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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 소감 잘못됐나…中 역사왜곡 대책 전혀 없어"
  • [2020국감]"BTS 소감 잘못됐나…中 역사왜곡 대책 전혀 없어"
  • [이데일리 신중섭 기자] 국회 교육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중국의 역사 왜곡과 관련해 방탄소년단(BTS)의 수상소감 논란이 등장했다.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이 13일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열린 국가평생교육진흥원ㆍ사립학교교직원연금공단 등 국정감사에서 답변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조경태 국민의힘 의원은 13일 오후 국회 교육위 국정감사에서 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에게 “어제 뜨거운 감자였는데 BTS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이해 한국과 미국이 겪었던 고난의 역사에 대한 수상소감을 말했다”며 “잘못된 표현이라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했다. 이에 김 이사장은 “(BTS의 말이)맞다”고 답했다.그러면서 조 의원은 “중국의 지도를 보면 고조선 시대와 고구려 시대의 한반도 3분의 1 이상이 중국땅으로 돼 있다”며 “시진핑 주석은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 말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의 한국전쟁 역사 왜곡에 대한 지적도 나왔다. 조 의원은 “우리는 6.25 전쟁 당시 압록강까지 가서 한반도를 통일하려 한 것이고 중국이 불필요하게 개입하는 바람에 휴전선이 생긴 것”이라며 “그런데 중국은 이를 항미원조라고 해서 3500억원을 들여 6.25 관련 드라마와 영화를 제작해 내년까지 중국 전역에 방영하는데 정부는 전혀 대책이 없다”고 지적했다.아울러 조 의원은 “중국에 의해 우리 기업들과 국민들이 겪는 굴욕에 대해 우리 정부는 왜 제대로 말을 하지 못 하느냐”며 “교육부는 외교부와 협력해 어떤 식으로든 중국에 강력하게 항의해야 한다”고 밝혔다.조 의원이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해 현실적인 어려움 토로해달라는 질의에 김 이사장은 “지금까지 재단에서 중국 역사문제는 고대사와 중세사에 너무 집중돼 있다”며 “6.25 등 근현대 부분은 중국과의 외교채널, 외교부에서 하고 있지만 (역사재단은)2004년도 고구려 역사문제가 일어났을 때 맺은 것들이 얼마나 잘 지켜지고 있는지 수준에서 의견을 내고 있다”고 답했다.
2020.10.13 I 신중섭 기자
<16> 공장식 공방서 생산→홍보→영업…'CEO 화가' 루벤스
  • [이주헌의 혁신@미술]<16> 공장식 공방서 생산→홍보→영업…'CEO 화가' 루벤스
  • 평생 3000점이 넘는 대작을 제작한 ‘다작 화가’ 루벤스의 비밀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뽑힌 제자·조수들을 세심하게 조직화한 공방에서 나왔다. 공장식 분업체계를 세운 뒤 효율적으로 이를 가동해 거대한 작품을 대량생산했는데, 이렇게 생산한 작품은 ‘루벤스가 어느 정도 손을 댔느냐’에 따라 가격도 달랐다. 그 구분에 따라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예수회로부터 주문받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1619)은 모델로(modello)를 기초로 조수들의 역할을 나눠 완성했고, 딸을 그린 ‘클라라 세레나 루벤스’(1615∼1616)는 처음부터 끝까지 루벤스 자신이 제작했다. 또 프랑스의 왕비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를 주제로 한 ‘마르세유 상륙’(1622·연작 ‘메디치 사이클’ 24점 중 하나)은 다른 모든 건 공방에서 제작하되 인물만큼은 반드시 루벤스가 그려야 한다는 조건이 달렸던 작품이다. 빈미술사박물관·리히텐슈타인미술관·루브르박물관 소장.미술은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밥으로만 채울 수 없는 풍요와 평화를 안겨줬으니까요. 그림의 힘이고 조각의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미술의 역할이 이뿐이라 한다면 미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문명을 이끌고, 의식을 뒤집고, 결정적으로 돈의 흐름을 주도했던, 그것을 못 본 겁니다. 미술의 사조와 양식이 탄생할 때마다 세계경제에는 ‘변화의 그림’이 걸렸습니다. 바로 ‘혁신’을 주도했던 겁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미술로 이룬 혁신’의 현장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주헌 미술평론가] 미술에 대해 잘못 알려진 고정관념 중 하나가 ‘위대한 예술가는 과작(寡作)을 한다’는 것이다. 걸작을 하나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이다 보니 과작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과작을 하는 거장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피카소, 마티스, 반 고흐, 모네, 르누아르, 렘브란트 등 우리가 아는 많은 대가들이 다작을 했다. 미술 창작에 있어서만큼은 ‘다다익선’이 진리다. 다작을 하면 졸작이 많이 나오지만, 걸작 또한 많이 탄생할 수밖에 없다. 17세기 바로크미술의 대가 페터르 파울 루벤스(1577∼1640)도 다작을 한 화가다. 유럽의 주요 미술관을 돌아보면 그의 작품을 설치하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 어렵다. 흥미로운 사실은, 루벤스는 다작을 한 화가일 뿐 아니라 ‘아틀리에 경영’에도 매우 뛰어난 화가였다는 것이다. 아니, ‘아틀리에 경영’이라니? 아틀리에는 화가가 홀로 그림을 그리는 곳이 아닌가. 거기에 무슨 경영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하지만 실제로 루벤스는 ‘아틀리에를 매우 잘 경영’한 화가였다. 루벤스는 개신교도였던 아버지가 박해를 피해 고향 안트베르펜(벨기에 플랑드르 지방)을 떠나 쾰른 인근의 지겐(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 머물 때 그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다시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와 라틴어학교를 다닌 그는 한 백작부인의 시동이 돼 귀족문화를 익혔다. 이런 고급 교육의 바탕 위에서 그림을 공부한 뒤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이탈리아 유학 시절 루벤스는 고대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대가들의 빛나는 성취를 빠르고도 광범위하게 흡수했다. 이후 이를 풍성하고 에너지 넘치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발전시켜 ‘화가들의 군주’이자 ‘군주들의 화가’로 명성을 드높이게 된다. △주문 받은 그림, 팀장에게 맡겨 책임지고 완성케 해루벤스가 이처럼 서양미술사의 최고 거장 중 한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된 바탕에는 물론 그의 타고난 재능이 큰 몫을 했다. 하지만 그만의 독특한 ‘아틀리에 경영’ 또한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는 공장식 분업체계를 세운 뒤 이를 효율적으로 가동해 대작을 대량으로 생산했고, 작품 생산방식의 차이에 따라 가격을 차등화했으며, 작업과정을 홍보에 활용하는 독특한 마케팅으로 작품을 손쉽게 팔았다. 그의 이런 행보는 지금의 기준으로 보아도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루벤스의 아틀리에에는 많은 조수와 제자들이 있었다. 얼마나 많은 미술학도가 그의 아틀리에에 들어오고 싶어 했는지 1611년, 그는 한 지인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과장 없이 말하건대, 1000명이 넘는 사람의 청을 거절해야 하네. 심지어 친척과 아내의 청마저도 말일세. 내 가까운 친구들의 불평을 안 들을 재간이 없네.” 그는 그 치열한 경쟁을 거쳐 들어온 제자들을 세심하게 조직화했다. 서양에서는 중세 길드 시절부터 화가가 제자들을 두고 공방 형태로 작품을 제작했다. 제자들의 협력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스승의 이름으로 팔려나갔다. 루벤스도 큰 틀에서는 이 형식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나, 그의 관리는 다른 작가들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효율적이었다. 그는 일단 주문 받은 작품별로 팀을 하나씩 만들었고, 각 팀의 팀장이 전적인 책임을 지고 그림을 완성하도록 했다. 팀장은 기량이 매우 뛰어나야 했는데, 자신의 제자 출신인지 여부를 가리지 않아 안토니 반 다이크(1599∼1641)처럼 제자는 아니었어도 출중한 능력이 있는 사람을 고용하곤 했다. △루벤스 손이 얼마나 갔느냐가 작품 값 결정 핵심요소이렇게 조직화한 공방을 통해 생산한 작품은 정해진 분류기준에 따라 작품 값을 달리 받았다. 미술사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1818∼1897)는 루벤스의 작품으로 알려진 그림들을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① 처음부터 끝까지 루벤스 자신이 제작한 작품, ② 루벤스가 밑그림을 그린 뒤 조수들의 제작과정을 감독하고 직접 마무리한 작품, ③ 모델로(modello)를 기초로 조수들의 역할을 체계적으로 나눠 완성한 작품, ④ 루벤스 풍으로 제작됐으나 그는 거의 손을 대지 않은 그의 공방 작품, ⑤ 루벤스의 직접적인 참여 없이 그의 스타일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복제한 작품, ⑥ 다른 화파의 화가들이 복제한 작품. 여기서 ⑤번과 ⑥번의 작품은 그의 공방에서 제작한 게 아니므로 제외하고, 나머지 작품들은 같은 사이즈라도 제각각 다른 가격으로 팔았다. 물론 루벤스의 손이 많이 간 것일수록 비쌌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루벤스 자신이 그렸다는 ‘클라라 세레나 루벤스’(1615∼1616)의 부분. 첫 부인 이사벨 브란트가 낳은 첫 딸 클라라의 다섯 살 때다. 안타깝게도 클라라는 12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작품 외에 클라라의 초상화는 3점이 더 있다. 루벤스의 다른 대작에 비해선 작은 규모(37×27㎝)로 제작됐다. 리히텐슈타인미술관 소장.앞의 ③번 사항에서 언급한 ‘모델로’는 원작을 만들기 전, 전체 인물과 배경의 구성이나 배색이 어떻게 될지 미리 구상해보는 유화 스케치를 말한다. 루벤스가 작은 모델로를 그려 팀장인 조수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면 조수들은 자기 밑의 제자들을 지휘해 이를 각각 대작으로 확대 제작했다. 이 과정에서 루벤스의 손이 얼마나 갔느냐가 작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로 기능한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왕비 마리 드 메디치(1573∼1642·앙리 4세의 두 번째 정부인)가 그녀의 생애를 주제로 한 24점의 연작 ‘메디치 사이클’을 주문할 때도 계약서에 ‘인물은 반드시 (조수나 제자가 아닌) 루벤스가 그린다’는 조항을 넣었다. 이처럼 루벤스의 간여 정도를 정하고 그에 맞춰 가격을 흥정한 것이다. 이 거대한 연작 앞에 선 관람객은 어떻게 루벤스가 이 대작들을 불과 2년 만에 완성했을까 놀라게 되지만, 실은 많은 부분이 제자들의 기여로 가능했던 것이다. 이 연작을 제작하는 동안에도 루벤스 아틀리에에서는 다른 팀들이 루벤스의 이름으로 또 다른 작품들을 무수히 제작하고 있었다. 이렇게 공방에서 작품을 제작하는 동안 그는 유럽의 여러 왕실을 드나들었다. 루벤스는 당시 그 어떤 상인 못지않게 ‘영업’의 중요성을 잘 알았다. 그의 인간적인 장점은 성격이 호방해 친화력이 높았고, 어릴 때부터 귀족문화를 잘 알아 세련되게 행동했으며, 고전에 대한 교양과 어학능력이 뛰어나 금세 사람들을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그는 모국어인 플라망어뿐 아니라 라틴어·이탈리아어·프랑스어·영어에 능통했다. 이런 능력으로 적극적으로 ‘영업’에 나서니 숱한 귀족과 왕들이 그의 패트런이 됐다. 그에 대한 보답이라고나 할까. 루벤스는 유럽 왕가를 다니며 나라 사이의 복잡하고 어려운 외교문제의 해결에 적극 나서곤 했다. 이런 공로로 그는 영국과 스페인의 왕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처럼 바쁜 루벤스가 대작 위주로 평생 3000점이 넘는 작품을 생산했다는 것은, 아무리 붓을 빨리 놀리는 화가였다 하더라도,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대규모 공방이 아니었다면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작업실에 컬렉터 전용 발코니 마련…‘퍼포먼스’ 연출도물론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 루벤스는 매우 부지런히 일했다. 흔히들 예술가는 올빼미 형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났다. 또 일할 때는 ‘멀티태스커’였다. 1621년 덴마크 궁정의사 오토 스페를링이 목격한 바에 따르면, 루벤스는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의 저서 낭독을 들으며 그림을 그렸는데, 그러는 동안 편지를 구술해 쓰게 했고, 손님들과 이야기꽃을 피웠다고 한다. 스페를링은 이 모든 게 동시에 이뤄진다는 게 지극히 경이로웠다고 적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루벤스가 일부러 이런 연출을 한 ‘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패트런이나 딜러들이 자신의 아틀리에를 찾아오면 그는 이 모든 과정을 기꺼이 보여줬고, 붓으로 2m에 가까운 곡선을 휘감듯 그리는 ‘퍼포먼스’로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작업실 안에는 브리지 형태의 발코니가 있어 컬렉터들은 이 모든 장면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루벤스는 또,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 고대 조각을 비롯한 동전·보석 등도 수집했는데, 컬렉터가 자신의 작품을 사서 나갈 때 “나보다 더 훌륭한 예술가의 작품”이라며 자신이 수집한 작품을 끼워 팔았다. 당대 최고의 화가가 극찬하며 떠안기니 컬렉터들은 그 작품 역시 사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이처럼 루벤스는 탁월한 ‘CEO 화가’였다. 관리에 능했으며 마케팅과 세일즈에 뛰어났다. 그렇게 해서 많은 재산을 모았을 뿐 아니라, 역사에 길이 남는 거장의 반열에까지 올랐다. ※ 안토니 반 다이크(1599∼1641) 루벤스와 함께 플랑드르 바로크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다. 어릴 적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여 ‘신동’ 소리를 들었다고 전한다. 특히 초상화에 탁월했는데, 굳이 대적할 상대를 꼽자면 루벤스와 티치아노를 거론할 정도다. 덕분에 그의 ‘우아하고 기품있는’ 초상화 양식은 이후 200여년간 유럽 궁중이나 귀족을 그리는 기준이 됐다. 루벤스와의 관계는 1618년 19세부터다. 이미 16세에 두 명의 조수를 고용한 독립 공방을 꾸리다가 루벤스의 작업을 돕게 되면서다. 굳이 제자만 고집하지 않았던 루벤스의 눈에 들었던 셈인데, 그럼에도 루벤스는 “내 제자 중 최고”라고 할 만큼 그의 능력을 높이 샀다고 한다. 루벤스에게는 확실한 조수였던 만큼 반 다이크 역시 큰 화가로 성장하는 데 루벤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실제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이 둘의 작품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루벤스 회화의 비법을 숙달했고, 루벤스의 작업장을 찾는 수많은 지식인·예술가·컬렉터들과 교류하며 대가를 상대하는 교양과 매너를 몸에 익혔다. 명예욕과 자기애가 강했다는 그는 평생 자신의 모습을 많이 그린 화가로도 꼽힌다. 1620∼1621년 그린 ‘자화상’에는 그의 20대 초반 앳된 얼굴이 보이는데, 이 얼굴은 이후에도 배경과 의상을 바꾸며 여러 차례 등장한다. 안토니 반 다이크 ‘자화상’(1620∼1621). 루벤스에게서 “내 제자 중 최고”란 말을 들었을 만큼 능력을 인정받은 반 다이크는 평생 자신의 모습을 많이 그린 화가이기도 했다. 20대 초반 앳된 모습인 이 자화상 속 얼굴은, 이후에도 배경과 의상을 바꾸며 여러 차례 등장한다. 독일 뮌헨 알테피나코텍 소장.△이주헌 미술평론가는…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신화의 미술관’(2020),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
2020.10.08 I 오현주 기자
로에베, 2021 봄·여름 여성 컬렉션 공개
  • 로에베, 2021 봄·여름 여성 컬렉션 공개
  • 코오롱FnC가 수입, 전개하는 로에베의 2021 S/S 시즌 여성 컬렉션. (사진=코오롱FnC)[이데일리 이윤화 기자] 코오롱인더스트리FnC부문이 4일 스페인 가죽 브랜드 로에베(LOEWE)가 ‘Show on the wall’을 컨셉으로 한 2021 봄·여름(S/S) 여성 컬렉션을 공개했다. ‘Show on the Wall’은 1대 1 비율의 실제 사이즈로 즐길 수 있는 페이퍼 패션쇼다. 로에베는 전통적인 패션쇼가 아닌 창의적인 방식으로 선보여 디지털 컬렉션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었다. 특히 빠르게 변화하는 상황을 모두가 직접 참여하고 즐길 수 있도록 집중했다. 로에베는 지난 2021 S/S 남성 컬렉션을 디지털 포맷으로 최초 진행했으며 컬렉션 내용을 응축한 아카이브 상자를 미니어처 사이즈로 선보였다.이번 컬렉션은 영국 아티스트 앤시아 해밀턴(Anthea Hamilton)과 공동 작업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응하는 새로운 형식의 커뮤니케이션을 찾고자 하는 열망에서 시작했다. 연출은 로에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나단 앤더슨(Jonathan Anderson)과 파리의 그래픽 디자인 듀오 M/M (Paris)가 함께 했다.Show on the Wall은 아티스트들이 사용하는 대형 사이즈의 포트폴리오 형태로 제작됐다. 표지는 포토그래퍼 스티븐 마이젤(Steven Meisel)이 촬영한, 1999년 패션 매거진 보그(Vogue) 이탈리아에 실린 이미지 중 하나이다.컬렉션 박스는 9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포스터 시리즈, 캔버스백, 앤시아 해밀턴이 디자인 한 벽지 롤 그리고 로에베의 전체 컬렉션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벽지 롤이 있다. 또한 벽지 접착제, 브러시, 가위, 비트 뿌리 향의 세라믹 방향제, 토머스 탤리스(Thomas Tallis)의 ‘주님밖에 희망이 없네(Spem in Alium)’ 악보가 모테트(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무반주 성악곡)로 들어있다.포트폴리오 안에는 조나단 앤더슨의 레터, 그리고 2M 높이로 펼쳐지는 포스터 16장이 들어 있다.포스터에는 모든 성별과 다양한 연령 그리고 바디 타입을 대표하는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함께 했다. 아담 베인브릿지(Adam Bainbridge), 앨리스(Alice), 앤시아 해밀턴(Anthea Hamilton), 엘리스(Elise), 힐러리 로이드(Hilary Lloyd), 홀리(Holly), 자데이 파도주티미(Jade Fadojutimi), 주엘(Jewel), 크리스티나 드 코닉(Kristina de Coninck), 로렌 클라인크네흐트(Laurence Kleinknecht), 루이스(Louis), 모나(Mona), 링케(Rinke), 로지(Rosie), 서니 슈츠(Sunny Suits), 비토리아(Vittoria)가 극적인 포즈로 등장한다.컬렉션 박스를 받은 이들은 박스 안에 구성된 도구들로 원하는 위치에 벽지를 붙이고 포스터의 실루엣을 잘라 배경에 넣을 수도 있으며, 컬렉션이 프린트 된 벽지로 자신만의 컬렉션을 완성할 수 있다. 로에베는 사람들의 참여를 통해 패션에 더 다가서며 패션쇼의 제약을 초월하는 촉감적인 언어를 만들어 내길 의도했다.한편, 로에베의 2021 S/S 여성 컬렉션에서는 조나단 앤더슨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패션의 즐거움을 표현했다. 과장된 볼륨, 튀어나온 플랩, 대형 사이즈의 힙 그리고 춤추는 듯한 매듭이 특징이다. 점점 커지는 원과 과장된 기장의 화려함은 흠 잡을 곳 없는 테일러링의 정교함과 균형을 이룬다. 의상들이 과장된 사이즈의 볼륨으로 표현되었다면 가방은 클래식에 집중했다. 스팽클 장식의 퍼즐백과 매듭 디테일의 플라멩코백, 해체된 벌룬백 등을 선보였으며 조개 모양의 새로운 가방도 소개 되었다.이번 2021 S/S 시즌 여성 컬렉션은 2일 오후 6시 30분(한국시간), 로에베 공식 인스타그램에서 공개했다. 로에베의 더 많은 제품은 전국 매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2020.10.04 I 이윤화 기자
