 왕석현과 같은 훌륭한 신인 연기자들이 나올 것이라고 확신한다"라며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배경으로 한 김상경, 이요원 주연의 영화 `화려한 휴가`로 725만 명이라는 흥행스코어를 남긴 김지훈 감독은 3D 블록버스터 `7광구`로 오랜만에 관객들을 찾는다. 하지원, 안성기, 오지호 등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는 `7광구`는 망망대해 한가운데 떠 있는 석유 시추선 '이클립스호'에서 벌어지는 심해 괴생명체와 인간의 사투를 그린 영화다. 작년 9월 말 본 촬영을 마쳤으며 올 여름 개봉을 앞두고 있다. 2008년 `영화는 영화다` 130만, 2010년 `의형제` 550만 관객 동원을 기록한 장훈 감독은 올 여름 `고지전`으로 돌아온다. 모두가 전쟁을 멈춘 1953년에도 전쟁을 멈출 수 없었던 `애록고지`에 남겨져야 했던 병사들의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지난 3월 3일 크랭크업해 후반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강형철, 김지훈, 장훈 등 한국 영화계 젊은 세 감독들의 감독들의 귀환은 올해 극장가에 큰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된다.
2011.03.31 I 장서윤 기자
  • `진실`과 `화해` 역사의 뒤안길로
  • [노컷뉴스 제공]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가 29일 종합보고서 발표를 마지막으로 5년간의 활동을 마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진실화해위는 이날 오전 서울 중구 위원회 건물 12층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6개월간 집필한 종합보고서를 공개했다. 앞서 진실화해위는 지난 6월말로 공식 조사 활동을 마쳤으며, 5년간의 활동 내용이 담긴 종합보고서는 지난 28일 대통령과 국회에 보고됐다. 진실위가 펴낸 종합보고서는 △위원회 활동 전체를 개괄한 제1권 △항일독립운동 및 해외동포사 사건을 요약한 제2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사건을 담은 제3권 △권위주의 통치기 인권침해사건을 담은 제4권 등 모두 4권으로 구성됐다. 위원회는 종합보고서를 통해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구제조치, 재발방지 조치, 법령 및 제도에 대한 시정 및 개폐, 법적 정치적 화해조치, 국민화해, 미신청 사건에 대한 조치' 등 17개 조항을 국가에 종합적으로 권고했다. 이영조 위원장은 이날 간담회에서 "그동안 위원회 활동을 아낌없이 성원해준 국민 여러분들께 감사드린다"며 "이번 종합보고서가 국민들은 물론 국내외 연구자들에게도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지난 2005년말 출범한 진실화해위는 공식 조사 활동이 끝난 지난 6월말까지 신청 사건 1만 860건과 직권조사 사건 315건을 모두 처리했다. 이 가운데 76.5%인 8450건은 진실을 규명했고, 4.7%인 510건은 규명하지 못했으며, 1729건(15.5%)은 각하했다. 특히 1980년대 언론인 해직 사건 등 6건을 직권조사해 "신군부가 정권 장악 목적으로 언론통폐합 사건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은 대표적 성과로 꼽힌다. 지난 2007년엔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을 조사한 끝에 국가 차원의 사과와 재심을 권고해 주목 받았다. 위원회는 또 활동 기간 전국 13곳에서 1617여 구의 유해와 6020여 점의 유품을 발굴했으며, 총 885건을 정부에 권고해 이중 41%인 361건이 이달 현재까지 이행 완료됐다. 또 재심을 권고한 73건 가운데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 등 20건은 무죄가 확정됐으며, '진보당 조봉암 사건' 등 42건은 재심이 청구됐거나 진행중이다. 진실화해위는 "지난 50여 년간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위법 또는 부당한 인권 침해로 고통받은 사람들의 인권을 옹호하고, 은폐된 진실을 밝혀내 왜곡된 과거사를 정리하는 계기가 됐다"고 활동 성과를 평가했다. ◈ 이영조 위원장 취임 후 구설수…씁쓸한 뒷맛 위원회는 그러나 현 정부 들어 '뉴라이트' 성향의 이영조 위원장이 취임한 이후 각종 구설수에 휘말리면서 씁쓸한 뒷맛을 남기기도 했다. 이 위원장은 지난달초 미국에서 외유성 심포지엄을 개최하는가 하면, 이 자리에서 제주 4.3항쟁과 5.18민주항쟁을 '공산당 폭동'이나 '반란'으로 규정해 비난을 샀다. 또 지난 6월 전원위원회가 이미 '진실 규명'으로 의결한 포항 미군 폭격 사건 등 3건에 대해 지난달 독단적으로 '불능 처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와 관련, 진실화해위는 전날 마지막 전원위원회를 열어 이의신청이 들어온 13건을 심의 의결했다. 하지만 이 위원장이 독단적으로 결론을 뒤바꾼 '포항 망천리 미군 폭격사건'은 끝내 '진실규명 불능'으로 처리됐다. 이로써 진실화해위의 공식 활동 기간은 끝났지만 사무처는 존속돼, 다음달 1일부터 3개월간 청산 절차를 밟게 된다.
