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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항석 교수, '벌거벗은 세계사' 역사왜곡 논란 해명→대화 제안 [종합]
- (사진=tvN ‘벌거벗은 세계사’ 방송화면)[이데일리 스타in 김보영 기자]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페스트와 관련한 강연에 나섰다가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인 장항석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교수가 입장을 밝히며 문제를 제기한 박흥식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와의 대화를 요청했다.장항석 교수는 지난 4일 병원 환자들과의 소통을 위한 인터넷 카페 ‘거북이 가족’에 입장문을 올리고 “우선 이 방송과 관련해 본의 아니게 잡음이 일게 된 점 송구하고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박흥식 교수님께 같은 교수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대 인간으로 서로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이 이야기를 풀어볼 것을 제안한다”고 요청했다. 장 교수는 이번 입장문을 올리게 된 계기에 대해 “이 방송에 대해 서울대 서양사학과 박흥식 교수께서 개인 SNS에 방송이 역사 왜곡을 하였으며 자문을 거치지 않았고, 괜한 공포심을 조장하였다는 내용의 비판글을 게재했다”고 경위를 설명하며 “저는 의학을 전공한 교수로서 2018년 ‘판데믹 히스토리’라는 책을 집필한 바 있고, 당시 검토했던 수많은 책과 자료 및 연구를 토대로 이번 ‘페스트’편을 준비했다. 제작진과 함께 여러가지 잘 알려진 설들 중 가장 보편타당성이 있는 내용을 엄선하려 노력했고, 여러 검증 과정을 거쳐 각 세부 주제들을 구성했다. 의학적인 관점에서 페스트라는 감영병에 대해 접근해보고자 했다”고 방송 강연에 나선 취지를 밝혔다. 박흥식 교수의 주장처럼 질병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려 방송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공포심을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질병에 승리해온 역사를 말하며 현재를 이겨낼 희망을 말하고자 한 것”이라며 “역사를 해석함에 있어서 다양한 역사학적 관점과 의견이 존재하며, 세계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 입장에서는 내용이나 구성에 대한 지적을 충분히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다만 “저는 거짓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제가 감염병 관련 책을 준비하면서 찾았던 그 수많은 자료들이 박교수님의 주장대로 다 왜곡이라고 한다면, 페스트와 관련된 내용이 있는 수많은 책들은 다 폐기되어야 옳을 것”이라고 반박했다.또 박흥식 교수의 지나친 지적이 방송과 관련한 명예를 훼손할 우려가 있음을 꼬집으며 일부 발언에 대해선 박 교수의 해명 및 사과 역시 필요하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장 교수는 “SNS에 공개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수준의 의사가 나섰다’는 식의 인신공격성 언급은 지나친 발언이며, 이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우리 의학분야에서도 서로의 의견이 상충될 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격한 토론을 한다. 하지만 적어도 서로에 대한 예의는 지킨다. 충분히 역사학적 토론이 가능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공격적이고 자극적인 언사를 통한 일방적인 매도는 지나치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방송과 관련해 수정돼야 할 부분과 풀어야 할 오해가 있다면 허심탄회한 대화로 풀어나가고 싶다는 의지도 내비쳤다. 장 교수는 “박교수님의 SNS에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는 대목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제게 더 가르침을 주시고자 한다면 언제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내용에 대해서도 후속 조치가 필요하다면 시정할 의사가 있다”라며 “그리고 그런 만남을 통해 서로의 오해를 풀고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 일들이 해결되어 나가길 기대해 보다”고 제안했다. 앞서 지난달 30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4회 방송에서는 장항석 교수가 강연자로 나서 중세 유럽시대 전염병인 ‘페스트’(흑사병)를 상세히 다루는 모습이 전파를 탔다. 장 교수는 방송 당시 중세시대 ‘카파 공성전’을 설명하며 몽골군이 ‘페스트’를 퍼지게 하려고 페스트로 사망한 시체를 투석기로 던졌다고 설명했고, 페스트를 현재 전세계적으로 유행 중인 코로나19 팬데믹과 비교하기도 했다. 그러나 방송 다음날인 31일 박흥식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흑사병을 10년 넘게 공부했고 중세 말기 유럽을 전공하는 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건 정말 아니다 싶다”라며 “힘들게 자문을 해주었더니 내가 자문한 내용은 조금도 이용하지 않았다”고 비판, 역사왜곡 및 오류가 있음을 지적해 논란이 일었다. 박 교수는 “흑사병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목표였나, 통계나 병인학적 측면에서도 최근 해석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라며 “설민석이 문제인줄 알았더니 이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거의 모든 것이 문제인 듯하다”라고도 혹평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벌거벗은 세계사’ 제작진은 지난 1일 공식입장을 통해 “페스트편은 페스트와 관련한 내용을 의학사적인 관점을 중심으로 구성한 것”이라며 “방송 전 대본과 가편본, 자막이 들어간 마스터본을 관련 분야의 학자분들에게 자문을 받고 검증 절차를 마친 후 방송했다. 앞으로도 더 좋은 방송을 만들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번 논란은 특히 역사왜곡 논란으로 기존 강연자였던 스타강사 설민석이 지난해 12월 방송 3회 만에 하차한 후 약 1달 여 만에 방송을 재개하자마자 불거진 것이라 타격이 크다. 당초 프로그램 이름 역시 ‘설민석의 벌거벗은 세계사’였다. 당시 설민석은 ‘나치-독일’편 방송에서 “유대인들로 비누를 만들었다”, “인간 교배장을 만들어 공장처럼 아이를 생산했다” 등 확인되지 않은 역사적 낭설을 사실인 것처럼 발언해 논란에 휩싸였고 ‘이집트’편에서도 역사적 사실과 풍문을 섞어 설명하는 오류를 범해 역사학자들의 지적을 받은 바 있다. (사진=‘벌거벗은 세계사’ 방송화면)아래는 장항석 교수 입장 전문. 우선 이 방송과 관련해 본의 아니게 잡음이 일게 된 점 송구하고 안타깝게 생각합니다.이 방송에 대해 서울대 서양사학과 박흥식 교수께서 개인 SNS에 방송이 역사 왜곡을 하였으며 자문을 거치지 않았고, 괜한 공포심을 조장하였다는 내용의 비판글을 게재했습니다.저는 의학을 전공한 교수로서 2018년 <판데믹 히스토리>라는 책을 집필한 바 있고, 당시 검토했던 수많은 책과 자료 및 연구를 토대로 이번 <페스트>편을 준비하였습니다. 제작진과 함께 여러가지 잘 알려진 설들 중 가장 보편타당성이 있는 내용을 엄선하려 노력했고, 여러 검증 과정을 거쳐 각 세부 주제들을 구성했습니다. 의학적인 관점에서 페스트라는 감영병에 대해 접근해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공포심을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질병에 승리해온 역사를 말하며 현재를 이겨낼 희망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저는 역사를 해석함에 있어서 다양한 역사학적 관점과 의견이 존재하며, 세계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 입장에서는 내용이나 구성에 대한 지적을 충분히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하지만 저는 거짓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준비했습니다. 제가 감염병 관련 책을 준비하면서 찾았던 그 수많은 자료들이 박교수님의 주장대로 다 왜곡이라고 한다면, 페스트와 관련된 내용이 있는 수많은 책들은 다 폐기되어야 옳을 것입니다.아울러 이번 방송과 관련해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할 우려가 있어 이에 대한 몇가지 말씀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특히 SNS에 공개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수준의 의사가 나섰다”는 식의 인신공격성 언급은 지나친 발언이며, 이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우리 의학분야에서도 서로의 의견이 상충될 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격한 토론을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서로에 대한 예의는 지킵니다. 충분히 역사학적 토론이 가능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공격적이고 자극적인 언사를 통한 일방적인 매도는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저는 수많은 사람들을 수술하고 생명을 살리는 외과의사로서 신뢰성이 중요한 사람입니다. 박교수님의 지적 이후 많은 매체에서 저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고, 제 저술 또한 일거에 형편없는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박교수님의 SNS에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는 대목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제게 더 가르침을 주시고자 한다면 언제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내용에 대해서도 후속 조치가 필요하다면 시정할 의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만남을 통해 서로의 오해를 풀고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 일들이 해결되어 나가길 기대해 봅니다.박흥식 교수님께 같은 교수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대 인간으로 서로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이 이야기를 풀어볼 것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제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박교수님의 해명과 진정성 있는 사과를 요청합니다. 박흥식 교수님의 긍정적 답신을 기대하겠습니다.