인류의 역사는 지구가 만든 것이다
  • [책]인류의 역사는 지구가 만든 것이다
  •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지구는 지금으로부터 약 46억 년 전 생겨났다. 인류의 역사는 600만~700만 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등장하며 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굉장히 길게 느껴지는 인류의 역사도 지구의 역사와 비교해 보면 지극히 짧은 기간이다.그런데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논할 때 지구보다 사람을 중심에 둔다. 소수의 지도자와 집단의 대이동, 결정적인 전쟁에 초점을 맞춘다. 인류의 역사는 오롯이 인류의 힘으로 이뤄낸 것일까.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과학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고 있는 저자의 대답은 ‘아니오’다.저자에 따르면 문명의 진화와 지구의 변천사는 상호작용을 하며 함께 발전해왔다. 나무에 매달려 열매와 잎을 먹고 살아가던 영장류가 두 발로 직립 보행을 하게 된 것은 숲으로 무성했던 동아프리카 지역이 극적인 사건으로 메마른 사바나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인류가 멸종의 위기를 이겨내고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대륙판들의 활동과 이로 인한 화산의 분화 등 지구의 변화에 발 빠르게 적응한 결과다.중세 대항해시대도 지구 대기와 해양의 순환계라는 맥락에서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 항해자들이 바람의 패턴과 해류를 차츰 이해하며 대륙 간 무역로와 해상 제국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7500만 년 전 존재한 옛날 바다의 퇴적물이 현대 미국 남동부 유권자가 특정 당을 지지하게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흥미로운 분석도 제시한다.사람에게는 재앙과 같은 코로나19가 오히려 지구를 살리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저자의 설명을 듣고 있으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저자는 “문명의 전체 역사는 현재의 간빙기에서 잠깐 동안 반짝이는 불꽃에 지나지 않는다”며 “지구가 우리를 만들었다”고 강조하고 있다.오리진
2020.09.23 I 장병호 기자
<14> 위대한 혁신가는 '휴머니스트'다
  • [이주헌의 혁신@미술]<14> 위대한 혁신가는 '휴머니스트'다
  • 조토가 그린 이탈리아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 프레스코 벽화’ 중 ‘애도’(1304∼1306). 길이 13m, 폭 8.5m의 작은 예배당은 벽과 천장을 38면 구획으로 나눠 ‘수태고지’부터 ‘예수의 죽음과 부활’까지 조토의 프레스코화가 꽉 채우고 있는데 ‘애도’는 그중 가장 유명한 장면으로 꼽힌다. 예수의 주검을 둘러싼 인물들이 내보이는 다양한 슬픔의 층위를 자세·동작·표정 등으로 전달해 당대인들이 충격을 받을 만큼 사실적인 것이 특징이다. 애도자들 중에는 등을 보인 인물도 등장하는데, 이 역시 조토가 창안해 즐겨 사용한 기법. 공간의 깊이감 이상의 연극적 효과까지 만들고 있다.미술은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밥으로만 채울 수 없는 풍요와 평화를 안겨줬으니까요. 그림의 힘이고 조각의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미술의 역할이 이뿐이라 한다면 미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문명을 이끌고, 의식을 뒤집고, 결정적으로 돈의 흐름을 주도했던, 그것을 못 본 겁니다. 미술의 사조와 양식이 탄생할 때마다 세계경제에는 ‘변화의 그림’이 걸렸습니다. 바로 ‘혁신’을 주도했던 겁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미술로 이룬 혁신’의 현장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주헌 미술평론가]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1266/7∼1337)는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사실적인 조형으로 서양미술의 물꼬를 튼 위대한 혁신가다. 정적이고 양식화한 비잔틴 스타일이 압도하던 중세 말, 조토는 역동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화면으로 시대를 앞서갔다. 르네상스가 열리기 한 세기 전의 화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르네상스 화가’ 혹은 ‘르네상스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잔틴 스타일은 우리에게 ‘이콘’(주로 동방교회에서 발달한 예배용 화상. ‘상’(像)을 뜻하는 그리스어 이콘에서 유래했다)으로 익숙하다. 비잔틴 회화는 색채와 장식을 중시해 장엄하고 화려한 인상을 주지만, 사실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미술이다. 공간의 깊이감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탓에 공간이 얕다는 느낌을 주고 사물의 덩어리감도 떨어진다. 인물은 대체로 길게 그려졌는데, 눈이 강조되는 경우가 많아 보기에 따라서는 왠지 만화 같은 인상을 준다. 치마부에(1240∼1302 추정), 두치오(1255∼1319) 등 당시 이탈리아의 주요 미술가들은 이런 비잔틴 스타일을 따랐다. 이 스타일은 인간의 시각적 경험이나 이성적 판단과는 거리가 있는, ‘천상의 시각’을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무렵에 비잔틴 스타일과 성격을 크게 달리하는 조토의 예술이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다. 조토는 아직 원근법이 창안되기 전이었음에도 매우 직관적으로 원근법적 표현을 시도했다. 광학적인 이해 또한 동시대의 다른 화가들에 비해 매우 높았다. 무엇보다 대상을 견고한 입체로 표현할 줄 알았다. 그만큼 공간과 사물의 삼차원적인 특성을 잘 포착했다. 사람의 인상이나 제스처도 자연스럽게 묘사할 줄 알았다. 그에 더해 무엇보다 감정의 탁월한 표현으로 인간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뛰어났다. 이 모든 게 그가 진정한 휴머니스트임을 보여주는 증표라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시각과 감정으로 세계를 표현하려고 했다. △조토, 사별의 슬픔 절절히 표현…인간적 공감 불러일으켜 조토의 휴머니즘은 그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 벽화’(1304∼1306)에서 생생히 살펴볼 수 있다. 스크로베니 예배당은 그 이름이 나타내듯 엔리코 스코로베니라는 사람이 지어 봉헌한 예배당이다. 대부업자였던 스크로베니가 미술사에 남긴 매우 중요한 공헌은 바로 이 예배당 내부의 벽화를 조토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조토는 벽화의 주제를 ‘구원’으로 잡았다. 구원의 역사를 표현하기 위해 예수의 생애뿐 아니라 성모 마리아의 생애도 그렸는데, 이 두 생애를 그린 장면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고도 감동적인 장면은 ‘애도’다. 조토 특유의 사실적인 표현과 진한 휴머니즘을 느낄 수 있어서다. ‘애도’를 보노라면, 사랑하는 이와 사별하는 사람의 내적 고통과 슬픔이 절절히 느껴진다. 조토 이전의 화가들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매우 생생하고도 현실감 넘치는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검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져 땅에 누워 있다.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의 목을 감싸 안고 흐느껴 운다.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시선은 형언하기 어려운 상실감을 드러내고 있다. 오른쪽에서는 예수가 가장 사랑한 제자 요한이 팔을 벌린 채 예수에게 달려온다. 그 역시 격정을 못 이겨 온몸으로 애통해 한다. 예수를 둘러싼 모든 이들이 그처럼 저마다의 몸짓으로 슬픔을 토해낸다. 하늘의 어린 천사들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죽음이 얼마나 서러운지, 아기 천사들은 제각각 애처롭게 통곡한다. 바로 이런 표현이 조토를 이전의 다른 화가들과 구별해주는 대표적인 표지다. 대상의 내면과 감정에 충분히 틈입해 들어가 이를 매우 실감나게 생생히 전달해주는 것 말이다. 물론 기법적인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의 우리에게 조토의 표현은 여전히 고졸(古拙)하고 ‘나이브’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인간이 만든 이미지가 이 정도로 박진감 있게 다가온다는 게 매우 신기했다. 나아가 그림 속 인물들의 감정이 생생히 느껴지고 그들에게 같은 인간으로서 공감하게 된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조토가 그린 ‘애도’의 부분. 예수의 죽음을 슬퍼하는 ‘천사’(왼쪽부터) ‘요한’ ‘마리아’다. 이전 화가들이 몰입했던 초자연적 현상을 버리고 인간적인 감정을 진하게 표현하고 있다.△창조·혁신의 근원적 목표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는 것’어떤 혁신이든 휴머니즘을 동반하지 않은 혁신은 진정한 혁신이 아니다. 창조와 혁신의 근원적인 목표가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는 것’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은 조토를 비롯해 우리 주변의 많은 창조자와 혁신가들이 증명해온 바다. BMW의 수석 디자이너로 일했던 크리스 뱅글(64)도 그런 혁신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휴머니스트로서 그는 자동차 디자인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자동차도 사람과 대단히 흡사해서, 자동차 디자인이란 ‘그 자동차의 성격을 외부로 표출하는’ 작업이다.” 자동차를 사람처럼 생각함으로써 그는 보다 ‘인간적인’ 자동차를 디자인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디자인하는 자동차의 성격을 면밀하게 연구했고, 그렇게 파악한 성격이 과연 어떤 생김새로 나타날지 인간의 사례와 비교해가며 추출해냈다. 그렇게 해서 직선적인 스타일이 트레이드마크였던 BMW에 곡선의 새바람을 불러일으켰고(그로 인해 분노한 BMW의 ‘광팬’에게 살해 위협까지 받았다), 결국 벤츠, 포드, 아우디 등 다른 브랜드들이 그 뒤를 따르는 성과를 이뤄냈다. 그가 이런 추구를 한 바탕에는 대학시절 광범위하게 파고든 ‘문(文)·사(史)·철(哲)’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문·사·철’은 그로 하여금 자동차를 하나의 인간처럼 상상하게 만들었는데, 그래서 케네스 클라크의 ‘누드의 미술사’를 읽을 때조차 그는 ‘누드’라는 단어가 나오면 대신 그 자리에 ‘자동차’라는 말을 바꿔넣어 읽었다고 한다. △장애 형제에 대한 배려에서 시작된 ‘킥보드’ 어른들을 위한 초경량 미니 스쿠터(킥보드) 또한 ‘인정’(人情)의 경험으로부터 기원한, 한 휴머니스트의 창작물이다. 스위스의 은행원이었던 빔 오우보터(60)는 자신의 단골 소시지 상점이 집에서 걸어가기에는 좀 멀고 차를 타고 가기에는 가까워 고민하던 끝에 어른들이 타고 다니기에 좋은 초경량 미니 스쿠터를 개발했다. 그가 스쿠터를 착안한 계기는 어린시절 단란했던 가족 간의 추억에 있었다. 오우보터에게는 다리에 장애가 있는 누나가 있었다. 다른 형제들과 달리 누나는 한쪽 다리가 25㎝가량 짧았다. 그러다 보니 자전거나 스키를 탈 수 없었다. 그러나 스쿠터, 곧 킥보드는 곧잘 탔다. 그래서 오우보터의 부모는 아이들이 가급적 자전거를 타지 않고 스쿠터를 타도록 유도했다. 형제들이 장애가 있는 형제에게 공감하고 그 애로를 함께 나누도록 이끈 것이다. 그 덕에 그의 부모는 거의 매년 스쿠터를 한 대씩 새로 사야 했다. 이처럼 스쿠터는 오우보터의 가족에게 사랑과 연대, 배려의 상징이었다. 이 사랑의 추억으로부터 발원해 개발한 초경량 미니 스쿠터는 처음에 주변으로부터 그다지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일반적인 어린이용 킥스쿠터는 바닥판이 넓고 바퀴는 바람이 든 타이어인데 비해 그의 스쿠터는 판이 작고 바퀴는 스케이트 롤러였기 때문에 매우 민첩한 동작이 가능했고, 빠르고 매끄럽게 몰 수 있었다. 한마디로 보다 ‘인간 친화적’인 스쿠터였다. 그러나 그가 이 아이템을 사업화하려 하자 친구들은 어른들이 무엇 때문에 킥스쿠터를 타겠냐며 앞다퉈 그를 말렸다. 의기소침해진 그는 첫 개발품을 차고에 처박아놓고는 더 이상 돌아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차고를 드나들던 이웃집 아이가 어느 날부턴가 그 개발품을 이용하기 시작했고, 곧 그 아이의 친구들이 몰려들면서 그의 스쿠터는 아이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 있는 탈것이 돼버렸다. 아이들이 사용하기에도 매우 편리했고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다시 용기를 내 자신의 개발품을 출시할 수 있었다. 동료 인간에 대한 공감과 애정에 기초한 휴머니즘, 이것이야말로 끝없는 혁신의 기회를 제공하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 ※ 치마부에(Cimabue·1240∼1302 추정) 중세 이탈리아 피렌체파를 대표하는 화가다. 비잔틴 스타일의 형식주의를 취하면서도 조형성이 강한 중교화를 그렸다. 1270년대 말부터 1280년대에 걸쳐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서 ‘성모전’ ‘묵시록’ 등의 벽화를 제작했다. 이후 피렌체 산타 트리니타 성당에서 ‘마에스타’(장엄의 성모·1280∼1290)를 그렸고 그의 유명한 대표작으로 남겼다. 현재 우피치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산타 트리니타 마에스타’는 길이 4m에 육박(385.2×223.6㎝)하는 패널화로, 무엇보다 아름다운 조형성이 눈에 띈다. 하지만 비잔틴 스타일 특유의 평면적인 구성에 입체감·공간감이 떨어지는 구도를 보이고 있다. 이는 치마부에가 키운 제자 ‘조토’와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치마부에는 미술사에서 전환기를 이루는 13세기 후반 시대의 생활 감정, 취미의 변천 등 새로운 동향을 파악하고 반영해, 비잔틴 전통인 이차원적 회화양식에서 사실주의 양식으로 변환을 시도한 기여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조토와의 만남을 두고는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피렌체 근방 시골마을 베스피냐노에 갔다가 바위에 그림을 그리던 열살 남짓한 양치기 소년을 보고 재능을 발견해 피렌체로 데려와 제자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그중 하나다. 조토의 스승으로 알려진 치마부에가 그린 ‘산타 트리니타 마에스타’(장엄의 성모·1280∼1290). 길이 4m에 육박(385.2×223.6㎝)하는 패널화로, 아름다운 조형성이 눈에 띈다. 하지만 비잔틴 스타일 특유의 평면적인 구성에 입체감·공간감이 떨어지는 구도를 보인다. 제자 조토와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기도 하다.△이주헌 미술평론가는…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신화의 미술관’(2020),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
2020.09.18 I 오현주 기자
①화폐, 권력과 전쟁의 역사
  • [위대한 생각]①화폐, 권력과 전쟁의 역사
  • ☆ ‘인더스토리’(INDUSTORY)현대 산업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의 과거와 현재를 역사·정치·문화·기술·경제 등 복합적인 시선으로 이해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보는 능력을 기른다. 현대 문명의 기반이 된 ‘철’(鐵)과 ‘사’(沙·모래)부터 코로나19 사태로 주목받고 있는 ‘약’(藥), ‘의’(醫) 등 이 세상 모든 산업의 역사를 다룬다.☆ 임규태 공학자·교육자·기업가미국 조지아공대에서 15년간 교수로 재직. 조지아공대 부설 전자설계연구소 부소장, 조지아공대 기업혁신센터 국제협력 수석고문. 국제 통신표준화 의장. 빅데이터·소프트웨어·게임·블록체인·기후변화 등 다양한 분야의 스타트업에 참여.임규태 박사가 서울 중구 순화동 KG하모니홀에서 ‘위대한 생각’ 지상 강연 ‘인더스토리Ⅱ’ ‘화폐(上)’ 편을 강의하고 있다.(사진=김태형 기자)[총괄기획=최은영 부장, 연출=권승현 PD, 정리=김무연 기자] 화폐의 역사는 어디서부터 시작했을까. 임규태 박사는 경제 인문학 토크 콘서트 ‘위대한 생각’의 대표 프로그램 ‘인더스토리’ 시즌2의 주제로 ‘금융’을 정하고 ‘은’과 ‘금’에 이은 세 번째 강연에서 ‘화폐’의 역사를 이야기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인류 최초의 화폐는 기원전 2000년 세워진 리디아 왕국의 금화 ‘리디아의 사자’다. 당시는 주조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금과 은이 반반 섞인 호박금 원석 그대로 화폐를 만들었다. 이후 금과 은을 분리할 수 있게 되면서 금화와 은화가 별도로 주조된 크로이세이드가 등장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 금화와 시글로스 은화리디아의 화폐 기술이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 퍼지게 된 것은 페르시아가 리디아를 복속하면서부터이다. 기원전 546년 리디아를 정복한 키루스 2세는 리디아의 화폐인 크로이세이드를 그대로 사용했으나, 권좌를 이어받은 다리우스 1세가 다릭 금화와 시글로스 은화라는 페르시아의 독자 화폐를 발행하면서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 화폐 문명이 전파됐다.로마 제국은 데나리우스 은화를 사용해 500년 간 번영했으나 네로 황제 시기부터 은의 함량을 줄이며 나라가 기울기 시작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솔리두스 금화를 발행해 화폐 시스템을 안정시켰지만, 동서 로마의 분열과 서로마 멸망을 거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서로마 제국 멸망으로 중세 시대는 금욕을 중시해 기술, 문화 뿐 아니라 화폐 경제 역시 암흑기에 빠져 들었다. 유럽의 은화들. 왼쪽부터 네덜란드 달더르, 스페인의 페소 데 오초, 북유럽의 요아힘스탈러.◇ 르네상스에 부활한 화폐 경제화폐 경제의 부활은 르네상스 시대의 시작과 궤를 같이한다. 르네상스가 과거 그리스와 로마의 유산을 복원했던 것처럼 화폐 경제 역시 페르시아와 로마가 사용했던 은화의 부활로 시작됐다. 1486년 독일의 요아힘스탈 지역 은광에서 채굴한 은으로 주조한 은화인 요아힘스탈러가 인기를 얻는다. 은화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실물화폐였기 때문에 누구나 양질의 은만 있으면 화폐를 발행할 수 있었다. 