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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121기는 최고 성능의 레이더를 갖고 있었기에 북한 전투기가 뜨면 먼저 발견하고 달아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북한 입장에서 EC-121기는 얄미운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 생일인 4월 15일을 맞아 EC-121기를 격추하기 위해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이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동해를 관할하는 북한 어랑 비행장에는 6.25 전쟁 때 활약한 구식 ‘MiG-15 전투기’밖에 없었다. 이 전투기는 속도가 느려 EC-121기를 격추할 수 없었다. 당시 어랑 비행장은 김책공군대학이 관할했는데, 김기옥 소장은 이 대학 학장으로 있었다. 김 소장은 평안남도 북창 비행장에 주둔해 있던 22연대의 MiG-21기 두 대를 어랑 비행장으로 옮기게 했다. 마하 2 정도의 속도를 가진 최신형 전투기 MiG-21기라면 미국의 EC-121기를 격추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북한은 미군 정찰을 피해 두 대의 MiG-21을 분해해 야간 열차 편으로 어랑 비행장으로 옮겼다. 그 후 대형 텐트를 쳐 그곳에서 MiG-21을 재조립했다. 김 소장은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을 기약하며 일주일 남짓 EC-121이 날아오기를 기다렸다.
북한이 이처럼 미국에 대해 대담한 작전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불과 이 사건 1년 전에 이뤄진 미국 군함 피랍 사건에서 비롯된 자신감이었다. 1968년 1월 23일 미국 해군 소속 정찰함 USS 푸에블로호가 동해 공해상에서 북한 해군에 의해 나포돼 83명의 미 해군 승무원들이 11개월이나 붙잡혀 있다가 풀려난 ‘푸에블로함 피랍 사건(Pueblo Incident)’이 바로 그것이었다. 북한은 이 사건이 마무리된 지 4개월도 채 되지 않아 미국의 정찰기를 격추한 데 이어, 4개월 뒤엔 또다시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미군 헬리콥터(OH-23)를 떨어뜨렸다. OH-23에 타고 있던 미군 병사 3명은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됐는데, 같은 해 12월 3일 미국은 북한이 요구하는 대로 사과문에 서명을 하고 나서야 미군 병사를 데려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