- [인터뷰]조정훈 "安, 10년간 무얼 했나…'집권 안 해서'는 변명"
- [이데일리 김겨레 기자]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사표를 낸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이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측으로부터 받은 ‘제 3지대 단일화’ 제안에 선을 그었다. 조 의원은 “안철수 대표가 나온 지 10년이 됐는데 국민에게 ‘새 정치는 이것’이라고 이야기할 구체적인 사례가 하나도 없다”고 비판했다.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이 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이데일리와 인터뷰하고있다. (사진=노진환 기자)조 의원은 2일 이데일리와 인터뷰에서 “2012년부터 시작된 ‘제 3지대 정치’의 열매가 왜 없었는지 반면교사로 삼을 것”이라며 “왜 세력이 쪼그라들고 이제는 존재 자체가 없어졌나 묻고 싶다. ‘집권을 안 해서’라는 것은 변명”이라고 말했다. 그는 제 3지대 단일화에 대해서도 “국민의힘으로 가는 중간 정거장에 불쏘시개 역할을 할 생각은 없다”고 일축했다. ‘완두콩이 아닌 새로운 자장면론’을 들고 나온 조 의원은 “새 정치를 위해선 새로운 인물과 함께 정책·담론의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며 “여야 양 대 진영이 던지는 의제에 대해 비판·찬성하는 것이 아니라 담론 자체를 주도해야 하는데 (안 대표는) 그렇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찍어주면 사회를 이렇게 바꾸겠다’는 청사진이 보여야 하는데 안 대표는 ‘찍어줘도 무엇을 한다는 건지 모르겠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조 의원은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대변하는 민주화·산업화 세력을 향해서도 “두 집단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개인의 시대’”라며 “2021년의 문제는 1970년대의 문제와 1987년의 문제와 다르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제는 ‘노력해서 이것도 해냈다. 네가 뭘 아느냐’는 그 경험이 오히려 미래 준비에 장애물”이라며 “민주화 세력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지만 민주주의에서 산 것은 아니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청년은 생존 자체가 목표인데 선배들은 자꾸 공동체를 말한다”며 “사람들은 개인이 불편하지 않은 공동체를 원한다. 개인으로서 이력을 살아낸 사람만이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하버드 케네디스쿨을 졸업하고, 세계은행에서 15년을 근무했다. 실향민 2세이기도 하다. 조 의원은 기본소득 주의자이며 주 4일제와 청약 가점제 폐지를 주장한다. 그는 더불어민주당의 비례정당 더불어시민당에서 비례대표 공천을 받은 뒤 독립해 ‘범 여권’ 의원으로 분류되지만, 민주당의 핵심 정책과 법안에는 동참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그는 공공부문 일자리 확대와 공무원 임금 인상을 강하게 비판하고, 판사 탄핵에도 동참하지 않았다. 반면 ‘3%룰’을 완화한 상법 개정안에 대해선 “퇴색됐다”고 공개 비판했다. ‘여권이냐, 야권이냐’ 질문에 그는 “저는 전데요”라고 답했다.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이 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이데일리와 인터뷰하고있다. (사진=노진환 기자)다음은 조 의원과의 일문일답.-서울시장 공약으로 ‘1인 가구 역차별 철폐’를 주장했다. 어떤 정책을 준비했나. △서울의 1인 가구 비중이 42%라고 한다. 누군가 저에게 틈새 시장을 노린다고 했는데 1인 가구는 틈새가 아니라 주류다. 고대 로마에서는 미혼 여성이 26세를 넘기면 ‘싱글세’를 물렸다. 혼자 사는 남녀를 불편하게 만들어서 결혼을 강제 하는 것은 중세도 아닌 고대의 정책이다. 이래선 안 된다. 먼저 1인 가구 주택 기준을 만들 것이다. 예를 들어 서울시가 주택 허가를 낼 때 10평 이하는 집으로 분류되지 않는다든지 하는 기준이 있어야 할 것 같다. 84㎡를 국민 주택이라고 부르는데, 4인 가구 기준이다. 4인 가구는 총 가구의 50%도 안 되는데 어떻게 국민 주택인가. 여기에 더해 1인 가구의 ‘코로나 블루’를 치료하는 사회적인 프로그램들, 반려동물 관련 정책, 부동산 정책도 선보일 것이다. -1인 가구 청약 제도 개편 주장을 둔촌 주공에서 발표 한 이유는.△둔촌주공은 단군이래 최대 규모 재건축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85㎡ 이상, 즉 1인 가구가 추첨제로 청약할 수 있는 물량이 없다. 1인 가구로선 넘사벽, 불가능의 영역이다. 심지어 생애최초 특별공급조차 결혼을 해야 할 수 있다. 이게 맞나. 결혼을 해서 애를 낳아야 인생이 시작되는 건가. -정부로선 결혼·출산을 장려해야 하니 그런 청약 제도를 만든 것 아니겠나. △저는 청약 한가지 기준, 무주택 기간으로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득 기준이나 부양가족 가점은 모두 없애야 한다. 주택 정책에 출산 정책과 교육 정책까지 넣으려니 다 꼬이는 것이다. 그리고 평생 당첨 1회 또는 2회로 한정하는 것이다. 로또 분양을 막을 순 없기 때문이다. 분양가를 높이면 청약할 이유도 없다. 저희 세대가 한 번씩 돌려 먹었던 로또 분양을 후배 세대로부터 기회를 박탈할 순 없다. 전국민이 한 번씩은 당첨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가점이든 추첨이든 청약 당첨은 한 번으로 끝내야 생애 주기로 보면 공평 한 것 아닌가. 저는 연말정산에서도 부양가족, 교육비 공제 등은 다 폐지해야 한다고 본다. 1인 가구에는 아무 것도 없고 너무 역진적이다. -서울 집값 문제가 심각하다. 해결책이 있나△앞으로 발표할 정책중 하나다. 가장 무겁고 어려운건데 어느 정도 답을 찾았다. 설 전에 발표할 것이다. 주택은 공공성으 가진 시장이다. ‘시장이 아니어야 한다’고 하면 비현실적이다. 부동산 세미나에 몰려드는 국민들이 탐욕 가득한 나쁜 사람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공공성을 확보하면서 하향 안정화 시킬 것인지가 중요하다. -세계은행 출신으로 볼때, 정부·여당이 서울을 홍콩 대신할 금융허브로 만든다고 하는데 가능한가. △기회이긴 하다. 글로벌 금융사들이 중국 비즈니스를 하긴 해야 하는데 본토로 들어가긴 어렵다. 과거에도 서울을 동북아의 금융 허브로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는 많았다. 하지만 규제가 너무 무거워서 안 됐다. 한국에선 아직 국내 자본과 외국 자본으로 나누는 이분법이 있다. 하지만 돈은 색깔이 없다. 경계가 있으면 돈은 도망간다. 국민 정서에 부담감이 있다. 아무리도 외국계 자본은 더 막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 한국 금융은 부동산과 주식 버블 두 개가 받치고 있다. 불안한 활황이다. 연착륙이 시급하다. -출마 선언을 하면서 민주화·산업화 세력을 모두 비판했다. △컨설턴트들에게 물어보면 가장 설득하기 어려운 사람은 자수성가한 회장이라고 한다. ‘내 식대로 해서 성공했다는데 니가 뭘 알아’ 이런 반응이라는 거다. 미래 준비에 장애물이다. 정치영역에서도 산업화 세력이 됐든 민주화 세력이 됐든 당시의 경험이 이것도 할 수 있냐 하면 아니다. 