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면 초대 인사혁신처장·성균관대 특임교수]대한민국 노인들이 가난하다는 건 이제 삼척동자도 다 아는 얘기가 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 중 가장 빠르게 늙어가는 나라이면서도 이들 고령층이 먹고 살기 힘든 나라(노인빈곤율 OECD 1위).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경제대국의 짙은 그림자 중 하나가 바로 극심한 노인빈곤이다.
| 기온이 영하 7도 안팎으로 떨어진 지난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 사회복지원각 앞에 무료 급식을 받으려 줄을 선 사람들(사진=황병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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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빈곤 문제가 심각한 이유는 노년층의 인간다운 삶이 사회 전체적인 복지 시스템의 지속가능성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람이 청장년 시절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참아가며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육체가 쇠락해 노동하지 못할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고통을 감내하며 열심히 일해도 나이 들어 가난해질 것이 뻔하다면 일할 의욕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최근 몇 년간 유행한 욜로라는 단어는 벌써 이 땅의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열심히 일해도 안정적인 노후를 누리긴 어렵다는 자포자기의 정신이 스며들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적정 수준의 노인소득 보장과 이를 통한 인간다운 삶의 영위는 그 자체가 복지의 일환이자 국가 복지 시스템의 건전성 유지를 위한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나라는 소모적인 공짜 정책들이 복지라는 이름으로 시스템을 좀먹으며 안정적 노후보장을 위협하고 있다. 복지는 사회구성원이 생활의 곤궁에 처하게 될 경우 삶의 질 향상을 위해 공공의 재원으로 최저생활을 보장해 주는 제도이다. 고도성장기 대한민국은 복지는 개인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오로지 성장을 위해 달렸다. 어느 정도 경제가 성장한 후엔 허약한 복지망에 대한 반작용으로 복지정책 관련 예산이 급속히 팽창했다. 국가의 부조(扶助)가 필요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무차별적으로 제공하는 이른바 공짜예산, 선심성 정책은 자꾸 늘어가는데 한쪽에선 굶어 죽는 사람, 고독사하는 사람이 나온다는 것은 무언가 잘못 되고 있다는 신호다.
복지는 공짜라는 잘못된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 스스로 벌어서 스스로 먹고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이에게 제공되는 것을 복지라 한다. 그렇지 않고 빌어서 먹고살아가려는 근성과 인기영합주의가 만나 공중에 흩뿌려지는 것은 공짜일 뿐이고 지금 제공하는 공짜는 훗날 우리 자식들이 결국 갚아야 할 빚으로 남는다.
다시 노인 빈곤 이야기로 돌아가자. 지금 노인세대는 젊은이들이 상상하지도 못할 강도의 노동과 착취 수준의 처우를 감내하며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된 세대다. 복지라는 개념도 없었던 대한민국에서 자기 몸 돌보지 않고 묵묵히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식을 잘 키우면 노후는 자식들이 책임져 줄 것이라는 전통적 가족복지 시스템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이후 가족 복지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있다. 남은 것은 국가가 제공하는 안전망인데 그마저도 방만한 복지정책으로 허점이 적지 않다. 이대로라면 극심한 노인빈곤은 해결은커녕 더 심해질 것이 자명해 보인다.
왜 아이들을 성장시키고 양육한 세대에게 인색한가? 자식 세대의 부모 부양은 사회적 책임 이전에 근본적이고 도덕적 윤리의 문제이다. 야박하지만 수익자 부담이란 원칙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오롯이 사회와 국가의 책임으로 돌리는 시각과 관점을 누가 만들었는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전통 이전의 가족의 의미와 가족 우선의 기본적인 인식을 다시 살펴야 한다. 아이는 왜 낳아 키우는가? 봉사인가? 행복인가? 더불어 사는 삶인가? 아니면 살모사적 가족주의가 지향할 점인가? 사회 모두의 가치적 과제이다. 부모자식간의 양육과 부양은 자연의 법칙이고 순리이다. 이를 회복하고 상호 책임을 공유하는 것이 정책으로라도 정립돼야 한다. 말로는 동방예의지국이라 하면서…
우리 사회는 복지혜택을 받는 아이들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이유로 재벌집 자녀에게까지 세금으로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독거노인들은 민간이 운영하는 무료 급식소를 찾아 두세 시간을 찾아 헤매고 있다.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젊은 시절 노후에 대한 최소한의 준비마저 뒤로한 채 소처럼 일만 했던 노인들에게 국가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청년들에게 어찌 근면하라, 노력하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필요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무차별적으로 제공하는 공짜복지는 일차적으론 가난한 노인들을 도울 재원을 낭비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고 이차적으론 젊은 세대로 하여금 안온한 복지망에 안주하게 만들어 스스로 먹고살겠다는 의지를 약화시킨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지금 많은 청년들은 은퇴 후의 삶은 국가가 세금으로 책임져 준다는 인식으로 오늘 벌어 오늘 쓰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만약 청년들이 국가의 도움은 전혀 없이 부모의 노후와 자기들의 노후를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면 지금과 같은 소비패턴을 유지할 수 있을지 냉정히 따져봐야 한다. 그러면서 이토록 노인들이 오래살고 가난한 사회에서 더 일하지 말고 은퇴하라는 것은 이들을 가난의 절벽으로 더 밀어내는 건 아닌지 고민해볼 일이다. 우리 사회 전체가 되돌아보고 책임질 문제다. 필요 없는 이에게 낭비되는 공짜는 줄이고 필요한 이에게 필요한 만큼 제공하는 진짜 복지야말로 노인빈곤을 해결하는 열쇠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연금 재정이 예상보다 더 빨리 고갈되니 젊은 세대가 부담해야 한다며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것도 문제다. 복지국가가 아닌 폰지사기와 다를 바 없다. 기울어진 복지제도의 단면 아니겠는가. 상위계층이나 고소득 자산층의 적절한 기여, 즉 기득권의 자발적 연금 축소와 반납, 유보 등의 고통분담책을 유도하거나 더 많은 연금 기여자를 만드는 정년연장 등의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 누가 복지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라 했는가. 일견 그들만의 복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