드라마가 그려낸 아픈 현대사
  • [아듀, 자이언트]드라마가 그려낸 아픈 현대사
  • ▲ 유신 정권 반대 시위를 묘사한 `자이언트`[이데일리 SPN 김영환 기자] SBS 월화드라마 `자이언트`는 70~80년대 개발기 도시를 둘러싼 인간의 욕망을 그렸다. 제작진은 인물이나 배경 등 제반 설정이 픽션임을 명확히 밝혔지만 우리 현대사의 아픈 장면도 극 속에 적절히 버무렸다. `자이언트`의 주인공 이강모(이범수 분)는 극중 1958년생 개띠로 설정돼 있다. 우리 현대사로 따지자면 군사 독재 시절과 유신 정권 속에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셈이다. 어린 강모(여진구 분)와 정연(남지현 분)은 `자이언트` 9회에서 성인 연기자인 이범수와 박진희로 변한다. 이 장면은 시위대 속에서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두 사람의 모습으로 표현됐다. 자욱한 최루탄 가스 속에서 어린 강모와 정연이 휘말린 시위대의 슬로건은 `군사정권 반대`였고, 10년 세월이 훌쩍 흐린 뒤 시위대는 `유신정권 반대`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후 20회 무렵에선 민주화 운동을 다뤘다. `자이언트`는 `광주 민주화 운동`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대통령 취임` 장면 등을 방송하기도 했다. ▲ 삼청교육대에 들어간 이강모(이범수 분)의 모습지난 7월26일 방송된 21회에서는 삼청교육대의 실상도 전해졌다. 강모는 자신을 정연과 떼어 놓으려는 민우의 계략에 의해 소태와 함께 삼청교육대에 끌려간다. 이 곳에서 강모는 인간답지 못한 대우를 받으며 우리 역사의 아픈 현장을 생생히 증언했다. `자이언트`는 또 `평화의 댐` 사건도 다뤘다. 국민 성금으로 지은 평화의 댐은 그러나 사실 당시 권력층에 거대한 부를 축적케 하는 대국민 사기극이었다. 강모는 "그거 사기잖아. 국민들 상대로 사기치는 공사, 참여하고 싶지 않아"라며 평화의 댐 사건을 꼬집기도 했다. 1987년 6·10 민주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자이언트`는 7일 방송된 마지막 회에서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도 묘사했다. 조민우(주상욱 분)의 욕심 속에 부실로 진행된 만보 플라자는 삼풍 백화점이 그랬던 것처럼 무너져 내렸다. 경제 개발기 도시의 비뚤어진 욕망을 그려낸 `자이언트`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극의 몰입도를 높이는 데 성공했다.▲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와 유사점이 있는 만보 플라자 붕괴▶ 관련기사 ◀☞`자이언트` 사랑은 해피엔딩···`강·정` 결혼, `우·주` 재회☞조필연 악행 밝힐 비밀장부, 방탄조끼에 있었다☞`자이언트` 산 자와 죽은 자, 떠난 자와 남은 자는?☞조필연 끝까지 `카랑카랑`···악마 본색 명대사 5☞`자이언트` 막방 대박쳤다..시청률 `38.2%`☞[아듀, 자이언트]씁쓸한 엔딩, 깜짝 반전은 없었다☞[아듀, 자이언트]이범수·정보석·박상민이 얻은 것
2010.12.07 I 김영환 기자
최일구 앵커 "1987년 6월 항쟁 취재, 눈물이 났다"
  • 최일구 앵커 "1987년 6월 항쟁 취재, 눈물이 났다"
  • ▲ MBC `황금어장`의 `무릎팍도사` 코너에 출연한 최일구 앵커(사진=화면캡처)[이데일리 SPN 김은구 기자] 최일구 MBC 주말 `뉴스데스크` 앵커가 기자로 활동하던 제5공화국 당시 정부의 언론통제에 따른 안타까웠던 속내를 털어놨다. 최일구 앵커는 자신이 게스트로 출연해 10일 방송된 MBC `황금어장`의 `무릎팍도사` 코너에서 1987년 6월 항쟁 취재 당시를 설명하며 “제대로 취재를 해도 기사가 안 나갈 때였다. 부끄러움에 살았다”고 밝혔다. 최일구 앵커는 “내년(1988년)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하자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분출되던 시기였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 “6월10일 전국 대도시에서 오후 6시 일제히 자동차 경적을 울리는 시위가 있었는데 모든 차들이 경적을 울렸다. 민심이 폭발한 것”이라며 “이후 시위가 벌어졌고 시위대가 명동성당에 들어가 장기농성을 했다”고 덧붙였다. 최일구 앵커는 “10일 정도 지나 시위대가 해산하는 날 취재를 위해 자동차를 타고 명동성당에 올라가는데 MBC로고를 보고 시위대가 차량 본네트에 올라타고 물건을 던져 (창이) 깨지기도 했다”며 “차량을 뒤로 뺀 후 뒤에서 시위대가 해산하는 모습을 지켜봤는데 눈물이 났다. `이래서 무슨 기자냐` 싶었다”고 말했다. 최일구 앵커는 이날 `무릎팍도사`에서 기자로 생활할 당시 특종과 낙종의 경험담과 `뉴스데스크` 앵커로 발탁된 계기 등을 털어놨다. 이날 `황금어장`은 AGB닐슨미디어리서치 조사에서 15.1%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 관련기사 ◀☞최일구 앵커 "악플로 유명 달리한 연예인들 이해 간다"☞최일구 앵커 "첫 `뉴스데스크` 하며 `뿅` 날아갔으면 했다"
2010.11.11 I 김은구 기자
  • 민주, 486주자 이인영 역할론 주목
  • [노컷뉴스 제공] 이달 초 민주당 전당대회 경선에서 486진영의 지지를 바탕으로 지도부에 입성한 이인영 최고위원이 몸 풀기에 나섰다. 이 최고위원은 지난 29일 당의 중점 현안인 ‘4대강 대운하 반대 특위’ 위원장에 선임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지난 3일 전당대회에서 득표율 4위를 기록하며 손학규 정동영 정세균 등 ‘빅3’에 이은 발언권을 갖게 됐지만 예상과 달리 조용한 행보를 보여왔다. 87년 6월항쟁의 주역 가운데 한 명으로 초대 전대협 의장을 역임했던 전력에 비춰 예상 밖의 모습인 셈이다. 평소 수줍어하는 듯한 인상과 차분한 성품 탓에, 민주당엔 김대중 노무현의 길 외에 문익환의 길도 있다고 하는 강골 이미지가 빛을 못 본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 최고위원을 가까이 접해본 인사들은, 평소에는 별로 드러나지 않지만 그의 존재감은 분명히 작용한다고 평가한다.민주당이 손학규 대표 등장 이후 사실상 집단지도체제로 전환됐는데도 불구, 빅3 등을 중심으로 한 당내 불협화음이 의외로 적은 이유도 이 최고위원 때문이란 분석이다.한 측근은 “대권까지 넘보는 사람들이 괜히 발목 잡는 모습을 보였다가 이인영 최고위원으로부터 호되게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이 최고위원은 기자들과 만나 “지금은 서로 조심하는 것 같다”며 “역(逆) 치킨게임을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외적으로도, 2012년 대선을 앞둔 야권연대 및 통합 행로에서 그의 잠재가치는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그는 야권의 연대 수준을 넘어선 ‘통합’ 주의자로 국민참여당은 물론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등 진보세력까지도 한 지붕 안으로 모아야 한다고 역설해왔다. 최고위원 등 지도부 내에서 진보 색채가 가장 뚜렷한 점과 과거 민주화운동 과정에서의 인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벌써부터 야권연대 추진의 최적임자로 꼽히고 있다. 민주당은 다만 야권연대 및 통합은 대화.협상의 상대가 있는 문제이니 만큼 민주당이 먼저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고 야권통합기구는 한 달 정도 여유를 두고 가동한다는 방침이다.
