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행의 끝에서 다른 삶의 물길을 여는 포구, 베니스

이동진의 세계영화기행 【18·끝】 베니스에서 죽다
  • 등록 2006-09-20 오후 12:20:00

    수정 2006-09-20 오후 12:20:00

[조선일보 제공] 어쩌면 이 여행기는 같은 자리를 몇 차례 맴돌다 미로 속에 갇히는 글이 되지 않을까.

물이 길을 만들었다. 베니스를 처음 봤을 때 세상에 이런 곳이 있나 싶었다. 곤돌라가 누비는 수로마다 너무 로맨틱해서 비현실적인 낭만이 장밋빛 등불을 달고 동동 떠다녔다. 하지만 이곳 방문이 네 번째였던 그날은 달랐다. 영화 ‘베니스에서 죽다’에서 홀로 죽어간 작곡가 아센바흐의 자취를 좇는 여행이기 때문이었을까. 가끔씩 내리는 비에 베니스는 음울하게 젖어 있었다. 숙소로 가는 길, 짙은 녹색 바다는 응고된 푸딩 같았다. 배는 푸딩을 으깨듯 힘겹게 물 위를 지났다.

베니스에 쉬러 왔던 아센바흐는 비굴하거나 불친절한 베니스 사람들에 질릴 때쯤 열네 살 폴란드 소년 타치오를 발견한다. 가족과 함께 휴가를 즐기러 온 타치오는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타치오를 찾지 못해 베니스의 좁은 골목에서 쪼그리고 앉아 울먹이는 꿈을 꾸던 아센바흐는 잠에서 깨어 땀을 흘린다. 그의 땀은 검은색이다. 젊음을 의식한 초로의 신사가 머리를 염색했기 때문이다. 신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종종 바다를 바라보지만 갈피를 잡지 못한다. 어디로 가는지 모를 때는 어떤 바람도 순풍이 되지 못한다. 빈 하늘을 어지럽게 떠도는, 새.


▲ 죄수들이 다가올 고문과 죽음을 생각하고 한숨지으며 건넜다는‘탄식의 다리’. 그 아래 좁은 수로 위를 베니스의 상징인 곤돌라가 여유롭게 떠간다.
새들의 세상이었다. 베니스의 명소인 산 마르코 광장은 언제 가도 비둘기 천지였다. 도시 전체로 번져가는 전염병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아센바흐가 가로지르던 광장을 거닐 때, 노천카페의 악단이 영화 ‘모 베터 블루스’의 테마곡을 멋지게 연주했다. 비둘기들이 힘차게 공기를 가르며 관악기가 쏟아내는 음표 사이를 저공 비행할 때마다, 아이들의 즐거운 비명도 솟아올랐다. 새의 날갯짓과 어린이의 웃음소리와 브라스 밴드의 음악, 그리고 저 멀리 바다에 떠 있는 곤돌라 위의 연인들. 이보다 더 낭만적인 풍경이 있을까.

그러나 춤을 추는 사람 모두가 즐겁진 않은 법. 광장 구석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노인은 비둘기가 날아오를 때마다 찡그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 보니 손 어깨 머리 등 어디나 앉는 새들은 이악스러웠다. 1유로짜리 모이를 산 관광객이 채 펼치기도 전에 달려들었다. 받은 팁만큼 음악을 뽑아낸 브라스 밴드는 악기를 내려놓았고, 잠깐의 낭만을 선사한 곤돌라 사공은 웃돈을 요구했다. 그리고 흐려진 노안(老眼)에, 아이들은 유난스러웠다. 결국 되돌아왔지만, 아센바흐는 신발 끄는 소리와 긴 그림자를 남기고 전염병이 창궐하는 베니스를 떠나려 했다. 소리와 그림자 외에, 떠나는 자의 뒷모습이 남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깊을수록 고독한, 섬.

섬은 한적했다. 남북으로 좁고 긴 베니스 리도섬은 아센바흐가 묵었던 곳이다. 그가 투숙했던 ‘호텔 데 뱅’(Hotel Des Bains)으로 갔다. 이곳의 레스토랑과 카페와 엘리베이터에서 그는 타치오와 수 차례 마주치면서도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다. 삐걱거리는 나무 복도를 지나 1층 카페로 들어가서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함께 나온 초콜릿 입힌 딸기를 보니, 딸기 하나를 먹고도 냅킨으로 깔끔하게 닦아 냈던 아센바흐가 떠올랐다. 손꼽히는 휴양지 리도섬은 여기서 열리는 베니스 영화제 기간에만 방문해서였는지 썰렁한 분위기가 익숙지 않았다. 