민주화 세력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지만 민주주의에서 살 진 않았다. 2021년 서울의 문제를 1970년대, 1987년의 문제로 풀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시대 정신은 생존이다. ‘서울을 세계 10대 도시로 만들겠다’고 하면 청년들은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할 것이다. 선배들은 자꾸 공동체와 국가 담론을 이야기한다. 우리나라가 OECD에서 몇번째 국가다, 이런 식이다. 후배 세대는 개인이 중요하다. 개인이 불편하지 않은 공동체를 원한다. -최근 공무원 연봉을 깎아 기본소득 재원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그래서 공무원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가진 사람으로 알려졌다. 제가 공무원들을 괴롭혀서 무슨 쾌락을 얻겠나. 적대감은 없지만, 여전히 ‘세금 내는 사람보다 세금 쓰는 사람이 편한 나라는 좋은 나라가 아니다’고 생각한다. 이와중에 세금 쓰는 사람들이 임금을 1% 올렸다. 그것도 사기 진작을 이유로. 공무원은 과평가돼있다. 공무원 연봉을 5% 삭감한다고 치자. 노량진의 공무원 시험 준비생들이 줄어들 것 같나. 아닐 것이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출산율이 올라가는 곳이 세종이다. 말 다 한 것 아니냐. 과평가 된 것은 정상 평가 되어야 한다. 그게 시장 논리다. -정부는 공공부문 일자리를 늘리고 있는데. △불안하다. 이미 선례가 있다. 소련 무너질때 동부권 국가가 공공 일하는 사람 쏟아지니까 국가가 고용했는데 너무 힘들었다. 공무원을 뽑는 순간 평생 일자리를 보장해야 한다. 다음 세대에게 짐이다. 그럴 바에 기본 소득을 주는 것이 낫다. -공무원의 정년 보장을 하지 않고 유연화 한다면.△하나의 방법이긴 하다. 정년 보장이 답인지 고민해야 한다. -민주당의 판사 탄핵에 동참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헌법에 국회가 법관 탄핵 권한을 준 이유를 인정하긴 하지만, 시기와 방법이 지금이 최적인가 의문이 든다. 여야 관계를 급격히 냉각시켜 민생이 뒤로 밀리고 있는데 국회가 해야 할 우선순위가 맞나. -그럼 무엇이 최우선 순위인가. △기본소득이다. 지금 당장은 손실 보상이다. 영업제한 손실 보상을 너무 늦게 지급하면 장례식 부의금이 될 수도 있다. 빨리 지급하면 병원비가 되는 것이다. 빨리 국회 움직여서 응급실 병원비가 되고 (소상공인들이) 무사 퇴원했으면 좋겠다.
- [위대한 생각]①한니발은 왜 알프스를 넘었는가
- ◇오늘의 강연 및 지성인☆ 워-스트래티지(WarStrategy)전쟁은 무기의 질, 병력의 수보다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전략과 작전을 바탕으로 전투를 수행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페르시아 전쟁 등 인류사의 향배를 결정지은 수많은 전쟁과 이에 얽힌 전략적 사유를 통해 개인과 국가의 행위를 이해하는 폭을 넓힌다.☆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중앙대에서 정치국제학과 교수로 재직.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역임. 육군 및 해군 발전자문위원. ‘전쟁과 미술’ 발간. ‘현대군사명저를 찾아’, ‘군사고전 다시읽기’, ‘역사속의 군사전략’ 등 기고 중.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가 서울 중구 순화동 KG하모니홀에서 ‘위대한 생각’ 지상 강연 ‘워-스트래티지’ 6강 ‘한니발의 대전략과 로마의 대응’ 편을 강의하고 있다.(사진=김태형 기자)[총괄기획=최은영 부장, 연출=권승현 PD, 정리=이성웅 기자] “길을 찾을 수 없다면, 길을 만들어라.”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가 로마를 공격하기 위해 알프스 산맥을 넘으면서 남긴 말이다.‘위대한 생각: 워-스트래티지’ 강연을 진행하는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는 지난 5강에서 고대부터 중세까지 유럽을 호령한 로마군단 이야기를 다뤘다. 이런 최강 로마군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준 이가 바로 한니발이다. 한니발은 15년에 걸친 ‘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의 근거지 이탈리아 반도에서 로마를 수세로 몰아넣었다. 과연 한니발 장군은 어떻게 강력한 군사력과 동맹을 가진 로마를 곤경에 몰아넣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로마는 그 수세에서 어떻게 역전극을 펼칠 수 있었을까.◇대 이은 로마 정벌 숙원…한니발, 알프스를 넘다 한니발은 지금의 튀니지 지역에 해당하는 해안 도시국가 카르타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는 카르타고의 장군으로 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 항전했다.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로마에 패하자 히밀카르는 카르타고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 가족과 군대를 거느리고 에스파냐로 넘어갔다.당시 카르타고의 식민지였던 에스파냐에 정착한 하밀카르는 토착민을 정벌하고 거대한 농장과 은광을 경영하는 한편 상비군을 양성해 힘을 키웠다.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쓴맛을 본 바르카 가(家)의 숙원은 여전히 로마 정벌이었기 때문이다. 하밀카르는 아들 한니발에게 ‘로마와 결코 친구가 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을 정도로 그를 철저한 군인으로 키웠다. 기원전(B.C) 221년 한니발은 26세의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에스파냐 총독 자리에 오른다.한니발과 로마의 전쟁은 에스파냐 동부의 작은 도시인 사군툼에서 시작했다. 한니발은 총독에 오르면서 지역통제를 강화했지만 로마의 지지를 받는 사군툼은 비협조적이었다. 이에 분노한 한니발은 사군툼을 8개월 동안 봉쇄한다. 로마는 원로원을 보내 한니발을 설득했지만 응하지 않았고, 결국 로마 민회는 전쟁을 결의하고 카르타고에 선전포고를 한다.29세의 한니발은 로마로 직접 진격하기로 하고 10만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에스파냐를 떠나 이탈리아 본토로 향한다. 본래 카르타고는 해상국가로 지중해 해상무역을 독점했을 만큼 많은 배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1차 포에니 전쟁을 치르면서 해군의 힘이 약해져 원정에 바닷길을 이용할 수 없었다. 게다가 로마는 이미 이탈리아 서쪽 코르시카와 사르디니아를 장악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로마로 가는 가장 험난한 길인 알프스 산맥을 넘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한니발이 알프스를 넘는 경로를 선택한 데는 전략적 이유도 있었다. 최 교수는 “한니발이 알프스 산을 넘기로 한 배경에는 그 과정에서 로마와 사이가 좋지 않은 갈리아인들을 한편으로 끌어들이려는 목적도 있었다”며 “알프스를 넘는 과정에서 10만 군사가 4분의 1로 줄었지만, 갈리아 부족에게 다시 인적·물적 지원을 받아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이탈리아 본토로 진입한 한니발은 트레비아 강에서 4만의 로마 군단과 맞붙는다. 여기서 로마는 보병 3만 6000명과 기병 4000명으로 한니발을 막았다. 한니발 측은 보병은 2만 8000명으로 적었지만 기병은 1만 명으로 두 배 이상 많았다. 결국 이 전투에서 한니발의 기병에 압도된 로마군 2만 명이 사망하고, 5000명이 포로로 잡혔다.