이에 유럽 각지의 은광마다 지역 명칭을 딴 은화들이 경쟁적으로 주조되고 유통되었다. 은광은 곧 부와 권력을 의미했으니 북유럽뿐 아니라 서유럽, 남유럽으로 확장됐다. 1497년 스페인의 페소 데 오초, 1576년 네덜란드의 달더르 은화가 차례로 등장했다. 당시 유럽 지역에서 통용되던 은화들을 통칭해 ‘탈러’라 불렀다.대항해 시대에 남미를 식민지화한 스페인은 볼리비아 포토시 은광을 발견하고 대량의 은화를 주조해 유통시킨다. 스페인이 남미에서 생산한 은화는 ‘스페인 달러’로 불리며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로 유통됐고, 대항해 시대에 은 기축통화 시대를 열었다. 스페인과 해상 패권을 양분하던 네덜란드는 일본의 이와미 은광에서 독점한 은으로 주조한 달더르 은화를 유통시켰다. 스페인과 네덜란드 은화는 다량으로 신대륙으로 흘러들었고 이는 미국 ‘달러’의 기원이 된다.네덜란드와 연합해 가톨릭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물리친 영국은 해상 패권을 두고 네덜란드와 결별을 선택했다.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은 영국 관련 무역은 영국 국적의 선박만 이용하도록 강제하는 항해조례를 발표해 네덜란드의 반발을 샀다. 결국 양국 간에 전쟁이 벌어졌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해상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 영국이 금본위제를 채택하면서 세계 무역의 기축통화가 은에서 금으로 바뀌게 된다.영란은행.◇ 금보관증으로 시작된 금본위제…유럽과 식민지 전쟁으로 유지1694년 설립한 영란은행은 금보관증 제도를 바탕으로 막대한 양의 통화를 시장에 공급했다. 금보관증은 금 보유자가 은행에 금을 맡긴 뒤 받는 보증서로 현대 화폐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영란은행은 금 보관증을 소유한 사람이 금을 찾으러 은행을 방문할 일이 거의 없다는 점에 착안해 금 한 덩이에 10장의 보관증을 발행하는 기법을 도입했다. 이른 바 ‘10%의 마법’이다. 이후 미국 등 다른 국가들도 금 보관증을 바탕으로 한 금본위제를 채택한다.10%의 마법으로 영란은행은 실제 금 보유고의 10배가 넘는 화폐를 발행하며 부를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제도에는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모든 금 보유자가 일시에 은행으로부터 금 상환을 요구할 경우다. 은행으로선 금 보유고가 발행한 보관증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상환 요구에 응할 수 없는 ‘뱅크런’ 현상이 발생한다. 역으로 뱅크런만 억제한다면 금 보관증 제도는 10배가 넘는 레버리지로 국부를 창출할 수 있었다. 결국 유럽 열강은 뱅크런을 막기 위해 식민지와 전쟁이라는 두 가지 해법을 찾아냈다. 식민지 개발에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고 전쟁을 벌이면 전비를 지속적으로 소모해야 해 다량의 통화를 찍어내도 본국 은행에 상환 요청이 들어올 가능성이 적다는 점을 노린 전략이었다.실제로 영란은행이 탄생한 뒤 영국은 스페인 왕위계승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 프렌치-인디안 전쟁, 미국 독립전쟁, 나폴레옹 전쟁, 아편전쟁 등 꾸준히 전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전비 지출 유혹에 빠진 유럽 각 국이 참여하면서 전쟁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게 된다. 결국 이들이 폭주 끝에 다다른 끝판 전쟁이 바로 ‘1차 세계대전’이다. 대공황 당시 미국 사진.◇ 英, 1차 세계대전으로 금융패권 상실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 중세 봉건 왕정은 몰락했다. 유럽은 단순히 정치 체제의 변화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1차 세계대전은 급속히 발달한 과학기술로 대량 살상이 가능해 인력 손실이 극심했다. 군인만 참전하던 과거 전쟁과는 달리 일반 주민들까지 전시 물자 생산에 동원하는 총력전 개념을 도입하면서 사실상 국가 경제가 마비됐다. 여기에 각국의 이해관계와 계속된 참호전으로 전쟁의 끝을 가늠할 수 없었다. 전쟁 후 유럽은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경제적 파탄을 피할 수 없었다. 단 미국은 예외였다. 미국은 먼로주의를 주창하며 전쟁에 관여하지 않았다. 대신 1차 세계대전 기간 내내 영국과 프랑스 등에 무기와 전쟁 물자를 공급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전후 무너진 영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재무장관으로 등판한 인물이 윈스턴 처칠이다. 처칠은 전쟁 기간 동안 일시적으로 중단했던 금본위제를 다시 가동했다. 전비 확보를 위해 대량으로 발행해 가치가 하락한 파운드화의 위상을 살리기 위한 급진적 조치였다. 문제는 금본위제를 유지할 만큼 충분한 양의 금이 없었다는 사실. 처칠은 가장 금을 많이 보유한 미국을 압박해 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1차 세계대전 막판에 참전하면서 새로운 패권국으로 떠오르는 미국은 영국의 강압적 금 회수 조치에 응할 마음이 없었다. 때마침 1929년 대공황까지 발생하자 미국은 금 반출을 전격 중단한다. 미국발(發) 금 반출이 막히면서 영국을 포함한 유럽 각국은 금 부족 사태를 겪었으며 연쇄적으로 뱅크런이 발생했다. 결국 영국은 1931년 금본위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급해진 영국은 전 세계로 번지는 대공황을 막기 위해 파운드 기축통화를 포기하고 영 연방 블록 경제를 추진한다. 영국, 호주, 캐나다, 남아공, 뉴질랜드 등으로 구성한 영연방 경제 블록은 연방 내 국가 간 관세를 없애고, 연방 이외 국가에는 고관세를 매겼다. 대공황과 금본위제 붕괴가 촉발한 무역전쟁의 시작이었다. 이에 반발한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3년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개인 소유 금을 연방준비위원회로 강제 회수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한다. 신흥 강국 미국이 기축통화국이던 영국을 넘어 서구 최강국으로 발돋움하는 순간이었다.◇‘위대한 생각’은…이데일리와 이데일리의 지식인 서포터스, 오피니언 리더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경제 인문학 토크 콘서트입니다. 우리 시대 ‘지성인’(至成人·men of success)들이 남과 다른 위대한 생각을 발굴하고 제안해 성공에 이르도록 돕는 프로그램으로, 이데일리 창립 20주년을 맞아 기획했습니다. ‘위대한 생각’은 매주 화요일 오후 6시 이데일리TV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2020.09.14 I 김무연 기자
①금(金), ‘인간 궁극의 가치’ 금융을 지배하다
  • [위대한 생각]①금(金), ‘인간 궁극의 가치’ 금융을 지배하다
  • 임규태 박사가 서울 중구 순화동 KG하모니홀에서 ‘위대한 생각’ 지상 강연 ‘인더스토리Ⅱ’ ‘금’ 편을 강의하고 있다.(사진=이영훈 기자)☆ ‘인더스토리’(INDUSTORY)현대 산업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의 과거와 현재를 역사·정치·문화·기술·경제 등 복합적인 시선으로 이해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보는 능력을 기른다. 현대 문명의 기반이 된 ‘철’(鐵)과 ‘사’(沙·모래)부터 코로나19 사태로 주목받고 있는 ‘약’(藥), ‘의’(醫) 등 이 세상 모든 산업의 역사를 다룬다.☆ 임규태 공학자·교육자·기업가미국 조지아공대에서 15년간 교수로 재직. 조지아공대 부설 전자설계연구소 부소장, 조지아공대 기업혁신센터 국제협력 수석고문. 국제 통신표준화 의장. 빅데이터·소프트웨어·게임·블록체인·기후변화 등 다양한 분야의 스타트업에 참여.그리스 황금시대를 나타낸 그림[총괄기획=최은영 부장, 연출=권승현 PD, 정리=김무연 기자] 금은 인류 문명의 시작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한때 금보다 가치가 높았던 금속들은 기술의 발달로 그 가치가 떨어졌다. 문명사의 시작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금만큼 꾸준히 가치를 인정받은 ‘물질’은 없다.인류 역사와 함께한 금은 지금도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황금시대’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황금시대’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5개의 시대(금·은·청동·영웅·철) 중 가장 앞선 시대이다.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가 다스리던 ‘황금시대’는 이후 등장하는 어떤 시대보다 풍요로웠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시금석’도 금에서 유래됐다. 시금석은 고대 금 세공사들이 금의 순도를 측정하기 위해 늘 지니고 다녔던 검은 돌판(현무암)을 뜻한다. 그들은 순도를 측정할 금붙이와 자신이 지닌 표준 금 시료를 시금석에 긁어 묻어나온 색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순도를 측정했다. 결국 금의 가치를 가늠하는 도구에서 판단의 기준이 되는 기회나 사물을 뜻하는 일상용어로 의미가 확장된 셈이다. 임규태 박사는 “어원도 모른 채 황금시대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인간이 황금을 최고의 상징으로 여긴다는 것”이라면서 “시금석의 어원에서 보듯 금은 인간의 말과 사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쳐온 금속”이라고 강조했다.인류 최초의 금화인 리디아의 사자◇ 화폐의 아버지 ‘리디아의 사자’인류 역사상 최초의 금화는 기원전 6세기에 만들어진 ‘리디아의 사자’다. 뛰어난 금화의 주조 기술을 보유한 리디아가 페르시아에 복속되면서 화폐가 아시아와 유럽에 전파됐다. 페르시아 제국과 날을 세웠던 그리스와 이후 지중해를 지배한 로마의 화폐도 리디아 금화의 영향을 받았다. 리디아의 사자가 ‘세계 주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다.리디아의 주조 기술을 받아들인 로마는 금화와 함께 은화도 생산해 유통했지만, 금화가 화폐로 사용되는 일은 드물었다. 당시 금의 생산량이 은보다 적기도 했지만 금의 높은 가치를 눈 여겨 본 귀족과 부호들이 금화를 부의 축재 수단으로 금고에 보관했기 때문이다.금이 본격적으로 화폐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즉위하고 나서다. 로마에서 500년간 사용되던 데나리우스 은화가 네로 황제 시절부터 은 함량을 속이면서 그 가치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즉위 직전 데나리우스 은화의 은 함량은 5% 밖에 되지 않았고, 당시 로마는 5현제 이후 군인 황제 시대를 거치며 극도로 혼란한 상황이었다.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사회 개혁과 통합을 위해 기독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다. 이와 동시에 가치가 땅에 떨어진 데나리우스를 대신해 솔리두스 금화를 도입하는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 하지만 그의 사후 로마가 동서로 분열하고 서로마가 멸망하면서 솔리두스 효과는 사라진다. 중세 암흑시대에 물욕을 죄악시하는 기독교 신본주의가 중심이 되면서 금화 유통이 자취를 감춘다. 명예혁명으로 영국 왕위에 오른 오렌지공 윌리엄◇ 패권을 거머쥔 영국, ‘영란은행’을 세우다화폐가 다시금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대항해 시대 때이다. 해상 패권을 장악한 스페인이 남아메리카 볼리비아 지역에서 포토시 은광을 발견하며 질 좋은 은화가 대량으로 주조된 것이다. 네덜란드 역시 일본 이와미 은광을 독점해 은화를 생산하면서 무역 분야에서 스페인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대항해 시대가 ‘은의 시대’라고 불리는 이유다.하지만 스페인과 네덜란드 양강이 쥐던 해상 무역의 헤게모니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후발주자 영국이 해상 패권을 두고 스페인과 대규모 해전을 벌인 것. 영국은 같은 반(反) 가톨릭 국가였던 네덜란드와 손을 잡았고 가톨릭의 수호자였던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연합했다. 결국 이 전쟁은 영국-네덜란드 동맹의 승리로 끝났고, 승리에 기여한 사략 해적(정부 공인 해적)들은 합법적으로 무역 권한을 부여받고 차례로 동인도 회사를 세운다. 하지만 영국 동인도 회사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은 영국 관련 무역은 영국 선박으로만 할 수 있다는 항해조례를 발표한다. 이에 반발한 네덜란드는 영국과 전쟁을 벌인다. 영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네덜란드를 제치고 해상 패권국으로 발돋움 한다. 하지만 영국 내부에서는 공화정과 왕정이 격렬하게 충돌하면서 왕들이 처형당하거나 쫓겨나는 혼란이 반복되고 있었다. 1688년 공화주의를 주장한 영국 공화파는 네덜란드의 오렌지공 윌리엄과 손잡고 제임스 2세를 추방하는 명예혁명을 성공시키면서 입헌군주국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윌리엄이 즉위한 뒤 영국은 다시금 프랑스와 전쟁에 들어갔다. 9년간 지속된 이 전쟁으로 영국 재정은 파탄 직전까지 몰렸다. 윌리엄은 친분이 있던 네덜란드 자본가들로부터 120만 파운드를 조달했다. 단, 영국의 화폐발행권을 달라는 조건이 붙었다. 이에 따라 1694년 영국과 네덜란드가 합작한 ‘영란은행’이 탄생했다.금 보관증.◇ 연금술사가 만든 ‘금 보관증’ 영란은행의 최우선 과제는 기축통화로 사용되는 은의 영향력을 줄이는 일이었다.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생산하는 은화의 가치를 줄여야 영국이 진정한 패자로 거듭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은을 대신해 금을 화폐로 사용하고 싶어도 금의 절대적인 유통량이 부족하다는 사실이었다. 영란은행은 금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금 세공업자들이 사용하던 금 보관증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금 보관증 제도란 금 소유자가 금을 은행에 맡기면 보관증을 발행해 주는 시스템이다. 금 보관증을 가진 사람은 언제든 금을 은행으로부터 찾을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교역에서 무거운 금을 주고받기 보다는 금 보관증으로 거래하는 경우가 늘어났다.영란은행은 금 보관증 제도에 레버리지 효과를 더했다. 고객 한 명이 금 한 덩이를 보관하면 은행은 금 보관증 열 장을 발행했다. 만약 고객 열 명이 금 열 덩이를 맡기면 한 덩이만 저장하고 나머지 아홉 덩이는 다시 빌려줄 수 있었다. 결국 은행에 보관된 금은 한 덩이 뿐이지만 시중에는 금 보관증 열 장과 아홉 덩이의 금이 유통되는 셈이다. 임 박사는 금 한 덩이가 10배 이상의 가치로 불어나는 이 상황을 가리켜 ‘10%의 마법’이라고 지칭했다.아이작 뉴턴임 박사는 영란은행의 획기적인 아이디어에 아이작 뉴턴이 깊이 관여했을 것이라 추정했다. 뉴턴은 천체학자, 물리학자, 화학자로 알려졌지만 1689년 국회의원을 역임할 만큼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뉴턴이 영란은행 설립 2년 후인 1696년 왕립 조폐국 이사 자리에 오른 것이 금 보관증 시스템 도입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임 박사는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과학자들은 사실 연금술사였고, 뉴턴 역시 수많은 연금술사 중 한 명이었다”라면서 “그는 진짜 금을 만들어 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금 보관증과 레버리지 효과로 한 덩이의 금을 10배 이상 불리는 연금술을 구현했다”고 했다.◇‘위대한 생각’은…이데일리와 이데일리의 지식인 서포터스, 오피니언 리더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경제 인문학 토크 콘서트입니다. 우리 시대 ‘지성인’(至成人·men of success)들이 남과 다른 위대한 생각을 발굴하고 제안해 성공에 이르도록 돕는 프로그램으로, 이데일리 창립 20주년을 맞아 기획했습니다. ‘위대한 생각’은 매주 화요일 오후 6시 이데일리TV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2020.09.07 I 김무연 기자
②기술 천시한 조선, 세계사 변방으로 밀려나다
  • [위대한 생각]②기술 천시한 조선, 세계사 변방으로 밀려나다
  • 단천연은법을 기술한 책 3권. 왼쪽부터 ‘연산군일기’, ‘패관잡기’, ‘중종실록’.[총괄기획=최은영 부장, 연출=권승현 PD, 정리=김무연 기자] 기술은 발명보다는 활용에 의미가 있다. 선진 기술을 먼저 발명한다고 해도 이를 활용하지 않으면 기술의 가치는 없다. 반면 선진 기술을 도입해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그 기술을 바탕으로 세계사의 중심에 설 수도 있다. 조선시대 발명한 단천연은법(端川鍊銀法)이 좋은 사례다. 단천연은법은 끓는점 차이를 이용해 납과 은을 포함한 은광석에서 은만을 뽑아내는 기술이다. 조선시대 연산군 시절 우리나라에서 발명한 은 제련 선진 기술이다.‘연산군일기’에 따르면 함경도 단천에 사는 김감불과 장례원 소속 관노 김검동은 조정에 납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시연해 보였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는 등 정국이 불안전한데다 조선에 은 화폐 수요가 적었기 때문에 이 선진 기술은 빛을 발하지 못한다.본국에서 잊힌 기술은 이웃나라 일본으로 전파됐다. ‘패관잡기’에는 중종 말년 왜인들이 납에서 은을 만드는 법을 알아내 일본으로부터 은을 대량으로 들여와 조선의 은값이 폭락했다는 글귀가 있다. ‘중종실록’에는 왕이 연철로 은을 만드는 기술을 전파한 유서종 일가의 일을 철저히 조사하도록 명령했다고 적혀 있다. 일본 이와미 은광에도 조선의 경수와 종단이란 기술자가 연은분리법(단천연은법)을 전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일본은 조선에서 유래한 단천연은법을 바탕으로 이와미 은광을 포함해 16~18세기 세계 은 생산량의 3분의 1을 책임졌다. 이 은은 일본과 독점 무역을 하던 네덜란드로 흘러 들어갔다. 조선의 단천연은법이 네덜란드가 대항해시대 패권국가로 성장하는 바탕이 된 것이다. 일본은 이와미 은광을 매개로 중세부터 근세까지 이어지는 세계 무역사에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네덜란드 상인들이 일본 다이묘들과 교역을 하던 데지마 섬네덜란드는 일본에서 생산하는 양질의 은을 얻기 위해 자신들이 보유한 선진 문물을 일본의 영주들에게 전수했다. 이 중에는 시계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발명품뿐 아니라 총, 포 등 최신 병기들도 포함됐다. 이 최신 무기들은 임진왜란에 사용했다. 단천연은법의 본 고장인 조선은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세계사의 변방으로 밀려난 것도 모자라 국가 존망의 위기에 빠지는 상황을 자초했다.첨단 기술이던 단천연은법을 발명하고도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이 세계사의 흐름에 뒤처진 원인으로 ‘쇄국정책’을 꼽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에도 시대 일본 역시 쇄국정책을 유지했다. 임 박사는 기술자와 기술을 대하는 태도가 조선과 일본의 차이를 갈랐다고 봤다. 그는 “조선은 기술을 천대하고 기술자들을 정치와 관료의 아래에 두고 관리하는데 급급했다”고 꼬집었다. 이어 “반면 일본은 조선의 기술자들을 우대했고, 전수받은 기술을 발전시켰다”고 했다. 기술이 한 나라의 가치와 경쟁력을 높이는 원동력이란 점을 감안하면 조선의 역사가 아름답지 않게 끝난 이유를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임 박사는 단천연은법에 얽힌 사연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우리 정치인과 관료들이 공학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라고 질문을 던지며 “과연 조선시대와 무엇이 달라졌는지 고민해 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 임규태 박사가 지난 18일 서울 중구 순화동 KG하모니홀에서 ‘위대한 생각’ 지상 강연 ‘인더스토리’ 시즌2 ‘은’ 편을 강의하고 있다.(사진=이영훈 기자)
