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전설' 키신저 전 美국무장관 별세…미·중 데탕트 설계(재종합)

1970년대 냉전 해빙 주도…"미국에 국익만 있을 뿐" 현실주의 외교
'중국 인민의 라오펑유' 자처…지난 7월에도 시진핑과 환담
베트남전 종전 공로로 노벨상…남미 쿠데타 사주 의혹 비판도
  • 등록 2023-11-30 오후 3:35:17

    수정 2023-11-30 오후 7:14:53

[이데일리 박종화 기자] 외교의 전설’로 불리며 1970년대 미·중 간 데탕트(긴장 완화)를 이끌었던 헨리 키신저 전(前) 미 국무장관이 29일(현지시간) 타계했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사진=AFP)


키신저어소시에이츠는 키신저가 이날 미국 코네티컷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발표했다. 향년 100세.

1923년 독일 퓌르트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키신저는 나치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1938년 미국으로 이민 갔다. 이후 하버드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그는 현실주의적 국제정치를 연구·강의하며 명성을 쌓았다. 특히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프랑스·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가 빈 체제를 통해 세력 균형과 유럽의 안정을 이뤘다는 박사논문 ‘회복된 세계’는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고전으로 꼽힌다.

비밀 방중으로 미·중 관계 초석 다져

키신저는 1969년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을 맡으며 현실 외교에도 발을 들여 놓았다. 국가안보보좌관으로서 그가 처음 맡은 역할은 베트남전쟁 종전이었다. 미국의 명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베트남전의 늪에서 빠져나가는 게 목표였다. 그는 ‘미치광이 전략’, 즉 소련에 대한 핵 공격까지 시사하며 북베트남을 협상장에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결국 1973년 미국과 북베트남·남베트남은 강화 협정을 맺었고 키신저는 그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73년 중국 베이징을 방문한 헨리 키신저(왼쪽) 당시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마오쩌둥(오른쪽) 중국 국가주석과 대화하고 있다.(사진=AFP)


이후 키신저가 이룬 또 다른 역사적 업적은 미·중 데탕트다. 1971년 비밀 특사로 중국 베이징을 방문한 그는 저우언라이 당시 중국 총리와 미·중 관계 개선을 논의했다. 냉전 상황에서 소련을 고립시키기 위해서다. 당시 회담은 이듬해 닉슨 대통령의 역사적인 중국 방문으로 이어졌다. 키신저가 이룩한 데탕트는 1979년 미·중 수교로 이어졌다. 또한 ‘죽의 장막’에 갇혀 있던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는 계기가 됐다. 후일 키신저는 미·중 데탕트에 대해 “시대적 필요성을 생각하면 미국과 중국의 협력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평가했다. ‘중국 인민의 라오펑유(老朋友·오랜 친구)’를 자처한 그는 생전 중국을 100차례 방문했다.

키신저는 1969년 미국과 소련 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체결도 이끌었다. 미국과 소련이 맺은 첫 핵 군축 조약으로 핵 전쟁 공포를 완화했다. 뉴욕타임스는 키신저가 국가안보보좌관의 역할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고 평가했다.

이 같은 공로로 1973년 국무장관에 임명된 키신저는 중동 전쟁 중재 등에서도 업적을 세웠다. 키신저가 장관에 취임한 지 2주 만에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34일 동안 중동에 머물며 아랍 국가와 이스라엘을 중재해 전쟁을 끝냈다. 워싱턴포스트는 영구적인 평화 협정 체결엔 실패했지만 중동 지역을 안정시키고 이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증대, 소련의 영향력을 축소시켰다고 평가했다.

미국의 국익을 최우선시한 키신저식 현실주의 외교는 결국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하는 밑거름이 됐다. 그는 “미국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오직 국익만이 존재할 뿐이다”고 자신의 외교정책을 설명했다. 또한 “외교정책에서 도덕적 완벽성을 추구하는 나라는 완벽성도, 안보도 이룰 수 없다”고도 말했다.

키신저 외교에 빛만 있는 건 아니다. 키신저는 베트남전 중 베트콩(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제압하기 위해 중립국이던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대한 비밀 폭격을 지시했다. 또한 칠레의 좌파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사주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이 같은 과오로 인해 키신저에게 노벨평화상을 준 건 잘못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국과도 70년 인연…“한·미 공조로 북핵문제 풀어야”

키신저는 한국과도 오랜 인연이 있다. 그는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던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을 찾아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미국이 적극적으로 소련에 대응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는 미국의 대한(對韓) 정책 등에 영향을 줬다.

키신저는 국무장관을 지내던 1975년엔 미국과 일본, 소련과 중국이 각각 남·북한을 교차 승인하고 두 나라를 유엔에 동시 가입시키자고 제안했다. 데탕트 분위기를 한반도까지 확산한다는 구상이었다. 키신저는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막후에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이 20일 중국 베이징 다오위타이 국빈관에서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과 대화하고 있다.(사진=AFP)


“미·중 관계, 벼랑 끝” 최근엔 G2 갈등 우려

키신저는 최근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지난 7월엔 중국을 찾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환담을 나눴다. 시 주석은 키신저에게 “우리는 오랜 친구와 그의 역사적 공헌을 잊지 않을 것”이라며 “당신과 미국의 통찰력 있는 사람들이 중미 관계를 올바른 궤도로 되돌리기 위해 계속해서 건설적인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키신저는 최근 인터뷰에서 미·중 갈등을 우려했다. 그는 지난 6월 블룸버그와 한 인터뷰에서 현재의 미·중 관계에 대해 “벼랑 끝에 서 있다”며 “양측이 동시에 이 문제(미·중 갈등)에서 물러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전쟁에선 누구도 이길 수 없다”며 “이기더라도 상상을 초월하는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도 경고했다.

거인의 죽음에 전 세계에서 애도 메시지가 이어졌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미국은 외교 문제에서 가장 믿을 만하고 독보적인 목소리를 잃었다”는 추모사를 발표했다. 중국신문망은 “정치 생애 동안 중미 관계에 걸출한 공헌을 했다”고 고인을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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