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가 90달러를 돌파할 때만 해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과매수에 따른 일시적 급등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설사 100달러를 돌파한다 하더라도 헤지펀드들이 차익실현에 나서면서 재차 약세로 돌아설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그러나 현재 원유 시장은 골드만삭스가 2년여 전 예상한 `유가 대급등(super-spike)` 시나리오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수급 불안으로 유가가 배럴당 105달러까지 치솟는다는 전망이었다.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위기와 달러 약세, 헤지펀드의 유입 등 유가 상승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면서 유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고만 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대형 정유사들이 유가 급등의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며 증산을 회피하고 있어 공급 측면에서도 기댈 것이 없는 상황이다.
◇`유가 100弗 시대` 사실상 열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이제 유가가 얼마나 더 오를 것이냐에 초점을 맞춰 분석을 내놓고 있다.
투자은행에 비해 보수적인 전망치를 내놓았던 미국과 유럽의 에너지 분석 기관들도 잇따라 `유가 100달러 시대`를 예견하고 나섰다.
영국의 세계에너지센터(CGES)가 내년 2분기 브렌트유 가격이 평균 100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한 데 이어, 미국 케임브리지 에너지연구소(CERA)도 내년 3분기 경 서부 텍사스산 중질유(WTI) 가격이 배럴당 100 달러, 두바이유는 95.50 달러까지 상승할 것으로 내다봤다.
파이낸셜타임스(FT)가 내놓은 전망치는 좀 더 높다. FT는 원유 트레이더들의 분석을 토대로 유가가 실질 가격 기준으로 1979년 제2차 오일쇼크 당시의 수준까지 오를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질 가격이란 명목 가격에 물가상승률을 반영한 것. 제2차 오일쇼크 당시 유가를 현재 가격으로 환산하면 배럴당 100~110달러 수준이라는 것이 정설인 만큼 유가가 최고 110달러까지 갈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구매력 기준 130弗..수급전망에 따라 2~3년내 200弗 전망도
도이체방크는 선진 7개국(G7) 국가들의 1인당 국민소득을 기준으로 산정한 구매력을 놓고 볼 때 현재 유가는 2차 오일쇼크 당시 가격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1980~1982년 당시 320~350배럴이었던 G7 국가들의 1인당 국민소득 대비 원유 구매력은 현재 456배럴 수준까지 늘어났다. 따라서 G7의 구매력을 오일쇼크 당시 수준으로 환산해 전망할 경우 유가는 배럴당 120~130달러까지 오를 수도 있다고 도이체방크는 진단했다.
더 극단적으로는 2~3년내 배럴당 200달러에 이를 것이란 전망도 있다. 현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이같은 전망은 수요 우위 장세가 장기화될 것이라는 분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독일의 에너지감시그룹(EWG)은 향후 원유 생산량이 매년 7% 가량 줄면서 2006년 기준 일일 8100만배럴에서 2020년 5800만배럴까지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고,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12년 전세계의 일일 석유수요가 9580만배럴에 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 그렇게 현실성 떨어지는 전망만도 아니다.
◇`오일달러 더 필요한 OPEC·투자여력 없는 정유사`..증산 기대 어려워
상황이 이렇지만 OPEC과 정유사들이 장기적으로 생산을 늘려 수급에 숨통을 틔어줄 것으로 기대하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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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증산에 호의적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상황만 보더라도 OPEC이 섣불리 증산을 단행해 유례없는 고유가 행진을 스스로 중단시킬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영투자청(SAGIA)에 따르면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를 위해 사우디가 계획하고 있는 투자액은 6240억달러. 주요 자금조달원이 오일 달러임은 말할 것도 없다.
미국 정유사들은 1976년 이후 30년 이상 미국에 새로운 정유시설을 지은 적이 없다. 1990년대 유가가 10~20달러 수준까지 하락하면서 신규 유전 개발 및 생산 프로젝트에도 소극적이었다.
대형 정유사들도 시설 투자를 통해 고유가의 수혜를 누리고 싶어하지만 상황이 녹록치 않다. 유가가 급등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제 마진이 줄어 실적 부진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건도 좋지 않다. 2004년 이후 멕시코만 연안지역에서 철강 가격은 74%, 숙련공의 임금은 60% 치솟았다.
◇세계경제 견조 `체질개선 덕분`..유가 100弗은 곤란
유가가 이렇게 치솟더라도 세계 경제가 이를 견딜만 하다면 문제는 되지 않는다.
앨런 그린스펀 전 FRB 의장도 재직 시절 "유가가 80달러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말한 바 있다. 대다수 경제학자들도 세계 경제가 여전히 3% 이상의 탄탄한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보고 있다.
연료 효율성이 증가해 세계 경제의 펀더멘털 자체가 개선된 데다 중국과 산유국 등 신흥 경제대국의 성장세가 견조하기 때문이다. 제2차 오일쇼크가 공급 부족으로 인해 발생한 반면, 이번 유가 급등은 수요가 견인한 것인 만큼 전세계 경제가 건실한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세계 경제의 기초체력이 아무리 탄탄하더라 하더라도 유가가 현제 추세를 지속할 경우 균열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유가가 인플레이션 압력을 고조시켜 소비 둔화를 야기할 경우 세계적인 침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 특히 미국의 경우 주택시장 부진으로 가뜩이나 경기침체 가능성이 부각되고 있는 상황에서 고유가가 계속될 경우 자칫 스태그플레이션(저성장·고물가)에 빠질 수도 있다는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와 같이 원유 의존도가 높은 국가의 상황은 좀 더 다급하다. 지난 19일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유가가 배럴당 70달러에서 90달러로 30% 올라가면, 물가는 0.45% 오르고, 성장률은 0.45% 하락한다"며 "유가가 100달러를 상회할 경우 어려워진다"고 우려한 바 있다.
벌써부터 내년 5% 성장은 물건너 간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일본과 인도 등 석유 의존도가 높은 아시아 국가들의 상황도 비슷하다. 오타 히로코 일본 경제재정상과 야가 베누고팔 레디 인도 중앙은행 총재 등 아시아 지역의 경제 수장들도 고유가에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의 수비르 고칸 아시아 태평양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유가가 현 수준에서 유지되면 아시아 지역에 인플레이션 압력을 야기할 것"이라며 "중국과 인도 경제를 둔화시킬 위험이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