 송진우 "광현아, 다음 기회가 오면…"
  • [베이스볼 블로그] 송진우 "광현아, 다음 기회가 오면…"
  • ▲ 송진우[이데일리 SPN 정철우 기자] 어제 인터넷 뉴스를 통해 김광현(SK)이 9회 2사까지 노히트 노런을 하다가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됐다. 옛날 일도 있고 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노히트 노런을 했던 날은 2000년 5월18일이었다. 장소는 광주 구장. 이전까지 5월18일에는 광주에서 경기가 열리지 못했다. 5.18 민주항쟁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날의 광주는 피했던 거라 들었다. 나름 역사적인 날이었는데 광주에서 내가 대기록을 세웠다는 것이 좀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난 위기를 1회 첫 타자에게서 맞았다. 1번 타자가 홍세완이었는데 제대로 맞고 말았다. 완전히 빠지는 타구였는데 내 글러브에 맞고 굴절돼서 아웃시킬 수 있었다. 그때를 떠올려 보면 역시 투수도 수비수라는 걸 잊어선 안된다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9회 2아웃을 잡은 뒤엔… 사실 타자와 수비 덕을 모두 봤다. 마지막 타자가 정성훈이었는데 초구를 바로 때려버렸다. 좌익수 쪽으로 큼지막한 타구가 날아갔는데 (이)영우가 잘 따라가줘서 잡아낼 수 있었다. 정성훈이 좀 더 버티며 기다렸다면 나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많이 긴장했었기 때문이다. 7회 넘어가면서부터는 신경이 분명히 쓰인다. 힘도 더 들어갔던 것 같고. 헌데 신경 쓰이는 걸 굳이 안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나 보다 더 긴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말이다. 노히트 노런은 볼넷은 내줘도 되는 기록이다. 물론 난 5-0이라 승패에 대한 부담은 적었다. 광현이는 2-0이었기 때문에 주자가 나가는 것 자체에 좀 더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따져보면 타자도 무지 긴장할 수 밖에 없다. 정성훈이 초구를 쉽게 건드렸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제 경기 후 광현이가 “완봉이나 완투를 앞두고 마지막에 마음이 흔들리는 단점이 있다”고 말했다고 들었다. 그건 고치겠다고 고쳐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경 안 쓰려고 한다고 어떻게 신경이 안 쓰이겠는가. 광현이는 지금도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투수다. 하지만 이제 4년차일 뿐이지 않는가. 억지로 하려고 해도 안 되는 일도 있는 것이다. 그저 시간의 흐름에 맡겨두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한 1~2년 더 경험을 쌓다 보면 지금 안되던 것들도 자연스럽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또 그런 기회가 오면 그저 흐름에 맡겼으면 좋겠다. 얼마 전 오심 때문에 퍼펙트 게임이 무산된 사건은 일본에서도 큰 뉴스였다. 아직도 그 이야기가 나오고 있을 정도다. 그게 야구다. 내가 아무리 잘해도 운이 따르지 않으면 하늘이 준 기회도 놓칠 수 밖에 없다. 그걸 어쩌겠나. 광현이가 대기록에 도전해 준 덕에 덩달아 내 이야기까지 나왔다고 들었다. 벌써 10년이나 된 기록인데 아직 새 주인공이 나오질 않았다니… 데뷔전 완봉승도 내가 마지막 기록인데 그건 이제 22년째에 접어들었다. 후배들이 꼭 새로운 이름을 올려놓게 되었으면 좋겠다. 광현이도 또 (류)현진이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재주가 있는 후배들이다. 꼭 좋은 결과 있기를 기대해본다.▲ 김광현
  • 민주-민노당 서울시장 후보 한명숙으로 단일화
  • [이데일리 이숙현 기자]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이 한명숙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로 후보단일화에 합의했다고 14일 밝혔다. 이로써 서울시장 선거는 한나라당 오세훈, 민주당 한명숙, 진보신당 노회찬 등 3파전 구도가 됐다. 한명숙 후보와 이상규 민주노동당 서울시장 후보는 이날 “공동의 목표와 공동 정책·공약, 공동 선거대책본부 구성 그리고 공동 서울시정 운영방안에 합의하고, 서울시장 후보는 한명숙 후보로 단일화하기로 합의했다”고 선언했다. 이어 “6.2 지방선거에서 압도적 지지로 서울특별시의 새로운 출발을 담당할 시민참여형 공동지방 정부를 함께 출범시킬 것을 엄숙하게 선언한다”고 밝혔다. 양당은 “87년 6월 항쟁 이후 20여 년 동안 키워온 인권과 민주주의, 참여의 나무는 이명박 정부 집권 2년 만에 줄기가 꺾였다”며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 절대다수를 한나라당이 차지하고 중앙권력과 의회권력까지 거칠 것 없이 휘두르는 상태가 더 이상 지속된다면 이제 민주주의는 뿌리까지 파헤쳐질 위기”라고 밝혔다.이어 “민주주의와 인권, 참여를 키워나가야 할 야당과 시민사회가 이번 6월 2일 지방선거에서 차이를 뛰어넘고 갈등을 극복해 힘을 모아 지방권력을 바꿔야 한다”면서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오만과 독선을 심판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편 진보신당 노회찬 후보측은 선거를 완주할 것이라며 한 야권단일화 가능성을 일축했다. 김종철 대변인은 이데일리와의 통화에서 “구여권세력(열린우리당)과 현 여권 세력간의 2파전 구도에 들러리를 서지 않겠다는 뜻을 이미 밝혔다”면서 “서울시민에게 새로운 세력을 선택할 수 있도록 완주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 후보는 14일 오전 한 라디오에 출연, “제가 민주당만의 후보가 아니다"면서 "야권 그리고 범 민주 세력들과 함께 선거에서 이겨야 된다는 당위성과 위기감을 가지고 설득하고 협상을 한다면 단일화를 이루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는 희망을 내비쳤다.