2020.08.31 I 김무연 기자
①인류 최초의 기축통화 ‘은’
  • [위대한 생각]①인류 최초의 기축통화 ‘은’
  • ☆ ‘인더스토리’(INDUSTORY)현대 산업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의 과거와 현재를 역사·정치·문화·기술·경제 등 복합적인 시선으로 이해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보는 능력을 기른다. 현대 문명의 기반이 된 ‘철’(鐵)과 ‘사’(沙·모래)부터 코로나19 사태로 주목받고 있는 ‘약’(藥), ‘의’(醫) 등 이 세상 모든 산업의 역사를 다룬다.☆ 임규태 공학자·교육자·기업가미국 조지아공대에서 15년간 교수로 재직. 조지아공대 부설 전자설계연구소 부소장, 조지아공대 기업혁신센터 국제협력 수석고문. 국제 통신표준화 의장. 빅데이터·소프트웨어·게임·블록체인·기후변화 등 다양한 분야의 스타트업에 참여.임규태 박사가 서울 중구 순화동 KG하모니홀에서 ‘위대한 생각’ 지상 강연 ‘인더스토리Ⅱ’ 1강 ‘은’ 편을 강의하고 있다. 이 세상 모든 산업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인더스토리Ⅱ’에서는 금융 산업의 역사를 집중 조명한다.(사진=이영훈 기자)[총괄기획=최은영 부장, 연출=권승현 PD, 정리=김무연 기자] 화폐의 영향력은 곧 그 화폐를 발행하는 국가의 위상과 직결된다. 고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화폐의 핵심은 금이 아닌 은이었다. 서구 문화의 근간을 조성한 고대 로마도, 대항해시대 해상 패권국들의 기축통화는 은화였다. 한때 세계 최강국이었던 명, 청 시대의 중국에서는 주요 조세 수단으로 은을 사용했다. 은의 역사를 알면 세계 금융과 무역, 그리고 글로벌 헤게모니의 변천사를 읽을 수 있는 까닭이다.로마 제국이 사용한 은화 데나리우스.◇ 은화 데나리우스로 비춰보는 로마의 흥망성쇠“포도밭 주인은 일꾼들에게 하루 품삯으로 1데나리온을 주기로 했습니다.”(마태복음 20장 2절)신약성서에 등장하는 데나리온은 로마에서 사용하던 은화 데나리우스를 의미한다. 예수가 활동하던 당시 예루살렘 지역은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로마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라면 데나리우스를 사용했던 것이다. 기원전 211년 2차 포에니 전쟁 당시 주조를 시작한 데나리우스는 이후 500여년간 로마의 금융과 상업의 뿌리가 된다.하지만 데나리우스의 위상은 폭군 네로의 등장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네로는 데나리우스 주조에 필요한 은 함량을 92%로 낮추고 남은 8%의 은은 자신이 착복했다. 이후 여러 대를 거치면서 데나리우스에 은 함량은 5%대까지 추락하고 305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화폐 개혁을 단행하며 화폐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임규태 박사는 데나리우스의 가치 추락과 로마 제국의 쇠락이 맞물리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데나리우스의 가치가 폭락할 당시는 5현제 이후 군인들이 황제를 갈아치우며 혼란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국가가 발행하는 화폐가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은 해당 국가의 정치·경제 시스템이 무너지는 것을 의미한다. 임 박사는 “데나리우스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로마 제국의 안정성이 급격히 무너졌다”면서 “네로 시대 일어난 폭동 역시 데나리우스의 가치 하락이 원인일 수 있다”고 추정했다.남미를 정복하는 스페인의 콘키스타도르.◇“은을 가진 자가 승자”…대항해 시대, 3국간 패권 전쟁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뒤 서유럽 해양 국가들이 앞다퉈 식민지 개척을 위해 바다로 나아가면서 대항해 시대가 시작된다. 대항해 시대에 가장 적극적으로 식민지 개척에 나선 국가는 스페인이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를 비롯한 콘키스타도르는 신대륙에 황금의 나라(엘도라도)가 있다는 소문을 이용해 투자자들을 모아 신대륙 정복에 나섰다. 콘키스타도르는 아즈텍과 잉카 제국을 약탈하면서 막대한 양의 보물을 손에 쥐었다. 하지만 투자자들에게 약속했던 만큼의 금은 확보하지 못했다. 그들은 금을 찾아 남미 내륙으로 진출하던 도중 현재 볼리비아 포토시에서 대량의 은맥을 발견한다. 포토시 은광의 개발은 대항해 시대의 향배를 완전히 뒤바꿔 놓게 된다.스페인의 페소 데 오초.당시 스페인의 화폐는 은화 ‘페소 데 오초’였다. 포토시 은광이 개발되면서 남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대량으로 은화가 주조된다. 포토시 광산에서 채굴한 질 좋은 은으로 주조한 스페인 은화는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 무역의 공용 화폐가 된다. 페소 데 오초가 대항해 시대의 기축 통화 역할을 담당하면서 스페인이 대항해 시대 무역의 패권을 장악한다.스페인의 경쟁자였던 네덜란드는 스페인이 선점한 남미 대신 아시아로 눈을 돌렸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에도 막부와 독점 무역권을 따내고 일본 이와미 은광에서 생산하는 은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16~18세기에 일본은 전 세계 은의 3분의 1을 생산했고, 이와미 은광은 그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네덜란드는 이와미 은광에 힘입어 스페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해상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원나라 시기부터 사용한 마제은.◇ 후발주자 영국, 은을 위해 마약을 팔다스페인과 네덜란드에 밀리던 영국은 다량의 은을 확보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영국은 은이 풍부한 중국으로 눈을 돌린다. 중국에선 명나라가 세금 징수 수단으로 은을 사용하면서 은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청나라에 들어서는 말발굽 모양의 마제은이 재물을 쌓는데 사용되면서 민간에서도 상당한 양의 은을 보유하고 있었다. 다만 중국(당시 청나라)은 영국과의 무역이 탐탁지 않았다. 중국은 제후국이 진상을 하면 이에 답변하는 조공무역에 익숙해 근대적인 무역 개념이 약했던 데다 자국 내 물산이 풍부해 굳이 무역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편전쟁.영국 동인도 회사는 자국 식민지였던 인도를 끌어들여 삼각무역을 시도한다. 산업혁명 이후 영국 본토에서 대량 생산한 면직물을 인도에 넘기고 인도에서 재배된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했다. 중국은 아편 대금으로 은을 지불했는데, 이 은은 면직물 대금의 명목으로 영국에 흘러들었다. 자국민들이 아편 중독자가 되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던 중국은 광둥성에 임칙서를 파견해 아편 단속을 하도록 했다. 임칙서는 아편 무역을 뺀 다른 무역은 모두 허용하겠다고 했지만 영국은 자신들의 정당한 무역을 방해했다며 아편 전쟁을 일으킨다. 결국 청나라는 아편 전쟁에서 패해 영국에 홍콩을 할양한다. 가장 부도덕한 전쟁으로 불리는 아편 전쟁의 이면에는 은을 확보하려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의도가 숨어 있었다.세계 은 용도별 수요.◇ 몰락한 은의 시대중세를 지배했던 은은 근대로 접어들면서 기축통화로서의 역할을 금에 넘긴다. 현대에 이르러 은은 귀금속보다는 주요 산업 소재로 쓰이고 있다. 은은 전기전도율과 열전도율이 금속 중 가장 높다. 따라서 전기전도나 열전도가 중요한 고급 제품, 즉 태양광 패널이나 5G 관련 제품, 전기 배터리 등에 은이 널리 사용하고 있다. 현재 생산한 은의 60%를 산업용으로 소비하고 있다.최근 코로나19 여파로 금융시장이 불안정한 상황이 되자 은이 다시 금융의 중심 역할을 할 것이라는 주장이 일각에서 대두하고 있다. 하지만 임 박사는 은이 기축통화였던 과거의 위상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임 박사는 “일반적으로 수요가 늘어나면 가격이 높아지지만 산업 소재는 다르다. 당장 은 값이 급격하게 오르면 첨단 산업 전반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은 가격 상승이 억눌릴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기원전 3000년 전 은과 금의 교환 비율은 2.5대 1 정도였지만 최근에는 100대 1까지 내려갔다. 은의 산업용 수요가 확대되면서 은 가격이 지속적으로 낮게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금 대비 은 가치 비율임 박사는 “화폐는 물건의 가치를 대변해야 하는데, 그러기에 은은 너무 값싸다”며 “화폐로서의 역할은 다했다고 봐야 할 것”이라며 강연을 마무리 지었다. ◇‘위대한 생각’은…이데일리와 이데일리의 지식인 서포터스, 오피니언 리더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경제 인문학 토크 콘서트입니다. 우리 시대 ‘지성인’(至成人·men of success)들이 남과 다른 위대한 생각을 발굴하고 제안해 성공에 이르도록 돕는 프로그램으로, 이데일리 창립 20주년을 맞아 기획했습니다. ‘위대한 생각’은 매주 화요일 오후 6시 이데일리TV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2020.08.31 I 김무연 기자
아디다스의 '스피드 팩토리' 실패가 주는 교훈
  • [38]아디다스의 '스피드 팩토리' 실패가 주는 교훈
  • [박정수 성균관대 스마트팩토리 융합학과 겸임교수] 4차 산업혁명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making invisible visible) 인공지능(AI)과 콘텐츠 융합 혁명이다. 인공지능이 표현하고 있는 수많은 이미지들은 대체로 가상의 이미지다. 보이지 않는 것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즉, 인공지능의 본질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독립된 것도 아니다. 아마도 인간이 목격하게 될 인공지능은 콘텐츠와 융합하여 다양한 분야에 나타나고 있다. 바이오 산업을 중심으로 대부분의 제조산업은 이미 전환점에 와 있다. 환자의 증상을 확인하고 빅데이터 관리기술을 활용해서 모든 의료 기록을 분석해서 희귀병도 정확히 판명한다. 인간이라면 실수할 수 있는 부분도 완벽에 가까운 판단을 해낸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 할 수 없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그만큼 인공지능 기술이 발달했지만, 발달한 기술은 보이지 않는다. 가늠할 수 없는 위험을 지닌 채 기업가들의 무한 도전은 지속되고 있다. 데이터 크기로 생각해보자. 현재 기가바이트 단위가 사용되고 있지만 곧 테라바이트가 일상이 될 것이며, 페타바이트(Petabyte), 엑사바이트(Exabyte), 제타바이트(Zettabyte)에 도달할 것이다. 더 큰 이슈와 문제는 뭔가가 대량으로 생성되고 그 모든 것이 연결되기 시작하면 그 뭔가의 양적인 특성보다는 질적인 특성이 바뀐다는 것이다. 미래의 성장은 모든 것이 혼돈스럽고 뒤섞인 곳에서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스마트 팩토리도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해서 준비되어야 한다. 아디다스(독일)는 7월 11일(현지시간) 홈페이지를 통해 “스피드 팩토리 기술을 아시아 공장 두 곳에 적용할 계획”이라며 “독일 안스바흐와 미국 애틀랜타의 스피드 팩토리는 내년 4월 생산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세계적인 신발 제조업체인 아디다스의 스피드 팩토리는 “스마트 팩토리”의 대표적이며, 선도적인 사례로 소개되어 왔다. 그러나 아디다스의 “스피드 팩토리 실패”가 스마트 팩토리의 실패처럼 보일 수 있다. 실제로 많은 국내 언론의 헤드라인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추진하는 “스마트 팩토리 구축”과는 구분하여 접근할 필요가 있다.왜냐하면, 스마트 팩토리는 하나의 기술이나 솔루션이라는 측면보다는 ‘제조업의 미래비전’ 또는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지향점’이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하다. 아디다스의 이번 조치가 실패로 평가받을 수도 있지만 아디다스가 축적한 많은 경험과 데이터는 훌륭한 자산이 될 것이고, 또 다른 전략으로 이를 활용해 재도약을 이루어 낼 수가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하기 때문이다. 스마트 팩토리는 본격적으로 소개된지 몇 년 지나지 않았고,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따라서 아디다스의 스피드 팩토리는 그 와중에 이뤄진 ‘스마트 팩토리의 실험’ 가운데 하나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스마트 팩토리는 단순한 자동화가 아니며, 여러 분야의 복잡한 기술이 맞물려 돌아가는 보이지 않는 융합기술이다.일각에서는 전통 제조업이 비대면 방식으로 전환했을 경우 결코 호의적일 수 없다고 반문한다. 현재 방식은 고객의 니즈와 불편사항을 현장에서 직접 해결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비대면으로 전환하는 데에는 더딜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하지만 결국 코로나19 사태로 급부상한 비대면 현상은 기존 제조 산업으로부터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4차 산업혁명의 개념은 온택트(On-tact)의 초연결성으로 개인화되고 있는 고객과 시장에서의 협력업체들을 포함한 생태계와 연계하여 새로운 서비스와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 기업들은 4차 산업혁명 개념의 일부분인 프로세스의 디지털화를 통한 효율성 제고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서비스와 제품의 가치사슬(value chain) 측면에서 디지털 혁신에 대한 품질(Quality), 원가(Cost), 납기(Delivery)에 대한 생산관리의 궁극적인 목적을 실현시키는 데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점점 개인화되고 있는 시장에서는 밀레니얼 세대와 개인화 고객층을 중심으로 “미닝아웃(Meaning Out)”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러한 새로운 소비성향(Trend)은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트랜드로 제조업의 변화를 견인하고 있다. 밀레니얼 세대가 새로운 소비의 축으로 등장하면서, 이전 세대보다 자기애(愛)가 강하고, 주관적이며 적극적인 표현으로 여론을 모으며,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이러한 “미닝아웃(Meaning Out)” 현상은 비대면 시장의 성장과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공급자 중심 시장원리로는 더 이상 경쟁우위의 지위를 확보하기가 어려우며, 가까운 미래에는 공급자의 존재감마저도 시장에서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요자 중심 맞춤형 시대를 준비해야 할 분명한 이유이다.아래 그림은 린 생산의 JIT(Just in Time적기납품)과 스마트 팩토리의 FIT(Fit in Time적기맞춤)에 대한 비교 설명이다.출처: 박정수 성균관대 대학원 스마트팩토리 융합학과 겸임교수공급망관리(SCM)적인 측면에서 보면 가치나 이익의 총량은 같으나, 서로의 역할과 능력, 기능에 따라 그 비율이 달라진다. 건전한 공급망 체인은 지속적으로 발전 및 유지가 가능할 때 성장을 한다. 제조업의 경쟁력은 원가경쟁력, 품질경쟁력, 속도경쟁력, 유연한 생산경쟁력, 그리고 건전한 거래 등에 의해 존재한다. 그러나 전체를 하나의 시스템이라고 볼 때 가치 및 이익 지대가 수반이 되지 않는 제품군을 가진 공급망은 유행이나 추세가 끝났을 때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므로 스마트 팩토리를 구축하여 공급망(SCM)과 제조현장의 “생산 대응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정보 설계가이며 ‘분류의 역사’의 저자인 알렉스 라이트(Alex Wright)는 인간의 유전자에는 분류를 하고자 하는 속성이 깃들어 있다고 주장했다.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는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은 분류라는 행위를 통해 사물을 인식하고, 소통했으며,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인류는 그리스 도서관에서부터 중세 암흑시대 수도원에 이르기까지 컴퓨터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정보를 수집하고 분류해왔다. 인공지능 기반 스마트 팩토리를 구축하 위해서는 사용자가 인식하기 쉽도록 정보들을 제공해야 한다. 그 출발점은 “정보 ‘분류’를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한 고민에서부터다. 이러한 작업을 정보 구조화(Information Structurization)라고 부른다. 그 내용은 계층 구조, 계열 구조, 그리고 네트워크 구조가 있다. 정형 데이터든, 비정형 데이터든 구조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의 정보관리 분야와 기술은 단순히 이 모든 역학관계를 다루는 과제에는 미치지 못한다. 정보 관리자는 정보관리의 모든 자원을 계획함으로써 데이터에 대한 접근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한다. 빅(Big)이라는 단어가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빅데이터는 단순히 볼륨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복잡성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빅데이터 관리 기술을 기반으로 스마트 팩토리를 구축할 때, 우선적으로 데이터의 구조화를 정형 데이터와 비정형데이터의 상호작용 및 연결성에 대해서 고려해야 한다. 아디다스가 그동안 축적해 온 스마트 팩토리 기술을 300여개의 협력업체가 있는 아시아 공장 두 곳에 적용할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스마트 팩토리 기술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making invisible visible) 인공지능(AI)과 콘탠츠 융합 기술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데이터 구조화는 인공지능의 시작이며, 인공지능 기반 스마트 팩토리 플랫폼은 제조업의 미래비젼(future vision)이고, 이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속성(attribute)을 갖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일컬어 연결을 통한 경쟁, 즉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 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인공지능 기술과 빅데이터 관리기술을 활용하여 스마트 팩토리를 구축하는 목적은 4차 산업혁명으로 새롭게 부각되는 제조 서비스 역량(제품과 서비스의 결합: product servitization, 서비스의 상품화: service productization)과 새로운 경영 페러다임, 즉 적시맞춤(FIT: fit-in-time)을 실현시키는 것이며, 그 핵심에는 “속도”가 있다.