윌리엄 터너가 그린 ‘알프스 산을 넘는 한니발과 그의 군대’.◇한니발의 로마 동맹 와해 전략 한니발은 이때부터 로마동맹의 와해를 꿈꾼다. 포로 중 로마시민은 혹독하게 대우했지만, 동맹도시의 시민군은 환대하고 음식을 주면서 회유했다. 로마는 트레비아 전투에서 이긴 한니발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한니발이 어느 쪽을 먼저 공략할지 몰라 4개 군단을 2개씩 나눠 파견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한니발은 길이 잘 닦인 행군로 대신 알페니노 산맥을 넘는 어려운 길을 택했다.한니발은 도중에 이탈리아 중부의 트라시메네 호수에서 매복 작전을 펼친다. 한니발을 추격하기 위해 북에서 남하하는 로마군단을 겨냥한 작전이었다. 겨울이 지나 봄이 된 트라시메네 호수는 물안개가 많이 끼고 숲으로 둘러 쌓여 있어 매복하기 최적의 장소였다. 로마군 2개 군단이 매복 사실을 모른 채 행군 속도를 높이던 순간 한니발 군대가 그 앞을 막아섰다. 행렬 후미에서는 앞쪽의 상황을 모른 채 계속해서 밀고 들어왔다. 로마군의 앞과 뒤는 한니발 군대, 오른쪽은 호수가 있으니 학살에 가까운 전투가 벌어졌다. 연이은 대승을 거둔 뒤 한니발은 본격적으로 동맹 와해 작전에 들어갔다. 한니발의 전략적 목표는 로마 동맹의 해체였다. 그는 포로의 출신에 따라 차별대우를 했는데 동맹도시 출신 포로들이 고향에 돌아가 한니발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전하게 했다. 최 교수는 “한니발은 로마를 완전히 멸망시키기보다 카르타고에 유리한 평화협정을 맺으려고 했다”며 “이 목적을 위해서는 로마 동맹의 해체가 필수였다”고 짚었다.로마의 독재관이었던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위기에 몰린 로마에서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으로 임명해 한니발에 대응키로 결정한다. 파비우스의 대응법은 한니발과 정면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본토 카르타고에서 보급을 받지 못한다는 점을 이용해 소모적인 게릴라전만 펼치고 최대한 전쟁을 오래 끌었다. 현대 군사전에서도 통용되는 일명 ‘파비앙 전략’(Fabian Strategy)은 파비우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소극적 전략은 로마인의 기질과 맞지 않았다. 게다가 한니발의 동맹 와해 작전이 계속되면서 로마 시민들은 파비우스를 경질하고 더 적극적인 집정관을 선출한다. 로마는 B.C 216년 13개 군단을 편성하고 한니발 대응에 군사 8만 7000명을 투입한다. 이때 벌어진 전투가 ‘칸나이의 조우’다. 칸나이는 로마에서 300㎞ 남쪽에 있는 남부 식량 창고였다. 이 전투에서 한니발은 로마군의 양익을 궤멸하고 기병으로 로마군 주변을 감싸는 포위망을 만든다. 이 전투에선 최대 7만 6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사를 통틀어 단일 전투에서 발생한 최대 사망자다. 로마 역사에서도 가장 큰 패배였다. ◇시스템이 일군 로마의 역전극참패를 당한 로마의 대응은 어땠을까. 로마는 한니발의 강화협상을 거부하고 전쟁을 계속할 것을 선언한다. 노예까지 끌어모아 군단을 편성하고 원로원 의원들도 재산을 헌납했다. 이렇게 해서 총 25개 군단이 탄생했고 그중 10개 군단을 한니발을 막는데 투입했다. 최 교수는 “절치부심한 로마군단은 기습과 미인계 등 비전통적 전략을 쓰는데 주저하지 않았다”며 “전쟁 수행 집정관을 1년 단위로 바꾸던 것을 장기복무로 바꿔 전쟁에 투입시켰다”고 말했다. 로마는 본토 외부에도 군사를 파견해 한니발의 세력 확장을 막았다. 이 과정에서 로마는 한니발에게 빼앗겼던 타란토, 카푸아, 시라쿠사 등을 탈환한다. 한편 에스파냐로 원정을 떠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한니발의 본거지인 카르타헤나와 바이쿨라를 점령해 한니발의 기반을 뒤흔든다.한니발로부터 로마를 지켜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결정적인 사건은 B.C 207년에 일어났다. 에스파냐에 있던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3만의 병력을 모아 다시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로마군에 패해 3만 병력이 궤멸했고, 한니발은 고립무원 상태에 빠진다. 마지막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에 안겨준 치욕을 고스란히 돌려받는다. 자마 전투를 끝으로 카르타고는 항복을 선언하며 전쟁이 끝났다. 최 교수는 한니발이 끝내 로마를 이기지 못한 이유를 시스템의 차이에서 찾는다. 한니발은 카르타고에서 제대로 보급도 받지 못했고, 카르타고 군대에는 한니발을 제외하고는 믿을만한 지휘관이 없었다. 반면 로마는 지휘관 양성 시스템 덕분에 유능한 지휘관이 지속적으로 배출됐다. 덕분에 초기 전투에서 한니발에게 연전연패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군대와 더 유능한 지휘관을 기용할 수 있었다.최 교수는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었을 때 고작 2만 6000명의 병력으로 로마군을 압도했고 무려 12년 동안 로마를 괴롭혔다”며 “한니발의 전략이 길이 칭송받는 것은 세계 최강의 군대를 압도적으로 이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위대한 생각’은…이데일리와 이데일리의 지식인 서포터스, 오피니언 리더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경제 인문학 토크 콘서트입니다. 우리 시대 ‘지성인’(至成人·men of success)들이 남과 다른 위대한 생각을 발굴하고 제안해 성공에 이르도록 돕는 프로그램으로, 이데일리 창립 20주년을 맞아 기획했습니다. ‘위대한 생각’은 매주 화요일 오후 6시 이데일리TV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 [위대한 생각]①해적부터 월스트리트까지…'주식의 탄생'
- 임규태 박사가 서울 중구 순화동 KG하모니홀에서 ‘위대한 생각’ 인더스토리Ⅱ’ 주식 편을 강의하고 있다.(사진=김태형 기자)◇오늘의 강연 및 지성인☆ ‘인더스토리’(INDUSTORY)현대 산업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의 과거와 현재를 역사·정치·문화·기술·경제 등 복합적인 시선으로 이해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보는 능력을 기른다. 현대 문명의 기반이 된 ‘철’(鐵)과 ‘사’(沙·모래)부터 코로나19 사태로 주목받고 있는 ‘약’(藥), ‘의’(醫) 등 이 세상 모든 산업의 역사를 다룬다.☆ 임규태 공학자·교육자·기업가미국 조지아공대에서 15년간 교수로 재직. 조지아공대 부설 전자설계연구소 부소장, 조지아공대 기업혁신센터 국제협력 수석고문. 국제 통신표준화 의장. 빅데이터·소프트웨어·게임·블록체인·기후변화 등 다양한 분야의 스타트업에 참여.대항해시대 당시 지도[총괄기획=최은영 부장, 연출=권승현 PD, 정리=김무연 기자]올 하반기 국내 증권 시장은 여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올랐다. 부동산 가격 규제 등으로 오갈 곳 없는 여유 자금들이 증시로 흘러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주식을 처음 시작하는 ‘주린이’(주식+어린이), 국내 소액 개인 투자자를 일컫는 ‘동학개미’라는 용어가 등장하기도 했다.주식이란 주식회사에 자본을 대고 이에 따라 교부받는 증서다. 개인이나 단체는 특정 회사에 일정 금액을 투자해주고 그 대가로 주식을 받는다. 투자자는 정해진 기간마다 보유한 주식에 걸맞게 이득을 배당 받거나 주가가 오르면 이를 팔아 차익을 챙긴다. 