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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야구 사령탑, 8인 8색 출사표
- ▲ 올시즌 각오를 말하는 8개구단 감독들 (맨윗줄부터 시계방향으로 SK 김성근, 두산 김경문, 한화 김인식, 삼성 선동렬, LG 김재박, 롯데 로이스터, 우리 이광환, KIA 조범현 감독) [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8개구단 감독 2008시즌 출사표 ▲김성근 SK 감독=지난해 우승한 뒤 크게 전력 보강이 없었다. 2군 선수들의 실력 업그레이드는 어느정도 성공했다고 봤는데 1군 선수 부상이 많아 시범경기서 헤맸다. 시즌 운영 방향도 아직 찾지 못했다. 남은 기간동안 정비를 잘 해야 할 것 같다. 작년엔 너무나 쉽게 페넌트레이스를 이끌 수 있었는데 올해는 시즌 초반부터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4월 한달을 5할로 넘어가면 승산이 있다고 본다. 4월을 어떻게 싸우는지가 갈림길이다. 시범경기서 보니 다른 팀들이 많이 향상됐다. 우승이라는 말 자체가 어려운 말이 됐다고 본다. 어쨌든 목표는 2연패다. ▲김경문 두산 감독=세월이 빠르다는 것 느끼게 된다. 시즌 전에 목표 정해 부담스럽게 하는 것 보다는 열심히 하다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거라 생각한다. 항상 팬을 잊지 않고 노력하겠다. ▲김인식 한화 감독=지난해 구대성 이영우 등 고참들이 하나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때로는 끈기있게 끌어가 주는 역할도 했다. 그러나 현재 그 선수들이 수술 후 재활과정에 있다. 또 지난해보다는 전력 보강이 없다. 시범경기서 보니 다른 팀들은 많이 보강 됐다. 특히 KIA가 눈에 띈다. 돌풍을 일으킬 것 같은 예감이다. 우리 팀은 걱정이 앞선다. 그렇지만 1차 4강을 목표로 최선을 다하겠다. ▲선동렬 삼성 감독=나름대로 준비를 많이 했다. 선수들에게 강조했던 것은 부상이 없는 한해로 지내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시즌도 들어가기 전부터 부상선수가 나와 걱정이다. 그래도 작년에 비해 팀이 공격력, 특히 중심타자 쪽에서 무게감이 생겼다. 단점은 포수가 진갑용 혼자라는 점인데. 부상중인 현재윤이 돌아올때까지 잘 버티면 좋은 결과가 예상된다. ▲김재박 LG 감독=작년에 부임해서 5위 했는데 실제 팀 전체에 부족한 점이 많았다. 작년 가을부터 1.5군 선수 데려가서 훈련을 많이 시켰다. 봄 캠프에 와보니 역시 선수들이 많이 올라온 걸 느꼈다. 작년보다는 많이 보강됐다고 본다. 전보다는 투수층이 좀 나아졌다. 공격 부분은 젊은 선수를 많이 활용할 생각이다. 잠실을 홈으로 쓰는 팀들이 잘해야 서울 팬들이 찾아와주시리라 믿고 서울에서 좋은 경기, 좋은 결과 보여드리겠다. ▲이광환 히어로즈 감독=어제 팀 창단 한 막내둥인데 앞으로 미흡한게 있더라도 예쁘게 봐주셨으면 좋겠다. 원래 막내가 말썽 많이 피운다. 우리도 그렇다. 와서 보니 마운드가 많이 부실하다. 김수경 전준호 등 선발 두 축이 빠진 상태다. 다행히 재활에 성공한 마일영 신철인이 가세했다. 빈 자리는 젊은 선수들이 메워줘야한다. 아무래도 젊은 선수들의 경기 수가 부족하다. 초반에는 검증과정이 아닌가 싶다. 엔트리 1/3을 젊은 선수들로 채울 수 밖에 없다. 하고 싶어 하는게 아니라. 부상이 많다보니 어쩔 수 없이 세대교체와 연결됐다. 어찌됐든 젊은 선수들에 대한 기대가 크다. 함께 지켜봐주시길 바란다. ▲로이스터 롯데 감독=다른 팀 감독들이 시범경기서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감사하다. 우리 팀은 과거보다 더 잘할거라 생각한다. 선수들이 밥 잘 먹는 만큼 수비를 잘해주면 별 문제 없을 것이다. 올해 좋은 경쟁 될 것 같다. 한국엔 훌륭한 팀들이 많다. 지난 올림픽 예선을 통해 한국야구의 힘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짧은 시간에 한국에서 좋은 야구를 많이 봤다. 시즌에 기대가 크다. ▲조범현 KIA 감독=아쉬운 면도 있지만 나름대로 훈련을 열심히 했다고 생각한다. 선수들이 자신을 가다듬기 위해 충실한 훈련을 했다. 