2020.08.01 I 류성 기자
코로나와 '시공간 압축'의 시대
  • [37]코로나와 '시공간 압축'의 시대
  • [박정수 성균관대 스마트팩토리 융합학과 겸임교수] “작은 것을 연결하여 축적의 힘을 만들어야 한다.” 스마트 팩토리는 생산 현장, 공급망, 그리고 고객과 접점에 있는 플랫폼(platform & click creation)에서 ‘연결의 힘’을 바탕으로 제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경영전략이다. 4차 산업혁명을 일컬어 연결을 통한 경쟁, 즉 “네트워크 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지금까지 대부분의 제조기업은 제품을 주문 받은 뒤 그것을 고려하여 생산계획을 수립하고 생산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소위 매출 추세 분석을 가미시켜 수요예측을 하고, 그에 따른 전사적인 제조 전략을 수립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고객의 물동량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공급 능력 측면에서 유연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막연한 의사결정 위주로 생산(make-to-stock)활동이 진행되어 왔다. 또한, 생산 설비의 순간 정지의 원인이나 작업자의 휴먼 에러(human error)에 대한 불량개선 방안을 찾아내기가 힘들었다. 한마디로 ‘깜깜이’ 생산현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산 현장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조업 특성에 맞는 맞춤형 스마트 팩토리를 구축해야 한다. 시장과 고객이 변화하고 있는 데 생산 현장은 아직도 과거의 생산(make-to-stock) 방식에 머무르고 있는 듯하다. 개인화 고객과 시장은 스마트 팩토리를 통해 미래의 생산(make-to-order) 방식을 요구하고 있다. 경제학의 ‘오스트리아 학파’는 모든 ‘경제적 활동과 사건(economic event)’이 그것에 관련된 특정한 개별 ‘행위자(actor)’의 ‘가치판단(value-judgement)’과 ‘합목적성(rationality)’적인 선택들, 그리고 그 당시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발생한다고 파악했다. 특히 소비자의 주관적 평가로서의 효용을 재화의 가치로써 궁극적으로 생각하고 근대적 인간의 경제활동에 대한 내면적 합리성으로서 한계효용 체감 · 균등의 법칙을 전개하고 생산재 가치는 소비재에서 파생한다는 귀속이론을 구상하는 등 효용가치론 위에서 모든 경제체계를 구축하였고, 미국에서 뿌리내려 1980년대부터 레이거노믹스로 등장한 뒤, 이로 인해 시작된 구글, 아마존과 같은 벤쳐 혁명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4차 산업혁명은 기술 자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제조업의 비용절감과 효율성 증대가 이어진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생산방식(make-to-order)과 적시맞춤(fit-in-time) 생산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맞춤형 인공지능 기반 스마트 팩토리 플랫폼’이 절실하다.1982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지는 최초로 ‘올해의 인물’에 사람이 아닌 개인용 컴퓨터, 즉 PC를 선정했었다. 이는 3차 산업혁명 시대의 시작과 역사적 변화를 알리는 상징과도 같았다. 컴퓨터가 1980년대 이후 기업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우리는 이미 목도해 온 바 있다. 이런 사실과 함께 증기기관 또한 산업혁명을 추진할 수 있는 수준까지 개량되기 위해 여러 세대가 지났듯이, 오늘날 4차 산업혁명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 추진 역량이 개선되기까지 시간이 더 소요될 것으로 보여진다.하지만 우리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시작과 변화의 중심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피부로 직접 느끼기에는 전혀 새로운 것이 없다고 할 수 있겠으나, 제조업들은 하루 하루가 예상하지 못한 경험의 연속이다.역동적인 세계 경제, 4차 산업혁명이 몰고 온 제조업은 새로운 성장 기회를 발굴하기 위해 고객의 통찰력, 내부 프로세스 및 비즈니스 운영에 대한 “인공지능 기반 스마트 팩토리” 구축에 집중해야 한다. 이러한 통찰력을 발견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대규모의 복잡한 데이터 집합이 생성되며, 이는 반드시 현장 경험과 전문 지식을 겸비한 숙련된 전문가들에 의해 관리, 분석 및 조직되어야 한다. 그동안 사용해 온 정형 데이터와 정보통신기술 발달로 새롭게 가치가 증명되고 있는 비정형 데이터에 대해 방대한 데이터 수집으로 집대성하여 우선적으로 스마트 팩토리에 적용시켜야 한다. 스마트팩토리는 기업의 자원을 속도 지향적으로 구축하여 사이버-물리적-사회적으로 상호 연결되어야 한다. 인간 중심에는 소셜 센서, 머신 중심에는 사이버-물리적 시스템(CPS), 노드(node), 소셜 인터랙션(social interaction)이 있다. 또한, 분산 생산 제어를 위한 제품 중심에는 스마트 제품을 통합하는 소셜(social) 제조 환경에서 개인화된 제품 생산으로의 사이버-물리적-사회적 시스템(CPSS: Cyber Physical Social System)을 제안한다. 다중 역할 분산 생산 제어 메커니즘은 사이버-물리적-사회적 시스템(CPSS) 지원으로 개인화된 제품 생산 시스템의 민첩성, 대응성, 유연성 및 조정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준비되어야 한다. 사이버-물리적-사회적 시스템은 맞춤형 제품 생산을 위해 글로벌 사이버-물리적-사회적 융합과 지역 마케팅(Area Marketing)까지 활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프레임웍(framework)은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기반 제조 모드(manufacturing mode) 혁신과 지능형 생산 공정 제어 분야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며, 스마트팩토리의 길라잡이 역할을 할 것으로 판단한다.더 나아가 네트워크의 본질과 관련해 또 다른 중요한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토폴로지(topology)다. 통신 분야에서의 토폴로지는 네트워크의 구성 형태와 형상이다. 통신 노드의 외형적인 연결 모양, 통신망을 구성하기 위한 물리적 결선 방식, 다수의 디바이스가 통신 링크로 상호 연결되어 있는 방식·형태·모양을 의미한다. 또한 수학에서의 토폴로지(위상)는 주어진 공간에서의 집합론적인 연구, 해석학적인 연구 등을 하는 분야이며 적용상의 구분은 집합론적인 위상수학, 대수적 위상수학, 위상해석학 등이 있다. 아래 그림은 네트워크 토폴로지(network topology)를 보여주고 있다. 출처: 성균관 대학교 대학원 스마트팩토리 융합학과 박정수 겸임교수4차 산업혁명은 통신혁명의 시대이며, “토폴로지” 시대이다. 제조업의 새로운 전략은 바로 “시공간 압축”이라는 인간의 시간 감각에서 출발해야 한다. 1966년 미국의 사회학자 도널드 제널(Donald Janelle)이 처음 정의한 개념으로 운송 기술이 발달하면서 물리적인 거리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공간 압축 현상은 비대면 시대에 온택트(ontact) 현상을 떠오르게 한다. 물리적인 거리는 인류사에 중요한 개념적 감각이었다. 인류 역사에서 대부분의 기업 경쟁과 권력 투쟁이 공간적인 지배와 영토를 대상으로 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듯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과제는 다름 아닌 “시간과 속도”이다. 1차, 2차, 3차 산업혁명 시대에서의 “시간”은 돈이 되었고,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속도”가 그 핵심이 되고 있다. 3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변하는 린 생산(lean Production)의 핵심인 JIT(just in time)은 시간이 비용이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준비하는 스마트 팩토리의 핵심인 FIT(fit in time, 적시맞춤)은 속도가 비용이다. 우리는 속도로 기업을 알아보고, 속도로 발전을 판단한다. 속도는 인간의 인식에 영향을 미쳐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구글의 연구에 의하면 클릭 크리에이션(click creation) 시대의 검색 시간이 1초에서 10분의 1초 미만으로 줄어들자 사용자의 행동이 변했다고 한다. 이처럼 속도는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을 바꾼다. 2019년 11월 11일 알리바바가 달성한 중국 광군절 하루 매출 45조의 의미도 속도다. 이처럼 토폴로지(topology)를 통해 거리, 속도, 힘을 함께 융합시키는 기술은 사물의 본질을 변화시키고 있다. 스마트 팩토리를 통해서 입증되고 있지만 사실 모든 것은 연결된 속도와 힘에 따라 “입지 효용”이 바뀐다. 똑같은 거리라도 더 빠른 속도로 연결되면 더 유력해지거나 중요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속도의 시대’에 맞는 전략(적시맞춤, fit in time)을 만들어야 한다. 제조업의 미래는 기업의 속도, 가능성, 유연성을 위해 맞춤형 직원(staff on demand)은 기본이며, 그러한 사회적 자원을 활용하기 위해서도 스마트 팩토리는 시대적인 명령이다. 정보 설계가이며 ‘분류의 역사’의 저자인 알렉스 라이트(Alex Wright)는 인간의 유전자에는 분류를 하고자 하는 속성이 깃들어 있다고 주장했다.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는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은 분류라는 행위를 통해 사물을 인식하고, 소통했으며,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그리스 도서관에서 중세 암흑시대 수도원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컴퓨터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정보를 수집하고 분류해 왔다. 여기서도 분류의 목적은 속도이다.‘인공지능 기반 스마트 팩토리’를 구축하기 위해서 사용자가 인식하기 쉽도록 정보들을 제공해야 한다. 그 출발은 “정보 분류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러한 작업을 “정보구조(information structure)”라 부른다. 그 내용은 계층 구조, 계열 구조, 그리고 네트워크 구조가 있다. 정형 데이터는 물론 비정형 데이터 역시 구조화(Structurization)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 또한 그 목적이 속도에 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4차 산업혁명을 일컬어 연결을 통한 경쟁, 즉 “네트워크 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인공지능 기술과 빅데이터 관리기술을 활용하여 스마트 팩토리를 구축하는 목적은 적시맞춤(fit-in-time)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그 핵심에는 “속도”가 있다.
2020.07.25 I 류성 기자
<6> '르네상스 최대 스폰서' 메디치家…다빈치 찾아내다
  • [이주헌의 혁신@미술]<6> '르네상스 최대 스폰서' 메디치家…다빈치 찾아내다
  • ‘코지모 데 메디치 초상화’. 예술과 학문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지원했던, 메디치가문의 신화를 만든 이다. 1518∼1520년경 자코포 다 폰토르모가 패널에 오일로 그렸다.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소장.미술은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밥으로만 채울 수 없는 풍요와 평화를 안겨줬으니까요. 그림의 힘이고 조각의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미술의 역할이 이뿐이라 한다면 미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문명을 이끌고, 의식을 뒤집고, 결정적으로 돈의 흐름을 주도했던, 그것을 못 본 겁니다. 미술의 사조와 양식이 탄생할 때마다 세계경제에는 ‘변화의 그림’이 걸렸습니다. 바로 ‘혁신’을 주도했던 겁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미술로 이룬 혁신’의 현장입니다. 3D 컴퓨터그래픽에까지 이어지는 이집트 미술, 스페이스X 민간우주선의 근원인 그리스 미술, 대량생산의 개념을 만든 목판화, 메디치가문의 부가 만든 피렌체 미술, 부르주아를 탄생시킨 인상파 미술 등을 비롯해 구스타프 클림트, 파블로 피카소, 앤디 워홀, 데미안 허스트 등 ‘혁신의 아이콘’까지.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주헌 미술평론가] “돈을 버는 것보다는 의미를 만드는 데 열정을 바쳐라.” 애플의 ‘치프 이밴절리스트’(Chief Evangelist·기술전도사)였던 미국의 유명 마케터 가이 카와사키(66)는 ‘의미를 만드는 것’이 혁신의 첫걸음이라고 말한다. 그는 ‘혁신의 기술’을 주제로 한 테드 강연에서 열 개의 ‘팁’을 나열하고, 그 가운데 ‘의미를 만들라’를 첫 계명으로 꼽았다. 그에 따르면 “의미를 만드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세상을 변화시키면 돈은 자연히 따라오기 마련”이다. 카와사키는 그 사례로 다음의 기업들을 들었다. “애플은 ‘컴퓨터를 민주화’하고자 했다. 컴퓨팅 파워를 모두에게 가져다주기를 원했다. 그것이 애플이 만든 의미다. 구글은 ‘정보를 민주화’하고자 했다. 모두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 이베이는 ‘거래를 민주화’하고자 했다. 웹사이트가 있는 누구나 다른 큰 소매점과 정면으로 맞설 수 있도록 했다. 유튜브는 사람들이 영상을 만들고, 업로드하고, 나눌 수 있기를 원했다. 이것이 기업과 그들이 만들고자 한 의미의 사례들이다.” 카와사키의 관점에서 보자면, 어떤 비즈니스도 단순히 이익이나 이윤만을 추구하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그 차원을 뛰어넘는 의미를 창출하지 못한다면, 그 비즈니스는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데도 결국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 혁신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고, 혁신이 없이는 성장도 없기 때문이다. 혁신은 바로 의미를 찾고 만드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메디치가문, 편견·멸시 딛고…자본·예술 결합한 ‘불후의 명작’ 빚어내 역사학자들은 문화혁신의 대명사인 르네상스가 메디치가문이 있어서 가능했다고 말한다. 메디치가가 르네상스를 활짝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경제활동이 역사적 의미를 지닌 문화활동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시로써는 심각한 비난과 저주의 대상이던 대금업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활동이 합리적인 경제활동이자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의미창출 활동이기를 바랐다. 그 열정적인 ‘투쟁’에서 그들은 결국 승리했다. 메디치가는 이처럼 비즈니스와 의미를 하나로 연결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메디치 머니’를 쓴 영국 출신 경제사학자 팀 팍스(66)는 메디치가문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피렌체에 기반을 둔 메디치가문은 자본과 예술을 결합하여 피렌체 전체를 불후의, 그리고 불멸의 걸작으로 만들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피렌체의 명성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지 않았을 것이다. … 르네상스가 꽃을 피운 것은 바로 이 우수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수라’(usura)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메디치가문에 번영을 가져다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1360∼1429)는 대금업으로 집안을 일으켰다. 중세 유럽에서는 대금업을 신성모독과 같은 죄로 쳐서 심지어 “대금업자의 시신은 개나 소·말의 주검과 함께 구덩이에 묻는 게 마땅하다”(1274년 리옹공의회)고 할 정도였다. 그런 편견과 멸시를 딛고 큰 부를 일군 조반니는 아들 코지모 데 메디치(1389∼1464)에게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게 했다. 그 덕분에 코지모는 라틴어·헬라어·히브리어·아랍어에 능했고, 고문서를 숙독하고 철학을 공부하며 인문학자들과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 인문학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컸는지 젊은 날 고문서를 수집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예루살렘까지 가려는 것을 아버지가 가까스로 말릴 정도였다. ‘메디치가문의 문장’이 든 조각. 1200년대 초에 만들어진 메디치가문의 문장은 6개의 붉은 원으로 장식했는데, 이후 가장 높은 원에 프랑스 발루아왕가의 문장인 3개의 백합 문양이 새겨진다. 동글동글한 공 모양을 두고는 여러 설이 있다. 메디치의 어원이 ‘메디슨’에서 유래하듯 약의 형체에서 따왔다는 설, 돈을 상징한다는 설 등.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소장.이렇게 성장한 코지모가 예술과 학문의 후원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예술과 학문에 대한 그의 남다른 이해와 사랑은 그에게 양립불가능한 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가져다줬다. 당시 금융업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과 그 뿌리가 되는 기독교 교리는 금융업자가 대변하는 강력한 세속적 욕망과 심한 갈등을 빚고 있었다. 바로 이 신앙과 현실의 모순을 코지모는 예술로 극복한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천재들의 손을 빌려 신을 찬양하고 도시를 아름답게 만드는 메디치가의 돈을 사람들은 더 이상 무조건적으로 비판할 수 없었다. 코지모는 많은 고문서를 수집해 고대 그리스·로마 철학의 보고인 메디치가문 도서관을 설립했고, 산마르코수도원을 건축·회화의 빛나는 아이콘으로 재건했다. 