기업이 발행한 주식을 거래하는 주식시장은 기업 경영 뿐 아니라 국가 경제를 좌우할 만큼 실물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그렇다면 주식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지위를 갖게 됐을까. 임규태 박사는 그 출발점을 중세 유럽의 흑사병에서 찾았다.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사망에 이르게 한 흑사병의 특효약이 육두구와 정향이라고 알려지자 유럽 각국은 이를 찾기 위해 대양으로 진출했다. 대항해시대의 시작이다.대항해시대에 무역을 통해 성장한 상인들과 해적 집단이 국가와 공생하는 과정에서 근대적인 회사를 설립하는데, 이것이 동인도회사다. 임 박사는 “주식은 민간업자들이 모여 국가가 지원하는 거대 독점 기업을 설립하면서 새로운 방식의 소유 체계가 필요해 생겨났다”며 “현대경제에서 주식 제도를 둘러싸고 ‘소유와 경영의 분리’ 논란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주식회사의 기원 때문”이라고 설명했다.사략선들이 활약한 칼레 해전◇ 주식회사의 기원 ‘동인도 회사’1492년 이슬람 제국을 몰아내고 이베리아 반도를 수복한 이사벨 여왕은 ‘알람브라 법’을 공표한다. 해당 법의 골자는 이슬람 세력과 공생하던 유대인을 추방하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유대인이 보유한 금융 자산 뿐아니라 무역업 기반까지 빼앗겠다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터전을 잃은 유대 자본가와 조선 기술자들은 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가 위치한 플랑드르 지방으로 이주한다. 유대인의 자본과 해양 기술의 집합지가 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은 금융과 해양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항해 황금시대에 네덜란드 선박이 전 세계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0%를 넘어설 정도였다.신구교간의 갈등이 심화하던 시기에 태생적으로 신교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던 네덜란드는 부에 비해 군사력이나 정치적 위상이 약했다. 가톨릭의 수호자를 천명한 신성로마제국이 해양 강국으로 키우던 스페인은 지속적으로 네덜란드를 압박했다. 결국 네덜란드는 성공회를 만들어 가톨릭과 단절에 나선 영국과 손잡고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포루투갈 연합과 해전을 치른다.이 전쟁의 향배를 결정짓는 칼레 해전에서 영국의 승리에 큰 활약을 한 인물이 프랜시스 드레이크다. 원래 그는 해적이었다. 당시 영국 정부는 해적들에게 전쟁에 참여하는 대가로 평상시 노략질을 할 수 있는 특허를 내주는 국가 공인 해적 ‘사략선’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 제도 덕분에 드레이크뿐 아니라 수많은 해적들이 영국-스페인 해전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국 국왕 엘리자베스 1세는 그들의 활약을 인정해 해적과 상인들을 모은 회사를 세우고 이 회사에 무역 독점권을 부여한다. 이렇게 설립한 회사가 영국 동인도회사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영국 동인도회사는 영국 정부의 무역독점권 덕분에 동남아시아 무역에서 빠르게 성장한다. 이에 위협을 느낀 네덜란드 역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세운다. 하지만 그 설립 방식은 전혀 달랐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왕실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반면 네덜란드는 무역선의 침몰, 해적의 약탈 등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해적과 상인들이 저마다 자본을 출자하는 방식으로 설립했다. 설립 자금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정부의 투자를 받았을 뿐 아니라 일반 네덜란드 국민들도 회사 설립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했다. 1602년 총 1143명이 650만 길더(약 1310억원)를 모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공식 출범했다. 당시 동인도 회사에 자본을 댄 해적, 상인, 일반 국민들은 투자를 했다는 증서인 ‘주식’을 받았다. 1609년에는 동인도 회사 주식을 사고 팔 수 있는 최초의 주식 거래소가 암스테르담에 설립됐다. 17세기 중반 암스테르담 주식 거래소에는 주식을 전문적으로 거래하는 브로커와 딜러, 주식을 기반으로 한 현대적인 파생상품이 이미 존재했다. 올리버 크롬웰◇ 영국, 산업사회의 리더로 부상스페인과의 해전에서 승리한 영국과 네덜란드는 때론 경쟁하고 때론 협력하면서 해상 무역을 주도했다. 그러다 네덜란드 식민정부가 말루쿠 해협에 위치한 암보이나 섬에서 영국 상인 10여 명을 납치해 살해하는 ‘암보이나 학살 사건’을 일으키면서 양국의 관계는 틀어진다.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은 ‘항해조례’를 선포해 자국 기업을 키우고 네덜란드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항해조례란 영국의 무역은 영국의 배, 즉 영국 동인도 회사 소속의 배로만 이뤄져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에 반발한 네덜란드는 영국과 전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크롬웰은 영국 동인도회사를 주식회사로 전환, 손쉽게 자본을 조달할 수 있도록 했다. 조너선 커피하우스영국 동인도 회사의 주식 거래가 이뤄진 곳은 런던 왕실 거래소가 아니라 그 옆에 위치한 ‘조너선 커피하우스’였다. 엘리자베스 1세가 주식 중개인들의 무례한 행위를 참지 못하고 주식 관련 거래를 금지한 탓이다. 조노선 커피하우스에서 소박하게 출발한 주식 거래는 향후 런던증권거래소로 이어지게 된다.초창기 영국 주식 시장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 동인도회사 주식을 제외하면 거래할 만한 회사 주식이 적었던 탓이다. 그러나 증기기관의 발명과 이에 따른 산업혁명, 철도 물류의 발달로 상황은 급변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기업들이 속속 등장하며 관련 주식도 넘쳐나기 시작했다.영국 정부는 기업법을 시행해 지금까지 허가제였던 기업 설립을 7인 이상이 모이면 누구나 회사를 차릴 수 있는 등록제로 바꾸면서 산업 육성에 적극 나섰다. 임 박사는 “산업혁명으로 새로운 산업이 속속 등장하던 시점에 영국 정부는 7인이면 누구나 자유롭게 회사를 차릴 수 있도록 규제를 손봤다”면서 “산업 혁신과 맞물린 제도의 변화가 결국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탄생시켰다”라고 강조했다.버튼우드 옆에서 주식 거래를 하는 사람들◇ 뉴욕은 어떻게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됐나1609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의 헨리 허드슨은 신대륙에서 한 강을 발견한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훗날 ‘허드슨 강’이라고 불리는 이 강의 하구를 ‘뉴 암스테르담’으로 명명하고 식민지 개척을 시작한다. 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결과로 네덜란드는 육두구 산지인 룬섬 지배권을 얻는 대신 이 지역을 영국에 넘긴다. 