시범경기서 1위를 했는데 선수들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게 큰 소득이다. 신인 선수들도 열심히 했고 팀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선수도 생겨 활력이 되고 있다. 올해는 많이 이기고 싶다. 기아 팬들의 자긍심을 높여드리고 싶다. 열광적으로 응원해주시는 팬들이 많이 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사진=김정욱 기자)▶ 관련기사 ◀☞프로야구 미디어데이 말의 전쟁 '신인선수 편'☞프로야구 미디어데이 말의 전쟁 '감독,고참 편'☞유니폼 실수 장성호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지 마세요'☞[포토]프로야구 8개 구단 감독·선수 한자리 모여 화이팅!☞[포토]프로야구 대표 선수들, '올해는 우리가 최고'
- [MLB 한국야구 다시 보기 9] 울고 간 천재, 야생마, 방랑자들
- ▲ 봉중근[이데일리 SPN 한들 통신원]12년 전 봄입니다. 서울시 고교야구 춘계연맹전이 열리던 동대문구장서 경기를 보다 깜짝 놀랐습니다. 한 선수가 무사 만루에서 번트 동작을 취하다가 강공으로 전환해 밀어쳐 좌중월 2루타를 날리는 것입니다. 고교 선수답지않은 ‘버스터’에 눈이 휘둥그레져 함께 갔던 아마 야구 담당에게 신상명세를 물었습니다. 뒤로 자빠졌습니다. 이제 갓 입학한 1학년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봉중근이었습니다. 봉중근이야말로 ‘미완의 대기’란 말에 가장 어울리는 선수였습니다. 신일고 2학년 때인 97년 캐나다서 열린 세계 청소년선수권대회서 투타에서 맹활약하며 우승을 이끌고 MVP로도 뽑혔습니다. 그 때 일화가 있습니다. 외야에서 캐치볼을 하던 봉중근이 동료를 앉혀놓고 공을 던졌는데 94마일이 찍혔습니다. 결국 그 해 겨울 가장 눈독을 들인 애틀랜타가 몸이 달아 학교를 중퇴시키고 스카우트해 갔습니다. 방망이 소질도 탁월했지만 애틀랜타는 그를 역시 투수로 키웠습니다. ‘투수 왕국’의 황태자로 성장하던 봉중근은 마침내 2002년 데뷔 첫 선발 등판을 하며 빅리그 마운드를 밟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불펜 투수로 44경기를 뛰며 첫 승과 함께 6승 2패 1세이브를 거둡니다. 하지만 봉중근은 언젠가부터 갑자기 떨어지기 시작한 스피드가 더이상 나오지 않더니 2004년 신시내티로 트레이드되고 2005년 어깨 수술, 2006년엔 40인 로스터에서도 제외되며 마이너리그 더블A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어 한국 U턴설이 불거져 나오면서 결국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17세의 어린 나이로 야심차게 도전한 빅리거의 꿈을 9년만인 26세에 깨끗이 접은 것이었습니다. 1남3녀 중 막내인 자신을 택시 운전으로 뒷바라지한, 삶의 전부나 다름없는 아버지의 위중한 병세가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부상과 부진이 겹치면서 스스로 절감한 빅리그의 높은 벽과 자신의 한계, 그리고 처한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도 못지않게 결단을 재촉했습니다. 만인의 삶이 그렇듯이 봉중근과 비슷한 길을 간 선수는 숱했습니다. 몇 년 전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뛰었던 이상훈도 그렇습니다. 한국에 이어 일본 주니치서도 좋은 활약을 보여줬던 그는 리그 우승을 하던 날 메이저리그 진출을 전격 선언했습니다. 주니치에 남았더라면 더 좋은 대우를 받았을 것이 확실했지만 미련없이 태평양을 건넜습니다. 보스턴에서 별 활약을 못하고 방출되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엔 “한계에 도달했다”며 5억원의 연봉을 포기하고 돌연 은퇴를 해버렸습니다. 지금은 록커로 변신했습니다. 그의 별명은 ‘야생마’였습니다. 그야말로 꿈을 찾아 거친 들판을 질주하는 야생마의 삶, 그것입니다. 한국 프로야구의 방랑자들도 글러브 하나, 방망이 하나 달랑 메고 미국에 왔습니다. 2006년 이미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의 최향남 (당시 35세)과 최익성(33세)이었습니다. 