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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다은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고등학생이다. 최저시급도 받지 못하는 힘든 일이지만 다은은 페이스북 라이브로 폐기처분을 앞둔 음식 리뷰를 하면서 즐거움을 찾는다. 그러나 즐거움도 잠시, 다은은 어느 날 편의점 창고가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죽는다. 다은의 죽음 이후 같은 반 친구들은 심리 상담을 받으며 시간을 보낸다.
사전 정보 없이 국립극단 청소년극 ‘사물함’을 보러 간다면 갑작스러운 친구의 죽음을 잊지 못하는 10대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극이 전개될수록 관객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사물함’은 청소년을 통해 한국사회의 계급 문제를 날카롭게 건드리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10대들은 친구의 죽음을 마냥 슬퍼하거나 애도하지 않는다. 대신 친구의 죽음으로 생겨난 부채감과 공포를 피하지 못해 안절부절 못한다. 이유는 서서히 드러난다. 이들은 다은과 미묘한 관계에 놓여 있다. 다은이 아르바이트하던 편의점 사장의 딸, 편의점이 세를 내고 있는 건물주의 딸, 다은에게 가끔 담배를 샀던 친구인 것이다. 관계의 중심에 ‘계급’이 있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국립극단은 청소년을 진지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청소년극을 꾸준히 선보여왔다. ‘사물함’도 그 연장선에 있다. 개막 전날인 19일 서울 용산구 국립극장 소극장 판에서 만난 연출가 구자혜는 “청소년극은 템포감이 있고 감각적이어야 한다는 시선이 있지만 ‘사물함’은 누군가의 죽음을 다루는 공연이라 그런 분위기로 풀어갈 수 없었다”며 “친구의 죽음이 계급과 무관하지 않음에 집중해 연출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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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함’은 지난해 국립극단의 청소년극 창작 인큐베이팅 프로그램 ‘예술가청소년창작벨트’를 통해 낭독공연으로 첫 선을 보였다. 신예 작가 김지현의 데뷔작이다. 혜화동1번지 6기 동인이자 극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을 이끌고 있는 구자혜 연출이 낭독공연에 이어 본 공연의 연출을 맡았다.
구 연출이 청소년극을 연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구 연출은 “국립극단 ‘청소년예술가탐색전’을 통해 실제 청소년과 같이 작업한 적도 있고 무대화하지 않은 청소년극 희곡도 몇 편 썼다”며 “청소년과 청소년극에 관심이 많았다”고 말했다.
제목은 다은의 사물함을 가리킨다. 아이들은 죽음 이후 잠긴 채 남겨진 다은의 사물함에서 냄새가 난다며 이를 피한다. 냄새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사물함을 열어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관객은 그 냄새가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부자들이 기피하는 가난의 냄새다.
죽음 이후 남겨진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설정은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실제로 김 작가는 세월호와 청소년에 관해 많은 관심을 두고 작품 활동을 해왔다. 구 연출도 혜화동1번지 6기 동인들과 함께 매년 세월호와 관련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구 연출은 “대본을 보고 세월호가 직접적으로 생각나지는 않았지만 타인의 죽음에 깊이 연루돼 있는 대본이라 좋았다”고 말했다.
구 연출과 여러 작품에서 호흡을 맞춰온 배우 이리·조경란, 대학로에서 활동해온 배우 정연주·김윤희, 올해 국립극단 시즌 단원으로 합류한 배우 정원조가 출연한다. 20일부터 오는 5월 6일까지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공연한다. 티켓 가격 전석 3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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