이 지역을 넘겨받은 영국은 당시 해군 사령관 요크 공작 제임스 2세의 작위를 따 ‘뉴 요크’라 이름을 바꿨다. 이곳이 바로 오늘날 세계 금융의 중심지 ‘뉴욕’이다.세계를 대표하는 금융 일번지 ‘월 스트리트’도 뉴욕 맨해튼 섬에 위치해 있다. 월 스트리트라는 이름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다. 네덜란드에서 최초로 이주한 월룬(Walloon) 가문에서 따왔단 설도 있지만 1640년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대형 나무 목책(Wall)을 세운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초창기 월 스트리트는 주식 거래가 아닌 최초의 노예 거래소였다. 1711년 월 스트리트에 50명 정도의 노예를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을 세우고 이곳에서 노예를 거래했다. 이후 월 스트리트에 주식 거래자들이 월 스트리트의 미국산 플라타너스 나무(버튼우드·Buttonwood) 옆에서 주식을 거래하기 시작했다. 1792년 24명의 주식 거래자들이 모여 수수료를 0.25%로 제한하는 등 공정 거래 합의서인 ‘버튼우드 협정’를 체결했다. 버튼우드 협정은 미국의 역사뿐 아니라 금융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전신전화를 이용하는 뉴욕증권거래소.버튼우드 협정이 체결된 이듬해부터 주식 거래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톤틴’이라는 이름의 커피하우스에서 진행됐다. 1817년 뉴욕증권거래소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미국 주식 시장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뉴욕증권거래소는 1878년 당시로선 최신 기술이었던 전신전화 기술을 도입해 브로커와 딜러 간 거래를 돕는 혁신을 단행하면서 세계적인 증권 거래소로 급부상했다.증권 거래소의 혁신과 더불어 뉴욕이 세계 금융의 중심이 되는데 공을 세운 인물이 바로 찰스 다우다. 그는 ‘월 스트리트 저널’을 만들어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의 소식을 전달했다. 그뿐만 아니라 통계학자 에드워드 데이비드 존스와 함께 다우 지수를 만들어 공정한 기업 가치와 주가 정보를 제공하는 선진 금융 제도를 도입했다.임 박사는 “1971년 등장한 나스닥은 컴퓨터를 이용한 자동 거래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다시 한 번 주식 거래의 혁신을 이뤘다”라면서 “뉴욕이 금융 일번지로서 현재의 명성을 얻게 된 계기는 혁신 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여 이를 시장에 접목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위대한 생각’은…이데일리와 이데일리의 지식인 서포터스, 오피니언 리더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경제 인문학 토크 콘서트입니다. 우리 시대 ‘지성인’(至成人·men of success)들이 남과 다른 위대한 생각을 발굴하고 제안해 성공에 이르도록 돕는 프로그램으로, 이데일리 창립 20주년을 맞아 기획했습니다. ‘위대한 생각’은 매주 화요일 오후 6시 이데일리TV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 [위대한 생각]①외세의 침략이 키운 '최강 로마군단'
- ◇오늘의 강연 및 지성인☆ 워-스트래티지(WarStrategy)전쟁은 무기의 질, 병력의 수보다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전략과 작전을 바탕으로 전투를 수행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페르시아 전쟁 등 인류사의 향배를 결정지은 수많은 전쟁과 이에 얽힌 전략적 사유를 통해 개인과 국가의 행위를 이해하는 폭을 넓힌다.☆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중앙대에서 정치국제학과 교수로 재직.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역임. 육군 및 해군 발전자문위원. ‘전쟁과 미술’ 발간. ‘현대군사명저를 찾아’, ‘군사고전 다시읽기’, ‘역사속의 군사전략’ 등 기고 중.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가 서울 중구 순화동 KG하모니홀에서 ‘위대한 생각’ 지상 강연 ‘워-스트래티지’ 5강 ‘절대강자 로마군단의 비밀’ 편을 강의하고 있다. (사진=김태형 기자)[총괄기획=최은영 부장, 연출=권승현 PD, 정리=이성웅 기자] 기원전(BC) 323년 유럽 최초로 대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이 급사했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그가 세웠던 헬라 제국은 네 조각으로 쪼개진다. 알렉산더 대왕이 더 오래 살았다면 이탈리아 지역까지 정복했을까는 역사학계의 오랜 논쟁거리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인들의 숙원인 페르시아 원정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그리스 서쪽에 위치한 이탈리아 반도까지는 세력을 미치지 못했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이탈리아 지역을 통일한 로마는 동쪽으로는 시리아와 이라크, 북쪽으로 라인강 지역, 남쪽으로 북아프리카까지 500만㎢에 달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렇다면 로마가 고대에서 중세까지 대제국을 영위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는 ‘위대한 생각’ ‘워-스트래티지’ 5강에서 “로마가 세계 제국으로 발전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로마군단이었다”고 운을 뗐다.◇위기를 기회로…군단 체제로 변화로마는 이탈리아 서쪽 테베레강 연안에 터를 잡은 작은 도시국가에서 출발했다. 강을 낀 지역이었지만, 국력이 강한 국가는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자신의 저서 ‘영웅전’에서 로마인에 대해 “지성으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으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며,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선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로마인도 알고 있었다”고 서술했을 정도다.켈트족에 의해 침략당한 로마를 묘사한 근대화가 폴 자민의 작품실제로 로마는 BC 390년 켈트족이 침략했을 때 굴욕적인 패배를 경험했다. 왕국에서 공화국으로 전환한지 불과 100여년만의 위기였다. 알리아 전투에서 참패한 로마는 카피톨리아 성전에서 7개월간 항전했지만, 그 기간 동안 켈트족은 로마인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살육했다. 켈트족은 황금 300㎏을 받고 나서야 로마에서 물러났다. 최 교수는 “켈트족의 침략이라는 국가적 위기는 로마 부흥의 계기가 되었다”며 “켈트족 침략 이전 분열됐던 로마 시민들은 전쟁 이후 대통합하고 새로운 국가발전 전략을 모색했다“고 설명했다. 로마의 대전략은 동맹을 강화하고 뛰어난 전투력의 군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로마는 주변 동맹국들과 실효성 있는 공동안보체제를 만든 직후 군대 체제 개편을 단행했다. 로마는 켈트족의 침략을 받으면서 기동력의 필요성을 통감했다. 