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남북정상회담. 참여정부의 청와대는 그렇게 불러주길 원했다. 2000년 1차에 이은 2차가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2007년 회담이라는 점을 강조하려 했다.
2차든, 2007년이든 그 본진 출발에 하루 앞선 10월1일, 기자는 선발대로 먼저 평양을 향해 떠났다. 본진이 보기 전의 것을 보고 기록하는게 선발대의 임무였다.
◇ 군사분계선, 민족의 마음속에만 그어져 있을 뿐
어찌보면 평양 육로 방문은 새로울 게 없었다. 대통령이라 상징적 의미가 각별하고,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어서 형식이 특별할 뿐 이미 육로로 다녀온 사람들은 많았다.
대통령은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었지만 앞서 떠난 선발진은 노란색 경계선을 구경하지도 못했다.
군사분계선은 `무형의 선`으로만 있었다. 아무 것도 그어져 있지 않았다. 대통령이 밟게 될 노란색 경계선이 그때까진 흔적조차 없었다. 보이지도 않는 군사분계선은, 보이는 철책 보다도 50년이상 우리를 죄어왔던 것이다.
◇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되뇌이며
개성공단을 지나 개성시내로 들어서자 옛 고려 도읍지의 흔적은 아득했고 송악산은 운무에 쌓여 막연했다.
터덜터덜 평양가는 고속도로가 보슬비속에서 열렸다. 평양까지는 160km. 수해 때문에 급히 보수한 탓에 노면은 거칠었다. 고속도로 상하행선 위를 가로질러 서 있는 수곡 찻집(휴게소). 여성 접대원 선생이 내놓은 인삼차 한잔은 자꾸만 가라앉는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생각보다 나쁘진 않다`고 되뇌이게 하는 차 한잔이었다. (아래 사진은 수곡 휴게소 안)
2시간반을 달렸을까. 평양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푸에블로호가 대동강에 정박해있었다. "미국이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안돌려준다"는 안내원의 말이다. 자존심으로 뭉친 평양을 예고하는 듯했다.
평양은 국제도시급 이었다. 10여층이 높은 아파트가 즐비했고 인민대학습당 등 어마한 규모의 기념 건물도 시내 여기저기에 위용을 자랑했다. 인구는 외곽까지 합쳐 2백만명 정도라고 했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도시가 밝고 깨끗했다. 평양의 `명(明)`은 남측 손님에 대한 환대를 위한 것이었다. 하루 먼저 도착한 선발대는 가로등, 네온사인, 인민대학습당의 외부조명이 켜진 평양을 보지 못했지만, 본진이 온 다음날부터 평양의 온 전기불이 다 켜졌다.
평양의 `암(暗)`은 가려져 있었다. 북측 관계자들은 기자들, 수행원들이 자신들의 숙소를 벗어나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숙소인 고려호텔의 높이는 44층. 꼭대기에 회전 전망식당이 있었다. 그곳에서 평양은 지척으로 한눈에 들어왔다. 능라도에 있는 5· 1 경기장, 주체사상탑, 김일성 대학, 인민대학습당, 만수대의사당 등등.
◇ "평양에서 벌써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내"
다가갈 수가 없었다. 행사 관계가 아니면 일체의 접근을 금지했다. 주민 접촉도 일체 금지됐다. 떠나는 날 숙소인 고려호텔앞에서 평양 아파트촌을 향해 사진을 찍었는데, 곧바로 북측 안내원이 다가왔다. 사진 삭제를 요구했다. 그곳은 당 간부들이 주로 사는 곳이라고 했다. 평양은 눈 앞에 바싹 다가왔지만 만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소설가 조정래 씨는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수행원으로 평양에 들어온 다음날, 평양에 대한 소감을 물었더니 조 씨는 "기자양반, 10월의 크리스마스 트리를 본적이 있나. 이곳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10월에 벌써 나무마다 전구를 달아놓아 크리스마스 트리를 켜놓지 않았나. 이제 하늘도 곧 열릴 게야"라고 감격했다.
전력 사정이 좋아져서 가로등 불을 밝힌 것같지는 않았다. 어려움은 계속 되고 있는 듯했지만 손님을 따뜻하게 맞이하려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