▲ 산 마르코 광장을 뒤덮은 비둘기떼.
비 뿌리는 해변엔 아무도 없었다. 아센바흐가 타치오를 무망하게 바라보던 바닷가에는 파란색 간이 의자들이 접혀진 채 열 맞춰 늘어서 있었다. 함께 있어도 외로운 것들이 있다. 늦은 오후, 우산도 없이 모래사장을 걸었다. 물이 땅에 남긴 흔적 위에 다시 인간의 흔적을 보태는 것은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아무리 곧게 걸으려 애써도, 돌아보면 발자국은 늘 어지럽다. 누구보다 이성적으로 살아온 독일인 아센바흐는 삶의 마지막 여행에서 어린 소년에게 매혹되어 극심한 혼란을 경험한다. 모래가 기억하는 비, 삶이 추억하는 여행. 여행이 가치있다면, 그건 끊임없이 움직이는 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해가 나면 모래는 곧 비를 잊는다. 그리고 삶은 끝내 웅덩이를 이루며 고인다. 흐린 하늘이 더욱 어두워졌다. 열정도 권태도 모두 집어삼키고서 시간의 웅덩이에서 영겁회귀하는, 밤.

밤이 서린다. 베니스의 굽은 골목길마다. 베니스를 떠나기 전날 밤 12시, 거리로 나섰다. 밤의 농도는 촉각으로 다가왔다. 아센바흐의 타치오에 대한 매혹의 정체는 뭘까. 동성애적인 그 감정은 이성의 신봉자였던 그가 투항하게 된 열정의 상징일 수도 있고, 예술가인 그가 빠져들 수밖에 없는 절대적 아름다움의 표상일 수도 있다. 베니스 골목길은 좁고 어두웠다. 운하를 만나면 길이 끊어지기도 했다. 낮에도 헤매기 일쑤인 베니스에서 밤의 골목길은 미로 그 자체였다.

그가 타치오를 미행하던 작은 운하길, 디에트로 라 페니체를 찾아 헤맬 때, 후미진 골목길로 방향을 틀었다가 예기치 않은 광경과 마주쳤다. 운하에 맞닿은 기둥에 기대선 채 격렬한 ‘행위’에 탐닉하던 남녀는 낯선 자가 나타나자 고개를 숙인 채 얼어붙었다. 더 당황한 행인은 왔던 길을 서둘러 되돌아갔다. 밤은 차가웠다. 그러나 적어도 밤은 겪어내고 견뎌내야 하는 시간은 아니었다.

자정을 넘긴 디에트로 라 페니체에서 어둠은 안온했다. 타치오가 건넜던 작은 다리 위에 서서 내려다보는 운하엔 가로등 불빛이 잉크처럼 번지고 있었다. 죽음의 그림자를 목도하고도 베니스를 떠나지 못했던 아센바흐는 결국 노년의 초입, 뜨거운 태양 아래서 숨을 거뒀다. 그러나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버나드 쇼의 말이 떠올랐다. 모든 일을 용서받는 청년기는 아무것도 스스로 용서하지 않으며, 스스로 모든 일을 용서하는 노년기는 아무것도 용서받지 못한다.

열여덟 편 영화의 궤적을 좇았던 긴 여행은 베니스의 폐곡선 같은 미로 속에서 마지막 장을 맞았다. 길은 모두 세계의 끝으로 통한다고 믿었지만, 어떤 길은 그 안에서 꼬리를 물고 맴돌았다. 이젠 정말 여행을 끝낼 때가 되었다. 그런데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 과연 여정도 끝이 날까. 저 멀리서 누군가 가방을 끌며 뒤늦게 숙소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퀴가 달렸지만, 무거운 가방 소리였다. 아무도 오지 않는 다리에 서서 메마른 눈동자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지금 눈앞에서 검게 빛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저, 물.

‘베니스에서 죽다’는 이탈리아 거장 루키노 비스콘티의 1971년작이다. 작곡가 아센바흐는 휴식을 취하러 베니스에 갔다가 가족 여행중이던 열네살 미소년 타치오를 발견하고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든다. 끝내 말 한 마디 나누지 못하지만, 매혹된 아센바흐는 전염병이 창궐하는 베니스를 떠나지 못한 채 결국 죽음을 맞는다. 말년에 이르러 탐미적 경향이 짙어진 비스콘티 작품세계를 또렷이 보여주는 걸작. 베니스의 빼어난 풍광을 담은 몽환적인 영상이 시종 관객을 사로잡는다.

★여행박스=베니스는 ‘물의 도시’란 별명으로 잘 알려진 유럽의 대표적 관광 도시다. 해상무역을 통해 중세에 전성기를 구가했던 이 수상 도시는 버스와 택시에서 경찰차까지 모든 교통수단이 배로 되어 있다. 카날 그란데로 불리는 대운하와 150여개의 작은 운하들 사이사이로 좁은 골목길이 미로처럼 이어진다. 비둘기 떼로 뒤덮인 산 마르코 광장과 강성했던 베니스의 영화(榮華)를 엿볼 수 있는 산 마르코 대성당이 최고 명소. 대운하 한 가운데 버티고 선 리알토 다리는 베니스를 찾는 사람이면 누구나 방문하는 곳이다. 다리 근처에선 각양각색의 물건을 파는 노점상들과 전통 시장을 만날 수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무라노 글라스’의 원산지인 무라노섬, 베니스 영화제가 열리는 리도섬도 들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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