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실패한 약에 새옷 입히는 '드럭 리포지셔닝'

아스피린, 피 안 멈추는 부작용 이용해
진통제서 혈전방지제로 환골탈태
비아그라, 협심증 치료제 효과 못보고
'발기 지속' 부작용에 방향 전환
AI 활용해 효율성·개발속도 높여
  • 등록 2019-08-26 오후 2:35:20

    수정 2019-08-26 오후 5:42:39

스탠다임의 AI를 활용한 신약개발 플랫폼 ‘스탠다임 인사이트’ 개념도.(사진=스탠다임 제공)
[이데일리 강경훈 기자] 2015년 설립한 스탠다임은 이달 초 SK케미칼(285130)과 신약 공동개발 계약을 맺었다. 대기업이 설립한지 4년밖에 안 된 스타트업과 손을 잡은 이유는 명확하다. 조금이라도 신약개발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서다. 스탠다임은 신약개발을 실험실이 아닌 컴퓨터로 하는 회사다.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이미 나와 있는 약을 새로운 질환에 적용하도록 하는 게 핵심 기술이다. 스탠다임은 이미 나와 있는 약의 구조를 비롯해 유전자 발현 패턴, 단백질 결합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가능성 있는 후보질환을 추린다. 이런 방식으로 연구 1년만에 비알코올성지방간 후보물질 2건을 찾아낸 이력이 있다.

스탠다임의 방식과 같이 이미 나와 있는 약을 새로운 질환에 적용하는 것을 영어로 ‘드럭 리포지셔닝’(Drug Repositioning)이라고 한다. 약을 재배치한다는 의미다. 비슷한 의미로 약의 쓰임새를 새로 찾는다는 의미로 ‘드럭 리퍼퍼싱(Drug Repurposing)이라고 한다.

드럭 리포지셔닝은 낯선 개념이 아니다. 대표적인 게 아스피린이다. 아스피린은 버드나무껍질에서 추출한 살리실산이 주성분이다. 아스피린은 히포크라테스도 해열진통제로 썼을 만큼 역사가 길다. 물론 당시에는 원료물질인 버드나무껍질을 약재로 썼다. 1830년대 약효성분이 살리실산이라는 게 밝혀졌고 1890년대에 버드나무 껍질이 없어도 화학적으로 만들 수 있게 됐다. 아스피린은 진통효과가 우수했지만 약을 쓰면 피가 잘 굳지 않는 부작용이 있었다. 제조사는 이 부작용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바로 심혈관질환 치료제다. 혈액응고를 방해하기 때문에 혈전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아스피린은 현재 진통제 시장보다 심혈관질환 치료제 시장이 더 크다. 이 외에도 협심증 치료제에서 발기부전치료제로 방향을 틀어 성공한 비아그라를 비롯해 고혈압 치료제에서 탈모치료제로 방향을 튼 미녹시딜 성분 등 드럭 리포지셔닝 사례가 있다.

국내 바이오벤처 투비바이오는 러시아, 독립국가연합 등에서 헤르페스, B형간염, 인유두종바이러스 치료제로 쓰는 알로페론으로 면역항암제를 만드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알로페론은 곤충에서 면역기능을 하는 항체다. 회사 측은 이를 췌장암치료에 이용하는 방법을 연구 중이다. 현재 전임상시험을 진행 중이다. 회사 관계자는 “러시아에서 100만 건 이상 처방 이력이 있는 약”이라며 “사망 등 심각한 부작용 사례가 보고된 적이 없는 만큼 독성 등 초기 단계는 쉽게 넘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바이오벤처 메티메디는 영양제로 널리 쓰는 성분으로 대사 항암제로 개발 중이다. 암세포의 대사에 관여해 암을 굶겨 죽이는 것인데 이 회사는 먹는 대신 주사제로 개량했다. 장종환 메티메디 대표는 “영양제로 쓸 만큼 안전한 성분이지만 먹으면 위산에 분해돼 항암 능력이 없다”며 “혈관에 직접 주입해 항암효과를 높였다”고 말했다.

제약·바이오기업이 드럭 리포시셔닝에 뛰어드는 이유는 명확하다. 김태순 신테카바이오 대표는 “제약사들이 보유한 신약 후보물질 라이브러리로는 이미 만들 수 있는 약을 모두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며 “새로운 후보물질을 탐색하는 것보다 기존에 있는 약의 가치를 높이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과거에는 경험으로 이뤄지던 드럭 리포지셔닝이 AI와 결합해 효율성을 높인 것도 드럭 리포지셔닝이 활성화한 요인이다. 바이오비스타, 힐엑스, 랜턴파마, 파넥스트, 리커션 등 글로벌 바이오벤처 기업이 AI를 활용해 드럭 리포지셔닝에 도전 중이다. 몇몇 기업은 꽤 진전을 보이고 있다. 미국 아토마이즈는 다른 질병 치료에 쓰던 약의 구조를 AI로 분석해 하루 만에 에볼라 바이러스 치료제 후보물질 두 개를 찾아내기도 했고 영국 베네볼런트AI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치료제로 개발하다 중단된 약으로 불면증 치료제의 임상2상을 진행하고 있다. 이에 대해 주철휘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인공지능신약개발지원센터 부센터장은 “신약개발에 드는 시간과 비용은 급격히 느는 데 비해 성공 가능성은 지속적으로 줄어들면서 약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높이려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며 “AI로 효율성을 키우면서 앞으로 드럭 리포지셔닝 성공사례가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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