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소현의 일상탈출)(26)여자라서 행복해요

  • 등록 2007-01-26 오후 5:19:55

    수정 2007-01-26 오후 5:20:30

[이데일리 권소현기자] 인도에선 '딸이 한 명이면 집안을, 두 명이면 친척까지 망하게 한다'는 말이 있다. 바로 결혼할 때 신부가 가져가야 하는 엄청난 규모의 다우리(지참금)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난 20년간 최소 1000만명의 딸들이 낙태시술로 사라졌으며 작년 인도 국가범죄기록국이 발표한 '2005년 범죄시계'에 따르면 지참금 문제로 77분마다 여성 한명이 살해됐다.

가끔 해외 토픽에는 인도에서 지참금을 적게 가져왔다고 남편에게 맞아 죽었다거나 죽은 남편을 화장하는 불길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황당한 뉴스가 나오기도 한다.

▲ 인도 농촌 여성들의 삶은 고단하다

힌두교 전통에 따라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을 '사티'라고 부르는데 여성의 정조와 헌신을 상징한다.

인도에서 여성으로 살기란 참 힘들다. 전통적으로 여성은 남성들의 소유물에 불과하다. 과부들의 재혼은 금지돼 있고 부모님이 죽었을 때 시신을 만질 수도 없다.
 
인도를 여행하면서 한국에서 태어난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를 수차례 느끼기도 했다.

아직 농촌 지역에서는 여성 90% 이상이 문맹이지만 도시지역에서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대도시의 여성들은 전통 의상인 사리를 벗어던지고 당당하게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델리의 인디아 게이트에서 여행자들의 거리인 빠하르간지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였다. 눈에 띄는 빈자리를 잡아 앉았는데 몇 정거장 안 가서 사람들이 우르르 탔다. 한산했던 버스는 금세 만원버스가 됐다.

다행히 창가쪽에 앉았기 때문에 서 있는 사람들이 밀어대는 압박에서는 자유로웠지만 옆자리에 앉은 덩치 큰 남자는 점점 자리를 침범해왔다. 완전히 군기가 바짝 들어있는 자세로 앉아 몇 정거장을 갔을까. 갑자기 똑부러진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실례합니다. 여기는 여성 전용석인데 일어나 주시겠어요?"

옆에 앉아있던 남자가 군말 않고 일어나 자리를 내준다. 위를 살짝 올려다보니 창문 위쪽에 하얀 바탕에 빨간 글씨로 'Ladies'라고 적혀져 있는 팻말이 있다. 뚱뚱한 남자가 일어나고 날씬한 여자가 앉으니 내 자리가 넓어졌다. 아주 편했다.

파키스탄과 맞닿아있는 아타리 국경 폐쇄식을 보러 갔을때도 여자로서의 권리를 한껏 누렸다.

매일 열리는 연극 같은 국경 폐쇄식을 보기 위해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온다. 국경 근처에서 내려 100m쯤 걸어갔더니 먼저 도착한 사람들로 국경 지역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는 인산인해다.

줄도 없고 그저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껴서 보니 이상하게 여성들만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국경수비대 한명이 나를 보더니 손짓하며 부른다. 앞에 서있던 남자들을 헤치고 갔더니 올라가란다.
▲ 아타리 국경폐쇄식 여성전용석을 가득 메운 인도 여인들

남자들은 그저 부러움이 가득한 눈길로 계단을 오르는 여성들을 바라보고 있다. 한 남자가 여성 가족을 따라 같이 묻어가려니 주변에 있는 여성들이 나서서 막았다. 국경수비대가 나서기 전에 여성들에게 먼저 제지당한 것이다.

계단을 오르니 노천극장처럼 계단식 객석이 펼쳐졌다. 좌석은 여성전용석과 일반석으로 구분돼 있었다. 하얀 바탕에 빨간 글씨로 쓰여져 있는 `Only Ladies`라는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여성이 대충 다 입장했나보다. 갑자기 우르르 남자들이 몰려 들어오는데 서로 좋은 자리를 맡으려고 바둥거린다.

남자들은 여성전용석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가족단위의 방문객은 갑작스럽게 생이별을 하게 됐다. 가족이 어디에 있나 두리번거리며 서로 이름 부르고, 찾으면 반가워라 손 흔들고 난리가 났다.

인도에서는 `Ladies`, `Only Ladies` 이런 표지판이 눈에 자주 띈다. 시내 버스에 타면 항상 여성 전용석이 있고 기차역에도 여성전용 창구가 있다.

사실 이같은 제도는 여성을 우대한다기 보다는 남자의 소유물인 여성이 다른 남자와 접촉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기원이야 어찌됐든 인도 여성들은 이같은 특권을 적극적으로 당당하게 누리는 듯 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며 다우리와 사티가 없는 미래의 인도를 잠시 꿈꿔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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