해태와 LG, 기아에서 투수로 활약했던 최향남은 다년간의 준비 끝에 클리블랜드와 연봉 10만 달러에 계약하고 트리플 A서 뛰었습니다. 영어가 서툴러 더 던질 수 있겠느냐는 코치의 물음에 “노 파워”라고 대답한 게 “노 프라블럼”으로 와전돼 교체가 늦어져 난타를 당하고 말았다는 해프닝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고생한 보람도 없이 메이저리그의 부름을 받지 못하고 이듬해 롯데로 돌아왔습니다. 10년간의 1군 생활 동안 한국의 8개팀 중 무려 6개팀을 옮겨다닌 최익성도 2006년 3월 사고무친의 LA로 와 ‘나 홀로’ 훈련을 하면서 팀을 찾았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몸담았던 팀에서 트레이너를 권유했지만 사양했다”면서 “아직 힘이 남아 있다. 마이너도, 멕시코도, 독립리그도, 어디든 좋다. 마지막으로 나의 한계를 시험하고 도전해 보고싶다. 그래서 ‘인제 정말 안되는구나’ 내 스스로 인정할 수 있을 때 미련없이 포기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미국은 기회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야구 선수라면 누구나 한번 밟아보고 싶어하는 메이저리그. 수많은 비지땀과 눈물만으로도 안되고, 그래서 꿈의 높이뛰기 조차 허락하지 않는 무감의 벽, 그것입니다. ▶ 관련기사 ◀☞[MLB 한국야구 다시 보기 8] 최희섭의 마지막 계약☞[한들의 친구 야구]클레멘스-실링 일그러진 백인 영웅☞[MLB 한국야구 다시 보기 7] 김병현이 서재응 같았다면...☞[ MLB 한국야구 다시 보기 6]동방서 온 ‘기인’ 구대성☞[ MLB 한국야구 다시 보기 5]통쾌, 유쾌, 상쾌 고추장볼
- [MLB 한국야구 다시 보기 8] 최희섭의 마지막 계약
- [로스앤젤레스=이데일리 SPN 한들 통신원] 지난 2005년 12월20일(이하 미국시간). LA 다저스에서 ‘방출되느냐, 마느냐’ 설왕설래했던 최희섭은 우여곡절 끝에 재계약 했습니다. 연봉도 35만1500 달러에서 106%나 오른 72만5천 달러로 예상 보다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연봉은 유감스럽게도 보장된 게 아니었습니다. 다저스가 최희섭을 방출시키면 대부분 휴지 조각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메이저리그 개막 2주일 전에 방출되면 17만8278 달러, 그 이전엔 11만8852 달러밖에 못받는 논개런티드(non-guaranteed) 계약이었습니다. 당시 최희섭의 에이전트는 "논개런티드 계약은 자유계약선수 권리를 획득하지 못한 6년차 미만 선수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계약”이라며 큰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최희섭의 논개런티드 계약은 메이저리그 노사 단체 협약에 규정된 ‘사실’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이 계약이 문제의 소지가 다분했던 것은, 다저스가 최희섭을 놓고 일관되게 견지해온 흐름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저스는 당시 이미 노마 가르시아파라를 1루수로 영입하고, 후반기엔 2루수 제프 켄트도 1루로 전업시킨다는 계획을 천명했습니다. 더욱 다저스는 2005시즌 내내 최희섭과 플래툰시스템을 이뤘던 올메도 사엔스와도 2년 계약을 마친 상태였습니다. 한마디로 최희섭은 주전으로 설 자리도 없거니와 보험용 백업 요원도 될 수 없는 사면초가였습니다. 그런 절박한 현실은 다저스와의 협상 과정에서도 고스란히 읽을 수 있었습니다. 최희섭의 트레이드를 줄기차게 추진해온 다저스는 마땅한 팀이 나타나지 않자 구단이 재계약 포기 대상자를 발표하는 마감일이 되어서야 계약을 했습니다. 와중에 (메이저-마이너리그에 소속되느냐에 따라 연봉이 달라지는) 스플릿 계약을 할 것이냐, 그래도 논개런티드 계약을 할 것이냐 두가지 안을 최희섭측에 제시한 뒤 계약을 마쳤습니다. 다저스의 속내는 뻔했습니다. 