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지 않는 태양… 산 속의 바다 위에서 나의 시간도 멈췄다

  • 등록 2007-05-17 오후 12:00:00

    수정 2007-05-17 오후 12:00:00

[조선일보 제공] >> 노르웨이 ‘피오르드’ 유람선 여행기

▲ 예아랑에르 마을에서 바라본 예이랑에르 피오르드. 피오르드를 거슬러 오르던 유람선은 이곳에서 바다 쪽으로 뱃머리를 돌린다.
베르겐에서 매일 저녁 8시에 북쪽을 향해 후티그루틴사에서 운영하는 유람선이 출발한다. 저녁 8시라고는 하지만, 5월의 베르겐은 아직 오후처럼 환하다. 북쪽으로 가면 아마도 더 많은 빛, 영어로 ‘자정의 태양(Midnight Sun)’이라고 부르는 백야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저물지 않는 태양이라는 게 내게는 흐르지 않는 시간처럼 느껴진다. 노르웨이 제2의 도시 베르겐은 그 멈춰버린 시간을 향해 떠나는 입구다. 도시를 알리는 팸플릿마다 ‘피오르드로 가는 입구’라고 적혀 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느낌은 베르겐에서부터 시작한 다. 밤 10시가 되도록 빛의 잔영은 남아 있다. 넘쳐흐르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선창가에서 한자(Hansa)라는 이름의 생맥주를 마셨다. 한 잔에 55크로네. 한화로 8000원이 넘었다. 중세의 그 도시 동맹에게 갈취를 당한 듯한 느낌마저 든다. 빛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맥주 한 잔을 홀짝이며 손바닥만한 크기의 48면짜리 ‘베르겐 약사(略史)’라는 책을 읽었다. 65크로네. 250면이 넘는 내 소설책의 가격과 거의 비슷했다.

그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신선한 연어, 굴 등의 어패류는 반드시 배와 선창에서만 판매할 수 있다”는 법규가 나온다. 1276년 베르겐 시에서 제정한 법규다. 연어와 굴 등 어패류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금방 700여 년 전의 베르겐 사람들을 이해해버린다. 그 법규에 나오는 선창이란 내가 맥주를 마시던 바로 그 자리였다. 선창으로는 12세기 초엽에 형성된 건물과 골목이 여전히 늘어서 있다.

이 때문에 1979년 유네스코는 베르겐의 선창가인 브리겐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지금의 건물은 1702년 화재로 불탄 뒤, 원형대로 재건한 것이지만 거기 여전히 신선한 연어와 굴을 선창에서 사던 옛 노르웨이인들의 잔영은 빛과 마찬가지로 남아 있다. 매일 술에 취한 어부들과 상인들로 북적대는 통에 한 주교가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더 사악한 도시라고 일갈했던 곳이지만, 지금은 도시 전체가 역사박물관처럼 고요하다.

▲ 노르웨이 제2의 도시이자 피오르드로 가는 입구인 베르겐의 "브리겐" 선창가. 12세기 건축양식이 그대로 남아있다.

다음날 저녁 8시 남쪽 부두에서 출발하는 유람선에 오른다. 11일 일정으로 노르웨이의 북쪽 끝인 키르케네스까지 다녀오는 배다. 당연히 유람선은 모두 11척이다. 내가 탄 배의 이름은 MS 트롤피오르드. 노르웨이에서는 피오르드라는 이름을 피해갈 수 없다. 사실상 보이는 모든 것이 다 빙하기와 간빙기의 유산인 피오르드다. 피오르드란 흡사 산악지대까지 바닷물이 들어찬 모양을 닮았다. 어디가 바다이고, 어디가 강인지 어떻게 구분할까? 물을 맛보면 아는 일이겠지. 나의 순진한 추측에 한 노르웨이 사람은 해초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일러준다. 과연 물 속 깊숙이 진한 녹색의 해초가 깔려 있다. 산 속의 바다라는 것. 그건 관념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 학창시절에 죽어라고 외웠던 피오르드 지형이라는 건 노르웨이에서 별무소용이다.