2010.05.14 I 이숙현 기자
  • 명동성당서 23년만에 ‘4대강 반대’ 시국미사
  • [노컷뉴스 제공] 민주화운동의 ‘성지’인 서울 명동성당에서 6월항쟁 이후 처음으로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시국미사가 열렸다. 학계와 언론계, 시민단체 등 각계 인사 77인도 4대강 사업을 일단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강은 생명이다, 4대강 삽질 중단하라” “6.2선거 참여하여 4대강 삽질 막아내자”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손에는 4대강 사업 중단과 지방선거 투표 참여를 촉구하는 팻말을 든 수천명의 천주교 신도들이 서울 명동성당에 운집했다. “생명을 살립시다”라는 구호 아래 촛불이 새겨진 하얀색 조끼는 명동성당 들머리를 가득 메우며 4대강 사업에 대한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 4대강 사업저지를 위한 천주교연대는 10일 오후 명동성당 본당에서 4대강 사업중단을 촉구하는 생명ㆍ평화 미사를 올렸다. 한국 민주화의 상징인 명동성당에서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시국미사가 열린 건 지난 1987년 6월항쟁 이후 23년 만에 처음이다.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윤종일 신부는 강론을 통해 “4대강 사업은 생태환경을 만든다면서 자연을 파괴하고, 깨끗한 물관리를 주장하면서 물을 오염시키고 있다”며 “국민의 눈물을 닦아줘야 할 대통령이 국민의 가슴에 못을 박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전국에서 모여든 300여명의 사제와 신도 등 8천여명의 미사 참가자는 성당 들머리에 나서 4대강 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생명의 강’ 잇기를 상징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4대강 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전국 사제ㆍ수도사 5,005인 선언도 발표됐다. 지난 3월 사제 천여명이 참여한 1차 선언의 5배 규모이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강에는 땅과 물과 동식물, 그리고 주변에서 농사짓는 농민들을 비롯한 모든 공동체의 삶이 담겨 있다”며 “강가의 모든 생명을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일은 우리 신앙인의 몫이고 의무이며 소명”이라고 밝혔다. 이어 “우리는 6.2 지방선거에 적극 참여해 ‘강의 생명’을 약속하는 후보들을 선택하고 4대강 사업에 대해 분명히 심판할 것”이라면서 “정부와 선관위는 종교ㆍ시민단체에 대한 정치적 개입과 압박을 중단하고 지금 당장 4대강 사업을 멈추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4대강 사업 저지를 위한 천주교연대는 이날 시국미사에 이어 한강과 낙동강 등 4대강 주변에서 권역별 기도회와 강 순례에 나서고 생명ㆍ평화 미사를 계속해서 봉헌할 예정이다. 앞서,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와 최열 환경재단 대표, 박종화 목사 등 학계와 종교계, 시민단체 등 각계 인사 77인은 이날 오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4대강 사업의 새로운 해법을 위한 77인 특별제안’을 발표했다. 이들은 “4대강 사업에 대한 국민의 걱정은 커지고 있고, 우리는 무엇보다 첨예한 사회갈등과 국론분열 현상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면서 “4대강 사업을 일단 중단하고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수립하는 등 근본적인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 이 대통령 "3.15 의거는 한국 민주주의 이정표"
  • [이데일리 김춘동 기자] 이명박 대통령은 15일 올해 처음으로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마산 3.15 의거 50주년 기념사에서 "자유·민주·정의의 숭고한 가치는 4.19 혁명으로 꽃피웠고, 부마항쟁을 거쳐 한국 민주주의의 위대한 이정표가 됐다"고 평가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김양 보훈처장이 대독한 기념사에서 "3.15 의거는 시민에 의한 자유민주주의의 출발점이었다. 남성동과 북마산, 그리고 마산시청 앞에는 불의와 독재에 항거하는 젊은 학생과 시민들의 함성이 대지를 흔들었다"며 이 같이 말했다. 이 대통령은 "3.15 의거는 올해 국가기념일로 승격되어 대한민국 민주화의 역사에 일획을 그은, 온 국민이 영원히 기념할 날로 남게 됐다"며 "마산에서 꽃핀 민주화와 산업화의 정신은 오늘날 자유와 번영이 넘치는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이어 "이제 우리는 세계 일류국가를 꿈꾸며, 더 큰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며 "우리는 세계금융위기를 가장 빨리, 가장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민족융성의 또 다른 기회를 맞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기회는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니다. 준비된 사람만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다"며 "우리가 지금 한 마음으로 단결해 노력한다면 대한민국을 선진일류국가로 도약시키는 절호의 기회를 만들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이제 (마산이) 올 7월 창원과 진해와 함께 통합시로 출범하게 된 것을 축하한다"며 "앞으로 동남지역의 경제중심지로 성장해 지역과 나라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2010.03.15 I 김춘동 기자