일단 최희섭과의 재계약으로 시간을 벌면서, 연봉도 높여 가치를 올려놓은 뒤 중단된 트레이드 작업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고서도 트레이드가 성사되지 않는다면 논개런티드 계약 조항을 십분활용해 방출시킨다는 의도였습니다. 이것이 다저스가 금전적 손해를 최대한 줄이면서 이중삼중의 안전 장치를 마련해 놓은 최희섭 논개런티드 계약의 '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최희섭의 에이전트는 다소 과민 반응을 보인 면이 없지 않았습니다. 미국 언론이 논개런티드 계약을 사실상 스플릿 계약이라고 처음 알렸을 때 “악의적인 보도”라며 한국 언론을 상대로 정정 노력을 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계약의 내용은 사실상 보장받지도 못한 스플릿 계약이었는데 106% 인상이라는 수치를 앞세워 공치사에 바빴던 것입니다. 어찌됐든 좋은 계약을 이끌어냈는데 가려지는 게 에이전트로서 억울한 면도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몇 달 후 최희섭은 다저스의 시나리오대로 됐습니다. 다저스는 3월24일 최희섭을 웨이버시켰고 보스턴 레드삭스가 잡았습니다. 다행히 다저스가 개막 11일 전에 방출해 연봉은 깎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희섭은 얼마 후 햄스트링으로 부상자 명단에 올랐고 이후 다시는 빅리그로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습니다. 363경기에 출장해 타율 2할4푼, 40홈런, 120타점. 그것이 메이저리그 5년 통산 최희섭의 성적이었습니다. 아쉬운 것은 일찌감치 다저스로부터 공을 넘겨받았던 최희섭의 에이전트였습니다. 촤희섭은 2005년 바로 그 해 메이저리그서도 몇 차례 없었던 3연타석 홈런 등 데뷔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막 꽃봉우리를 틔우는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음껏 활약할 수 있는 터전을 찾지 못하고, 부상마저 당한 뒤 마이너리그로 떨어지면서 메이저리그 생활에 마침표를 찍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최희섭의 불운이기도 하면서 에이전트의 한계였습니다. ▶ 관련기사 ◀☞[MLB 한국야구 다시 보기 7] 김병현이 서재응 같았다면...☞[MLB 한국야구 다시 보기 6]동방서 온 ‘기인’ 구대성☞[MLB 한국야구 다시 보기 5]통쾌, 유쾌, 상쾌 고추장볼☞[MLB 한국야구 다시 보기 4]WBC 김인식 감독과의 해후☞[MLB 한국야구 다시 보기 3] ‘쨍’했던 광주일고 야구
- [ MLB 한국야구 다시 보기 6]동방서 온 ‘기인’ 구대성
- [이데일리 SPN 한들 통신원] 지난 2005년 5월 하순, 메이저리그의 일주일은 ‘구대성의 주(Week)’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구대성은 5월16일 신시내티전에서 타자로 나와 배터박스에서 2피트나 멀찌감치 떨어져 방망이만 들고 서 있다가 삼진을 당해 메츠 선수들은 물론 메이저리그 관계자와 시청자들의 배꼽을 잡게 만들었습니다. 그러고도 TV 카메라에 잡힌,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그의 표정은 천연덕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포복절도케 했던 구대성은 닷새 후 사람들을 깜짝 놀래켰습니다. 21일 뉴욕 양키스와 인터리그 경기에서 언제 내가 '광화문에 서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었냐는 듯 큼지막한 2루타를 날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후속 포수 앞 보내기번트 때 3루까지 진출한 후 홈플레이트가 비어 있자 쏜살같이 달려 득점을 올리는 센스 넘치는 주루플레이로 셰이스타디움을 온통 ‘KOO’의 함성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의 점퍼 주머니엔 훈련용 쇠공까지 들어 있었습니다. 최희섭도 안타를 쳐 보지못한 사이영상 좌완 투수 랜디 존슨을 중월 2루타로 두들기고, 무거운 점퍼를 입은 투수의 몸으로 철벽을 자랑하는 양키스 내야진을 뒤흔들어 놓았으니 메츠 팬들이 열광하고도 남을 일이었습니다. 