괴팍한 건축가 브루넬레스키를 후원해 찬란한 두오모 성당의 돔을 설계하게 했고, 도나텔로·필리포 리피 등 초기 르네상스 대가들의 든든한 뒷배를 보아줬다. 인문학 연구의 요람인 플라톤아카데미의 설립에도 관여하고 지원했다. 코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피렌체시가 그에게 국부(國父·Pater Patriae)의 칭호를 선사한 것은 누가 봐도 그 공적에 걸맞은, 당연한 예우였다. △피렌체시, 코지모 데 메디치 사후에 ‘국부’ 칭호 선사피렌체의 르네상스는 코지모의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에 이르러선 절정을 이뤘다. ‘위대한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로 불린 데서 알 수 있듯 로렌초는 르네상스의 가장 강력하고도 영향력 있는 후원자였다. 어릴 적부터 당대 최고의 석학들에 둘러싸여 공부한 로렌초는 그 스스로 탁월한 시인이었다.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늘 역사라는 거시적인 흐름 속에서 돌아봤고 전성기 르네상스의 거장들, 곧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산드로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을 적극 후원했다. 할아버지가 만든 도서관을 더욱 크게 확장하고 피사대와 피렌체대에 거금을 기부했다. 그런 그에 대해 ‘처세의 지혜’를 쓴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1483∼1540)는 “피렌체에 독재자가 있어야 한다면 이보다 훌륭하고 매력적인 독재자는 없을 것”이라고 평했다. 이렇게 한 시대를 넘어 그 후까지 강력하고도 광범위한 정신적·감성적 영향을 끼친 가문은 세계사적으로도 찾기가 어렵다. 메디치가는 이처럼 전무후무한 문화사적 의미를 창출한 집안이었지만, 더불어 당대의 가장 선구적인 금융인으로서 근대 경제의 기초를 놓은 사람들이기도 했다. 흑사병이 창궐해도 신용을 지켜야 한다며 은행 문을 닫지 않을 정도로 돈을 열심히 벌었으나 그렇다고 돈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다. 메디치가 사람들에게 돈은 뿌리요, 정치는 줄기와 가지였으며, 문화예술은 꽃과 열매였다. 아름답게 꽃을 피우고 풍성하게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불휘 깊은’ 거목이라도 존재의 의미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그 사실을 잊지 않고 노력한 끝에 결국 르네상스라는 대혁신을 선도했다.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수태고지’. 1442∼1443년에 제작됐다. 메디치가의 후원으로 아름답게 재건한 산마르코수도원에는 안젤리코의 프레스코 시리즈가 곳곳에 들어 있다. 높이 230㎝ 너비 321㎝에 달하는 대작이다. 이탈리아 피렌체 산마르코미술관 소장.△포드, 어머니 죽음으로 ‘말보다 빠른 탈 것’ 갈망…자동차사업 의미 창출 메디치가뿐 아니라 많은 비즈니스 거장들에게서 우리는 ‘의미 추구’가 갖는 고귀한 혁신의 사례를 무수히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1863∼1947)는 어릴 적 어머니가 위독해지자 말을 몰아 의사에게 달려갔으나 돌아왔을 때는 안타깝게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말보다 빠른 탈 것에 대한 갈망이 이때 생겨났다고 한다. 그 갈망이 그의 자동차 사업에 의미와 추진력을 더해줬다. 화가였던 새뮤얼 모스(1791∼1872)는 멀리 출타 중에 아내의 발병 소식을 들었지만 인편으로 소식을 접한 탓에 집에 돌아왔을 때는 장례식까지 끝난 뒤였다. 그것이 한이 된 그는 전신기술과 모스부호를 개발하게 됐다. 손을 자주 베이고 다치는 아내가 안쓰러워 약을 발라주던 존슨앤드존슨의 직원 얼 딕슨(1892~1961)은 자신의 부재중에도 아내가 스스로 치료할 수 있도록 반창고에 붕대를 붙이고 소독약까지 뿌린 ‘밴드에이드’를 만들었다. 아내에 대한 사랑이 히트상품의 개발과 생산으로 이어진 것이다. 의미를 만드는 것은 비즈니스에 혁신을 가져올 뿐 아니라 무엇보다 삶에 보람을 가져온다. 그것이 꺼지지 않는 창조의 에너지가 된다. ※ 우수라 usura. 라틴어로 ‘사용한다’란 의미의 명사다. 이로부터 ‘고리대금’ 혹은 ‘고리대금업’을 뜻하는 영어 ‘유저리’(usury)가 파생됐다. 메디치가문의 부를 만든 출발점인 우수라는 ‘개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받는 돈놀이’로 풀이할 수 있다. 이 행위가 ‘천대받는 대금업’으로 몰렸던 것은 당시 교회법이 이자받는 일을 금지했기 때문. 메디치가는 이 문제를 이자라는 표현 대신 비용이란 개념으로 풀었다. 현대식으로 말해 채권자의 대출행위에서 발생한 손실 혹은 비용에 대해 보상차원에서 지급하는 것을 이자라고 가정해 교회법과의 충돌을 피했던 것이다. 우수라에서 출발한 메디치가의 금융업은 ‘메디치은행’을 만들면서 본격화했다고 볼 수 있다. 메디치은행은 로마은행에서 평사원으로 경험을 쌓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가 1397년 피렌체에 세운 은행이다. 지주 딸이 결혼지참금으로 들고온 1500플로린(피렌체금화·지금 돈 12억원)을 쌈짓돈 삼아 8000플로린의 자본금을 들였다. 환전과 대부업을 주 업무로, 메디치은행이 첫해 8개월 동안 남긴 이익은 약 1200플로린(수익률 10%). 이후로도 오랫동안 교황청의 공식은행으로, 세계에서 교황청으로 들어오는 막대한 자금을 관리했다. △이주헌 미술평론가는…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
2020.07.24 I 오현주 기자
김근식, 이인영 사상검증한 태영호에 "냉전시대 색깔론" 지적
  • 김근식, 이인영 사상검증한 태영호에 "냉전시대 색깔론" 지적
  • [이데일리 송주오 기자] 김근식 경남대 교수(미래통합당 서울 송파병 당협위원장)가 23일 태영호 통합당 의원이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에게 사상전향을 요구한 것에 비판했다. 김 교수는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태 의원에게 “사상전향을 공개요구하는 건 초점이 잘못된 접근”이라고 지적했다. 김근식 자문단장이 지난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미래통합당의 ‘박지원 국정원장 후보자 청문자문단 및 정보위원 2차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태 의원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이 후보자는 주체사상을 버렸다, 주체사상 신봉자가 아니라는 공개선언을 한 적이 있느냐”고 추궁했다. 이에 이 후보자는 “사상전향은 태 의원처럼 북에서 남으로 왔을 때 해당되고, 저는 그런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라며 “아무리 의원님이 저한테 청문위원으로서 물어본다고 해도 그건 온당하지 않은 질의내용”이라고 맞받아쳤다. 김 교수는 이같은 태 의원 질의에 냉전시대 색깔론으로 오해받기 쉽다고 우려했다. 그는 “저도 햇볕정책 지지에서 신중한 입장으로 바뀌고, 국민의당을 거쳐 통합당으로 옮겨왔는데, 지난 총선에서 일부 강성보수 성향분들이 전향선언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며 “사람은 누구나 생각이 바뀝니다. 그런데 생각의 변화를 이른바 사상검증의 잣대로 전향선언 방식으로 요구하는 건, 중세 마녀사냥과 다를 바 없다”고 강조했다.김 교수는 이 후보자가 전대형 초대의장을 지낸 만큼 통일부 장관으로서 합당한 대북관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건 맞지만 접근방식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통일부 장관에게 북한정권에 대한 견해, 한미관계에 대한 입장 등을 요구할 수 있지만 사상전향은 초점을 흐렸다고 거듭 지적했다.그러면서 “후보자의 입을 통해 대한민국 통일부장관에 걸맞는 대북관 통일관을 밝히도록 요구하고, 그 입장이 적절치 않을 경우 야당으로서 송곳처럼 지적하고 엄정하게 따져 물으면 될 일”이라고 조언했다.한편, 김석기 외통위 야당 간사는 “과거 후보자가 김일성 전 주석의 사상 추구한 전대협을 추구한 전대협 회장을 한 만큼 주체사상을 묻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태 의원을 변호했다.
2020.07.23 I 송주오 기자
언택트를 넘어 온택트(Ontact) 시대가 왔다
  • [36]언택트를 넘어 온택트(Ontact) 시대가 왔다
  • [박정수 성균관대 스마트팩토리 융합학과 겸임교수] 한국판 뉴딜 정책은 저성장, 양극화가 심화되고 코로나19의 경제충격이 큰 상황에서 현재 위기를 극복하고 글로벌 경제를 선도하기 위한 국가발전 전략이다. 특히 디지털경제를 통해서 똑똑한 나라를 만들고, 그린 경제를 통해서 그린 선도국가를 만들며, 양극화 해소를 위한 경제사회 대전환을 통해서 더 보호받고 따뜻한 나라를 만들고, 디지털 경제를 통해서 추격형에서 선도형 국가로 탈바꿈하고, 탄소를 줄여서 그린경제로 가며, 사회안전망을 구축하여 포용국가로 가자는 것이다. 한국판 뉴딜 정책은 4차 산업혁명의 기저(基底)가 흐르고 있는 훌륭한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그 중심에는 작년에 중기벤처기업부(박영선 장관)가 그토록 강조해 왔던 DNA(Digital, Network, Artficial Intelligence)와 인공지능 기반 스마트팩토리가 있다.20여년전 컨택트(Contact)라는 영화가 상영되었는데 현 시대에 대한 기시감(旣視感.데자뷔)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상상하기 힘든 아주 먼 물리적인 거리, 사고체계가 다른 언어적, 심리적 거리에 존재하는 외계생명체를 직접 대면하기까지의 엄청난 열정과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 반영되었던 영화로 기억하고 있다. 기술이 발전하고 자본주의 경제가 고도화 될수록 역설적으로 사람과 사람간의 만남, 정서적 교류는 더욱 더 중요해지고 있다. 이처럼 컨택트(Contact)의 중요성은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19의 영향으로 교류의 방법이 급변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의 가장 큰 키워드 중 하나가 언택트 (Untact)이다. 즉 서비스나 상품을 구매하는 과정에서 통신기술이나 무인기술 등과 같은 첨단 기술과 기기를 사용하여 판매자와 직접적인 대면이 없이도 재화와 서비스가 제공되는 새로운 소비 성향을 의미한다.최근에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온택트(Ontact)가 확산되고 있다. 비대면을 일컫는 언택트 (Untact)에 온라인을 통한 외부와의 연결(on)을 접목시킨 개념으로, 온라인을 통해 소통하는 방식을 온택트(Ontact)라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적 거리두기 등 집에서 머무르는 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온라인을 통해 외부와 연결하고, 다양한 활동을 하는 새로운 생활 추세, 신념을 뜻하는 ‘미닝(Meaning)’과 ‘벽장 속에서 나오다’라는 뜻의 ‘커밍아웃(Coming Out)’을 결합한 신조어처럼, 자신이 옳다고 지지하는 것을 더 이상 생각 안에 묶어 두지 않고 ‘소비’로 표현해 본인의 가치관을 한층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이를 통해 만족감을 느끼고 소비성향을 보이는 미닝아웃(Meaning Out)과 같은 라이프스타일(Lifestyle)을 말한다.점점 개인화되고 있는 시장에서는 밀레니얼 세대와 개인화 고객층을 중심으로 “미닝아웃(Meaning Out)”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새롭게 나타나고 소비성향이 제조업의 변화를 자극하는 등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고 있는 트랜드로 나타난다. 이러한 비대면 시장은 성장과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특히, 밀레니얼 세대가 새로운 소비의 축으로 등장하면서, 이전 세대보다 훨씬 활발하게 자기 주관에 대해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여론을 모으며, 변화를 꾀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더 이상 공급자 중심 시장원리로는 경쟁우위의 지위를 확보하기가 무척 어려우며, 가까운 미래에는 시장에서 공급자의 존재감 마저도 없어 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요자 중심 맞춤형 시대를 준비해야 할 분명한 이유이다.최근 신흥 공급자로서 강력한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아마존은 모두가 인정하는 글로벌 유통의 대표 플랫폼이다. 그런데 비대면 시장(non-face-to-face market)이 강화되고 있는 제조업의 환경 속에서 나이키를 비롯한 약 100여개의 브랜드가 아마존과 단절하고 소비자 직접 판매(D2C: Direct to Consumer)를 위한 자체 플랫폼(e-commerce)을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비대면 시장이 개인화 시장을 의미하며 대표적인 “수요자 중심 시장과 고객”에 대응하기 위한 스마트 팩토리이기 때문이다.공급망관리(SCM)적인 측면에서 보면 가치나 이익의 총량은 같으나, 서로의 역할과 능력, 기능에 따라 그 비율이 달라진다. 건전한 공급망 체인은 지속적으로 발전 및 유지가 가능할 때 성장을 한다. 제조업의 경쟁력은 원가경쟁력, 품질경쟁력, 속도경쟁력, 유연한 생산경쟁력, 그리고 건전한 거래 등에 의해 존재한다. 그러나 전체를 하나의 시스템이라고 볼 때 가치 및 이익 지대가 수반이 되지 않는 제품군을 가진 공급망은 유행이나 추세가 끝났을 때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 제조업은 여러 산업분야에서 아직 기회가 있다. 부족한 부분을 인식하고 기업간에 서로의 입장에서 건전하면서도 상호발전적인 거래를 통하여 협조하고 협력을 한다면 새로이 많은 기회를 맞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제조업을 중심으로 하여 우리기업의 발전과 경쟁력 강화방안을 찾는 데 있다. 그리고 국민들이 행복하고 보편적인 삶의 질이 개선된 일류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데 있다. 정보 설계가이며 ‘분류의 역사’의 저자인 알렉스 라이트(Alex Wright)는 인간의 유전자에는 분류를 하고자 하는 속성이 깃들어 있다고 주장했다.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는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은 분류라는 행위를 통해 사물을 인식하고, 소통했으며,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그리스 도서관에서 중세 암흑시대 수도원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컴퓨터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정보를 수집하고 분류해왔다. 인공지능 기반 스마트 팩토리를 구축하기 위해서 사용자가 인식하기 쉽도록 정보들을 제공해야 한다. 그 출발점은 “정보 ‘분류’를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한 고민에서부터다. 이러한 작업을 정보구조화(information structurization)라고 부른다. 그 내용은 계층 구조, 계열 구조, 그리고 네트워크 구조가 있다. 정형 데이터든, 비정형 데이터든 구조화(Structurization)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의 정보관리 분야와 기술은 단순히 이 모든 역학관계를 다루는 과제에 미치지 못한다. 정보 관리자는 정보관리의 모든 자원을 계획함으로써 데이터에 대한 접근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한다. 빅(Big)이라는 단어가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빅데이터는 단순히 볼륨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복잡성에 대한 것이다. 빅데이터로 간주되는 많은 소규모 데이터 셋(data set)은 물리적 공간을 많이 소비하지 않지만, 본질적으로 복잡하다. 동시에 상당한 물리적 공간이 필요한 대규모 데이터 셋은 빅데이터로 간주될 만큼 복잡하지 않을 수도 있다. 빅 데이터 라벨에는 규모(volume) 외에도 다양성(Variety), 속도(Velocity) 등 빅 데이터의 3대요소(3V)를 포함하고 있다. 3대요소의 V 외에도, 데이터의 진실성(Veracity)은 데이터 무결성과 조직이 데이터를 신뢰할 수 있고 중요한 의사결정을 위해 데이터를 자신 있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조직(기업)은 의사 결정, 기회 및 전반적인 성과를 개선하고 새로운 방법을 찾기 위해 점점 더 빅데이터로 눈을 돌리고 있다. 스마트 팩토리의 핵심기술인 빅데이터 관리 기술은 제조업이 고객 주문 패턴, 자재관리, 구매 행동, 공급망 관리, 그리고 매출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진 다른 동인을 추적하고 분석할 수 있게 함으로써 고객의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전례 없는 통찰력을 제공한다.그러므로 빅데이터 관리 기술을 기반으로 스마트 팩토리를 구축할 때, 우선적으로 데이터의 구조화를 정형 데이터와 비정형데이터의 상호작용 및 연결성에 대해서 고려해야 한다. 수학적인 사고의 영역을 빌려보면, 직선 위에서는 운동에너지의 “축적 후 발산”이 없다. 그러나 사이클로이드 곡선 위에서는 전반기에 운동에너지를 축적하여 후반기에 발산한다는 수학적인 지혜가 있다. 그러므로 사이클로이드 곡선은 눈에 보이는 직선 코스보다 목적함수를 빨리 달성할 수 있는 길이다. 스마트 팩토리 구축에 있어서 빅데이터 관리 기술과 인공지능 기술은 스마트 팩토리의 목적을 최대한 빨리 달성하기 위한 최선의 길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일반적인 시스템(ERP,MES)보다 더 효율적인 길을 가야 한다. 이런 길을 우리는 우회로(迂廻路, roundabout path)라고 표현하고, 연결의 힘을 바탕으로 제조생산과 공급망 분야를 인공지능 기반 스마트팩토리 플랫폼으로 구축하고 있는 제조업의 스마트팩토리 구축전략을 우회축적(迂廻蓄積, roundabout accumulation)이라고 정의하자. 4차 산업 혁명 시대의 최대 최강의 제조업체는 애플과 나이키일 것이다. 공통점은 공장을 소유하고 있지 않지만 가장 강력한 스마트팩토리 개념을 생산현장에 실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키는 10억달러 이상을 스마트팩토리 구축에 투자하고 있으며, 애플은 자신의 앱 스토어(app store)상에 올려진 앱(app)들을 거쳐 이뤄진 상거래의 규모가 5190억달러(약 626조8482억원)라고 한다. 바로 이것이 제조업의 스마트 팩토리를 통해서 제조부흥을 일으키기 위한 제조업 경영전략의 “우회축적”이 아닐까? 왜냐하면 현장에 제조업의 핵심역량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답이다.