무엇이 그들을 무죄로 만들었나? ''이태원 살인사건''
  • [SPN 리뷰]무엇이 그들을 무죄로 만들었나? ''이태원 살인사건''
  • ▲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 포스터[이데일리 SPN 김용운기자] 1997년 4월 외국인 관광특구인 서울 이태원의 한 패스트푸드가게의 화장실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피해자는 당시 대학생이었던 고 조중필군. 중필군은 여자친구를 바라다 주던 길에 화장실에 들렀다가 몸의 9군데가 칼에 찔려 숨을 거뒀다. 사건의 피의자는 미국 국적의 10대 청소년 두 명. 이들은 사건 직후 검거가 됐지만 결국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난다. 서로를 범인으로 지목했지만 누가 죽였는지를 확증할 수 있는 증거가 나오지 않아서다. 죽은 사람은 있고 이를 본 사람은 있는데 정작 죽인 범인은 없다는 것이 이태원 패스트푸드가게 살인사건의 요지다. 홍기선 감독은 우연히 조중필씨 사건에 대한 인터넷 홈페이지를 보고 이 영화를 기획하게 됐다. 서울대 원자력공학과 재학시절 공대 영화 동아리 얄랴성의 초기 멤버였던 홍기선 감독은 80년대 5.18 광주민주항쟁을 최초로 다룬 단편 영화인 ‘오 꿈의 나라’ 때문에 옥고를 치른다. 이후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 자르고’와 ‘선택’ 두 장편 영화로 당시 80년대 운동권이었던 영화인들에게 빚을 안겼다. 소위 멍텅구리 배라고 하는 새우잡이 배에 잡혀간 군상들의 삶을 가감 없이 보여준 ‘가슴에’와 비전향 장기수의 삶을 담은 ‘선택’은 한국사회의 어두운 진실이었고 홍기선 감독의 영화를 통해 재조명됐기 때문이다. 영화의 사회적 메시지를 고민하는 영화인들에게 그래서 홍기선 감독의 이름은 남달랐다. 홍 감독은 이태원 살인사건의 전후와 과정을 보면서 90년대 한국사회의 표징을 읽었다고 한다. 이태원이란 무국적 공간속에서 벌어진 미국 국적 10대 소년들의 살인사건. 그리고 이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결국 피해자만 있고 범인은 존재하지 않는 어이없는 상황. 결국 홍 감독은 누가 범인인가보다 누가 혹은 어떤 시스템이 피의자들을 풀어줬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그것이 당대 우리사회의 어두운 진실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이런 홍 감독의 진심을 보고 피해자인 조중필군의 어머니는 아들 사건에 대한 영화 제의에 눈물을 흘리며 수락했다. 억울한 아들의 죽음이 영화를 통해서나마 알려지고 행여나 다시 재판이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애초 저예산독립영화로 구상했던 ‘이태원 살인사건’은 점차 규모가 커져갔다. 홍 감독에게 빚을 진 마음이 컸다는 정진영이 박 검사 역으로 출연을 결정했고 청춘스타 장근석이 피의자 중 한 명인 피어슨 역을 맡게 됐다. 오광록, 고창석 등 충무로의 연기파 배우들이 합류했고 제작비도 처음 기획했던 것의 배 이상 확보할 수 있었다. 결국 예상치도 못했던 제작발표회를 거쳐 200여개관이 넘는 스크린에서 ‘이태원 살인사건’의 간판을 올리게 됐다. 이처럼 긴 사연이 ‘이태원 살인사건’이 있었기에 박 검사 역을 맡은 정진영은 “할리우드 스릴러 영화 같은 작품은 아니다”고 못을 박았다. 자칫 영화 제목에서 주는 어감 때문에 스릴러 영화의 감각적인 재미를 주는 작품으로 곡해될 것을 우려해서였다. 정진영의 말처럼 ‘이태원 살인사건’은 감독과 관객사이에 두뇌싸움이나 범인을 검거하는 과정에서의 긴박함이나 긴장감은 없다. 오히려 법정드라마처럼 사건의 사실적 재현과 전개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야구로 치자면 정통파 투수가 투스트라이크 쓰리볼 상황에서 타자의 헛스윙을 유도하는 변화구 보다 칠 태면 쳐보라는 식으로 스트라이크 존을 향해 꽂는 묵직한 직구 같은 느낌의 영화다. 홍 감독은 그렇게 영화를 만들어야지만 고인의 넋을 이용하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극적인 재미를 위해 가공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지만 사건 자체를 보다 객관적으로 관객들에게 전달시키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저예산독립영화를 표방(?)했던 ‘이태원 살인사건’이 상업적으로 주목을 받고 홍 감독의 작품 중 가장 큰 규모로 개봉하게 된 요인 중에 하나는 장근석이 주인공 피어슨으로 출연한 덕이 크다. 장근석은 20대 초반 자신의 영화 인생에 하나의 분기점이 될 만한 캐릭터를 선택했고 스스로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해냈다. 9일 개봉 15세 관람가.