메츠 내야수 크리스 우드워드는 “그런 플레이는 퍼펙트 피칭을 하고 동시에 그 공을 받는 것과 같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AP통신은 불과 5일만에 동상에서 강타자로 변신한 구대성을 두고 ‘쇼킹 그 자체’라고 평했습니다. 구대성은 원래부터 참 엉뚱했습니다. 시쳇말로 ‘골 때리는’ 선수였습니다. 한양대 시절 신입생으로 4학년이던 구대성과 함께 방을 함께 쓴 박찬호의 증언입니다. 새해를 앞둔 어느 날 구대성이 우겨서 설날(신정)이 1월2일로 바뀐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마침 그 해 1월1일은 토요일이고 1월2일은 일요일이었습니다. 구대성의 주장인즉 설날은 무조건 쉬는 날이니까 빨간 날인 2일이 설날이란 것이었습니다. 후배들은 기가 막혀 어이 없었지만 방장 구대성이 하도 우기니 도리 없었고 결국 2일 떡국을 먹었다고 합니다. 한화와의 연봉 협상에서는 이런 일화도 있었습니다. IMF 태풍이 몰아쳤던 1998년 구대성은 그 해 고액 연봉선수 중 유일한 인상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구단 관계자의 한마디에 감봉 계약을 해버렸습니다. 매년 연봉협상 때마다 끈질기기로 유명했던 구대성은 해외 전지훈련지에서 맨 마지막으로 도장을 찍기 일쑤였습니다. 그 이유는 '현명한' 아내의 코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구단 관계자가 그 해도 구대성이 차일피일 미루며 도장을 안 찍자 무심코 “이번에도 와이프한테 허락받고 찍을거냐“고 내뱉았습니다. 그 한마디에 구대성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는지 덥썩 사인을 해버렸습니다. 그것도 2000만원을 올려주겠다는 것도 필요없다며 오히려 스스로 1000만 원을 깎아서 말입니다. 구단 관계자가 아무리 만류를 해도 듣지를 않았습니다. 홧김에 일을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시범경기에서 홈런타자 새미 소사를 삼진으로 잡아낸 뒤 소감을 묻자 “소사가 누군데요?”라고 말해 한국과 일본 기자들을 뒤로 자빠지게 만들고, 클럽하우스의 경기 전 자투리 시간에 하는 포커게임선 하도 베팅을 세게 해서 동료들의 입을 쩍 벌어지게 한 구대성은 메이저리그 사람들에겐 딱 '외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같은 엉뚱함과 기질이 투수로서는 환갑을 넘긴 37세 구대성이 빅리그에 도전하는 모험을 감행한 힘이었는지도 모릅니다. 2005년 한 시즌만 뛰고 짐을 싼 구대성의 성적은 이랬습니다. 33경기에 나와 23이닝을 던져 22안타 2홈런을 맞고 볼넷 13개, 탈삼진 23개에 승-패-세이브 없이 6홀드와 블론세이브 2개를 기록하면서 평균 자책점은 3.91이었습니다. 타율은 2타수 1안타 1삼진, 5할에 장타율 10할, OPS(출루율+장타율)는 15할이었습니다. 성적까지 좋아 페드로 마르티네스처럼 진정한 '외계인' 소리를 들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구대성도 메이저리그에 기행으로 이름을 올린 선수 중 한명에 그쳤다는 것이 그저 아쉬울 따름입니다. ▶ 관련기사 ◀☞[ MLB 한국야구 다시 보기 5]통쾌, 유쾌, 상쾌 고추장볼☞[MLB 한국야구 다시 보기 4]WBC 김인식 감독과의 해후☞[MLB 한국야구 다시 보기 3] ‘쨍’했던 광주일고 야구☞[MLB의 한국야구 다시 보기 2] 구대성의 ‘연봉 타령’☞[MLB 한국야구 다시 보기1] 최희섭 홈런 더비 출전의 음영
- [MLB 한국야구 다시 보기 3] ‘쨍’했던 광주일고 야구
- [로스앤젤레스=이데일리 SPN 한들 통신원] 지난 2005년 8월24일(미국 시간) 메이저리그에서는 사상 최초의 풍경화가 그려졌습니다. 뉴욕 메츠의 서재응이 애리조나전에 선발 등판해 6승을 따내고, 콜로라도 로키스의 김병현과 LA 다저스의 최희섭이 다저스타디움에서 처음으로 투.타 맞대결을 벌인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광주일고 출신들입니다. 미국과 일본에도 숱한 야구 명문교들이 있습니다. 랜디 존슨과 마크 맥과이어, 마크 프라이어 등을 배출한 USC(대학)가 있고, 마쓰이 가즈오를 비롯한 수많은 일본 프로 선수를 키워낸 오사카 PL학원(고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날 광주일고 트리오처럼 한 날 한 시, 빅 리그 그라운드를 누빈 학교는 없었습니다. 