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풍’의 아픔 단풍의 가을이 잊으라 하네

부산영화제 개막작 ‘가을로’
  • 등록 2006-10-13 오후 12:00:00

    수정 2006-10-13 오후 12:00:00

[조선일보 제공] 너울대는 밀물의 파도보다는, 조수(潮水)가 물러간 뒤에 남은 모래와 바람. 12일 부산에서 처음 선을 보인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가을로’(26일 개봉)는 촉촉한 물기를 지닌 해운대의 가을을 닮았다. 한국영화로는 2002년 ‘해안선’ 이후 4년 만에 부산축제의 시작을 알리게 된 이 멜로드라마는 절제된 시선으로 상실과 분노, 그리고 사랑과 치유를 이야기한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한국의 풍광을 배경으로.



정치인 연루 사건으로 애꿎은 책임을 지게 된 검사 현우(유지태)는 원치 않는 휴가를 명령 받고 여행을 떠난다. 10년 전 떠나지 못했던 신혼여행의 궤적을 좇아서. 삼풍 백화점 붕괴 때 그 안에서 세상을 떠난 연인 민주(김지수)의 단 하나 유품, 일기장. 그 안에는 며칠 남지 않은 결혼식을 앞두고 민주가 꿈꾸던 신혼여행의 여정이 적혀 있다. 동해바다와 함께 달리는 7번 국도, 연못에 비친 부처님을 볼 수 있는 울진 불영사(佛影寺), 그리고 하늘과 수직으로 만나는 소광리 소나무 숲. 공교롭게도 여행지마다 세진(엄지원)과 마주치던 현우는, 불을 켜놓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는 그녀를 통해 10년 전의 비밀과 상처를 알게 된다.

‘번지점프를 하다’와 ‘혈의 누’에서 보여줬던 김대승 감독의 숙련된 바느질은 자칫 과잉으로 흐르기 쉬운 이 극단적 감정들을 매끄럽게 잇는다. 속도나 스타일을 우선하는 최근의 젊은 감독들과는 달리, 충무로의 어깨(그는 ‘서편제’에서 ‘춘향전’까지 10년간 임권택 감독의 연출부와 조감독을 지냈다)위에서 지어 낸 전통적인 방식이다. 몇몇 인위적 우연과 작위적 설정에서 솔기 자국이 겉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가을로’는 부산의 첫 장을 열어젖히는 데 큰 부끄러움이 없는 작품이다. 그 안에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 중의 하나로 꼽히는 ‘삼풍 붕괴’에 대한 우리 모두의 책임의식도 비유적으로 담겨 있다.

개막작 상영에 이어 열린 기자회견에서 김대승 감독은 “상상하기도 싫을 만큼 어처구니 없었던 그 사건을 멜로의 형식에 담아내는 건 분명 버거운 일이었지만, 최소한 누가 책임졌고 누가 용서했는 지에 대한 문제를 짚어보고 싶었다”고 했다.

12일 열린 기자회견장에는 여유와 웃음도 넘쳤다. 홍콩의 한 기자가 “키스 신이 두 번 나오는데 민망하지 않았느냐”는 가십성 질문을 던졌다. 김지수는 “연기니까… 하는 동안에는 잘 못 느낀다”고 ‘바른생활 소녀’같은 대답으로 받았지만, 마이크를 넘겨받은 유지태는 “나는 아주 좋았는데, 영광이었죠. (객석에서 웃음이 터지자). 왜 웃어요, 진짠데”라고 능글맞은 대답으로 축제 분위기를 돋웠다. 영화 속 민주의 주문(呪文)처럼, 117분의 스크린 여행을 마치고 난 뒤 “황량한 마음에 가득해진 나무 숲”을 느낄 수 있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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