2009.09.12 I 김용운 기자
  • (김前대통령서거)3김 시대의 물리적 종언
  • [이데일리 김세형기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우리나라 정치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3김` 시대도 `물리적 종언`을 맞게 됐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정착에 이들이 기여한 것에 대해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지만 이들은 `지역 할거주의`라는 고질적인 병폐도 양산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집권을 계기로 이들은 모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고, 3김 시대는 공식적으로 마감했다. 하지만 이들이 남겨 놓은 지역주의가 여전히 한국 정치판에 어슬렁거리고 있다. 호남권의 맹주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정치권에 `지역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 문화가 형성될 지 관심이다. ◇ 3김의 태동..`서울의 봄` 김대중 전 대통령(1924년생), 김영삼 전 대통령(1927년생),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1926년생)를 한묶음으로 일컫는 `3김`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통상 지난 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직후로 볼 수 있다. 그전까지 이들이 정치 일면에 없었던 것은 아니나 박정희 대통령의 피격당하면서 이들이 권력의 최상층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늘상 야권의 대표주자들이었다. 이승만 정권 붕괴와 5·16 군사 쿠데타로 약화된 해방 이후의 정치권을 대체하는 신세대의 기수들이었다. 둘은 박정희 정권에 맞서 그들의 경력을 쌓아갔고, 야권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서로 맞붙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가 심해질 때 핍박을 받았던 것 역시 같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살해 위험에 처하기도 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 역시 박정희 정권 말기에 국회의원직에서 영구제명되기도 했다. 이에 비해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는 군사 쿠데타에 가담해 정치권에 등장한 인물로,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것을 필두로 박정희 정권에서 국무총리를 두 차례 지냈을 정도로 실력자였다. 그러나 항상 2인자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총격에 의해 사망하면서 대한민국은 정권에 공백이 생겼다. 이른바 `서울의 봄`이다. 이같은 공백기에 부상한 것이 이들 3김이다.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야권의 대표주자로서, 김종필 전 총재는 전 정권의 지분 보유자격이 감안됐다. 작고한 종교계 지도자 강원용 목사의 중재 아래 이들 3김의 권력 분점이 막바지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서로 권리를 주장하면서 시간이 흐르는 사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신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해 버렸다. 이때 3김이 권력 분점에 합의했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시대가 좀 더 빨리 왔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있는 게 사실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이들 3김은 정계 은퇴와 가택연금 등 정권의 탄압을 받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다만 이때는 지역주의 색채가 그리 강하지 않았다는 것이 통설이다. ◇ 민주화와 함께 열린 3김 시대..`지역분할과 야합` 87년 정권 막바지에 이른 전두환 정권은 장기집권을 시도하고 국민들은 피로 얼룩진 6월 항쟁으로 결국 직선제 개헌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퇴진을 이끌어 내게 된다. 이는 3김 시대가 꽃을 피우는 계기가 됐다. 정치 활동 금지가 풀린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손을 잡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해 정권 창출에 나섰고, 김종필 전 총재도 미국에서 귀국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한 뒤 정계에 복귀했다. 이들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후계자격인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와 그해말 대통령 선거에서 대결하게 된다. 이때 대통령 당선에 가장 앞서 있던 것은 통일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다. 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은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결국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당선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때 평화민주당을 창당, 대통령 선거에 나섰는 데 이것이 결국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호남,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남, 그리고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충청도 등 지역 할거주의가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각자 후보마다 100만명 넘는 지지파를 동원해 여의도에서 유세를 가진 것은 지역 할거주의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집권은 했지만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의 열망은 매우 강렬했다. 이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소야대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민정당은 국정 안정을 위해 야권에 손을 내밀게 된다. 이것은 3당 야합으로 일컫어지는 1990년의 민정당, 통민당, 신민주공화당의 전격 합당으로 귀결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표라는 직함을 얻었고, 김종필 전 총재는 내각제라는 꿈을 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안정적 국정운영이라는 소득을 얻었다. 이때부터 분할과 야합이라는 부정적 평가도 얻었다. 서로 각기의 지역 기반을 갖고, 정권 획득에 전력하는 것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9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권 경쟁에서 승리한 김영삼 후보가 민자당 후보로 나온다. 영남과 충청권을 등에 업은 김영삼 후보는 호남을 기반으로 재차 출마한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의 꿈을 이루게 된다. 김대중 후보가 선거 패배 여파로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런던으로 갔지만 3김 시대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김종필 전 총재는 정권 창출에 기여한 공으로 김영삼 정부 초기 집권 민주자유당의 대표가 됐지만 결국 불화를 참지 못하고 1995년 2월 자유민주연합이라는 독자정당을 다시 창당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이를 전후해 정계에 복귀하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여권과 김대중, 김종필의 야권이라는 3각 분할구도가 이뤄진다. 이때가 3김의 절정이랄 수도 있다. 97년 대선에서는 재차 합종연횡이 이뤄진다. 3당 합당시 야합이라고 극렬 비난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측과 김종필 전 자민련측이 일명 DJP연합 전선을 구축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후보로 내세운 것. 때마침 불어닥친 IMF 경제위기라는 시대 상황도 유리하게 돌아가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네번의 도전끝에 결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3김도 한풀 꺾였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3년 퇴임하고 2004년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가 국회의원 선거 참패를 이유로 정계은퇴를 선언하면서 사실상 3김 시대는 막을 내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집권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영남권 출신의 호남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고, 스스로도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등을 제안하면서 3김 시대 종식에 앞장 서기도 했다. ◇ 김대중 서거..지역주의 끝나나노무현 정부시절 3김이 완전히 끝난 줄 판단했지만 3김의 지역주의 유산은 2007년 대선에서 고스란히 되살아 났다. 영남권을 기반으로한 박근혜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막판까지 접전을 벌이는가 하면 정계밖에 있던 이회창 자유선진당 후보가 충청권을 등에 업고 재차 정계에 들어 왔다. 집권 여당도 마찬가지였던 터라, 열린우리당은 전주 출신의 정동영 의원을 후보로 내세우면서 여전히 지역주의의 한계를 표출했다. 이명박 정권이 집권한 지 1년반으로 접어 들고 있지만 이런 지역주의는 여전한 모습이다. 지역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인물에, 그 인물이 현직에 있건 이선으로 후퇴해 있건 정치인들이 줄을 대는 양상이다. 이명박 대통령마저도 통합을 이야기하면서 지역 갈등을 척결대상으로 꼽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사실상 막을 내렸던 3김 시대는 이제 물리적으로도 종언을 맡게 됐다. 하지만 가장 손쉽게 지지세력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우리가 남이가`로 대표되는 지역주의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는 이상, 지역주의 척결까지는 아직 멀기만 해 보인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은 90년 3당 합당을 계기로 완전히 등을 돌린 뒤 최근까지도 화해하지 못했다. 그러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직전 병상을 직접 찾아 화해를 모색했다. 이 둘의 화해가 양편으로 갈라섰던 대한민국의 갈등을 봉합하는 계기가 될 지 지켜볼 일이다.
