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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대꽃 꽉 잡은 게, 장원급제 염원이…
- 이데일리신문 | 이 기사는 이데일리신문 2012년 02월 28일자 25면에 게재됐습니다.▲ 단원 김홍도 `해탐노화`. 과거 급제의 축원을 담은 게와 갈대 그림이다. 절묘한 착상, 감각적인 기교, 알찬 내용이 어우러진, 화훼영모화 중 걸작으로 꼽힌다(사진=다섯수레).[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참게 두 마리가 다투고 있다. 서로 엉키듯 움켜쥐고 있는 것은 갈대꽃이다. 본래 게는 육식성이라 했다. 소소한 갈대꽃을 두고 야단을 벌일 일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게의 이러한 행태에는 분명 사연이 있을 것이다. 등에 딱딱한 껍질을 쓰고 있는 게를 한자로는 `갑(甲)`이라 했다. 이는 선비가 염원하는 `갑`자와 다르지 않았는데, 그건 바로 조선시대 과거시험 합격 등급이다. 갑과, 을과, 병과 중 1등 장원이 바로 갑과였다. 결국 게를 그린 그림은 갑과로 합격하라는 염원이 담긴 것이다. 게와 갈대는 단원 김홍도(1745∼1806)가 그린 `해탐노화(蟹貪蘆花)`다. 누군가의 과거 급제를 바라는 마음을 먹 하나의 농담으로 호방하고 활달하게 그려냈다. 곁에 붙인 거침없는 행서도 의미가 단순치 않다. 당나라 시인 두목이 읊은 게에 대한 시 한 구절에서 따왔다. “바다 용왕 앞에서도 옆으로 걷는다(海龍王處也橫行)”다. 임금 앞이라고 눈치 보지 말고 소신 있는 사람이 되란 뜻이다. 간송미술관에서 상임 연구위원으로 있는 백인산이 우리 옛 그림을 다시 살핀 `선비의 향기, 그림으로 만나다`(120쪽, 다섯수레)를 냈다. 꽃과 풀, 날짐승과 길짐승을 그린 `화훼영모(花卉翎毛)`화 22점과 매난국죽의 `사군자(四君子)`화 30점을 뽑아 눈높이를 대폭 낮춘 설명을 달았다. 한점 한점을 마치 도록처럼 게재하고 그림들이 품고 있는 선비의 내면과 성정, 배경과 뒷이야기까지 풍성히 풀어놓는다. “형식이나 양식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림 안에 담긴 화가의 마음과 정서를 읽어내는 것이 한 수 높은 안목.” 굽이굽이 그림 세워둔 길목 끝엔 도움말 한 토막 차분히 붙였다.
- 박완서가 던지고 간 마지막 선물
- 이데일리신문 | 이 기사는 이데일리신문 2012년 01월 31일자 30면에 게재됐습니다.[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마흔 살이란 늦은 나이답게 수줍게 문단을 두드린 게 처녀작 `나목`이었다. 사적인 경험을 우려낸 작품이니 유니크하지만 등단작으로 끝나는 일회적인 작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한 심사위원의 조심스 러운 전망이 기억에 남는다. … 초기에 쏟아낸 6·25를 소재로 한 작품들에 대해선 비극적인 가족사를 반복적으로 우려먹는다는 평도 들었지만 나는 반전소설로 읽히길 바라고 있다”(`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중에서). 작가 박완서(1931∼2011)를 평생 옥죄던 질곡이 있다. 상처라는 말로는 어림도 없다. 그는 전쟁통에 오빠를 잃고, 훗날 남편과 막내 외아들마저 앞세웠다. 역설적이게도 이 질긴 속박은 그의 문학에 태동이 됐다. “소설로 복수하겠다는 생각은 고통을 이기는 힘이 됐다”고 했다. 쓰고 싶다는 욕구는 그 자신이 표현한 `이물감`처럼 서걱거렸다. 그리고 40년을 문단에서 살았다. 소설은 질곡도 도려내고 이물감도 빼낼 소통이었다. 그 한 덩어리가 엉켜 있는 선생의 마지막 단편들이 소설집 `기나긴 하루`(292쪽, 문학동네)로 묶였다. 선생의 타계 1주기를 기리는 소설집이다. 선생이 남긴 세 편의 단편과 함께 평론가 김윤식, 소설가 신경숙과 김애란이 추천한 세 편 등 모두 여섯 편을 실었다. 선생의 세 단편은 말년 작품들로 문예지엔 발표했지만 책으론 미처 묶이지 못했던 것들이다.