피오르드 앞에서는 12세기 초엽에 형성됐다는 거리마저도 이제 갓 등장한 역사의 풍경처럼 보인다. 그러니 자정의 태양을 보기 위해 떠나는 유람선 객실이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 부부들로 가득한 것도 이해할 만하다. 지도제작자라면 절망했을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향하는 유람선의 항해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요란스런 카지노도, 떠들썩한 바도 없는, 마치 명상센터처럼 고즈넉한 분위기의 유람선이다. 노인들은 갑판 여기저기에 앉아서 하루 종일 지치도록 자신의 선조가 태어나기도 전에 형성된 지형만 바라본다. 그 지형으로 구름은 몰려왔다가 다시 사라지고, 밤새 비는 내렸다가 오후면 해가 떠오른다. 그들의 인생 역시 그처럼 변화무쌍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간빙기의 기억을 담고 있는 산과 바다 앞에서 겸허해지지 않을 인생은 없다. 선박회사는 자신의 유람선을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유람선이라고 선전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20년째 그 유람선을 운행했다는 선장 토모드 칼슨은 대형지도를 펼쳐놓고 우리가 예이랑에르 피오르드(Geirangerfiorden)를 따라 내륙 쪽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마치 버스를 운전하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처럼 보인다. 그의 뒤로 GPS가 북위 62도 27분, 동경 6도 46분이라며 현재 위치를 알리고 있다. GPS에 따르면 해발고도는 28.1m인데, 그건 배의 맨 위에 있는 조종실의 고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바다에서 내륙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승객들은 착시현상을 느낀다. 주위에는 아직도 눈이 쌓여 있는 설산이다.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풍경은 기이해진다.

노르웨이의 5월은 눈이 녹는 시기다. 그래서 도처에 폭포다. 이름이 붙은 폭포는 몇 안 된다. 자부심에 가득 찬 목소리로 베르겐을 안내하던 할머니 베아트 로셔 잘렌은 베르겐에서 하루 코스면 다녀올 수 있는 ‘노르웨이 인 어 넛셀’ 코스를 출발하기 전에 산이 우는 걸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해서 한껏 기대를 품었다. 막상 아울란드 피오르드에 가서야 나는 산의 울음을 볼 수 있었다. 검은 절벽으로는 수없이 많은 물줄기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그건 나로서는 감히 위로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마치 유람선에 올라탄 노인들의 깊은 주름 사이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닮아 있었다. 요컨대 슬퍼서, 혹은 아파서 흐르는 눈물이 아닌 것이다.

예이랑에르 피오르드로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에도 산은 몸 안에 담아둔 모든 눈물을 쏟아낸다. 노인들은 하루 종일 그 눈물을 바라본다. 그렇게 앉아 있으면 내가 몇 번의 생을 살 수 있으리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든다. 나는 겸허해지고 또 오만해진다. 고통과 슬픔 없이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몸이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예이랑에르 피오르드의 끝인 예이랑에르 마을에 도착해 유람선이 다시 바다 쪽을 향해서 방향을 돌리자, 한 할머니가 소녀처럼 갑판 위를 껑충껑충 뛰어다니다가 내게 소리친다.

“봤어요? 이 좁은 틈에서 이 큰 배가 제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걸!”

봤어요, 라고 나는 대답한다. 좁은 피오르드 지형 안에서 큰 배가 제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은, 물론 피오르드란 리아스식 해안과 구별해야만 하는 시험문제 속의 지형이 아니라는 것도 다 봤어요. 그리고 나는 피오르드를 향한 항해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영원히 지지 않는 하얀 빛을 보는 경험이라는 것도 알게 됐어요. 하지만 그 할머니는 여전히 배가 어떻게 제자리에서 돌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갑판의 끝까지 달려간다. 피오르드와 마찬가지로 노인들을 당해낼 수는 없다.

베르겐에서 유람선 타기

제2의 도시라고는 하지만 베르겐은 인구 23만5000명 정도의 도시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유적지를 걸어서 돌아볼 수 있다. 12세기 건축양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선창가인 브리겐, 그 이후 목조, 벽돌, 콘크리트 등으로 발전해나가는 건축양식상의 변화를 볼 수 있는 외브레가텐의 골목들, 여전히 연어와 굴을 팔고 있는 어시장, 베르겐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플뢰옌 등이 찾아가볼만한 곳이다. 베르겐에서 자동차로 20분 정도 나가면 작곡가 그리그의 생가도 볼 수 있다. www.visitBergen.com

하루 코스로 피오르드를 경험하고 싶다면

‘노르웨이 인 어 넛셀’에 참가하면 된다. 이는 베르겐에서 보스까지는 기차로, 보스에서 구드반겐까지는 버스로, 구드반겐에서 플롬까지는 배로, 플롬에서 뮈르달까지는 산악기차로 여행했다가 다시 기차를 타고 베르겐으로 돌아오는 코스로 반나절이면 피오르드를 경험할 수 있다. www.fjordtours.no 후티그루틴사의 유람선 티켓을 예약하려면 어시장 왼쪽에 있는 스트란드 호텔의 사무실로 찾아가면 된다. 매일 저녁 8시, 뇌스테브리겐에서 유람선이 출발한다. www.kystopplevelser.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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