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잉 섹스 스캔들이 남긴 것

美 신보수주의 강화 분위기 반영
기업 윤리와 사생활 경계 논란도 고조
  • 등록 2005-03-10 오전 10:40:35

    수정 2005-03-10 오전 10:40:35

[edaily 하정민기자] 미국 최대 항공기업체인 보잉의 전 최고경영자(CEO) 해리 스톤사이퍼의 섹스 스캔들이 미국 전역을 들끓게 만들고 있다. 유럽 에어버스에 밀려 보잉의 세계 시장 점유율이 갈수록 하락하고 있고 스톤사이퍼의 전임자역시 군납 비리로 사임한 지 1년 밖에 안 된 터라 스캔들 여파는 더 크다. 이번 사건은 스타 CEO의 부적절한 관계라는 문제를 넘어 다양한 측면에서 화제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기업 윤리와 개인 사생활의 경계는 어디인지에 대한 논란도 한창이며 부시 집권과 911 이후 날로 강화되고 있는 미국의 신 보수주의 물결을 반영하는 현상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신 청교도주의 득세..보수주의가 기업계도 강타 영국 BBC방송은 이번 사건이 `신 청교도주의(New Puritanism)`의 도래를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그간 기업 경영자의 최고 덕목으로 성과가 꼽혔던 것과 달리 이제는 우수한 실적과 높은 수준의 도덕성까지 필수 조건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간 미국 기업계에서는 우수한 성과를 올리는 기업인이라면 사생활 측면의 문제는 적당히 눈 감아줄 수 있다는 분위기가 우세했다.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미국 사회의 영향이 강했고 이사회나 주주들역시 사생활 문제는 거의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이같은 분위기는 달라졌다. 엔론, 월드컴 등 각종 기업의 회계 스캔들로 투자자들의 신뢰가 땅에 떨어지면서 도덕성 문제가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는 강력한 회계 개혁법안인 `사베인-옥슬리 법`을 내놓았고 기업들도 지배구조와 내부통제 시스템을 강화하면서 윤리 경영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스톤사이퍼의 섹스 스캔들이 CEO에게 필요한 덕목이 성과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입증한 증거라고 풀이하고 있다. 실제 실적 측면에서만 보면 스톤사이퍼는 크게 나무랄 데가 없다. 그는 취임 이후 보잉 주가를 50% 이상 끌어올렸고 군납 로비 관행 파문 후 박탈당했던 국방부 입찰 자격도 되찾아왔다. 그러나 익명의 제보 한 통으로 능력있다는 평가를 받았던 경영자 스톤사이퍼는 곧바로 쫓겨났다.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미국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능력 이상의 그 무엇, 바로 도덕성이 필수 조건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기업 윤리와 사생활의 경계선은 어디 직장 내 사생활과 관련한 각종 규정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많은 회사들은 `성 희롱(sex harassment)`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규정을 갖고 있지만 `사내 연애(employee affair)`와 관련한 규정은 거의 전무한 현실이다. 성 희롱 문제의 경우에도 사건이 발생했을 때 회사의 책임 범위를 규정하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뉴욕대 메릭 로제인 법학 교수는 "기업들이 그나마 이런 규정을 갖춰 놓기 시작한 것도 불과 5년 정도"라고 말했다. 현재 IBM과 제록스는 같은 부서에 종사하지 않는 직원들의 경우 사내 연애를 허용한다는 공식 방침을 가지고 있다. 많은 경영자들은 고용인의 사내 연애 대상이 기혼인지, 미혼인지 여부도 크게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다. 직장인의 경우 가정보다 회사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길고 동료들과의 잦은 접촉이 불가피하다는 측면에서 사내 연애의 가능성을 인정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기업 최고 임원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CEO의 경우 사내 연애건 성희롱이건, 적절한 관계건 부적절한 관계건 회사 명성에 누를 끼칠 수 있다는 점을 용납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 법률자문회사 아우튼&골든의 캐슬린 페라티스 변호사는 수 백건의 직장 내 성희롱 소송을 담당한 바 있다. 페라티스는 "최고 경영진의 섹스 스캔들이 발생하면 해당 경영진의 사퇴는 불가피한 것이 관례"라고 말했다. 성 문제 전문 컨설턴트인 프리다 클라인도 "CEO의 염문설이 불거질 경우 설령 그것이 양자 합의에 의해 일어났다 해도 합법성 문제가 논란이 된다"고 말했다. 클라인은 "특히 상대자가 회사 내부인이었을 경우 이사회는 이를 단순히 CEO의 사생활로 간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CEO는 e메일 이용말고 회사 규정도 만들지 말라? 스톤사이퍼의 섹스 스캔들이 e메일을 통해 알려졌다는 점도 화제를 모으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스톤사이퍼의 직접적인 해고 원인이 `부적절한 관계` 자체가 아니라 e-메일을 통해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WSJ의 앨런 머레이 칼럼니스트는 "많은 최고경영자들이 스톤사이퍼와 같은 일을 저질렀으며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상당수는 해고되지 않을 것"이라며 "스톤사이퍼의 경우 자신의 행동과 욕망을 적어놓은 상당량의 e메일을 남겼기 때문에 쫓겨난 것"이라고 말했다. 스톤사이퍼가 연인과 오간 e메일의 존재를 시인했고 보잉 이사회는 이 e메일들이 공개되는 사태를 가장 우려했을 것이라고도 밝혔다. 스톤사이퍼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여성 임원은 보잉 워싱턴 사무소의 데보라 피바디 부사장으로 알려졌다. 스톤사이퍼가 자기가 놓은 덫에 좌초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보잉은 지난 2003년 말 미국 국방부에 공중급유기를 납품하는 과정에서 스카우트를 미끼로 국방부 구매담당자와 결탁, 금액을 부풀린 사실이 들통나 큰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스톤사이퍼의 전임자가 물러난 것도 이 때문이다. 2001년 은퇴했다 군납 로비를 잠재우기 위해 전격 영입된 스톤사이퍼는 사내 윤리 규정을 대폭 강화한 강령을 만들었다. 그러나 윤리 강령 강화는 결국 스톤사이퍼 자신의 목을 옭아매고 말았다. 미국 시애틀포스트는 스톤사이퍼의 이런 상황을 빗대 능력있는 경영자가 되는 2가지 비법을 소개했다. 첫째, 윤리 규정을 강화한 CEO는 사내 연애를 하지 말라. 둘째, 첫번째 조건을 어겼다면 결코 사내 e메일로 연인과 사랑을 속삭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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