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2010), `빨갱이 바이러스`(2009),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2008)가 처음으로 한 권에 들었다. 여기에 김윤식은 `카메라와 워커`(1975)를, 신경숙은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1993), 김애란은 `닮은 방들`(1974)을 대표작으로 추천했다. 세 사람은 선생을 향한 탄식을 따로 붙여 남은 비통을 전했다. 선생과의 엉킨 첫 만남을 회고하며 김윤식은 이렇게 썼다. “이래서 억울하고 저래서 억울한 법. 팔십쯤 되면 이 경지에 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안타깝게도 하늘은 내 이런 질문을 앗아가고 말았소.” 신경숙은 조금 더 간곡하다. “아주 오래전, 십오 년도 전에 당신이 제게 `신경숙씨, 보셔요`라는 제목으로 쓰셨던 글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렇게 뒤늦게 이 글의 맨 앞에 `박완서 선생님, 보셔요`라고 씁니다.” 요즘 출판계가 분주하다. 1주기 언저리로 선생의 등단작인 장편 `나목`이 500권 한정판(열화당)으로 나왔고, `박완서 소설전집`도 22권으로 재출간(세계사)됐다. `기나긴 하루`는 그 위에 얹은 마지막 돌덩이다. 한국문학사를 관통하는 기둥은 이렇게 세워졌다.
- 그들에겐 반란의 DNA 있었다
- 이데일리신문 | 이 기사는 이데일리신문 2012년 01월 05일자 26면에 게재됐습니다.[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손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그들의 손이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열여섯 명 작가들의 손은 하나같이 거친 굴곡을 감고 있었다. 그들의 글과 책은 유려한 손놀림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아니었다. 관념보다는 생존, 안위보다는 고통, 문학보다는 사회였다. “나는 좌파니 우파니 하는 우스꽝스러운 차별성 너머에 존재한다. 나는 권력의 한계에 대항하는 메커니즘으로 형성된 시스템을 믿는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정치혐오주의자일 것이다.” 200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중국 작가 가오싱젠은 파리에서 망명 중이다. 천안문 학살사건에서 착안해 쓴 `도망`으로 인해 그는 중국정부에 `찍힌` 인물이 됐다. “예술은 세상을 바꿀 힘이 없다. `돈키호테` `카라마조프 형제` `햄릿`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작가는 메시아적인 자세를 취하면 안 된다. 나는 약속은 하되 거기에 어떤 희망도 심지 않는다.” 1982년 수상자인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가 마지막까지 매달린 것은 지구 숲 지키기다. `책이 숲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주관이었다. 스페인 `라 반과르디아` 지 문학전문기자와 사진기자가 세계에 흩어져 있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을 찾아 인터뷰했다. 짧게는 6시간 길게는 8일에 걸쳐 열여섯 명을 만났다. 삶의 궤적을 더듬고 철학을 읽는 데 3년이 걸렸다. 그리고 생활 구석구석을 잡아낸 흑백사진들 속에 그 `손`들이 있었다. 현대사에서 유독 가시밭길을 걸어온 이들이 묶였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이들은 문학이 아닌 다른 어떤 이유로 사회참여를 하고 있었다. 노벨상과 삶의 안락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들이 평온치 않은 이유를 책은 `반란 유전자`를 가졌기 때문으로 봤다. 