2020.07.18 I 류성 기자
<5> "복제한 성화 팝니다"…교회, 블루오션에 뛰어들다
  • [이주헌의 혁신@미술]<5> "복제한 성화 팝니다"…교회, 블루오션에 뛰어들다
  • 복제해서 대량생산할 수 있는 판화. 그 조상격인 ‘목판화’를 서양에서는 14세기 말부터 본격 제작했는데, 여기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은 이는 미술가도 장인도 아닌 교회와 수도원이었다. 성화를 가질 수 없는 가난한 신도를 대상으로 ‘복제한 성화’를 팔았던 거다. 매스미디어 아트의 잠재력을 알아본 ‘가치혁신’이었다. 그즈음인 1423년경 제작된 작자 미상의 ‘성 크리스토포루스’(St Christophorus)는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서양 목판화 중 하나다.미술은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밥으로만 채울 수 없는 풍요와 평화를 안겨줬으니까요. 그림의 힘이고 조각의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미술의 역할이 이뿐이라 한다면 미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문명을 이끌고, 의식을 뒤집고, 결정적으로 돈의 흐름을 주도했던, 그것을 못 본 겁니다. 미술의 사조와 양식이 탄생할 때마다 세계경제에는 ‘변화의 그림’이 걸렸습니다. 바로 ‘혁신’을 주도했던 겁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미술로 이룬 혁신’의 현장입니다. 3D 컴퓨터그래픽에까지 이어지는 이집트 미술, 스페이스X 민간우주선의 근원인 그리스 미술, 대량생산의 개념을 만든 목판화, 메디치가문의 부가 만든 피렌체 미술, 부르주아를 탄생시킨 인상파 미술 등을 비롯해 구스타프 클림트, 파블로 피카소, 앤디 워홀, 데미안 허스트 등 ‘혁신의 아이콘’까지.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주헌 미술평론가]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왕서방이 번다’는 말이 있다. 수고한 사람 따로 있고 덕 보는 사람 따로 있다는 말이다. 인생사나 비즈니스에서 곧잘 일어나는 일이다. 얼핏 불공정해 보이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곰’이 자신의 재주를 알아보지 못한 반면, ‘왕서방’이 이를 알아보고 그 권리를 사용했다면 가치를 알아본 사람이 그만한 보상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혁신은 단순히 기술이나 품질의 제고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그런 단위(單位)적 성취도 중요하지만, 기술과 노하우를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사용할 때 최상의 가치를 창조할지 전체와 맥락을 통찰하는 능력에서도 나온다. 꼭 없던 것을 새로이 만드는 것뿐 아니라 기존에 있던 것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 역시 혁신을 초래한다. 이른바 ‘가치혁신’이다. △소프트웨어 가치 알아본 빌 게이츠…곰 재주 알아본 ‘왕서방’ 돼 마이크로소프트의 MS-DOS 운영체제는 빌 게이츠(65)가 직접 만든 게 아니다. 그는 불과 7만 5000달러(약 9000만원)를 주고 다른 회사로부터 86-DOS를 구입했다. 게이츠는 86-DOS를 보완해 이를 MS-DOS로 IBM에 공급했다. 1981년 애플이 주도하던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 뒤늦게 뛰어든 IBM은 운영체제의 중요성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IBM은 운영체제를 ‘아웃소싱’함으로써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이를 공급받았다. IBM은 ‘돈이 되는’ 컴퓨터 본체를 생산하니 운영체제처럼 ‘부수적인’ 것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게이츠는 컴퓨터의 미래가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에 달려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IBM에 MS-DOS를 팔 때도 제삼자 사용권 등 운영체제에 대한 권리는 넘기지 않았다. 이후 컴퓨터 제조사가 우후죽순으로 생기고 저마다 MS-DOS를 사용하자 게이츠가 가치혁신의 주도자라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났다. 우리가 알 듯 그는 컴퓨터산업의 ‘왕서방’이 되었고, 86-DOS의 권리 일체를 다 판 최초의 개발사나 갈수록 쇠락한 IBM은 결과적으로 ‘곰’이 되고 말았다. 미술의 여러 장르 가운데 판화는 근대 미디어산업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친 문명사적 의미를 지닌다. 모든 판화예술의 조상격인 목판화는 서양의 경우 14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됐다. 그런데 초기에 이 신생 예술로부터 가장 큰 이득을 얻은 이는 미술가나 장인들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교회와 수도원이었다. 교회와 수도원이 ‘매스미디어 아트’로서 판화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블루오션’을 개척해 가치혁신의 선구자가 된 것이다. 내막은 이렇다. 널리 알려져 있듯 목판인쇄술의 원류는 중국이다. 3세기 초 비단에 목판으로 꽃무늬를 찍은 한나라의 유물이 지금껏 전해진다. 중국의 영향으로 우리나라도 일찍부터 목판인쇄술이 발달했다. 논란이 있긴 하지만, 현전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평가받는 우리나라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통일신라시대의 것(751년 이전)으로 추정한다. 반면 유럽에서는 목판인쇄술이 뒤늦게 꽃피었다. 중국식 목판인쇄술이 유럽에 전파된 게 13세기 무렵이다. 이 수입기술을 발전시켜 유럽에서는 14세기 말부터 목판화를 본격적으로 만들었다. 유럽의 판화예술은 이처럼 그 출발이 아시아에 비해 상당히 늦었다. 하지만 초기 목판화 시장의 급격한 확산을 토대로 동판화·석판화 같은 혁신적인 판화기술을 개발하고 다양한 종류의 판화작품들을 양산함으로써 이후 판화예술뿐 아니라 신문·잡지 등 미디어산업을 선도하게 된다. 초기에 판화시장 확대를 주도한 교회와 수도원이 바로 그 성장의 디딤돌을 놓아준 것이다. 작자 미상의 ‘성 크리스토포루스’(St Christophorus).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서양 목판화 중 하나로 1423년경 제작됐다. 크리스토포루스는 가나안(혹은 시리아) 출신의 3세기경 인물. ‘그리스도를 업은 자’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기독교 성인 14명’ 중 한 사람으로 항해자·여행자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됐다. 영국 맨체스터 존 라이랜즈 도서관 소장.△목판화 제작해 이득 본 건, 미술가·장인 아닌 교회·수도원 중세 유럽인들은 잦은 전쟁과 전염병, 기근으로 힘겨운 삶을 살았다. 흑사병이 심하게 돈 14세기에는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그 제물로 사라졌다. 이런 시련 속에서 사람들은 재난과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신의 은총과 가호뿐이라고 생각했다. 중세 초부터 유럽의 교회와 수도원은 성인(聖人)과 순교자의 유해 같은 성유물(聖遺物)을 수집했는데, 이는 성유물에 병을 치유하고 재난을 막아주는 영험한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많은 순례자가 그 기적을 체험하고자 소장처를 찾아다니니 교회와 수도원은 더욱 열정적으로 성유물을 수집했고, 성유물로 소문난 교회와 수도원에는 신자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엄청난 수입이 발생했다. 성유물에 대한 믿음과 함께 성화(聖畵)에 대해서 또한 기적과 은총의 통로라는 인식이 자라났다. 성인이나 순교자를 그린 성화를 개인이 소유하는 것은 그 통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성화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은 컸지만, 대다수의 가난한 신자들에게 성화 소유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즈음 값싼 복제미술인 목판화가 제작되기 시작하자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든 게 교회와 수도원이었다. 교회와 수도원이 직접 나서서 성화 목판화를 대량으로 찍어내기 시작했고 이를 신자와 순례자에게 팔아 그들도 ‘은총을 소유할 기회’를 갖게 했다. 이 블루오션의 개척으로 교회가 큰 이득을 봤음은 물론이다. 그렇게 제작한 목판화의 인기 주제 가운데 하나가 성 크리스토포루스(St Christophorus·크리스토퍼)였다. 1423년경에 제작된 작자 미상의 목판화 ‘성 크리스토포루스’를 보면, 크리스토포루스가 어린 예수를 어깨에 태워 나르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힘이 세고 건장한 크리스토포루스는 강가에서 지내며 돈이 없어 배를 타지 못하는 사람들을 자기 어깨에 태워 건네주곤 했다. 한 번은 어린아이를 옮겨주다가 아이가 갑자기 너무 무거워지는 바람에 가까스로 강을 건넌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그 아이가 예수였다. ‘예수를 건네준’ 크리스토포루스는 이후 뱃사공과 어린이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졌고, 그의 이미지를 본 사람은 그 당일에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겨났다. 그때부터 뱃사람을 비롯해 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성 크리스토포루스 목판화를 구입했고, 이 문화는 오늘날 안전운전을 기원하는 서양인들이 자동차에 성 크리스토포루스 이미지를 새긴 스티커나 장식물을 부착하는 문화로 남아 있다. △통찰력을 얻으려면…기능적 사고 넘어 통합적 사고 필요일찍이 ‘블루오션 전략’을 주창한 프랑스 인사이드경영대학원의 김위찬 석좌교수와 르네 마보안 교수는 ‘가치혁신이론’을 제안하며, 기업들로 하여금 신기술 개발에만 매달리지 말고 성장이 제한된 시장을 넘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라고 권했다. 두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굴지의 세계적 기업들은 대부분 기존 시장에서 경쟁자들과 싸우는 것보다 참신한 아이디어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함으로써 크게 성공했다. 곰이 부리는 재주가 기술혁신이라면, 그런 단위 혁신을 뛰어넘어 전체를 꿰뚫어봄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는 게 왕서방의 혁신, 곧 가치혁신이다. 이런 통찰력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기능적 사고를 넘어 통합적·통섭적 사고를 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생각의 탄생’(2001)의 저자인 로버트 루트번스타인과 미셸 루트번스타인 부부가 한 다음의 말을 깊이 새겨들을 만하다. “우리에게는 통합적인 마인드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 혁신의 기법이란 항상 모든 분야에 걸쳐 있으며 다양한 방법론을 가진다. 따라서 미래는 우리가 앎의 방법 모두를 통합해서 통합적 이해를 창출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왕서방으로 상징할 가치혁신의 선구자들이 그 통합적 이해의 달인들이다. ※ 성화 聖畵·Holy Picture. ‘종교화’라고도 부르듯, 대개는 목적을 두고 그린 그림이다. 예배·전례·수신·포교·찬미 등의 종교활동이 그것이다. 종교마다 내용은 다르지만 주로 신이나 신적 인격을 형상화한다는 맥락은 유사하다. 이슬람교나 유대교에서는 세상에 하나뿐인 절대신을 도상으로 표현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여겼지만 불교와 기독교의 생각은 달랐다. 특히 기독교, 종교가 곧 삶이던 고대·중세시대에는 걸작이라 불리는 회화의 대부분이 성화로 제작됐다. 르네상스시대에 이르러서는 절정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프라안젤리코, 보티첼리,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 쟁쟁한 대가들의 손과 붓 역할이 컸다. 매체도 가리지 않아 종이와 캔버스는 물론 벽과 제단에까지 성화가 진출한다. 하지만 이조차도 ‘가진 자’의 몫이었을 터, 가난한 서민에게는 언감생심이었다. 신의 가호도 ‘빈익빈 부익부’이던 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것이 ‘복제된 성화’, 목판화였다. ‘불의 성모’라 불리는 초기 이탈리아의 목판화 ‘마돈나 델 푸오코’(Madonna del Fuoco·작자 미상)도 그중 한 점이다. 1425년경 제작돼 이탈리아 포를리의 한 학교에 걸렸다가, 1428년 일어난 화재로 소실될 위기를 넘기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이후 포를리시 성당으로 옮겨진 뒤 ‘많은 기적을 일으킨 성화’로 전해지고 있다. 작자 미상의 ‘마돈나 델 푸오코’(Madonna del Fuoco). 1425년경 제작된 초기 이탈리아 목판화다. 이탈리아 포를리의 한 학교에 걸렸다가 1428년 일어난 화재로 소실될 위기를 넘기고 살아남은 뒤 ‘많은 기적을 일으킨 성화’로 회자됐다.△이주헌 미술평론가는…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
2020.07.17 I 오현주 기자
박병석 국회의장 "`선국후당`(先國後黨) 자세로 K-민주주의 만들자"
  • [전문]박병석 국회의장 "`선국후당`(先國後黨) 자세로 K-민주주의 만들자"
  • [이데일리 이성기 기자] 박병석 국회의장은 16일 “국가적 위기의 심각성, 민생의 절박함. 참으로 비상한 시기”라며 “국회는 국민의 안전과 삶을 지키고 미래 비전을 세우는 근본적 혁신을 요구받고 있다”고 말했다. 박 의장은 이날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21대 국회 개원사를 통해 “코로나의 조기 종식, 경제 난국의 돌파, 남과 북의 신뢰 회복, 국가 개조 차원의 새로운 시스템 구축 모두 우리가 해결해야 할 막중한 임무”라며 이같이 밝혔다. 박병석 국회의장이 16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제21대 국회 개원식에서 국회의원 선서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박 의장은 △국민을 지키는 국회 △국민과 함께하는 국회 △국민의 내일을 여는 국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 뒤, “`선국후당`(先國後黨)의 자세로 K-민주주의를 만들어가자”면서 여야의 협지를 당부했다. 다음은 박 의장의 개원사 전문이다. 함께 `국민의 국회`를 만듭시다존경하는 국민 여러분!국회의원 여러분! 정세균 국무총리, 최재형 감사원장과 귀빈 여러분! 21대 국회가 뒤늦게 개원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방역, 경제난국 등 국가적 위기 속에 개원이 늦어져 국민 여러분께 송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시작은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혼신을 다하는 의정활동으로 국민의 신뢰를 받는 21대 국회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엄중한 시기에 국회의장의 큰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저는 국회의장으로서 이 자리에 있는 300명 국회의원 한분 한분과 함께 나라다운 나라, 국회다운 국회를 만들기 위해 헌신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합니다. 문명사적 전환기를 돌파할 국회 혁신이 필요합니다. 지금 세계는 미증유의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혼돈의 시대입니다. 국제 질서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습니다. 글로벌 밸류체인이 무너지고 탈동조화 현상은 가속되고 있습니다. 인류의 삶의 양식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됐습니다. 비대면이 새로운 기준이 되면서 역설적으로 초연결시대를 앞당기고 있습니다. 불확실성 시대에 위기관리 능력은 모든 나라의 최우선 과제가 되었습니다. 국가의 존재와 그 가치도 새롭게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문명사적 대전환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적 위기의 심각성, 민생의 절박함. 참으로 비상한 시기입니다. 지금 우리 국회는 국민의 안전과 삶을 지키고 미래 비전을 세우는 근본적 혁신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실사구시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중세 시대 흑사병이 르네상스 시대를 연 것처럼 코로나19는 세계 질서를 바꿀 것입니다. 코로나의 조기 종식, 경제 난국의 돌파, 남과 북의 신뢰 회복, 국가 개조 차원의 새로운 시스템 구축. 모두 우리가 해결해야할 막중한 임무입니다. 소통으로 `국민의 국회`를 만들겠습니다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의원 여러분!21대 국회를 향한 국민의 명령은 분명합니다. 민생 최우선 국회, 미래를 여는 국회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익숙한 관행과 단호히 결별하고 일 잘하는 국회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21대 국회는 엄중한 국민의 명령에 응답할 책임이 있습니다. 역사를 두려워하면서 오직 국민만 생각하는 국회가 돼야 합니다. `내일을 여는 국민의 국회`를 21대 국회의 나침판으로 삼겠습니다. 첫째, 국민을 지키는 국회가 되어야 합니다. 코로나 위기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삶의 터전을 지키는 든든한 국회가 되어야합니다. 국회와 정부는 위기를 극복하는 공동 주체입니다. 미래 비전을 만드는 수레의 두 바퀴입니다. 민주적 절차를 지키면서도 신속하게 난관을 돌파해야 합니다.둘째, 국민과 함께하는 국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상시 국회가 되어야 합니다. 국민이 안심하고 잠들 수 있도록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365일 불을 밝혀야 합니다. 일하는 국회를 넘어 일 잘하는 국회의 초석을 다져야 합니다. 국민의 신뢰를 회복해야 합니다. 국민의 신뢰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상식과 순리가 통하는 국회를 만들겠습니다. 셋째, 국민의 내일을 여는 국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문명사적 전환기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서라도 국가 개조 차원의 시스템 대혁신이 필요합니다. 지속발전이 가능한 국가 미래를 제시하는 국회가 되어야 합니다. 국회는 5년 임기의 정부를 뛰어넘어 지속 가능한 국가발전 전략을 제시해야 합니다. 저출산 고령화 완화, 소득 양극화 해소, 남북 평화의 구축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국회 입법을 통해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나라가 선진 민주국가입니다. 그 길로 가야 합니다. 21대 국회는 용광로 국회가 돼야 합니다.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내는 용광로, 그런 국회의 그 첫 걸음은 소통입니다. 소통은 공감대를 만들고, 공감대를 넓히면 타협을 이룰 수 있습니다. 타협은 국민통합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핵심은 소통입니다. 첫째도 소통, 둘째도 소통, 셋째도 소통이라는 다짐을 하겠습니다. `선국후당`(先國後黨)의 자세로 K-민주주의를 만들어 갑시다존경하는 의원님 여러분!우리 국민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지혜를 모으고 단결해 이를 극복해낸 훌륭한 저력이 있습니다. 코로나 대응에서 보여준 세계 최고 수준의 국민 의식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량은 세계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K-방역은 이미 세계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BTS로 대표되는 K-POP, 영화 기생충, K-방역까지 이제 대한민국은 ‘메이드 인 코리아’를 넘어 문화와 의료분야까지 새로운 세계의 표준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국회 차례입니다. 국회가 먼저 달라져야 국민의 인식도 바뀝니다. 대한민국은 코로나 위기 속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전국적인 선거를 치러냈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위기 속에서도 의회 민주주의를 굳건히 지켜냈습니다. 국민이 지켜낸 우리 의회민주주의를 세계의 표준으로 발전시켜 나갑시다. K-민주주의를 향해 나갑시다. 국회의원 한분 한분이 독립된 헌법기관이라는 소명 의식을 가집시다. 21대 국회는 다양한 가치의 연대, 정책연대의 장이 펼쳐지기를 기대합니다. 치열하게 토론하고 책임 있게 결정하는 국회를 만듭시다. 국민의 안전과 삶을 지키고 급변하는 세계질서 재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국회를 만듭시다. 민생이 참 어렵습니다. 서민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삶의 무게를 우리 국회가 함께 짊어지고 덜어주어야 합니다. 여야가 합의해 `코로나 극복 국회 경제특위`를 설치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제조업 중심의 `메이드 인 코리아`를 넘어 문화강국, 보건강국으로 우리 영역을 확장하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갑시다.국회 스스로 윤리적 기준을 높이 세우는 일도 미룰 수 없습니다. 그래야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의 윤리적 책임을 강화하기 위한 획기적 장치를 마련합시다. 우리 국민들이 열심히 일하는 국회의원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적극 추진하겠습니다. 일 잘하는 국회를 만들기 위한 제도 개선에도 박차를 가해 주십시오. 국회 세종의사당 설치 등 국가 균형발전에도 속도를 내야 합니다. 한반도 평화에 기여하는 국회가 되겠습니다. 국회가 경색된 남북 관계의 돌파구를 여는 길을 찾겠습니다. 아울러 국제사회가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확고히 지지할 수 있도록 의원외교 활동을 적극 뒷받침하겠습니다. 21대 국회의 기준은 국민과 국익입니다. 국회가 먼저 달라져야 국민의 삶이 바뀝니다. 국회의장부터 달라지겠습니다. 조정과 중재를 넘어 국가의 미래를 준비하고 선도하는 국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4차 산업혁명을 선도적으로 준비하고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21대 국회가 됩시다.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선국후당`(先國後黨)의 자세를 지켜주십시오. 국민 먼저, 국익 먼저, 국회가 먼저입니다. 당에서의 활동도, 지역구 활동도 그 다음이 돼야 합니다.정치의 중심은 국회입니다. 4년 뒤, 임기를 마칠 때 21대 국회는 미래를 여는 국회, 국민의 국회로 가는 이정표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국민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함께 그 길로 담대히 나갑시다.