2009.08.18 I 김세형 기자
(김前대통령서거)인동초 인생..결코 패배하지 않았던 삶
  • (김前대통령서거)인동초 인생..결코 패배하지 않았던 삶
  • [이데일리 이숙현기자] `인동초`. 김대중에 대한, 말하자면 비유라기보다 묘사다. 그는 한 때 (혹은 누군가에게는 영원히)`빨갱이`였다. 71년 신민당 대선 후보로 결정될 당시부터 심지어 1997년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이 진부한 색깔론은 언제든 `필요할 때마다` 살아나 그와 그 주변을 괴롭혔다. 사고를 가장한 암살 위협, 납치와 가택연금, 망명, 사형선고 그리고 4번의 대선 도전 끝 대통령 당선과 노벨평화상 수상에 이르기까지 단 한순간도 그는 `인간 김대중`일 수 없었다. 세상사 모든 것이 정치라지만 그는 유독 `정치인 김대중`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지나치게 뛰어난 사람에게 질투와 질시는 천형과 같은 법. 그가 짊어졌던 삶이 본인의 온전한 선택이었는지, 보이지 않는 운명의 강요였는지 눈 감아 버린 그만이 알 것이다. 그의 삶은 곧 영욕이자, 자체로 소설이었다.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에서 3차례 국회의원에 도전했다. 모두 실패였다. 4수 끝에 1961년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지만 5·16쿠데타로 당선 이틀 만에 의원선서도 하지 못하고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45세이던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40대 기수론`을 앞세우며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향토예비군 폐지, 노동자·자본가 공동위원회 구성, 비정치적 남북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선거공약을 내걸고 박정희 후보와 맞섰다. 김대중은 과감한 공약과 호소력 있는 연설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으나 박정희에 95만 표 차이로 패배했다. 하지만 쿠테타 세력에 의한 온갖 부정선거 의혹 속에서도 김대중은 46%를 득표, 박정희 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 `사건`은 곧 김대중 수난사를 본격적으로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72년 유신이 선포되자 김대중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73년 8월에는 그 유명한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난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다시 동교동으로 돌아왔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가택 연금. 이제 투옥, 살해 위협, 연금과 감시는 그의 일상사가 된 듯 했다. ▲ `김대중 내란음모죄` 재판 장면1980년 초 `서울의 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듬 해(1980년) 2월 사면복권된 김대중은 이 시기에 김영삼·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활동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1979년 12·12사태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이때 김대중은 26명의 정치인들과 함께 또 다시 체포, 수감됐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시기를 감옥에서 보낸 그는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에서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1981년 1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이에 미국·일본·독일·프랑스 등을 중심으로 현지 교포들과 각국의 양심적 지식인·문화인·정치인들이 대거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자 군사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한 데 이어 1982년 12월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19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미국에서 전격적으로 귀국한 그는 김영삼과 함께 급조한 신한민주당을 통해 당시 어용야당이던 민주한국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하는 저력을 보였다.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87년 6월 민주항쟁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자 군사정권은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 수용 등을 담은 `6·29선언`을 내놓았다.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이끌어냈지만 그것을 내용적으로 실현할 민주화 세력의 통합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김대중은 1987년 12월로 예정된 제1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통합민주당 총재였던 김영삼과의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통령선거에 나섰다. 야당의 분열 속에 집권당인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의 승리는 예견된 일이었다. 동시에 민주화세력에게 적전 분열은 재앙을 의미했다. 대통령선거에 패한 후 야당분열에 대한 국민적 비난, 평화민주당 총재직 사퇴, 제13대 총선에서 제1야당으로 부상 그리고 1990년 `3당 합당`. 그의 정치인생 놓인 시련과 굴곡은 끝이 없어 보였다. ▲ 1985년 미국서 귀국 당시 모습그는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또 다시 출마한다. 그리고 패배. 이후 전격 정계은퇴 선언을 했으나 곧 95년 정치활동을 재개하며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다.  마침내 1997년 12월. 그는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도전해 성공을 거두었다. 4번째 도전 끝에 `준비된 대통령`으로서 첫 발을 내딛게 된 순간이자, 71년 대선 첫 도전 이후 26년만에 이룬 꿈이었다. 생전에 노무현은 김대중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분은 그 시기에 가장 탁월한 정치인이었습니다. 지금 보면 완전한 정치인이라고 볼 수 없지만, 그 시기에 가장 탁월한 정치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시대의 역사적 가치의 상징이었죠. 민주주의라는 역사적 가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분을 평가할 때 그 점을 우리가 인정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칭찬을 하든, 비판을 하든 그 기본적인 전제를 먼저 우리가 인정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2009년 8월18일. 그는 떠났다.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히며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갔다. 그렇게 86년 인생을 쉼없이 살다갔다. 김대중의 죽음은 멀지 않은 우리의 과거, 통한의 역사를 돌아보게 한다. 2009년 5월 29일, 후배 대통령의 영정 앞에서 아이처럼 울던, 그리고 또다시 민주주의를 외치던 그의 빈 자리를 이제 누가,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좋든 싫든 그처럼 역사를 몸으로 웅변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는 이제 쉽지 않아 보인다. 수많은 현실적 패배 속에서도 결코 패배하지 않았던 한 `인간`을 다시 만나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의 죽음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이유다. "다섯 번 죽을 고비를 넘겼고, 6년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수십 년을 망명과 연금, 감시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 사이에 수많은 치욕과 고통도 있었고 수많은 유혹도 있었습니다. 신군부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죽는 것이 몹시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역사는 결코 불의에게 편들지 않고, 역사를 믿는 사람에겐 패배가 없습니다." (2003년 2월 24일, 대통령 퇴임사)
2009.08.18 I 이숙현 기자
  • 6·10 범국민대회… 수만명 서울광장 운집
  • [노컷뉴스 제공] 경찰의 불허 통보에도 불구하고 6월 민주항쟁 22주년을 기념하는 범국민대회가 예정대로 10일 서울광장에서 시작됐다. 이날 저녁부터 시민들이 불어나 범국민대회 시작을 전후로 광장이 거의 메워졌으며, 자체 집계로 저녁 8시를 기준으로 대략 4만여명의 시민들이 모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범국민대회 1부는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씨와 박종철 열사 아버지 박정기 씨의 여는 말로 시작됐다. 이어 정세균, 강기갑, 문국현, 노회찬 의원 등 야4당 대표 연설과 함께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의 결의문 낭독이 있을 예정이다. 준비위는 결의문에서 “국민은 전면적 국정기조 전환을 염원하고 있다”며 "대통령의 사과와 검경을 앞세운 강압통치 중단, 4대강 개발사업과 언론 악법 등 반민주, 반민생 악법 추진 중단 등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2부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및 민주회복 문화제가 이어진다. 배우 권해효 씨의 사회로 진행되는 2부 공연에는 노 전 대통령 추모 영상과 함께 노래를 찾는 사람들 등 문화 공연이 진행될 예정이다. 경찰은 80개 중대 6천여명의 전,의경을 광장 곳곳에 배치해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으며, 밤늦게는 최대 150개 중대 만 2천여명의 경력을 투입할 계획이다. 특히 경찰은 대회가 강경하게 이어질 경우 차벽을 설치하거나 대규모 경력을 동원해 서울광장을 에워싸는 인의장막을 칠 계획이어서 양측간 충돌이 우려되고 있다.