기존 그리스식 ‘팔랑크스’(Phalanx) 체제를 버리고 1명의 집정관이 2개의 군단을 거느리고 기병과 동맹군단을 배치하는 ‘레기온’(Legion) 체제를 채택했다. 2개 군단의 양 옆엔 비슷한 규모의 동맹군 ‘알라’(Ala)를, 각 동맹군의 옆엔 300명 규모의 기병대 ‘카발리’(Cavalry)를 배치했다. 로마군단의 핵심 전술 단위는 중대였다. 1개 군단이 약 5000명 규모로, 각 군단은 120명으로 구성된 보병중대 ‘마니플’(Maniple)로 채워진다. 단위 중대가 자율적·독립적으로 전술을 펼칠 수 있도록 편제를 짰다. 이 같은 로마군단의 편제는 현대의 군에서도 여전히 일부 사용하고 있다.로마군단 편제편제 변화뿐만 아니라 개별 전사의 전투력 양성도 군대 개편의 핵심 과제였다. 로마군은 30㎏ 완전군장 상태에서 18마일(약 29㎞)를 주파하는 훈련으로 기동력을 키웠다. 또 각종 토목기술을 배워 행군 중 주거지를 마련하도록 하는 등 어떤 상황에서도 싸울 수 있는 부대로 양성했다. 상명하복의 엄격한 규율도 중요시했다. 사소한 것을 지키지 않으면 중대의 백인대장이 채찍으로 처벌했다. 가장 큰 형벌은 ‘데시메이션’(Decimation)이었다. 데시메이션은 겁쟁이에게 내린 벌로, 전투에서 퇴각할 경우 부대원 중 무작위로 10분의 1을 뽑아 나머지 9할의 병사들이 때려죽이도록 하는 형벌이다. 최 교수는 “당시 로마군단은 어느 나라보다 전투력이 뛰어난 절대강자였다”며 “시민 전사였던 이들은 자신의 공동체를 스스로 지키는 것에 대한 명예와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전했다. 로마는 국가 차원에서 우수한 무장과 장비를 보급했다. 원래 로마군은 시민군이기 때문에 무장을 자체 수급하는 것이 당연시 됐지만, 무장을 통일하기 위해 국가에서 장비를 나눠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전 방위적 노력으로 얻어진 탁월한 전투력을 기반으로 로마는 켈트족 침략 이후 120년 만에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게 된다. ◇세계 민주주의 기틀 된 로마 공화정로마의 또 다른 강점은 정치체제였다. 세계 민주주의에 막대한 영향을 준 로마의 공화정은 켈트족 침략 이후 국민을 통합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평민 출신 호민관을 집정관에 배정한다는 ‘리키니우스법’이 통과된 것을 기념하는 ‘화합의 사원’(Temple of Concordia) 복원도.로마는 BC 509년 공화정 체제를 도입한 이후 귀족과 평민간의 치열한 계급투쟁이 이어졌다. 로마 공화정은 이 뿌리 깊은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원전 495년 평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호민관’을 설치했다. 평민이 실질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이다.켈트족 침략 이후에는 평민의 정치 참여 기회가 더욱 확대됐다. 평민도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게 됐고, 평민 출신 호민관이 집정관에 오를 수 있었다. 또 평민회의의 결정이 입법으로 이어져 사실상 귀족과 평민 간 정치적 평등이 실현됐다. 평민의 정치 참여는 군대에도 적용됐다. 로마 군단을 지휘하는 집정관의 임기는 1년이었다. 이들은 ‘켄투리아 민회’에서 투표로 선출되었는데, 집정관이 지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전장에서 목숨이 오갔기 때문에 군사적 역량이 가장 중요시됐다. 집정관을 뽑는 주체는 집정관의 지휘를 받는 백인대장들이었다. 또한 백인대장을 뽑는 것은 백인대장의 지휘를 받는 병사들이었다. 사실상 말단 병사들이 최고 지휘관인 집정관을 뽑는 셈이다. 이러한 민주적 제도 덕분에 로마에서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Quintus Fabius Maximus), 가이우스 줄리어스 시저(Gaius Julius Caesar) 등 유능한 지휘관을 계속 배출할 수 있었다.최 교수는 “로마는 전쟁을 계속했기 때문에 오히려 국민을 통합할 수 있었다”며 “전쟁을 수행하는 평민의 발언권이 확대됐고, 평민의 요구를 들을 수밖에 없는 개방적 정치체제가 가능해졌다”고 설명했다.가이우스 줄리어스 시저.◇원로원을 통한 통합의 대전략로마가 이탈리아 통일을 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적은 줄이고 친구는 늘리는 로마의 ‘로마화 전략’이 있었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우호적인 국가에는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고, 관계가 좋지 않은 국가에도 투표권을 제외한 시민권을 줬다. 동맹국에는 전쟁 발생 시 로마 군대의 자동 파견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또한 전략적 거점지는 식민지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차등을 두었으며 동맹국들 사이에는 식민지나 병합지를 두어 동맹국끼리의 단합이나 독립적 활동을 막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로마 동맹의 힘은 실로 강대했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과의 전쟁에서 연패했지만,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동맹의 힘으로 20개 군단, 18만 명의 병력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니발의 군사는 겨우 2만5000명 정도였다. 이 같은 동맹 체제를 만들 수 있는 지혜는 300명의 원로들로부터 나왔다. 로마의 원로원은 전직관리나 집정관, 법무관들로 구성됐다. 이들이 국정에 조언하고 실질적인 인사권을 행사했다. 원로원이라는 이름 때문에 구성원의 나이가 상당히 많고 보수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대한민국 21대 국회의원의 평균나이인 54.9세보다 젊고 개방적으로 운영됐다. 최 교수는 “로마는 원로원 일당 지배체제였지만 폐쇄적이지 않았고 새로이 통합된 지역의 원로를 받아들일 정도로 개방적이었다”며 “이들은 국가적 중대사를 결정할 시기에 지혜를 제공했고, 이는 로마의 대전략을 세우고 실현하는 토대가 됐다”고 강조했다. 이어 “원로원에서 대전략 차원의 지침을 내리면 유능한 지휘관이 군대를 운영해 승리를 쟁취했으며, 이 지휘를 시민 전사들이 충실하게 수행했다”며 “명예와 헌신을 중시하는 시민적 기풍과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는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태도가 상호작용하면서 로마를 대제국으로 이끌었다”고 덧붙였다.◇‘위대한 생각’은…이데일리와 이데일리의 지식인 서포터스, 오피니언 리더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경제 인문학 토크 콘서트입니다. 우리 시대 ‘지성인’(至成人·men of success)들이 남과 다른 위대한 생각을 발굴하고 제안해 성공에 이르도록 돕는 프로그램으로, 이데일리 창립 20주년을 맞아 기획했습니다. ‘위대한 생각’은 매주 화요일 오후 6시 이데일리TV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 [김기찬 칼럼]인류는 공감할 때 진화하고 갈등할 때 퇴화한다