권력의 바닥에 깔린 속성에 대한 저항 말이다. 이들은 정부권력의 전횡에, 오만한 엘리트에, 자본주의의 횡포에, 여성학대에 분노를 품고 있다. 대학살, 독재정부, 인종차별정책의 반대말은 `반란`이었다. ▲ 사진=스테이지팩토리일본의 오에 겐자부로(1994년 수상)는 인간의 고통을 표현하는 전문가로 불린다. 격통에 빠져들고자 원자폭탄이 투하돼 신음하는 히로시마로 향하기도 했다. 계기가 있다. 1963년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받은 수술로 지적장애가 되고나서였다. 터키의 오르한 파무크(2006)는 극우주의자들로부터 받는 암살협박이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이 땅에서 100만명의 아르메니아인과 3만명의 쿠르드족이 살해됐지만 누구도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폭로한 뒤다. 미국 흑인의 힘을 상징하는 토니 모리슨(1993)은 여전히 남아있는 노예제도에 대해 말한다. 일을 하고 돈을 못 받는 것, 의지대로 일을 선택하지 못하는 것이 노예제도와 뭐가 다르냐고 묻는다. 세세한 행적을 나열하지 않고 그들이 구축한 문학사적 의의를 따지지도 않았다. 만난 시점 바로 그 상태에서 들이댄 앵글에 비추인 그들의 삶, 혹은 삶과 괴리된 이상에 관해서만 말했다. 한국이 노벨상, 더욱이 노벨문학상에 매달린 지는 꽤 됐다. 한 번만 꿰차면 문단은 물론 나라가 흔들릴 형국이다. 그러나 노벨상이 과연 그런 것인가. 정작 수상자인 그들은 세상의 잣대와 동떨어진 곳에 있었다. 책무가 너무 무거운 탓에 명예조차 들어올리지 못했다.
- [동영상]''집이 무너진다'', 쓰레기 매립지 위 주민들
- [이데일리TV 송원근 김성권 PD] 언젠가 부터 예전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대구 서구의 평리 6동을 찾았다. 처음 도착했을 때의 마을 분위기는 특별할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주민들의 항의 섞인 현수막을 시작으로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진 전봇대 그리고 서로 맞붙을 듯 기울어져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주택들이 이곳의 심각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곳에서 처음 만난 주민의 목소리는 “집이 기울어 져서 집수리를 여러 번 했는데 아무리 해도 계속 기울어졌다. 이상해서 조사를 해보니 이곳이 예전 쓰레기 매립장이여서 이런 문제가 계속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이 동네 집들은 이제 팔리지도 않고 세도 안 들어온다. 쓰레기 냄새와 오염으로 공기가 안 좋은데 누가 여기서 살라고 그러겠냐.”라고 한숨 섞인 하소연이었다. 마을로 들어가 좀 더 가까이 살펴보니 1미터 이상이었던 집과 집의 간격이 이젠 거의 붙어 있을 정도로 양측이 기울어져 있다. 각 집들의 실내도 마찬가지다. 수도가 터지고 아귀가 틀어져 창문은 열리지 않고, 군데군데 물에 젖고 뜯어진 천장은 곧 무너질 듯 불안하기만 하다. 집집마다 벽이며 천장이 갈라지고 무너진 모습으로 주민들의 억장 역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평리 6동은 대구시가 1987년 농경지였던 지역을 주거지역으로 변경하여 1989년부터 새롭게 개발하여 탄생한 마을이다. 그런데 800여가구의 2천명이 넘는 주민 중 절반 이상이 집이 기울어지는 등의 불편을 호소하고 있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상황의 원인이 다름 아닌 쓰레기 매립장 위에 마을이 건립됐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최근 진행 중인 서평리 지하차도 공사현장에서 대량의 생활쓰레기가 발견되면서 의혹은 더욱 커져갔다. 