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만난 사람들)"왜 무료 가이드냐고? 좋아하니까"

  • 등록 2006-11-01 오후 12:45:21

    수정 2006-11-01 오후 2:06:02

[뉴욕=이데일리 하정민특파원] 매주 금요일 12시30분. 맨해튼 그랜드 센트럴 역 바로 앞에 위치한 알트리아 빌딩 1층에는 늘 작은 웅성거림이 일어난다. 전 세계와 미국 각지에서 몰려든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한 남자를 기다리며 잡담을 나누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기다리게 만드는 인물은 저스틴 퍼라티(Justin Ferate, 사진). 역사가이자 뉴욕의 명문 아트 스쿨 `쿠퍼 유니언`의 전직 교수인 그는 지난 25년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주 뉴욕을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그랜드 센트럴 무료 투어 가이드를 자청하고 있다.

뉴욕 전역이 이상 저온과 거센 바람으로 고생하던 지난 27일. 기자도 다른 무리에 섞여 저스틴 퍼라티를 기다렸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인종과 연령대의 사람들 40여명이 옹기종기 모여 그랜드 센트럴과 뉴욕에 대한 얘기꽃을 피웠다.

그랜드 센트럴은 맨해튼 42번가와 파크 애비뉴 교차점에 있는 거대 기차 역으로 뉴욕의 대표적 명물이다. 뉴욕 시를 지나는 거의 모든 노선의 지하철이 교차하는데다 뉴욕에서 뉴 잉글랜드, 시카고, 서부 방면으로 가는 열차의 시발점이기도 해 24시간 내내 혼잡하다. 

이 역을 더 유명하게 만들어준 것은 보자르(Beaux-Arts) 양식으로 지어져 흡사 유럽의 궁전을 연상케하는 아름다운 건물이라는 점.

외관의 지붕 꼭대기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헤르메스, 아테네, 헤라클레스의 조각이 새져겨 있고, 건물 내부 중앙 천장에 그려진 별자리들은 탄성을 자아낼 만큼 충분히 아름답다. 어느모로 보나 단순한 역이 아닌 예술적 건축물인 셈이다.

잠시 후 조그마한 체구의 한 남자가 나타났다. 활기차게 자신의 이름을 소개한 그는 알트리아 빌딩 내부, 그랜드 센트럴 바깥, 역 1층과 지하로 이어지는 2시간 30분의 투어를 숨가쁘게 진행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다양한 동작으로 그랜드 센트럴과 뉴욕에 관한 풍부한 역사적, 예술적 지식을 쉴새없이 쏟아내고, 그 와중에 관중의 적극적인 참여까지 지속적으로 유도하는 그를 지켜 보노라니 2시간 30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마치 한 편의 잘 짜여진 모노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투어를 마친 그와 근처 커피숍에 마주앉았다. 얼굴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역 바닥에 깔린 타일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설명해 주려고 넓이가 37미터에 달하는 역 내부를 왔다갔다 뛰어다니는 등 투어 내내 갖가지 퍼포먼스를 펼쳤기 때문이다.

올해 57세의 저스틴 퍼라티는 뉴욕에서 수천킬로미터 떨어진 시애틀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오하이오에서 교육학, 역사학, 건축학을 전공한 그는 디트로이트, 클리블랜드 등에서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다 책 한 권을 통해 뉴욕과 운명적인 조우를 했다.

"어느 날 서점에서 `New York : A Guide to the Metropolis`란 책을 발견했어요. 책이 너무 훌륭해서 금방 빠져들었죠. 책이 좋고 저자가 살아있으면 반드시 연락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에요. 저자가 제라드 울프라는 뉴욕대 교수였는데 당장 전화를 걸어 `당신은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인데 만나고 싶다`고 말했죠."

이를 계기로 울프를 만난 퍼라티는 곧 그와 친구가 됐고, 뉴욕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1981년 당시로는 매우 위험한 지역이었던 할렘에서 첫 투어 가이드를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위험하지 않냐고 걱정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할렘에 관한 여러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가슴이 뛰었죠. 첫 투어에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의 시녀 프리시 역할을 맡았던 흑인 여배우 버터플라이 맥퀸이 관람자로 오기도 했어요."

할렘, 센트럴파크, 5번가, 브루클린, 그랜드센트럴 등 뉴욕 곳곳의 역사적 유래와 예술적 의미를 알려왔던 그는 몇 년 전부터 스스로 본인의 천성이라는 가르치는 일도 접고, 가이드로서만 활동하고 있다. 매주 투어를 준비하고 시행하면서 체력과 정신력 소모가 만만치 않을텐데 힘들지 않냐고 묻자 "좋아하니까 괜찮다"고 답했다. 아프거나 휴가를 갈 때는 어떻게 하냐고 물었더니 "물론 나 대신 가이드를 할 수 있는 조력자가 있지만, 최근 몇 년간 아팠던 기억이 없다"며 웃는다.

왜 이 일을 하는지가 궁금했다. 퍼라티는 "내가 가장 힘들 때는 별다른 반응이 없는 관광객들을 만날 때"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뉴욕은 2명의 사람이 220가지의 의견을 쏟아내는 곳"이라며 "내 의견을 말해주고, 거기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듣고, 나와 다른 의견을 교류하는 일이 즐겁다"고 말했다. 퍼라티는 "내가 하는 일이 대단하지는 않지만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며 "사람들이 다른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강조했다.

아무리 봉사 활동이 발달한 미국이라지만 정말 이런 일은 좋아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퍼라티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열심히 귀담아 들었던 그랜드 센트럴의 역사에 관한 지식은 어느덧 다 사라지고 그의 한 마디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어떤 건물을 완벽하게 만들려면 아름다운 건축물을 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건물이 완벽해지는 것은 바로 그 자리에 당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건축가의 마음이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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