- [김기찬 가톨릭대 경영학부 교수]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2개의 공짜에너지가 있다. 자연계의 중력이 있다면 인간계에는 공감이 있다. 자연계에 모든 물체는 서로 끌어당긴다는 중력이 있다면, 인간계에도 사람간에 서로 당기는 힘이 공감이다. 중력은 1687년 뉴턴에 의해 발견되었고, 그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공짜의 힘, 중력을 과학계에 활용하는 출발이 되었다. 그러면 공감의 최초 발견자는 누구인가? 중세이후 자유시민사회의 사회혼란속에서 신질서에 대한 고민한 도덕철학자인 아담스미스이다. 공감은 아담스미스의 1759년 아담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서 발견된다. 그는 시민사회의 질서를 만드는 일반원리로서 이성이 아니라 선악을 구분하는 능력인 공감이라는 도덕적 감정에 주목한 것이다. 이제 공감의 리더쉽의 가장 큰 에너지 원천이 되고 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는 제16대 대통령 링컨은 공감 리더쉽의 결과로 요약될수 있다. 공감을 통해서 경쟁자를 국무장관과 국방장관으로 만들고 국민의 마음을 얻을수 있었기 때문에 노예해방과 남북전쟁을 통해 미국을 통합할수 있게 만든 힘이 된 것이다. 공감이라는 용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득을 위한 수사학(rhetoric)의 파토스에서 진화한 것이다. 공감(empathy)의 어원은 ‘en(안)’ + ‘pathos(감정)’의 복합어로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자신에게 이입시키는 것이다. 미술감상 이론에 사용되던 용어인 감정이입을 말한다. 공감이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대상에 이입시키거나 대상의 감정을 자신에게 이입시켜서 서로 공감하여 하나가 되는 과정이다.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게 된다. 그래서 공감은 서로 통하게 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이 우리에게 다가오게 하는 것이다. ‘불통즉통, 통즉불통’, 즉 통하지 않으면 통증이 있고, 통하면 통증이 없다. 공감이 없는 조직은 아프다. 공감은 다른 사람에게 힘을 주고 영감을 준다. 영감을 뜻하는 ‘Inspire’(숨을 불어넣다)는 In(안) + spir(숨쉬다:영혼,정신의 상징)의 복합어이다. 숨이 멎었던 사람을 ‘휴’ 할수 있도록 격려하고 고무하고, 숨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Humanity’(인간)의 어원은 ‘Humus’(흙)에서 유래되었다. 휴무스(흙)에 영혼을 넣어주는 것이 ‘Inspire’(영감을 주다)이다. 우리는 공감할 때, ‘휴’하고 안심할수 있다. 우리 몸에서 공감을 의학적으로 증명한 사람은 이탈리아 신경심리학자 파르마대학의 리촐라티(Rizzolatti, G.)교수 등이다. 그들은 1990년대에 공감을 느끼게 하는 신경의 와이파이 세포인 거울뉴런을 발견했다.거울뉴런은 공감하게 하고 협력하게 하는 세포이다. 공감의 세포발견은 인간이 어떻게 지구상에서 생존할수 있었는가를 설명하는 결정적 실마리가 되었다. 호모사피엔스가 지구상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힘은 공감 능력 때문이다.10만년 전 지구상에는 최소 6종의 인류가 있었다고 한다. 이중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다. 호모사피엔스 생존의 비밀은 그들 중 가장 뛰어난 공감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거울뉴런이라는 공감의 세포때문에 우리는 협력하고 인류생존의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공감능력을 보여주는 거울뉴런의 발견은 DNA 발견이후 최고의 대발견이라는 평가를 듣는 이유이다. 거울뉴런의 발견에 주목한 세계적인 문명비평가인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그의 ‘공감의 시대’(The Empathic Civilization·2009)저서를 통해 공감에서 인류의 생존과 진화의 비밀을 찾고자 했다. 위기의 시대일수록 적자생존이 아닌 공감하는 인간들의 협력에 의해 역사는 발전했다. 인류는 공감이라는 능력 덕분에 세계를 호령하는 종이 됐다. 제러미 리프킨은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는 종이 된 것은 자연계의 구성원들 중에서 인간이 가장 뛰어난 공감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공감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러한 인간을 공감하는 인간,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라고 불렀다. 거울뉴런 때문에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의 행동을 모방하고 공감할수 있다. 행동할 수 있게 되고 협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이가 아프면 엄마도 아프다. 거울뉴런에서 만들어지는 본능적인 ‘공감적 고통’(inborn empathic distress)을 느끼는 것이다. 아이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아이와 공감하기 때문이다.인간계의 가장 큰 공짜 에너지, 공감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노동 혹은 운동, 직업 혹은 소명 어느쪽 일을 하고 있는가. 노동과 직업은 돈을 위해 하고, 운동과 소명은 꿈을 위해 한다. 노동을 위해서는 근육의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운동의 에너지는 거울뉴런 세포가 만들어내는 공감의 에너지로 해야한다. 노동은 돈을 위해 마지못해 한다. 그래서 따지고 말이 많다. 운동을 할때는 기쁘고 즐겁다. 공감과 영감의 에너지는 세로토닌이라는 행복호르몬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공감하고 영감을 주는 지도자가 돼야 한다. 사람이 희망이다. 호모 엠파티쿠스!!
- '모모랜드 남동생 그룹' T1419, 비주얼부터 안무까지 '척척'
- [이데일리 스타in 윤기백 기자] MLD엔터테인먼트의 신인 보이그룹 T1419가 프리 데뷔 선공개곡 ‘드라큘라’(Dracula) 뮤직비디오를 공개했다.(사진=MLD엔터테인먼트)T1419는 27일 공식 SNS 채널을 통해 프리 데뷔 선공개곡 ‘드라큘라’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하고 본격적인 출격 준비에 나섰다. 공개된 ‘드라큘라’ 뮤직비디오에는 힙합을 기반으로 한 중독성 넘치는 팝 댄스 트랙에 T1419의 파워풀한 보컬, 강렬한 사운드와 어우러진 안무 퍼포먼스가 절묘하게 담겨 눈길을 끈다. 특히 T1419는 유럽 중세 시대의 성을 배경으로 파격적인 코스튬 콘셉트와 독보적인 아이덴티티를 선보여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에 T1419의 세계관에 대한 글로벌 팬들이 관심이 벌써부터 쏟아지며 데뷔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앞서 T1419는 ‘드라큘라’의 개인 포스터 이미지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T1419 멤버들은 ‘조커’부터 ‘헬보이’, ’직쏘’, ‘오페라의 유령’, ‘삐에로’ 등 유명 영화 속 주인공을 오마주해 전무후무한 콘셉트를 선보여 관심을 받았다. T1419는 MLD와 글로벌 IT 기업 NHN, 소니뮤직이 손잡고 선보이는 초대형 신인 보이그룹으로 국내뿐 아니라 미국, 일본 동시 데뷔를 목표로 기획한 특급 프로젝트다. 체계적인 시스템 속에서 집중적인 트레이닝을 받았으며, 비주얼은 물론 보컬과 랩, 퍼포먼스, 프로듀싱, 언어 회화 능력 등 다양한 재능을 갖춘 최정예 멤버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져 기대를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