셋은 나란히 1학년씩 터울입니다(김병현과 최희섭은 같은 79년생이지만 김병현이 1월생, 최희섭은 3월생입니다). 이들이 광주일고를 함께 다녔던 해는 96년이었습니다. 서재응이 3학년, 김병현이 2학년, 최희섭이 1학년으로 뛰었던 그 해 광주일고는 청룡기 우승을 일궈냈습니다. 이들 사이엔 재미난 일화도 많았는데요. 김병현은 어려서부터 ‘물수제비’(강에다 돌을 던져 돌이 물위에서 통통 튀어가는 놀이)를 잘 떳다고 합니다. 애리조나 입단 초, 이동하는 차 안에서 물수제비를 잘 던진 게 잠수함 투수가 된 한 이유가 아닌가싶다고 스스로 밝히기도 했습니다. 서재응이 최희섭을 알게 된 것은 광주일고 입학 훨씬 전이었습니다. 중학생 서재응은 초등학교에서 엄청난 체구로 홈런을 펑펑 쳐낸다는 '괴물 아이'가 있다는 소문들 듣고 직접 그 학교를 찾아가 봤는데 그 아이가 바로 최희섭이었다고 합니다. 광주일고의 야구 역사는 유구합니다. 해방 이후 6.25 동란 전까지 당시 경남중의 장태영과 함께 중학야구를 양분했던 광주서중의 김양중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후 침체기를 면치 못했던 광주일고 야구는 고교야구 최초의 3연타석 홈런의 주인공 김윤환과 투수 강만식 등의 등장으로 70년대 중반 르네상스의 전기를 마련하고 80년대 들어 최전성기를 활짝 열어 제칩니다.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투수라는 선동렬(78~80년), 타자 중에 처음으로 '천재' 소리를 들었던 이종범(86~88년) 등 국보급 선수들이 줄줄이 배출되면서 82년 한국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해태 타이거스 제국'을 건설하기에 이릅니다. 유독 광주일고 출신들이 '야구 본토'에 와서도 그 이름을 드높였던 힘은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서재응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광주일고 야구부는 지역 예선전에 나갈 때도 교정의 광주학생운동기념탑에 모여 항상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올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를 외치고 야구장으로 향한다. 무슨 대회에 나가 건 단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행하는 전통이다. 그런 정신이 광주일고 야구를 만들었고 그 덕분에 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광주일고 야구야말로 서재응과 최희섭이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 때마다 누누이 밝혔던, 바로 '한의 야구'입니다. 지난 1980년 5월의 광주는 세계 최현대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반인류적인 학살과 도륙의 참극이 벌어졌던 피의 현장이었습니다. 야만의 총부리에 졸지에 부모 형제 친구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광주 사람들에게 야구는 그 응어리진 한을 토해낼 수 있었던 유일한 배출구였고, 야구장은 그 해방구였습니다. 선동렬-이종범-서재응-김병현-최희섭으로 이어지는 광주일고 야구의 적자들은 바로 그 한의 용광로에서 담금질 되고, 길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이 메이저리그에까지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은 광주일고 야구의 사회학이고 역사학입니다. ▶ 관련기사 ◀☞[MLB의 한국야구 다시 보기 2] 구대성의 ‘연봉 타령’☞[MLB 한국야구 다시 보기1] 최희섭 홈런 더비 출전의 음영☞[한들의 친구 야구] 눈물의 씨앗, 감독 이야기☞[한들의 친구 야구]야구 바다의 '물과 기름',스몰볼과 세이버매트릭스☞[한들의 친구 야구]월봉 250불 중국 야구, 메이저리그가 불지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