  • 李대통령 "폭력 행사하는 모습이 민주주의 왜곡"
  • [이데일리 김세형기자] 이명박 대통령이 10일 "법을 위반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이 우리가 애써 이룩한 민주주의를 왜곡하고 있다"며 불법 폭력시위에 대해 우려의 뜻을 표시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6·10 민주항쟁 22주년 기념식에서 이달곤 행정안전부장관이 대독한 기념사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이 대통령은 "22년전 오늘 전국 각지에서는 한 목소리로 `호헌철폐`와 `직선제 개헌`을 외쳤고 마침내 위대한 우리 국민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주화의 새 역사를 창조해냈다"며 "2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누구도 되돌릴 수 없을 만큼 확고하게 뿌리 내렸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그러나 "민주주의 제도적, 외형적 틀은 갖추어져 있지만 운용과 의식은 아직도 미흡한 부분이 많다"며 "민주주의가 열어놓은 정치공간에 실용보다 이념, 그리고 집단 이기주의가 앞서는 일들이 종종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은 특히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법을 어기고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도 우리가 애써 이룩한 민주주의를 왜곡하고 있다"며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를 더욱 깊게 이해하고 성숙한 민주주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대통령은 그러면서 "성숙한 민주주의는 우리 사회 모든 곳에서 독선적인 주장이 아니라 개방적인 토론이, 극단적인 투쟁이 아니라 합리적인 대화가 존중받는 것"이라며 또 "성숙한 민주주의는 성숙한 시민이 자율과 절제, 토론과 타협을 통해 만들어 가는 위대한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대통령은 아울러 "민주주의가 사회갈등과 분열보다는 사회통합과 단합을 이루는 기제가 되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2009.06.10 I 김세형 기자
  • "대통령은 사과하라" 시국선언 교수 1천명 넘어섰다
  • [노컷뉴스 제공] 상아탑으로 번진 시국선언의 열기가 시간이 지날수록 확산되고 있다. 지난 3일 서울대 교수 124여명이 현 정부의 기조를 비판하는 시국선언의 첫 테이프를 끊은지 5일만에 17개 대학 1163명의 교수들이 시국선언문에 이름을 올렸다. ◈ 17개 대학 1,163명 선언, 이 대통령 모교 고려대 가장 많은 인원 기록지금까지 시국선언에 동참한 대학교는 서울대 (124명), 고려대 (131명), 중앙대 (68명), 서강대 (45명), 성균관대 (35명), 신라대 (39명), 동아대 (56명), 경상대 (66명), 경북대, 영남대, 계명대, 대구대, 대구보건대 연합 (309명), 충북대 (80명), 한신대 (88명), 우석대 (85명), 인천대 (37명) 등 17개 대학 1,163명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모교인 고려대 교수들도 8일 시국선언 대열에 동참했다. 고려대 교수 131명은 이날 시국선언문을 통해 "정부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추모 행렬에서 나타난 민의를 헤아리기 보다는 오만한 권력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우려하며 국정쇄신을 요구했다.특히 고려대는 지금까지 학교단위에서는 가장 많은 교수 참석인원을 기록하기도 했다. 성균관대 교수 35명도 이날 본교 호암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의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성균관대 교수들은 “검찰의 불법적인 표적 수사 행태, 추모에 대한 경찰의 폭력적 대응과 몰상식한 언행은 과거 군사정권의 악몽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면서 정부를 강하게 질타했다. 교수들은 이어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함과 동시에 정부가 표현과 집회의 자유를 억압하지 말고, 언론 장악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는 9일에도 연세대를 비롯해 건국대, 부산대, 전남대 등 전국의 각 대학 교수들이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기로 해 6월 민주항쟁 기념일인 10일을 전후로 이같은 시국선언의 물결이 최고조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민주화의 고비마다 사회 정의를 외치면서 역사의 전환점이 됐던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다시 한번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현 정부의 운영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 문인들도 시국선언 나서…보수 성향 단체 · 교수들 맞불이에 동참해 시인, 소설가, 평론가 등 문인들도 시국선언에 나선다.188명의 작가들은 9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현 시국에 대한 작가들의 목소리를 담은 '이것은 사람의 말-6ㆍ9 작가선언'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들은 이날 선언문을 통해 "민주주의의 일반 원리와 보편 가치를 무자비하게 짓밟으면서 달려온 이명박 정권 1년은 이토록 참담하다."고 비판한 후 개별 작가의 목소리를 담은 '한줄 선언'을 낭독할 예정이다. 한편 보수 성향의 단체와 교수들을 중심으로 릴레이 시국선언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보수 단체측에서는 "교수들이 시국선언을 통해 반정부 분위기를 정치적으로 선동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9일 오전에는 서강대 안세영 교수와 서울대 박효종 교수, 서울시립대 윤창현 교수 등 보수성향의 교수들이 최근의 릴레이식 시국선언을 우려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하며, 뉴라이트전국연합 등 보수진영 시민사회단체들도 이날 오후 국가위기극복을 위한 '맞불' 시국선언을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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