2020.07.16 I 이성기 기자
①'불의 혁명', 인류 문명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다
  • [위대한 생각]①'불의 혁명', 인류 문명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다
  • ◇오늘의 강연 및 지성인 ☆ ‘인더스토리’(INDUSTORY)현대 산업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의 과거와 현재를 역사·정치·문화·기술·경제 등 복합적인 시선으로 이해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보는 능력을 기른다. 현대 문명의 기반이 된 ‘철’(鐵)과 ‘사’(沙·모래)부터 코로나19 사태로 주목받고 있는 ‘약’(藥), ‘의’(醫) 등 이 세상 모든 산업의 역사를 다룬다.☆ 임규태 공학자·교육자·기업가 미국 조지아공대에서 15년간 교수로 재직. 조지아공대 부설 전자설계연구소 부소장, 조지아공대 기업혁신센터 국제협력 수석고문. 국제 통신표준화 의장. 빅데이터·소프트웨어·게임·블록체인·기후변화 등 다양한 분야의 스타트업에 참여.임규태 박사가 서울 중구 순화동 KG하모니홀에서 ‘위대한 생각’ 지상 강연 ‘인더스토리’ 불(火) 편을 강의하고 있다.(사진=노진환 기자)[총괄기획=최은영 부장, 연출=권승현 PD, 정리=김무연 기자]불은 물질이 산소와 화합해 연소하는 현상이다. 불은 연소 과정에서 빛과 함께 ‘열’이라는 또 다른 선물을 인류에게 선사했다. 선조들은 불이 제공하는 열로 추위를 견디고 다른 동물들로부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문명을 탄생시킨 결정적 계기는 ‘음식을 익혀먹었다’는 사실이다. 불로 음식을 익혀 먹으면 기생충, 세균에 의한 질병을 방지할 수 있고 소화가 잘돼 에너지 효율이 높아진다.임규태 박사는 “불로 짐승의 습격을 막는다거나 추위를 피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익힌 음식은 소화가 잘되기 때문에 육식과 채식이 모두 가능해져 식량의 스펙트럼이 넓어졌을 뿐 아니라, 에너지 효율이 높기 때문에 생존에 필요한 식량의 절대량 자체가 줄어든다. 불의 사용에 의한 식량 문제 해결은 인구 수 증가로 이어졌고, 인류 문명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됐다.임 박사는 “불은 인류에게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엄청난 잉여 시간을 선물했다”며 “인류는 그 잉여 시간을 활용해 문명의 발전을 이뤘다”고 말했다.증기기관을 발명한 토머스 뉴커먼(사진 왼쪽)과 증기기관을 개선한 제임스 와트.◇ 열에서 동력으로, 동력에서 전기로…불이 가져온 현대 문명중세까지 불이 제공하는 열 자체를 활용하던 인류는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열 에너지를 운동 에너지로 바꾸려는 시도를 한다. 1705년 영국의 토머스 뉴커먼은 물을 끓여 발생하는 증기의 압력으로 피스톤을 움직이는 장치를 발명한다. 이것이 ‘증기기관’의 탄생이다. 하지만 뉴커먼의 증기기관은 증기를 내뿜고 나면 실린더가 식어 열효율이 낮았다. 제임스 와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스톤과 물을 끓여 수증기를 모으는 부분을 분리하는 방법을 개발한다. 한쪽에서는 계속 물을 끓여 수증기를 모으고 실린더는 지속적으로 피스톤 운동을 반복하도록 해 증기기관의 효율성이 폭발적으로 높아졌다. 이제 인류는 불로 물을 끓이는 것만으로 수백 명분의 노동력을 얻을 수 있게 됐다. 뉴커먼이 발명하고 와트가 개량한 증기기관은 석탄을 캐고 기차를 움직이며 방직기계를 돌리는 등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서 적용하기 시작했다. 결국 산업혁명은 불의 에너지를 운동 에너지로 치환하는 동력 혁명이었던 것이다.세계 최초의 화력 발전소가 설치된 독일의 린더호프 궁전.인류는 증기기관 발명 이후 다시 한 번 불의 혁명을 맞는다. 1866년 독일의 에른스트 베르너 폰 지멘스는 자석의 양극 사이에 코일을 넣고 빠르게 회전시켜 전기를 만드는 교류 발전기를 선보였다. 불이 제공하는 열을 운동 에너지로 바꾼 인류는 운동 에너지를 전기로 변환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1878년 독일의 요한 지그문트 슈케르트는 린더호프 궁전에 전구를 밝히는 프로젝트에 지멘스의 교류 발전기를 사용했다. 그는 물을 데워 증기를 만든 뒤 증기기관을 교류 발전기에 연결해 코일을 회전시켜 전기를 발생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기는 린더호프 궁전 곳곳에 설치한 전구를 동작시켰다. 슈케르트의 이 장치가 역사상 최초의 화력발전소로 기록된다. 이즈음 미국에서는 손쉽게 동력을 얻을 수 있는 수력 발전이 대세였다. 하지만 뉴욕 등 대도시에서 마천루가 올라가면서 전구를 밝히려는 전력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결국 수력 발전만으로는 전력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면서 화력 발전이 전기 생산의 주력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 과정에서 화력 발전의 연료로 사용되는 석유도 주요 에너지원으로 떠오른다.히틀러의 핵개발 소식을 알린 에드워드 텔러(사진 왼쪽부터), 레오 실라르드, 유진 위그너.◇ 제3의 불 ‘원자력’…인류의 희망에서 공포로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총리에 취임한다.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출된 히틀러는 게르만 우월주의를 외치며 유대인을 탄압한다. 결국 독일에서 활동하던 유대인 학자들은 나치의 억압을 피해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그 가운데 헝가리 출신의 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와 유진 위그너도 포함됐다.1934년 미국으로 건너간 두 물리학자는 동향 출신의 레오 실라르드를 만나 히틀러가 핵무기를 개발 중이라는 정보를 알려준다. 실라르드는 미국 정부에 이 사실을 알리려 했지만 망명 과학자 신분의 한계에 부딪혔다. 실라르드는 미국에 자리 잡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아인슈타인은 실라르드가 작성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보내는 편지에 서명해준다. 편지를 받아 본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문가들에게 핵개발의 가능성을 검토할 것을 지시한다. 일본 히로시마(사진 왼쪽)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이 폭발하는 모습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루스벨트는 즉각 핵무기 개발을 지시하고, 1941년 맨해튼 계획이 공식 출범한다. 프로젝트의 중추에 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 등이 미국 전역에 분산된 연구소에서 핵폭탄 개발을 진행한다. 결국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두 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마무리됐다.미국의 라이벌로 부상하려고 꿈틀거리던 소련은 1949년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핵실험에 성공한다. 핵무기라는 유례없는 위력의 살상 방법의 등장으로 냉전은 고착화하고 각국 정부는 전쟁 발발시 세계가 공멸한다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혔다. 1953년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평화를 위한 핵’이란 연설을 통해 핵의 평화로운 사용 방법에 대한 국제적인 논의가 시작됐고 이에 따라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설립된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1954년 소련은 오브닌스크에 세계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를 건립한다.화력 발전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전기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주요 수단으로 자리매김 했지만 석탄, 석유 등 주요 자원의 고갈 우려가 커지면서 열 에너지를 얻는 새로운 방식의 필요성이 대두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새롭게 등장한 원자력은 인류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른다. 세계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인 소련의 오브닌스크 핵발전소.◇ 체르노빌부터 후쿠시마까지…원자력, 과연 안전한가원자력 발전소는 적은 양의 우라늄으로 대량의 전기를 발생시킬 수 있기 때문에 화력발전소보다 효율이 월등히 앞선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오브닌스크 핵발전소를 시작으로 세계에서 원자력발전소가 경쟁적으로 세워지게 된 이유다.문제는 안전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197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해리스버그 스리마일 섬 원자력발전소에서 노심이 녹는 사고가 발생했다. 시스템 결함과 관리자의 실수가 겹쳐 노심의 냉각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원자로가 붕괴되는 사태는 모면했고 인명피해도 미약했지만 미국 내에서 원자력에 대한 반감이 거세지는 계기가 됐다.1986년 소련 우크라이나 키예프 주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서 사고가 발생한다. 체르노빌 발전소 부소장 아나톨리 댜틀로프가 원자로 가동이 중단될 경우 관성만으로 터빈이 얼마나 돌아갈지 실험하는 과정에서 오동작이 일어난 것이다. 원자로는 순식간에 폭발했다. 초기 대응 오판, 기술 부족 등으로 체르노빌의 붕괴를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소련은 방사성 물질에 오염된 지역을 콘크리트로 막아버린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또한 핵연료가 용융해 지하수를 오염시키는 것도 막아야 했다. 아직도 명확히 밝혀진 바 없지만 원자로 가동률을 낮추기 위해 전력 공급을 줄이자 냉각 장치가 오작동하면서 원자로가 폭발했다는 가설이 대두한다.원자력발전소 사고가 발생한 세 곳. 왼쪽부터 미국 스리마일 발전소, 소련 체르노빌 발전소, 일본 후쿠시마 발전소.현재 세계적으로 전력 수요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000년부터 원자력 발전에 의한 전력 생산량은 늘지 않고 있다. 핵발전소를 기획하고 만드는데 10년 정도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적으로 1990년대부터 핵발전소 건립이 사실상 중단되다시피 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임 박사는 “2011년 일본 후쿠시마에서도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발생하면서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대중의 우려가 커졌고, 이것이 전기를 필요로 하는 유관 산업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 “이 가운데 중국만이 지속적으로 원자력 발전을 늘리고 있는 중”이라고 지적했다.◇‘위대한 생각’은…이데일리와 이데일리의 지식인 서포터스, 오피니언 리더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경제 인문학 토크 콘서트입니다. 우리 시대 ‘지성인’(至成人·men of success)들이 남과 다른 위대한 생각을 발굴하고 제안해 성공에 이르도록 돕는 프로그램으로, 이데일리 창립 20주년을 맞아 기획했습니다. ‘위대한 생각’은 매주 화요일 오후 6시 이데일리TV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2020.07.13 I 김무연 기자
롯데카드 새 브랜드 '로카'.."슬기로운 소비, 행복한 삶 실현"
  • 롯데카드 새 브랜드 '로카'.."슬기로운 소비, 행복한 삶 실현"
  • [이데일리 김범준 기자] 롯데카드는 1일 새로운 브랜드(BI) ‘로카(LOCA)’를 공개하고 고객 중심의 브랜드를 강화한다고 밝혔다.신규 BI ‘로카’는 롯데카드의 영문 ‘LOTTE CARD’의 줄임말이자, 스페인어 ‘라 비다 로카(La Vida Loca, 미친 듯이 행복한 삶)’의 의미를 담고 있다.BI 디자인은 19세기 말~20세기 초 유행한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을 근간으로 했다. 자연을 모티브로 삼아 덩굴식물이나 구불구불한 선을 화려하게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네 개의 알파벳 L·O·C·A은 기하학적이고 간결한 ‘산세리프(Sans Serif, 문자 끝부분 돌출 선을 없애 단순화한 글자체)’ 서체를 사용해 고전미와 현대적 감각의 균형을 맞췄다.BI 중앙에는 나침반 바늘이 자리 잡고 있다. 암초와 풍랑 속에서도 무사히 항해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처럼, 롯데카드가 고객의 다양한 라이프스타일과 소비 생활을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BI 전체의 바탕이 되는 네 개의 정사각형은 창문을 의미한다. 중세시대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다양한 색의 빛처럼, 롯데카드가 고객 카드 생활에 새로운 빛이 되고 카드업계에 혁신을 불러 일으키는 브랜드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표현했다.롯데카드 관계자는 “이번에 선보인 신규 BI에는 롯데카드가 추구하고자 하는 브랜드 지향점과 철학이 담겨있다”며 “궁극적으로 고객의 삶을 보다 가치 있고 행복하게 만드는 브랜드로 거듭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한편, 롯데카드는 최근 조좌진 대표이사 취임 이후 대대적인 브랜드 개편을 단행해 왔다. 핵심 브랜드 전략이자 지향점으로서 △품격과 가치가 있는 브랜드(Class & Heritage) △전문적이고 대담한 브랜드(Capable & Confident) △배려와 생각이 깊은 브랜드(Considerate & Thoughtful) 등 ‘3대 브랜드 기본 정신’을 정립하고 신사옥 인테리어와 이번 신규 BI에 적용했다. 향후 출시하는 카드 상품과 제작물, 임직원 명함 등에도 이러한 브랜드 정신을 담아 고객 중심의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을 강화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2020.07.01 I 김범준 기자
'北 연락사무소 폭파'에...70년만의 'DMZ' 실태조사 무기한 연기
  • '北 연락사무소 폭파'에...70년만의 'DMZ' 실태조사 무기한 연기
  •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70년 만에 이뤄진 비무장지대(DMZ)내 문화·자연유산 실태조사가 무기한 연기됐다.22일 관계자에 따르면 문화재청이 지난달 26일부터 착수한 DMZ 문화·자연유산 실태조사가 지난 16일 북한이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한 후 중단된 상태다. 이 관계자는 ”접경 지역인 만큼 안전상의 이유로 실태조사 중단을 결정했다”며 “언제 다시 재개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밝혔다.실태조사는 4·27 판문점 선언으로 남북이 합의한 ‘DMZ 평화지대화’의 일환으로 이뤄졌다. 문화재청은 그간 국방부, 통일부, 유엔사와 긴밀한 협력을 통해 계획을 추진해 왔다.이번 실태조사는 특히 분단 이후 70여 년간 미지의 땅으로 남아 있던 비무장지대 전역에 걸친 문화·자연유산에 대한 최초 종합조사로 그 의미가 컸다. 문화재청은 내년 5월까지 △파주 대성동 마을 △판문점 JSA(공동경비구역) △태봉 철원성 고성 최동북단 감시초소(GP) △대암산·대우산 천연보호구역 △건봉산·향로봉 천연보호구역 등 총 40여 개소에 대한 조사를 진행할 계획이었다. 첫 번째 순서로 지난달 26일부터 29일까지 조사한 경기도 파주 대성동 마을에서 구석기시대 뗀석기 유물부터 고려~조선 시대 기와, 도자기 조각 등 다양한 유물이 나와 주목을 받기도 했다.다음 실태조사 예정 장소는 태봉의 정치, 문화 중심지였던 철원도성(궁예도성)으로 23일부터 착수가 계획돼 있었다. 강원도 철원군에 있는 태봉 철원도성은 궁예가 905년 송악(개성)에서 철원으로 천도하면서 세운 도성으로 918년 왕건이 고려의 건국을 이곳에서 선포하고 다음 해 개성 만월대로 천도하기 전까지 15년 정도 유지됐다. 만월대가 생기기 직전까지 사용된 도성이라는 점에서 중세시대의 도성 구조를 알 수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외성, 궁성, 내성 순의 3중 구조를 한 직사각형 모양의 도성은 정확히 DMZ 안에 위치해 있어 그동안 접근이 불가능했다. 가운데를 군사분계선이 관통해 남쪽에 반, 북쪽에 반이 있는 형태여서 상징적 의미도 있다.이 관계자는 “아직 실태조사 재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DMZ 화살머리고지 유해발굴도 재개된 만큼 7월 재개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2020.06.23 I 김은비 기자
절망에 빠진 자를 유혹하지 마라
  • [목멱칼럼]절망에 빠진 자를 유혹하지 마라
  • 정의란 높은 곳에 우뚝 솟아 있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일상생활 주변에 가까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는 수오지심(羞惡之心)과 남의 잘잘못을 가리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정의의 원천이다. 남의 권리는 소중하게 여기면서 나의 의무를 다하려는 의지와 실천의 밑바탕이 정의감이다. 불의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 일은 사리사욕, 당리당략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위한 차원이어야 한다. 정의를 지키는 길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역지사지 자세로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온다.정의는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또는 의무로 공동체의식의 바탕을 이룬다. ‘탈무드’에서도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일은 관용이나 자비가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라 하고 있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에서 서로를 지켜주는 일은 납세의무나 국방의무처럼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다. “힘이 정의다”라는 억지소리는 원칙 없는 약육강식 세계에서 살아야한다는 푸념이다. “정의는 힘이다”는 정의가 이겨야 된다는 당위성에 더하여 힘이 있어야 내 이웃을 더 많이 도울 수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1000가지 인간의 심리를 꿰뚫었다는 셰익스피어(W. Shakespeare)는 ‘로미오와 줄리엣’ 5막 3장에서 “절망에 빠진 자를 유혹하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다. 한계상황에 이르러 어찌할 수 없는 사람들을 놀려대거나,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취하는 일은 인간의 길이 아니라는 뜻이다. 부모 슬하에서 놀아야 할 미성년 처자로서 남의 나라 전쟁터에 끌려가 짐승보다 못한 삶을 강요받았던 할머님들은 절망의 밑바닥에서 헤맸던 분들이다. 개인 소견으로는, 인류가 빚은 3대 죄악은 중세암흑시대 마녀사냥, 제3제국의 아우슈비츠 살육, 일제군국주의의 위안부 만행이다. 제 딸이 그렇게 되었다면, 그 보다 더한 지옥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단테(A. Dante)는 배신을 용서받지 못할 불의로 보았다. 신곡(神曲)의 마지막 부분 34곡을 보면 예수를 팔아먹은 유다, 자신들을 철석같이 믿어줬던 카이사르를 찌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망령들은 지옥의 마지막에서 마왕 입에 머리를 물려서 신음소리만 낸다. 그들은 정의라는 가면을 쓰고 저를 믿어주는 주인을 배신했다. 정의의 이름으로 불의를 저지르는 ‘정의의 탈’을 과감하게 벗겨내는 일이 바로 정의를 지키는 길이다. 외국에서 법무부를 ‘정의부’(Ministry of Justice)라 부르는 까닭은 법은 정의를 지키는 파수꾼이라는 뜻일 게다.이웃을 위하는 길이기도 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길이 정의다. 불의를 정의로 위장하거나 이웃을 속이면 잠시 넘어갈지는 몰라도 자기기만(self-deception) 행위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스스로 불행해진다.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일은 어떠한 위선자라 할지라도 가슴속에 남아 있는 회한의 응어리가 스멀대고 옴지락거리기 때문이다. 정의를 말로 부르짖지 말고 아무도 없는 건널목에서 신호를 지켜야 정의로운 자세다. 정의라는 말에는 각자 자신의 위치에 합당한 사회적 도리와 책임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자식들에게 열심히 노력하여 경쟁력을 갖추되, ‘네트워크’를 동원하거나 속임수로 남의 기회를 빼앗지 않도록 가르치는 일이 가장의 정의다. 더 좋은 상품을, 더 싼 가격으로, 더 빨리 공급해 공동체에 이바지하는 일이 기업가의 정의다. 다원적 가치관을 조화시켜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고 서로 애정을 가지도록 솔선수범하는 노력이 지도자의 정의다.
2020.06.19 I 권소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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