백승정 대구균형발전연구원은 “이곳을 조사해 보니 낮은 곳은 2.5미터 그리고 깊은 곳은 7미터 정도 깊이로 쓰레기가 매립되어 있다. 이렇게 매립지에 건축허가를 내 주는 것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사례다.”라고 심각성을 말해준다. 백연구원의 도움으로 장비를 동원하여 주변 땅을 파보았다. 파낸 흙더미에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가 섞여 있었다. 파면 팔수록 쏟아져 나오는 검은 흙과 쓰레기 주변으로 심지어 썩은 물도 흐르고 있다. 기름까지 앉은 침출수에 주민들의 황당한 한탄이 터져 나온다. 쓰레기와 함께 나오기 시작한 침출수는 이미 웅덩이 수준이다. 혹시나 하고 우려는 했지만 드러나는 진실에 주민들은 할 말을 잃었다. 이에 대해 정부의 대책을 듣기 위해 대구 시청으로 갔다. 대구시 담당 공무원은 예전 장부를 뒤적이며 “평리 매립장을 1981년부터 대구시에서 관리했다고 나오는데, 80년도 전에는 실제 관리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쓰레기 처리에 대한 책임이 구청장과 군수로 되어 있는데, 매립장으로 조성되어 관리한 곳이 아니라면 그 당시 구청장이 책임져야 할 것이다.”고 책임을 회피했다. 사실 대구시에서는 4곳에 비위생 쓰레기매립장을 운영했었다. 그 중 한 곳이 평리동 일대라는 것이 주민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대구시의 입장은 1981년부터 2년간 운영된 쓰레기 매립 부지에는 염색공단이 들어서 있고, 주택가는 매립지역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대구시는 관리기간 이후의 문제와 매립지역 이외 지역에 대해서도 책임이 없다는 입장이다. 또한 이런 사태의 원인이 마을 건립 전 토양을 다지기 위해 연탄재를 섞은 것이 문제의 원인인 것 같다고 예매하게 덧붙였다. 이연희 대구균형발전연구원은 “흙을 파는 순간 토양이 썩어있고 그 주변으로는 침출수가 흐른다. 대부분의 쓰레기들은 썩지 않는 생활 폐기물이다. 옷가지, 음식물 찌꺼기, 비닐 같은 것들 때문에 땅의 지하층까지 다 썩어있다. 이 땅위에는 사람이 살 수 없다. 이런 곳에 집을 짓도록 허가를 내준 정부가 지역 주민들 전부를 책임져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교원 경북대학교 지질학과 교수도 “80년대 초 쓰레기 매립지 관리에 관한 법률이 없던 시절에 허가 없이 쓰레기를 매립한 후 개인이 하나 둘 집을 지어 현재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 당시 쓰레기가 쌓여있는 걸 정부가 알았으면 흙을 바꾸던지 아니면 그 아래 토양까지 기초를 내려서 공사를 하던지 했어야 된다." 라고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러한 환경은 주민들의 건강까지 위협하고 있다. 주민들은 크고 작은 통증을 호소하고, 눈곱이 끼고, 목이 아파서 말도 못하고 숨을 쉴 수조차 없다고 한탄한다. 특히 쓰레기에서 나오는 독한 가스를 마시고 살고 있기에 이곳에 사셨던 노인 분들 대부분이 오래 못살고 일찍 돌아가셨다고 한다. PD는 평리 6동 일대의 오염도를 측정하기 위해 한국환경수도연구원에 지하 5m 아래에서 침출수를 채취해 성분분석을 의뢰해 보았다. 분석결과 매립시설 배출허용기준 부유물질의 표준치인 70mg/L 대비 평리 6동의 경우는 17,190mg/L로 245배나 높게 판명되었다. 또한 CODMn(산화정도) 역시 1,120mg/L가 검출됐다. 이 역시 기준치인 100~150mg/L의 7배~11배에 이르는 수치이다. 속속 드러나고 있는 사실에 주민들은 고통 받고 있지만 대구시청은 이를 무시한 채 대책세우기에 뒷전이다. 누구의 책임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민의 건강과 쾌적한 주거환경을 지켜줘야 한다는 것이다. 하루빨리 평리 6동 주민들이 평화로운 일상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